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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250108 매묵]2025년 1월 8일 수요일[(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8일 수요일[(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이사 9,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네.

본기도

온 인류를 비추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백성이 한결같은 평화를 누리게 하시고
저희 조상의 정신을 밝히시던 그 빛으로
저희 마음도 비추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4,11-18
11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2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압니다.
14 그리고 우리는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의 구원자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또 증언합니다.
15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시고 그 사람도 하느님 안에 머무릅니다.
1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17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18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72(71),1-2.10-11.12-13(◎ 11 참조)
◎ 주님, 세상 모든 민족들이 당신을 경배하리이다.
○ 하느님, 당신의 공정을 임금에게, 당신의 정의를 임금의 아들에게 베푸소서. 그가 당신 백성을 정의로, 가련한 이들을 공정으로 다스리게 하소서. ◎
○ 타르시스와 섬나라 임금들이 예물을 가져오고, 세바와 스바의 임금들이 조공을 바치게 하소서. 모든 임금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모든 민족들이 그를 섬기게 하소서. ◎
○ 그는 하소연하는 불쌍한 이를, 도와줄 사람 없는 가련한 이를 구원하나이다. 약한 이, 불쌍한 이에게 동정을 베풀고, 불쌍한 이들의 목숨을 살려 주나이다. ◎

복음 환호송

1티모 3,16 참조
◎ 알렐루야.
○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신 그리스도님, 영광받으소서.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리스도님, 영광받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45-52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뒤, 45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49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50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저희에게 참된 믿음과 평화를 주셨으니
저희가 예물을 바쳐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을 합당히 공경하고
거룩한 제사에 참여하여 온 마음으로 이 신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공현 감사송 : 인류의 빛이신 그리스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저희 구원의 신비를 밝혀 주시고
그분을 인류의 빛으로 드러내 주셨나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죽음의 운명을 지닌 인간으로 나타나게 하시어
그분께서 지니신 불사불멸의 힘으로
저희에게 새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1요한 1,2 참조
생명이 나타나셨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을 온갖 은혜로 다스리시니
오늘도 내일도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덧없는 현세에서도 위안을 받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더욱 힘차게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집안에 자녀가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안타깝게도 태어나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녀가 있습니다. 유전자의 결함으로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가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큰 수술을 몇 번씩 해야 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이런 의문을 가진다고 합니다. ‘왜 내게! 이런 일이!’ 아이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도 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어렵게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면서 가정의 화목이 깨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분노에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태어나면서 심장 판막 수술해야 했던 아이, 태어나면서 신체의 일부가 없었던 아이, 태어나면서 뇌에 이상이 있었던 아이도 보았습니다. 육체의 병은 치료하고 고칠 수 있지만, 평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유전적인 결함이 있는 아이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은 아들이 두 명입니다. 한 명은 보통 아이들과 같았습니다. 잘 자라주었고, 직장 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결혼해서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 명은 보통 아이들과 달랐습니다. ‘다운 증후군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자매님은 그 아이를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달라스 지역에 장애인 학교를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임원이 되었고, 장애인 학생들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하였습니다. 본당 자선 음악회 수익금도 자매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장애인 학교에 기부하였습니다. 장애인 학교에는 자매님처럼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부모님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기쁘고, 당당하게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길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역시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목사님도 열정을 다해서 장애인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자매님은 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위한 집을 마련하는 겁니다. 정부의 지원과 후원금으로 이 학생들이 언젠가 부모님들이 없어도 모두 행복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집을 마련하고 싶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선물 주셨으니, 마땅한 길도 마련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호수 위를 걸을 때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만 두려움에 빠졌고,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그리고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재우시고, 호수 위를 걸으시는 분이심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앞선 사람은 컵에 남은 반 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네.’ 그러나 희망과 용기를 가진 사람은 컵에 남은 반 잔의 물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직 반이나 남았네.’ 컵에 남은 물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내 생각에 따라서 그 물은 걱정덩어리가 되기도 하고, 갈증을 풀어주는 희망이 되기도 합니다. 꽃이 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본향으로 가는 존재임을 자각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두려움과 걱정은 나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진화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우리의 몸은 두려움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압도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 사나운 동물, 독이 있는 벌레, 먹으면 죽을 수 있는 식물, 추위, 배고픔, , 폭력, 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겨내고, 피하고자 인간은 두려움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은 인간의 지혜와 협력으로 하나둘씩 해결됐습니다. 지금, 진화의 피라미드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생물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또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걱정, 근심, 불안, 초조와 같은 것들입니다. 내가 걱정, 근심, 두려움,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 차면 내 몸도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체격을 가졌어도, 많은 배움이 있어도 그것들은 무기력하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 희망, 믿음, 온유함과 친절로 가득 차면 나의 몸 또한 그렇게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비록 건강하지 못해도, 많은 배움이 없어도 얼마든지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빵 공장을 세우고, 수상 스키를 타라는 뜻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마르 6,45-52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오래전 젊은 시절, 마음 맞는 형제들과 의기투합해서 어설프기 짝이 없는 뗏목 하나를 만들어

바다로 나간 적이 있습니다.

낚싯대도 드리우고, 드러누워 하늘도 올려다보고, 참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좋은 시절은 늘 찰나의 순간이었습니다.

물살이 멈추는 정조 상태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썰물이 시작되면서

저희가 탄 뗏목이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육지는 점점 까마득해지고 저희는 점점 큰 바다로 흘러가 몇 시간 동안이나 표류를 계속했습니다.

이러다 죽는가보다는 생각과 함께 점점 공황상태에 빠져드는 순간 작은 어선 한 척이 저희를 발견했습니다.

 

구릿빛 젊은 선장은 우선 저희를 안심시키더군요.

“이젠 됐슈. 아무 걱정들 마유.” 그러면서 어선의 꼬리에 저희가 탄 뗏목을 묶어 안전하게 항구에 내려줬습니다.

그 젊은 선장의 모습이 얼마나 고맙고 멋있던지 마치 예수님을 뵙는 듯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 역시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던 중에 강한 맞바람을 만납니다.

하필 날까지 저물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죽을 고생을 했습니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새벽녘까지 노를 저었지만 배는 언제나 그 자리였습니다.

전문직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었지만 탈진한 상태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습니다.

 

그 순간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혼비백산해서 비명까지 질러댔습니다.

아수라장이 된 제자들의 배 위로 예수님께서 올라가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건네시는 한 말씀은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 6,50)

 

참으로 위엄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빵과 물고기의 기적으로 당신의 메시아성을 백성들 앞에 확연히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물위를 걸으심으로써 당신의 초인간적 위대성, 당신의 신적 본질의 신비를 드러내는 현현(顯現)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킵니다.

 

인간, 근본적으로 유약한 존재입니다. 쉼 없이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은 당신을 향하도록 창조되었기에 당신 안에 쉬기까지 편할 날이 없습니다.”

 

결국 더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더이상 근심하지 않기 위해서 정답은 하나뿐입니다.

하느님의 품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선장인 교회란 배에 승선하는 일입니다.

 

어두운 밤 갈릴래아 호수 위에서 있었던 예수님의 현현은 큰 의미를 지닙니다.

유다 문학 안에서 깊은 물은 악의 세력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악과 어둠과 죽음의 정복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동시에 생명의 부여자로 자리매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의 물결을 당신 발 아래 두십니다.

그분의 옥좌는 광란하는 파도보다 높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분은 거센 역풍을 다스리실 능력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습니다.”(마르 6,51)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현존을 통해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사라지게 하고 보호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주님은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

 

오늘도 역시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를 이중으로 드러내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으십니다. 

이는 당신께서 어둠을 누르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홍해바다를 가르고 당신 백성을 구해내시면서 당신께서 주 야훼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듯이 말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하느님을 일컬어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라고 했듯이,

당신께서는 바다를 밟으심으로써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하여 <요한 묵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 새 땅'은 말하지만, '새 바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게 됩니다.

어둠인 바다는 이미 밟아 눌러버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으시는 권위 있는 행동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 6,50) 

예수님께서는 “나다” 하시면서, 구원하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마치 야훼 하느님께서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현현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호수를 건너신 이 이야기는 홍해를 건넌 사건을 기억하게 해 주는 동시에 ‘파스카’를 미리 보여줍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이를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곧 5천명을 먹이신 ‘호수 건너편 외딴 곳’이 홍해를 건너온 광야를 시사해준다면, 호수 위를 걸으시어 ‘다시 건너간 곳’은 에덴의 회복을 시사해줍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게 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이요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라는 배를 타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건너갑니다. 

배는 항구에 있을 때 안전합니다. 

그리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배는 그렇게 안전하고 평화롭게 정박하고 있으라고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풍랑을 헤치고 여행하라고 만들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수도공동체라는 이 배를 타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해서 절로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닙니다. 

배를 타고서 맞바람과 풍랑을 헤치며 항해를 해야 건너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맞바람과 풍랑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함께 계신 분께서 우리를 무사히 건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분께서 우리가 탄 배의 ‘키잡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 6,50)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7.주님 공현 대축일 후 화요일                                                         1요한4,7-10 마르6,34-44

 

                                              “하느님은 사랑이시다(God is love)”

                                                           <서로 사랑합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영어로 쓰니, “God is love” 한 눈에 들어옵니다.

하느님에 대한 정의입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사랑해서 사람이요 만병통치약이 사랑이고 만병의 근원이 사랑 결핍입니다.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입니다.

가장 많이 말하면서 가장 모르는 것이 사랑입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간단합니다. 사랑에 위반되는 모든 행위가 죄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는 소극적 노력보다는 사랑하려는 적극적 노력이 죄에 대한 최고의 처방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에는 우리 모두 영원한 초보자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되는 평생 공부가 사랑이요, 우리는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인생 학교에 재학중인

평생학생입니다. 하루하루가 사랑을 배워가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죽으면 사랑도 못합니다. 살아있을 때 사랑이요, 사랑하라 주어지는 인생입니다.

죽음에 직면했을 때 가장 후회되는 것이 사랑 못했던 것이요, 하느님 앞에 가서는

평생 사랑으로 심판 받을 것입니다. 

평생 아프게 했던 남편의 임종전 고백에 말끔히 치유되었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이 생생합니다.

 

1.미안하다.

2.고맙다.

3.사랑한다.

 

마지막 이런 임종어를 주님께 고백할 수 있다면 무조건 구원일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 요한이 ‘사랑의 대가’답게 명쾌하게 사랑을 설명합니다.

무려 사랑이란 말이 10회 나옵니다.

사랑없이는 결코 사람이 허무와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사랑이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없이는 하느님도, 인간도 해명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신비, 인간의 신비는 그대로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은 모든 신비의 열쇠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사랑도 못합니다.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선물이 이웃이요 공동체입니다.

서로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라 주어진 공동체입니다.

 

혼자서는 사랑도, 구원도 없습니다.

공동체내에서 서로 사랑할 때 서로가 구원이요, 서로가 자존감 높은 삶에, 정체성 또렷한 삶입니다.

수도 공동체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잘 체험할 수 있는 두 중심 시간은 성당에서의 공동미사시간이요,

식당에서의 공동식사시간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름길은 사랑하는 일뿐입니다.

사랑은 추상 명사가 아니라 구체적 동사입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께 가까워지고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은 능력입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사람마다 사랑의 능력은, 깊이는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니 참사람이 되는 길은 사랑 실천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길뿐입니다.

이 사랑이 아니곤 도대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길도, 사람이 되는 길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보고 배울 사랑의 영원한 롤모델은 예수님뿐입니다.

요한이 설명이 명쾌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화신이 오늘 복음의 착한목자 예수님입니다.

사도들이 전교활동후 돌아와 성과를 보고하자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배려하는 주님의 사랑이요,

막상 외딴곳에 도착했을 때 기다리던 목자 없는 양들같은 군중을 보자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에

많은 것을 가르치십니다. 

 

새삼 예수님의 분별의 사랑, 분별의 지혜가 고맙고 감동적입니다.

당신과 제자들의 휴식보다는 군중의 필요를 우선 충족시킨 주님이십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구조가 그대로 사랑의 성체성사 미사를 닮았습니다.

앞서 가르치시는 부분은 말씀전례에 해당되고 이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는 장면은

그대로 성찬전례에 해당됩니다.

하느님 사랑의 절정의 계시가 미사시간이요, 미사전례의 주례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성체성사의 기적은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성을 다해 모두를 봉헌하니 하느님도 감동하셨고 군중도 감동하여 가진 것을 다 나누니,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5천명이요,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것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가리킵니다.  

없어서 굶주린 것이 아니라 나누지 못해 굶주림이요, 이것은 하느님 탓이 아니라 순전히 사람 탓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새롭게 깨닫는 진리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주님의 이 거룩한 사랑의 미사 은총을 통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3,18). 아멘.


1/8(수)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이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빵 공장을 세우고, 수상 스키를 타라는 뜻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치네.”

(조재형 신부)

 

2.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이 순간 인생의 고해(苦海)을 건너가고 있는

우리 각자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역풍 속을 헤쳐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옛날 제자들을 안심시켰듯이 우리의 마음도 안심시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 6,50)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성체성사의 기적은 사랑의 기적, 나눔의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정성을 다해 모두를 봉헌하니 하느님도 감동하셨고 군중도 감동하여 가진 것을 다 나누니,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5천명이요,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것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합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를 가리킵니다.  

(이수철 신부)

 

1/8(수)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8일차 기도

 

복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았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 6,50)

주님!

비록 어둠이 짙고 풍랑이 거세고 배가 흔들릴지라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하소서.

비록 흔들릴지라도 앞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이”(욥 9,8), 바로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성령의 바람을 태워, 가야 할 곳으로 저를 인도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8일(수) 9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