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12월 28일 토요일[(홍)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신부님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대영광송>
본기도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오늘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1,5―2,2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5 듣고
이제 여러분에게 전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6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7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우리 안에 진리가 없는 것입니다.
9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고
우리 안에 그분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2,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
○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
○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
복음 환호송
○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18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6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17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18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철모르는 아기들도 거룩하게 하신 그 신비로
이 종들이 정성껏 바치는 예물을 받으시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이들은 하느님과 어린양께 바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되었으니,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자의 탄생으로
말도 못하는 죄 없는 아기들이 순교한 이 축일에
저희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풍성히 내려 주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종교는 ‘으뜸가는 가르침’이라는 한자입니다. religion은 ‘엉킨 실타래를 푼다.’라는 영어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느끼고 체험하는 ‘고통’의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불교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고통, 거짓된 자아를 따르려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그 고통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고 합니다. 집착이라는 줄을 놓아버리면 집착에 매달려 있는 고통도 사라질 거라고 합니다. 집착을 놓아버리는 훈련이 필요하고 그렇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집착에서 벗어나지면 깨달음을 얻게 되고, 참된 자아를 만나게 된다고 합니다. 교회는 고통의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고통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에게 ‘고통’이라는 벌을 주셨습니다. 최초의 고통은 노동하는 고통과 아이를 낳는 고통입니다. 죄의 결과 죽음이라는 고통이 생겼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은 ‘회개’입니다. 회개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육체라는 집이 허물어지면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갈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속(’代贖)입니다. 구약에서는 ‘어린양’을 속죄의 제물로 바쳤습니다. 심청이는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몸을 바쳐서 임당수로 뛰어야 했습니다. 이수현이라는 청년은 일본에서 알지 못하는 사람을 구하고 대신 목숨을 바쳤습니다. 대속에는 자발적인 대속이 있고, 힘으로 바쳐지는 대속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은 자발적인 고통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시는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우리를 향한 끝 모를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을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인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허망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무참하게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고통이었지만, 신앙인에게는 영원한 삶으로 나가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록하였고, 그분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는 교회를 세웠고, 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받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우리는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의 신비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 홀로 외롭게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 또한 천상의 별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는지, 고통과 시련은 왜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신앙의 원리와 기초’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보았던 ‘원리와 기초’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억만년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국립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위한 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조국을 지키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복음: 마태 2,13-18: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리더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자기 성찰과 기도, 희생과 봉사가 요청됩니다.
적절한 균형 감각과 보편적 상식을 지녀야 합니다.
작은 이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사람이 갑작스레 위로 툭 튀어 오르다 보니, 지금 나라 전체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데올로기나 무속에 깊이 빠져 백성들을 혼돈상태에 빠트렸습니다.
멀쩡하던 사람들, 무고한 사람들을 단체로 죽음의 골짜기로 내몰았습니다.
엉뚱하거나 그릇된 지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페스트나 콜레라보다 더 무섭습니다.
히틀러가 그랬습니다. 네로 황제가 그랬습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 역사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무 부끄럽게도 그런 지도자가 한두명이 아니었습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까?
그 한 사람의 그릇된 생각, 치명적인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습니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역시 똑같은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행동을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즉흥적이고, 또 얼마나 포악한지, 얼마나 앞뒤 생각 않고 행동하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그는 동방박사들에게 속은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머리 뚜껑이 활짝 열리다 보니 이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해서는 안 될 명령을 내렸습니다.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헤로데는 수많은 성채와 수로, 극장과 공공건축물을 건설하며 유다를 발전시켰지만,
말년에는 정치적 음모와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骨肉相爭)의 중심인물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헤로데에게는 10명의 아내가 있었으며, 1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한 아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이 아니라 세 명의 아들에게
영토를 골고루 상속해주었습니다.
놀랍게도 세 명의 아들들은 모두 이복(異腹) 형제들이었습니다.
잔악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났던 헤로데 가문으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만,
헤로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해 순교한 세례자 요한이 대표적입니다.
헤로데로 인해 베들레헴 인근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은 모조리 목숨을 잃었습니다.
집집마다 흘러나오던 아기들의 울음소리는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대신 아기 잃고 슬퍼하는 부모들의 통곡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팠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노력이 아닐까요?
“이 무서운 시절의 소란이 끝나면 우리에게 확신의 시절을 주십시오.
이 기나긴 어둠 속의 방황이 끝나면, 우리로 하여금 밝은 햇빛 아래로 걷게 하십시오.
거짓의 굽은 길이 끝나면, 우리에게 당신 말씀의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의 범죄를 씻어주실 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디게 하여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무죄한 어린이들의 순교 축일
<죄 없으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동시에 훗날 예수님의 죽음도 ‘무죄한 아기의 죽음’처럼 죄 없으면서도 무고하게 죽게 될 예수님의 신비를 드러냅니다.
사실 이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마리아를 신약의 ‘새로운 라헬’이라 칭합니다.
곧 라헬이 일생동안 고통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면, 마리아 역시 '영혼이 칼에 꿰질리는'(루카 2,35)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던 ‘고통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또 라헬이 <예레미아서>에서 ‘이스라엘의 어머니’(예레 31,15)라 칭해지듯이, 마리아는 <요한묵시록>에서 전체 ‘교회의 어머니’라 칭해집니다(묵시 12,17; 12,1-6 참조).
그리고 라헬이 하느님 앞에서 지상의 자녀들을 위해 슬퍼하며 울음으로 전구했듯이, 마리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장 유력한 ‘기도의 전구자’가 되십니다.
또한 우리는 ‘무죄한 어린이의 희생’을 들으면서 앞서 있었던 파라오가 히브리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 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을 기억합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 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곳 없이 반드시 이루지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한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헤아려 보게 됩니다.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 순간이었고 죽음이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죽은 아기들의 어머니들의 아픔을 마리아는 통째로 짊어지셔야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고 고통을 받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 쓸 줄을 아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그렇게 예수님도 훗날 죄 없으면서도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27.금요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1요한1,1-4 요한20,2-8
참사람, 참영성가
“예수님 닮기”
욕망의 사욕에 함몰된 시대정신이요 사회정의같습니다.
이게 기성세대의 민낯입니다.
작금의 국내사태는 단지 좌우,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비상식,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의 문제같습니다.
상식에 바탕한 영성이요, 먼저 상식에 바탕한 사람이 되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옛 장상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양쪽 공히 상식과 진실, 정의에 바탕을 두고 각자의 이상을 펼쳐가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너무나 뻔뻔한 후안무치, 적반하장의 몰상식이 범람하는, 중심을 잃고 길을 잃은 양심 실종의
혼탁한 세상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가르침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욕망에 실려 떠나버린 나를 다시 찾아오기란 어렵다. 인생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나를 지키는 것이다.”<다산>
“천하만물 가운데 굳이 지킬 것이 없지만, 오직 나만은 지켜야 한다.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한 것이 없다.”<다산의 여유당전서>
모두 참사람의 나를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수십년전 어느 수녀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누구나의 바람일 것입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면 주님을 만난 듯 반가울 것입니다.
참사람은 아주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사람입니다.
참으로 꿈과 비전을 지닌 섬세와 배려, 예의와 존중, 겸손과 섬김의 사람입니다.
한마디 말에 인격을 담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대화의 사람’이라면 참 좋은 참사람일 것입니다.
“1.대화중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는다.
2.잘 모를 때는 정중하게 질문한다.
3.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보며 이야기한다.
4.계산적이지 않고 요점을 간략하게 말한다.
5.평소 비속어나 욕설을 쓰지 않는다.
6.강단있게 말하되 인상은 환하게 유지한다.“
수도원 청원자 형제의 어머니가 성탄축제날 피정중 면담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이미 세상 떠난 형제의 부친은 49년생 저와 소띠 동갑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자랑하는 남편이자 형제의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평생 시골에서 이발사를 하면서 가난중에도 네 자녀를 모두 사랑하며 밝고 반듯하게 키웠고
존경을 가득 받았기에 지금도 네 자녀들이 아버지를 몹시 그리워한다 했습니다.
성서를 읽듯 배우는 마음으로 장시간 경청했습니다.
아들 청원자 형제에 대한 세 긍정적인 언급도 잊지 못합니다.
1.변덕이 없다.
2.남을 판단할줄 모른다.
3.손재주가 좋다.
저보다 네 살 적은, 평생 아들을 키워온 어머니의 말을 들으니 정말 믿음직한 수도자의 자질을 지닌
청원자 형제였습니다.
하느님은 보물같은 형제를 수도원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후배는 선배를 그대로 보고 배웁니다.
새삼 아버지답게 처신해야 하겠다는, 독신의 수도자이지만 정말 아버지다운 참사람 수도자가 되기 위해
계속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새로이 했습니다.
이제 젊은 수도자들의 아버지뻘 나이를 훨씬 넘기 때문입니다.
정말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공부가, 평생공부가 참영성을 지닌 참사람되는 공부입니다.
학식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한 참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영성가라는 토마스 머튼의 평가를 기억합니다.
“머튼은 가톨릭인이었으나, 가톨릭인이기보다는 그리스도교인이었고, 그리스도교인인이기보다는
종교인이었고, 종교인이기보다는 인간이었다.”
참으로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는 참사람이요, 영성의 최고봉 경지에 이른 머튼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읽은 교황님 문서에 나오는 성 바오로 사도의 인품에 대한 묘사가 참사람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게 합니다.
무엇보다 참사람은 현실주의자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란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성 바오로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인생은 그의 기쁨과 슬픔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고, 사랑은 시련들중에 시험되고 있음을 알았으며,
희망은 고통을 직면하면서 흔들릴수 있음을 알았다.
그럴지라도 그는 다음과 같이 힘차게 고백한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마5,3-4)”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참사람이자 참영성가, 현실주의자 바오로 사도임을 깨닫습니다.
더 분명히 하면 늘 천상에 눈길을 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라함이 맞습니다.
이런 좋은 본보기가 또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입니다.
오늘은 어제 성 스테파도 첫 순교자 축일에 이어, 예수님의 애제자로 추정되는,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사랑의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최측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중 요한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사도축일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예수님곁에서 자리를 지켰던 에제자 요한이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애제자 요한이야말로 진정 참사람, 참영성가였습니다.
그는 결코 영육의 이원론자나 영지주의 이단자도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육화의 주님을, 하느님이자 인간이신 예수님을 철석같이 믿고 사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유령이 아닌 참사람이자 참하느님이심을 알았습니다.
참으로 신적일수록 인간적이요 인간적일수록 신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로 닮아갈수록 참사람에 참영성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요한1서의 말씀을 통해 요한의 체험이 흡사 우리의 체험처럼 생각됩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 요한, 성 바오로처럼 영원한 생명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참사람,
참영성가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의 대조가 참 흥미롭습니다.
빈무덤에 먼저 달려온 것은 열렬한 사랑의 애제자 요한이었고 빈무덤 입장도 수제자 베드로에게 양보함으로
겸양의 사랑이 빛납니다.
빈무덤 안에 잘 개켜져 있는 수건을 보는 순간, “보고 믿었다”라는 묘사에서 보다시피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의 부활을 직관하고 믿은 애제자임이 분명합니다.
시공을 초월한 사도 요한의 선포와 초대가 고맙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아버지와 아드님이신 당신과 나누는 친교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참사람이, 참영성가가 되어 충만한 친교의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12/28(토) [(홍)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은 어제 성 스테파도 첫 순교자 축일에 이어, 예수님의 애제자로 추정되는, 사도들중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사랑의 성 요한 사도 축일입니다.
늘 예수님과 함께 했던 최측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셋중 요한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사도축일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예수님곁에서 자리를 지켰던 에제자 요한이였습니다.
예수님을 그대로 보고 배운 애제자 요한이야말로 진정 참사람, 참영성가였습니다.(이수철 신부)
12/28(토) [(홍)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제 189-59일 기도
복음 <헤로데는 베들레헴에 사는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오늘의 말·샘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28일(토) 7시-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4년 12월 27일 금요일[(백)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4.12.27 |
---|---|
[매묵]2024년 12월 26일 목요일[(홍)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4.12.26 |
[매묵]2024년 12월 25일 수요일[(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신부님 강론 4개 (3) | 2024.12.25 |
[매묵]2024년 12월 24일 화요일[(자) 12월 24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4.12.24 |
[매묵]2024년 12월 23일 월요일[(자) 12월 23일]/신부님 강론 4개 (6) | 2024.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