[매묵]2024년 12월 23일 월요일[(자) 12월 23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나 용맹한 하느님이라 불리리니,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해 복을 받으리라.
본기도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 ◎
○ 주님은 어질고 바르시니, 죄인들에게도 길을 가르치신다. 가련한 이 올바른 길 걷게 하시고, 가난한 이 당신 길 알게 하신다. ◎
○ 주님의 계약과 법규를 지키는 이들에게, 주님의 모든 길은 자애와 진실이라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와 사귀시고, 당신의 계약 그들에게 알려 주신다. ◎
복음 환호송
○ 민족들의 임금님, 교회의 모퉁잇돌이신 주님, 어서 오소서. 흙으로 빚으신 사람을 구원하소서.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거룩한 예배로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이
주님과 완전한 화해를 이루는 제사가 되게 하시어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구세주의 성탄을 경축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모든 예언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미리 알려 주었고
동정 성모님께서는 극진한 사랑으로 그분을 품어 주셨으며
요한은 오실 분을 미리 알려 주고
이미 와 계신 그분을 가리켜 주었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자께서 오실 때에
등불을 밝혀 들고 마중 나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12월23일
달라스 교구에서 시노드 회의하는 중에 한국에서 카톡이 왔습니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소식입니다. 비상계엄은 국가의 재난, 내란, 전쟁과 같은 말 그대로 비상한 상황에서 선포하는 수단입니다. 비상계엄으로 국가는 정보를 독점하고, 정부에 비판적인 정치인의 활동을 제한 할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으로 집회의 자유를 제한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국민의 정치적인 관심이 적거나, 문맹률이 높아야 합니다. 교통수단이 열악해서 정보의 소통이 어려워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4·19 혁명, 광주 민주화 운동, 6.10 항쟁을 이루어낸 국가입니다. 합법적으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하여 정권을 평화롭게 교체한 나라입니다. 고도로 발전된 정보와 통신을 소유한 나라입니다. 비상계엄을 해제할 수 있는 의석을 가진 야당이 있는 나라입니다. 한마디로 비상계엄은 21세기를 사는 나라에서 19세기의 방법을 사용하려는 시도입니다. AI의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식 방법을 사용하려는 시도입니다. 정부가 그런 시대 상황을 알고도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면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그런 시대 상황을 모르고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면, 비상계엄이 가져올 경제적인 손실을 예측 못했다면 국가를 운영할 자격이 없는 정부입니다.
2000년 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새로운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론을 통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보를 독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시작은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작은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가 찾아갔던 ‘아인카렘’이었습니다. 저도 아인카렘을 다녀왔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아인카렘은 조용한 동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인카렘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요한’입니다. 오늘 독서는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사람들은 그를 세례자 요한이라고 불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요르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며 죄의 용서를 상징하는 의식을 행했습니다. 이 세례는 예수님의 공적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와 죄의 용서를 설교하며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렸습니다. 그의 설교는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켜 하느님께 향하도록 돕고, 메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시켰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했던 마리아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의 결단이 있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 새벽길을 떠났던 동방의 박사들이 있습니다. 밤새워 양들을 돌보았던 목동들이 있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며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때를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했던 마리아의 친척 엘리사벳이 있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정했던 사제 즈카리야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평생 예수님의 앞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이 태어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새벽을 여는 사람의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 양이 오십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합니다. 내 뒤에 오실 분이 있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을 열었던 세례자 요한에게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서는 작은 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큽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눈이 먼 사람, 자신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 권력에 취한 사람은 ‘임마누엘’이 곁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면 좋겠습니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성자께서 강생하실 날이 가까웠으니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신 말씀, 저희와 함께 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부당한 종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23일
복음: 루카 1,57-66
우리 모두 존재 자체로 하느님 은총의 표지요 도구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한 아기가 태어나면 어떤 이름을 지어줄까, 부모나 조부모들이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과거에는 작명에 있어서 오랜 전통인 돌림의 룰에 따라 중간이나 마지막 한자만 선택하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가정에서는 아이의 인생이 더 잘 풀리고, 큰 인물이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안고
작명소를 찾았습니다.
어린 시절 저도 어르신들을 따라 작명소를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꼬질꼬질한 하얀 한복을 입고 수염을 길게 기른 어르신께서 큰 방석 위에 앉아 계셨습니다.
한자로 가득한 두꺼운 책을 뒤적이고, 고민을 거듭하더니, 멋진 붓글씨로 이름을 적어주셨는데,
사례비가 만만치 않아, 저도 나중에 크면 작명소나 차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노인 중의 노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사이에 아기가 생겼다는 소문은 당시 아인카림에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다들 두 사람을 두고 수군거렸습니다.
“세상에, 정말이지 기가 찰 일일세. 그 연세에 어떻게 그게 가능한 일인가? 비결이 대체 뭐지?”
특히 엘리사벳은 이웃 사람들의 눈총과 수군거림이 너무나 싫고 부끄러워 다섯 달 동안이나 숨어지냈습니다.
그러나 큰 부끄러움과 동시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놀라운 은총과 자비에 감사하며
이렇게 속으로 되내었습니다.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루카 1,25)
이윽고 해산달이 되어 엘리사벳은 주변 사람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주 건강한 아기를 순산했습니다.
호기심 가득했던 이웃과 친척들이 몰려와서 태어난 아기를 구경하며 축하도 하고 신기해하기도 했습니다.
여드레가 지난 후 이웃들과 친척들은 아기의 할례식에도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말을 못하고 있는 아버지 대신해서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즈카르야라고 정하고
명부에 적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엘리사벳이 크게 외쳤습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은총’ 혹은 ‘은총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요한이 후에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리고 이 세상에 결정적인 은총을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아직도 의구심으로 가득했던 이웃과 친척들이 재차 즈카르야에게 아기에게 어떤 이름을 주고 싶다고
물었습니다.
그는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습니다.
즈카르야가 서판에 요한이라는 단어를 쓰자마자, 즉시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인한 주님의 은총이
즈카르야에게 내렸습니다.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는데, 첫 마디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도였습니다.
이렇게 요한은 태어나면서부터 주님의 은총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광야 생활을 거쳐 위대한 예언자로 거듭난 요한은 세례 갱신 운동을 통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 역시 존재 자체로 하느님 은총의 표지요 도구입니다.
수많은 하느님의 은총 속에 살아온 우리들입니다. 그분으로부터 받은 은총을 내 안에 담고만 있지 말고,
은총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기꺼이 나눠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늙은 엘리사벳은 마지막 예언자를 낳았고, 젊은 처녀 마리아는 천사들의 주님을 낳았습니다.
아론의 자손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낳았고, 다윗의 자손은 땅의 힘센 하느님을 낳았습니다.
아이 못 낳는 여자는 죄를 탕감하는 사람을 낳았지만, 동정녀는 죄를 없애시는 분을
낳았습니다.”(시리아인 에프렘, 타티아누스의 네 복음서 발췌 합본 주해)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12월 23일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 복음은 구세주의 탄생에 앞서, 요한의 탄생을 전해줍니다.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들과 친척들도 그녀의 해산 소식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습니다(루카 1,58).
그것은 그들이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감추어진 무언가가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를 통해 실현되고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탄생하자 그의 부모와 친지들은 아기가 어떤 이가 될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수행할 사명이 무엇일지 궁금해 합니다.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루카 1,66)
그런데 여드레째 되는 날, 아기는 할례를 받고, 사제인 아버지 즈카르야와 아론 가문의 어머니 엘리사벳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가문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라는 요한이란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순간 즈카르야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루카 1,65).
왜냐하면 예상하지 못한 아기의 이름이 명해지면서 즈카르야의 혀가 풀린 사건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그렇습니다.
먼저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입니다(루카 1,66).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손길이 오늘도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자신을 묻고, 우리의 신원과 소명을 찬미하며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 모두도 이름과 함께 각자의 신원과 소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요 수도승이라는 신원을 지니고, 그에 따른 직무와 소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합니다.
“저는 이 세상에서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제가 이 세상에 있는 이유입니다.”
(<복음의 기쁨> 273항 )
그리고 실존철학자 하이덱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세상 안에 과업을 짊어진 채 던져진 존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소명을 과업으로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구원과 사랑을 '마음에 새기며'(루카 1,66) 소명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야 할 일입니다.
본훼퍼 목사님은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는 존재이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도 먼저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하여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를 보살피고 계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만이 오로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22. 대림 제4주일 미카5,1-4ㄱ 히브10,5-10 루카1,39-45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겸손, 순종, 섬김”
“오 만민의 임금이시여, 모든 이가 갈망하는 이여,
두벽을 맞붙이는 모퉁이돌이시니,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을 구원하소서.”
대림 제2부, 오늘 12월22일의 애절한 "오후렴"입니다.
"마라나타!" 예수님 오시어 흙으로 만드신 우리 인간을 구해달라는 간원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애타게 기다리는,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의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바로 우리의 길잡이가, 인도자가 되는 분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가 되시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모두가 되시는 분입니다. 도대체 예수님 아니고는 누구를, 무엇을
이 자리에 놓을 수 있을런지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라"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평생 우리 삶은 주님을 따르는 “따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야 할 분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제가 다음과 같이 자주 즐겨 고백하는 분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어제 뜻밖의 책 선물도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아빠는 아니지만 “아빠! 아버지!”(로마8,15)라 부르는 하느님을 닮은 수도사제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꼭 읽어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 5분, 아빠 목소리” 란 책 제목에, ‘태교 동화를 읽는 시간, 지혜를 배우는 아이’ 였고,
이어 ‘마음과 생각이 함께 자라는 이야기, 나답게 크는 이야기, 세상을 꿈으로 채우는 이야기’ 세부분의 제목도
아름다웠습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탄생 전 요셉의 태몽, 마리아의 태몽,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아름다운 만남이 태중의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태교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었겠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옛 어른이 지혜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바닥으로 내려갔을 때, 그 사람의 바탕이 드러난다.”<다산>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더디 시듦을 알게 된다.”<논어>
예수님의 진면목은, 바탕은 바로 사랑임을, 소나무, 잣나무잎처럼 끝까지 남아있는
독야청청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사랑으로 요약되는 예수님의 본모습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보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겸손과 순종, 그리고 섬김의 사랑입니다.
첫째, 사랑의 겸손입니다.
사랑의 표현이 겸손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천명하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예시되는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그 아득한 옛날 미카 예언서의 말씀이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탄생할, 동시에 모시고 살고 있는 예수님의 묘사같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올라간다....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외관상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예수님의 탄생지 베들레헴이 상징하는바, 예수님의 “작음, 겸손, 온유, 착함,
평화”입니다.
험하고 거친 광야와 같은 세상, 얼마나 소중하고 그리운 덕목들인지요!
이래서 "우리의 착한 목자 겸손한 예수님"이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존재자체가 겸손이신 분, 평화이신 분, 바로 예수님입니다.
둘째, 사랑의 순종입니다.
예수님은 순종의 모범입니다.
사랑의 자발적 순종입니다.
사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 순종함이 생활화될 때 마지막 순종의 아름다운 선종의 죽음도 가능합니다.
참영성의 표지가 순종이요,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의 여정은 그대로 비움의 여정이 됩니다.
모전자전, 그대로 "예스맨"이신 마리아 어머니의 순종을 닮았습니다.
히브리서의 말씀도 이를 입증합니다.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대로 어머니 마리아의 고백을 닮았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이루러 세상에 왔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순종의 삶, 그대로 우리의 존재이유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 진리에 순종합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순종이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의 연인”이라 명명했던 성 아우구스티노, “진리의 협력자”라 명명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도 생각납니다.
심지어 불교의 대선사 고 성철스님도 “진리에 몸바치는 삶”이 당신의 좌우명이라 했습니다.
셋째, 사랑의 섬김입니다.
섬김 역시 참 영성의 표지입니다.
우리에게 직무가 있다면 섬김의 직무 하나뿐이요, 권위가 있다면 섬김의 권위 하나뿐입니다.
예수님 역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설파하셨습니다.
고 이형우 아빠스의 모토도 “서로 섬기자(Serviamus invicem)”였고 "나는 공동체의 심부름꾼"이라 고백했던
취임식때 말씀도 잊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섬기는 심부름꾼이 바로 장상입니다.
오늘 엘리사벳을 방문한 마리아 어머니의 모습이 심상치 않습니다.
나이 적은 분이 연장자를 찾아가는 것이 예의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어머니가 엘리사벳을 방문했다는 것은
깊은 의미를 함축합니다.
바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모범을 보여 주시듯 태중의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을 찾아 오신 것이지요!
성모님을 통해 태중의 예수님의 섬김의 사랑에 감격한 엘리사벳이요,
즐거워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요한입니다.
엘리사벳의 성령충만한 기쁨과 감격의 고백은 늘 들어도 참신합니다.
사랑의 표현이자 믿음의 표현이 바로 섬김입니다.
섬김은 바로 사랑의 척도요 믿음의 척도가 됩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모전자전, 성모 마리아의 믿음의 순종과 섬김을 고스란히 닮은 예수님이요,
오늘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은 태중의 예수님은 물론 요한에게도 참 좋은 태교가 됐을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 모습은 겸손과 순종, 섬김으로 요약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길을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바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삶에 정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12/23(월)[(자) 12월23일], 되새김 구절
1. 세상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우리 곁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2. 엘리사벳이 크게 외쳤습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은총’ 혹은 ‘은총을 지닌 사람’이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름은 요한이 후에 선포할 복음의 은총, 그리고 이 세상에 결정적인 은총을 가져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만이 오로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예수님 탄생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 모습은 겸손과 순종, 섬김으로 요약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주님의 길을 잘 준비하도록 합시다.
바로 겸손과 순종, 섬김의 삶에 정진하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12/23(월)[(자) 12월23일],제 184-54일 기도
복음 <세례자 요한의 탄생>
<오늘의 말·샘 기도>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루카 1,66)
주님,
당신이 베푸신 자비를 봅니다.
감추어진 무언가가 제게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저의 가린 눈을 열고, 당신의 관여와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손길이 오늘도 저를 보살피고 계시오니, 당신 신비 안에 저 자신을 묻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구원과 사랑을 소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그것만이 오로지 제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23일(월)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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