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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12월 29일 주일[(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12월 29일 주일[(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은 나자렛의 성가정을 기억하며 이를 본받고자 하는 축일이다. 1921년 이 축일이 처음 정하여질 때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 첫 주일이었으나, 1969년 전례력을 개정하면서 성탄 팔일 축제 내 주일(주일이 없으면 12월 30일)로 옮겼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부터 해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부터 한 주간을 ‘가정 성화 주간’으로 지내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정 공동체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가운데 사랑이 넘치는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은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입니다. 나자렛의 성가정을 본받아 우리도 주님을 가정의 중심에 모시고 가족이 화목하게 살아가도록 합시다. 또한 해체된 가정과 위기를 겪는 가정에 주님께서 은총을 내리시어,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루카 2,16 참조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았네.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시니
저희가 성가정의 성덕과 사랑을 본받아
하느님의 집에서 끝없는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아버지를 공경한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3,2-6.12-14
2 주님께서 자녀들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권리를 보장하셨다.
3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죄를 용서받는다.
4 제 어머니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보물을 쌓는 이와 같다.
5 아버지를 공경하는 이는 자녀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도하는 날 받아들여진다.
6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이는 장수하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는 제 어머니를 편안하게 한다.
12 얘야,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13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14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히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사무엘은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
1,20-22.24-28
20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21 남편 엘카나가 온 가족을 데리고 주님께 주년 제사와 서원을 드리러 올라가는데,
22 한나는 올라가지 않았다. 한나는 남편에게 말하였다.
“아이가 젖을 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주님께 보이고,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살게 하겠습니다.”
24 아이가 젖을 떼자 한나는 그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는 삼 년 된 황소 한 마리에 밀가루 한 에파와
포도주를 채운 가죽 부대 하나를 싣고,
실로에 있는 주님의 집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아이는 아직 나이가 어렸다.
25 사람들은 황소를 잡은 뒤 아이를 엘리에게 데리고 갔다.
26 한나가 엘리에게 말하였다.
“나리! 나리께서 살아 계시는 것이 틀림없듯이,
제가 여기 나리 앞에 서서 주님께 기도하던 바로 그 여자입니다.
27 제가 기도한 것은 이 아이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드린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28 그래서 저도 아이를 주님께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이 아이는 평생을 주님께 바친 아이입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그곳에서 주님께 예배를 드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8(127),1-2.3.4-5(◎ 1)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네 손으로 벌어 네가 먹으리니, 너는 행복하여라, 너는 복을 받으리라. ◎
○ 너의 집 안방에 있는 아내는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너의 밥상에 둘러앉은 아들들은 올리브 나무 햇순 같구나. ◎
○ 보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이렇듯 복을 받으리라.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

제2독서

<주님과 함께하는 가정생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말씀입니다.3,12-21
형제 여러분, 12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13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 주는 끈입니다.
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17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18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19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20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21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3,1-2.21-24
사랑하는 여러분,
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
23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24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콜로 3,15.16
◎ 알렐루야.
○ 그리스도의 평화가 너희 마음을 다스리게 하여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41-52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52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거룩하신 주님, 성가정의 모범을 따르려는 교회를 굽어보시어, 겸손과 온유와 인내로 세상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의 향기와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 세계 경제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자이신 주님, 세계의 경제를 이끌고 있는 이들을 살펴 주시어, 그들이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본받아, 인류의 공동선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3. 노숙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여러 사정으로 노숙하는 이들을 몸소 보호하시어, 추위 속에서 건강을 지켜 주시고, 그들이 하루빨리 안정된 터전에서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친교의 주님, 작은 교회인 가정을 보살펴 주시어, 주님의 성가정을 본받고, 가족들이 존경과 존중으로 대화하며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보금자리를 만들어 가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화해의 이 제사를 드리며 간절히 청하오니
동정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전구를 들으시고
저희 가정을 주님의 은총과 평화로 굳건하게 지켜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주님 성탄 감사송 1 : 빛이신 그리스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바룩 3,38 참조
우리 하느님이 세상에 나타나시어, 사람들과 함께 사셨네.

영성체 후 묵상

성가정을 통하여 참된 삶의 모범을 보여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노래합시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 주님은 시온에서 너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너는 한평생 모든 날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리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지극히 인자하신 아버지,
저희를 천상 성사로 길러 주시니
저희가 언제나 성가정을 본받아
현세의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마침내 영원한 천상 가정에 들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성가정.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주일 아침 성당 가는 길이었습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 했지만, 나올 때는 비가 오지 않아서 우산도 없이 성당으로 갔습니다. 중간쯤 가면서 비가 내렸습니다. 사제관으로 가기도 그렇고, 비를 맞으면서 성당으로 갔습니다. ‘머피의 법칙이 제게도 해당하는지 그만 성당 열쇠를 사제관에 놓고 왔습니다. 아무리 본당 신부라고 해도, 열쇠가 없으면 성당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조금 기다리니 수녀님이 오셨고, 성당으로 들어갔습니다. 비를 맞으며 걸어오면서 예전에 토론토에서 지냈던 시간이 생각났습니다. 2005 11월에 저는 해외연수를 신청했고, 토론토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과 저는 2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따로 지냈습니다. 말을 배우려면 따로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2달 정도 지내다가, 동창 신부와 저는 같이 지내기로 했습니다. 말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낯설고 먼 타향에서 같이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습니다. 2년 동안 지내면서 부부가 같이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집은 열쇠가 있으면 열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있어야 열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3가지 차원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께서 머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나의 몸과 마음에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는지,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이 예수님께서 머물렀던 구유가 될 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가족이라는 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혼자 있어야 하는 아담을 위해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와는 아담의 몸에서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가족은 서로 아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우리 모두는 가족이라는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늘과 땅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지구라는 집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선조들이 물려주었던 아름다운 지구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는 예수, 마리아, 요셉 성가정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을 성가정 축일로 지내는 것은 예수, 마리아, 요셉에게 한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한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가정 역시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모든 추억, 기억, 상상력이 시작되는 성가정 축일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가정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소중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가족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 아버지에 대한 효행은 잊혀지지 않으니, 네 죄를 상쇄할 여지를 마련해 주리라.”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님 안에 사는 사람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자녀 여러분,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일입니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그들의 기를 꺾고 맙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데, 키 큰 사람하고, 키 작은 사람이 우산 하나만을 가지고 비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키 큰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작은 사람이 비를 맞게 되고, 키 작은 사람에게 우산의 높이를 맞추면 키 큰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서로가 키가 다른 것에 대해 한탄하거나 탓하면 둘 다 불행해 집니다. 또 서로를 탓하다 갈 곳을 못 가게 될 수도 있죠. 해결 방법의 하나는,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을 업고, 키 작은 사람은 우산을 들면, 비 맞지 않고 갈 곳을 가게 될 뿐만 아니라, 둘이 서로의 믿음과 나눔의 경험을 창출해 낼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문제는 함께 해결할 수 있고 또 함께 해결하면서 성장의 기회를 얻게도 됩니다.”

 

기도와 마음을 열어주는 대화, 그리고 신뢰를 통해서 성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가정 축일

복음루카 2,41-52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정말이지 힘든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순명의 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윗사람이 하라시니 눈물을 머금고 억지로 하는 순명이 아니라, 기쁨에 찬 자발적 순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를 과감하게 접는다는 것, 분명 나보다 부족해 보이는 상대방의 뜻에 따른다는 것,

타인의 생각과 계획에 내 삶을 종속시킨다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몸소 인간에게 기꺼이 순종하셨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그러한 정황을 아무런 가감 없이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루카 2,51)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지, 당신의 삶 전체, 당신의 미래를 인간의 손에 맡기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극도의 자기 낮춤이요, 지극한 겸손의 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눈여겨볼 측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셨지만,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께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수도 공동체 안에서 때로 장상들도 회원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때로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에게 순종하신 예수님, 그 놀랍고 감동적인 덕행의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철저한 순명이 있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의 끔찍한 십자가 죽음을 고스란히 예견하신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마음이 심란하고

괴로운 나머지,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 바쳐, 온 몸과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살벌한 죽음의 현장,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2)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최종적인 결정은 아버지께 맡겨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

 

순명의 덕과 관련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는 돈보스코 시대 때 부터 내려온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Faccio Io, Vado Io’(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통입니다.

 

굳이 장상이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사리 부탁하기에 앞서, 수도자들은 미리 장상의 괴로움을 파악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원장님, 어려운 일이 있으신가보군요.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거 제가 하겠습니다.

관구장님, 어디 힘든 자리로 누군가를 보내기 위해 고민하고 계시는군요.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목소리로 ‘Faccio Io, Vado Io’를 외치지만, 어딘가를 보내면

그쪽에서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러니 잘 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어디를 가든 공동체와 잘 어울리면서,

기쁘고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어딜 가든 그쪽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집회서와 바오로 사도가 건네는 권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겠습니다.

 

“네 아버지가 나이 들었을 때 잘 보살피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마라.

그가 지각을 잃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업신여기지 않도록 네 힘을 다하여라.”(집회 3,12~13)

 

“아내를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에서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자녀들을 들볶지 마십시오.”(콜로 3,19~21)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가정 축일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사람이 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거룩한 탄생은 하느님께서 ‘가정’ 안으로 들어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가정’을 만드시며(이루시며)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엮어지고 꾸며졌기 때문입니다.

곧 ‘성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이루시며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는 첫 장소로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이토록 당신의 오심으로 모든 것을 축복하고 새롭게 하시는 당신께서는 맨 먼저 ‘가정’을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가정’이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무대임을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가정의 주인이 되시도록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곧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집회 3,6)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신앙공동체 구성원의 신분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곧 하느님의 호의를 입은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선택받은 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삶으로 동정, 호의, 겸손, 온유, 인내, 용서, 사랑, 평화, 감사로 제시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풍부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 3,16)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며,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시고, “이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콜로 3,20)이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바로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준재임을 말하면서도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명하고 지냈다.'(루카 2,51)고 전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연상시킵니다. 

곧 ‘친교와 사랑과 통교를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를 연상시켜줍니다. 

그래서 ‘성가정’은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모든 ‘수도공동체’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가정’이라고 해서,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거나, 혹은 근심 걱정이나 고통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문제가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낳자마자 쫓겨 다녀야 했고, 자신의 아기 때문에 많은 무죄한 아기들이 죽어야 했으며, 혼인 전에 아기를 낳은 까닭에 이웃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마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살아야 했으며, 아들마저 세상을 먼저 떠나버린 ‘불우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한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분명 ‘행복한 가정’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도 없어서 성가정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가정’이란 단순히 고통이나 어려움이 없거나 말썽 부리는 사람이 없는 가정이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지에 달려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되어 계시는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을 이루는 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실 수 있도록 하는 일’이요, ‘그 말씀이 품은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일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성가정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구원의 길에 함께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가정'은 예수님과 함께 구원의 길을 가는 동반자요, 협조자요, 반려자로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곧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가정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머무르게 하되, '말씀'이 주인으로 머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주인이신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순명과 섬김을 통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순명으로 섬기고, 섬김으로 순명하며 사랑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가정공동체 안에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과 평화가 넘쳐났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가정 축일'을 맞아, 우리의 가정과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동행하시 위해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으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12.28.토요일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1요한1,5-2,2 마태2,13-18

 

                                                                역사는 반복한다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어린이들은 마치 어린양처럼 뛰놀며,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였도다."(독서기도; 후렴1)

 

계속되는 성탄축제중 오늘은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얼마전 12.3 비상계엄 내란사태를 보면서, 어제 국무총리 탄핵 사건을 보면서,

또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내면서 새삼스러이 깨닫는 진리는 ‘역사는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삶은 반복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늘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이 있을 뿐입니다.

 

문득 생각나는 “시지프의 신화”입니다.

시지프가 형벌로 산꼭대기까지 돌을 굴려 올려 놓으면 떨어뜨리고, 또 올려 놓으면 떨어뜨리고...

참으로 무의미하고 단조로운 반복의 인생이 흡사 형벌같기도 합니다.

삶의 의미를 잃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이기도 할 것입니다.

수도원에서 42년동안 정주의 삶을 통해 늘 새롭게 깨닫는 엄중한 삶의 진리가 반복입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26년전 한 여름에 써놨던 ‘담쟁이’란 애송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타오르다 가을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다시 써내려 가면서도 시공을 초월하여 불끈 샘솟는 초록빛 열정을 느낍니다.

주님의 전사로서 종신불퇴, 백절불굴의 지칠줄 모르는 열정으로 정주의 반복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은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느님 향한 희망에서 샘솟는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애의 열정이요 무한한 인내력입니다.

 

역사는 반복합니다(History repeats itself).

역사가 지속되는 한 반복은 계속될 것입니다.

조선 500년 역사의 실록을 보면서도 보복의 악순환의 반복의 역사이기에 한권으로 족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해방 80년이 되었어도 여전히 반복되는 좌우의 첨예한 증오와 배척의 극단적 대결입니다.

세계 곳곳에서도 여전히 반복되는 불의의 전쟁의 현실입니다. 

 

무지의 죄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 좋은 모범이 오늘 이집트로 피신하여 예수 아기를 살린 요셉 마리아 성가정 부부입니다.

오늘 사도 요한의 말씀이 깊은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길지만 그대로 인용합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줍니다...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빛속에서 회개와 화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과 친교를 누리며 사는 것이

반복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고통과 고난의 악순환에 함몰되지 않게 합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가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봄과 겨울이 모두 계절이듯, 살아가며 겪었던 고통과 고난 또한 나를 이루는 것이다.”<다산>

참으로 주님을 믿는 우리는 무의미한 반복의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세월과 더불어 연륜의 나이테처럼

모두가 참나의 완성에로 이끄는 거룩한 반복임을 깨닫습니다.

“근심과 고난이 나를 살게 하고, 편안함과 즐거움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맹자>

참으로 살려면 안락함을 추구하지 말고, 근심과 고난을 일상의 벗으로 삼으라는 충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의 폭정을 피하여 이집트로 도주하는 요셉의 모습이, 헤로데와 요셉의 싸움같지만

실은 헤로데와 하느님의 싸움입니다.

빛이신 하느님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는 요셉을 어둠속에 살아가는 헤로데가 결코 이길 수는 없습니다.

빛이신 하느님의 인도로 언제나 헤로데 보다 몇걸음 앞서가는 요셉입니다.

그 누구도, 무엇도 주님의 빛 속에서 살아가는 요셉을, 우리를 이길수는 없습니다. 

 

폭군 헤로데는 가상현실, 과대망상속에 살아가는 편집증 환자입니다.

그에게는 일상도 없고 상식도 없고 무도, 무법, 무지, 무능합니다.

권력은 자식과도 나누지 않습니다.

2인자를 허락하지 않는 권력자들입니다.

권력욕의 화신같은 헤로데는 자기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식도 둘이나 처형했고,

이어 화근이 될 수 있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의 죄없는 아이들을 죽여버리니 대략 20여명 안팎으로 추정합니다.

당신 주민 인구는 1000명쯤 됐을 거라합니다. 

 

그 아득한 옛날 이집트 폭군 파라오의 폭압치하에서 모세의 탄생과 더불어 많은 히브리 아기들이

살해되었듯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 탄생과 더불어 많은 아이들이 희생됩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예수님도 빌라도에 의해 희생될 것입니다.

새삼 역사는 반복됨을 깨닫습니다.

반복되는 순교의 역사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우리는 이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들뿐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물론 모든 인류의 생명을 보호해 주십사 기도와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 성무일도 화답송 후렴도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기도하며 이들을 주님을 위한 순교자들로 기립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비극과 신비를 해명할 길이 없습니다.

아, 인류역사상 얼마나 무죄한 이들이 억울하게 비참하게 죽었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죽어가겠는지요!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의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가 내 주변에서는 재현되지 않도록, 오늘 복음의 성 요셉처럼

늘 주님의 빛 속에 깨어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여러분 모두를 무지의 죄악에서 보호해 주시어 주님의 빛 속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독서기도;후렴2). 아멘.


12/29(일) [(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되새김 구절

 

1. 나자렛 성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성모님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하셨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하느님의 뜻이 함께한다면,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난다면 우리의 가정 역시 성가정이 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순명의 덕과 관련해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 사이에서는 돈보스코 시대 때 부터 내려온

너무나 아름다운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Faccio Io, Vado Io’(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통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목소리로 ‘Faccio Io, Vado Io’를 외치지만, 어딘가를 보내면

그쪽에서 너무 힘들어 합니다.

 

그러니 잘 순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어디를 가든 공동체와 잘 어울리면서,

기쁘고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어딜 가든 그쪽 사람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도록,

계속해서 자신을 갈고 닦아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으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빛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기억하지 않으면 반복의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가 내 주변에서는 재현되지 않도록, 오늘 복음의 성 요셉처럼

늘 주님의 빛 속에 깨어 기도하며 사시기 바랍니다.(이수철 신부)

 

12/29(일) [(백)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제 190-60일 기도

 

복음 <부모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있는 예수님을 찾아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으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12월29일(일) 7시3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