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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22일 수요일[(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22일 수요일[(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빈첸시오 부제 순교자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7,1-3.15-17
형제 여러분,
1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15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께서 나오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16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17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0(109),1.2.3.4(◎ 4ㄴㄷ)
◎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주님께서 내 주께 이르셨나이다.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너의 발판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 주님이 당신 권능의 왕홀을 시온에서 뻗치시리이다. “너의 원수들을 다스려라.” ◎
○ 네 권능의 날에 주권이 너와 함께하리라. 거룩한 빛, 새벽 품에서 나는 너를 낳았노라. ◎
○ 주님은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않으시리이다. “멜키체덱과 같이 너는 영원한 사제로다.” ◎

복음 환호송

마태 4,23 참조
◎ 알렐루야. 
○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목사님이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가는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님은 최근의 통계를 설명하였습니다. 한때 개신교 신자는 천만 명이 넘었는데, 지금은 팔백만 명이 안 된다고 합니다. 반면에 가톨릭 신자는 이백만 명이 조금 넘었는데 지금은 오백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의 증가는 세례받는 새 신자도 있지만, 개신교에서 개종한 신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로 가면 한국에서 가톨릭 신자가 개신교 신자보다 많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개신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심층 인터뷰한 자료에서 두 가지 이유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명품성이었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말씀, 친교, 봉사, 나눔이 있어서 좋은데 허전한 무엇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허전함이 영성인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가톨릭은 개신교처럼 다양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지만, 명품 같은 느낌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0년 동안 같은 전례를 이어오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례와 성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에게 가톨릭의 전례, 성사, 수도자, 성직자의 모습은 마치 명품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접근성이었다고 합니다. 개신교회는 봉사하면서 직급이 있는데, 가톨릭은 그런 직급이 없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어느 곳이나 같은 전례와 말씀으로 미사가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여행을 가도, 출장을 가도 성당만 찾아가면 미사에 참례할 수 있습니다. 그날 전례는 세계 어디에서나 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지순례 다닐 때는 제의만 가지고 다녔습니다. 다른 미사 도구는 모두 성당에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명품은 비싸기도 하고,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명품 같은 가톨릭은 쉽게 찾을 수 있고, 큰 비용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과부의 작은 정성을 칭찬하셨듯이, 가톨릭은 헌금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톨릭이 지닌 소중함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천주교인이요?” 179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심문하던 관원의 말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제로서 1년 짧게 사셨지만, 순교로서 신앙을 지켰고, 목자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지상에서의 삶은 짧았지만,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어 한국천주교회를 위해 전구하고 계십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한국천주교회의 수호자가 되셨고, 사제들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179년 전에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였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포기한다는 의미였습니다. 한국천주교회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당신이 천주교인요?”라는 말을 주제어로 삼았던 것은 우리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따라서 세상이 주는 평화와 기쁨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가난, 병고,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두려움 없이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제자들은 저마다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을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선생님을 예언자라고도 합니다. 선생님을 세례자 요한이라고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엘리야가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세례자 요한이 했던 일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제자 중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베드로이니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나는 이제 천국의 열쇠를 주겠습니다.” 오늘 두 가지를 묵상하면서 하루를 보내면 좋겠습니다. 하나는 당신은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천주교인답게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체적인 혈통이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마르코 3,1-6

 

 안식일의 의미: "졸지 마! 세상은 호구야!"

 

오늘 복음도 안식일 법의 의미에 대한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주는 이는 부모이고 창조자입니다.

불안을 주는 부모는 자녀를 사회에 부적응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그 평화로서 자녀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안식일에 회당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습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세상에 나갈 용기도 낼 수 없다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중앙으로 부르십니다. “네가 주인공이야. 쫄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돈 많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시는지만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호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이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용기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시고 그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당신이 먼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자녀에게 평화를 줄 수 없음을.

죽음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자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금쪽이’에 은둔형 외톨이가 나옵니다. 엄마가 음주운전 피해자로 사망하자 아들은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말도 안 하고 컴퓨터만 합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제한하자 아들은 울면서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요! 진짜 너무나도 살기 힘든데….

제 인생에서! 제 가정에서! 진짜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제 가정에서! 인생에서!

(컴퓨터가) 유일하게 살길을 만들어주고 있다고요! 유일하게….”

 

아빠는 왜 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없었을까요? 아빠조차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엄마 옷장을 열어놓고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애들 좀 지켜줘. 내가 더 열심히 할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

당신은 못 와도 내가 갈 수 있으니까 갈게. 가서 또 잔소리해 줘. 너무 그립다. 미안해.”

 

아빠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인데,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날 수 있을까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크리스 가드너란 자수성가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그는 1954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나 가난, 가정 폭력, 위탁 양육으로 얼룩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드너는 유명 중개 회사에 무급 인턴십을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노숙자가 되어 어린 아들과 함께 보호소와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서 살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가드너의 인내심은 결실을 보았고 결국 Series 7 시험에 합격하여 정규 주식 중개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7년 자신의 중개 회사인 Gardner Rich & Co.를 설립하여 재정적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수천억을 번 가드너는 자신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엄마도 없는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노숙하면서도 자식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누군가가 네게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두지 마라. 나조차도 마찬가지야. 알겠니?

네게 꿈이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해.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할 수 없으니까

네게도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 해.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가서 그걸 가져. 끝이야. 가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세상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어야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어깨를 감싸며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이런 안식의 참 의미를 살게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며,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마르 2,28). 

오늘 복음도 여전히 ‘안식일 논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지 고발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마르 3,4)

그들이 입을 열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손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마르 3,3, 5)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인가?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 가슴에 자기 뜻을 꼭 움켜잡고 있듯이, 손에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바람에 형제들과 주고받고를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고집 때문에 완고해져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느님과 형제들과 단절되어 있음을 말합니다. 

묘한 것은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손을 꼭 쥐고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분명, 에덴에서부터 쥐었습니다. 

‘선악과’를 손에 움켜쥐었고, 교만과 불순명과 탐욕을 움켜쥐었습니다. 

사실 그것을 따먹고 높아지려고 한 것이지만, 오히려 추락이었습니다.

금단을 어기고 자유를 행사했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속박이었습니다.

욕심 부려 자신을 채웠지만, 오히려 단절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무엇인가를 움켜쥔다는 것은 곧 추락이요 속박이요 죽음입니다.

그러니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곧 원죄를 뒤집어 쓴 그리스도인을 표상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꼭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잎으로 앞을 가리고 숨어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손을 뻗어라."

(마르 3,3, 5)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은 단지 움켜쥔 것을 내려놓는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빈손에 못을 박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단지 움켜 쥔 것을 내려놓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을 건네주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께서는 손을 펴시어 십자가에서 못을 받아들이시고, 구원의 피, 화해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첫 아담이 움켜쥔 손을 펴시고 새 아담이 되셨습니다.

죽음과 어둠을 몰아내시고 생명과 빛이 되셨습니다. 

오늘 저희는 손을 펴고 성체를 받아 모십니다. 

 

움켜쥔 것을 내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손을 뻗어 상처를 입고 구원의 피를 흘려야 할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의 손에 구원의 못을 받아들였듯이 말입니다. 

 

사랑으로 상처 입을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랑으로 자신을 건네줄 줄을 알아야 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손이 당신 구원을 전하는 손, 당신 사랑을 건네주는 손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뻗어라.”

(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21.화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291-304) 기념일 

                                                                                                   히브6,10-20 마르2,23-28

                                                 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과 자유”

 

"보라,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분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한 분을 만났도다."(즈카르야 후렴)

 

성녀 아녜스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오늘은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여러 아녜스 자매들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고작 13세에 순교한 성녀입니다.

성덕과 산 햇수는 무관함을 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는, 바로 성덕의 잣대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성녀 아녜스는 아가타, 세실리아, 루치아와 함께 로마의 4대 순교 성녀에 속합니다.

 

아녜스는 ‘순결’ 또는 ‘양’을 뜻합니다.

성녀는 발치에 양을 데리고 있거나 팔에 양을 안고 있는 여인으로 그려지지만, 때로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거나 긴 머리칼로 온몸을 덮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성녀 아녜스는 처녀, 약혼한 남녀, 정원사의 수호성녀입니다.

성녀 아녜스의 미모에 반한 로마 총독의 아들이 청혼했을 때의 성녀의 전설적 답변 내용을 소개합니다.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서약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은 고결하고 훌륭한 혈통의 자손입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동정녀이시고, 그분은 천사들의 시중을 받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결국 배교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하다 참수형의 순교를 맞이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순교요 새삼 순교는 주님 성체와의 결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꽃같은 사랑의 성녀 아녜스는 물론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사랑하는 아녜스 자매님들께 

제 좋아하는 두 시를 헌정하고 싶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하루를 살더라도 꽃같은 하루, ‘파스카의 꽃’같은 사랑으로 살면 참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간혹 꽃을 가져오는 꽃보다 더 예쁜 영혼의 자매들에게 선사하는 덕담같은 시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말마디는 제 세 번째 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책 1면에 소개된 글을 인용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온몸은 사랑하라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주님과 가족,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모두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은 사실에 격렬히 항의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자 바리사이들의 사랑부재를 반영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배고픈 구체적 인간 현실을 도외시하고 인정머리없이 안식일법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님은 즉시 바리사이들 역시 존경하는 구약의 다윗의 예를 듭니다.

우리가 여기서 비교할 것은 예수님과 바리사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입니다.

 

두분은 공통점은 참으로 자유로운 처신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고 일행들에게도 준 사실을 예로듭니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사랑을 너무 잘 알았기에, 또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너무나 받고 있음을 알았기에 이처럼 다윗의 자신있는 자유로운 처신입니다.

 

이것은 일상에서도 자주 목격하는 사랑의 진리입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참사랑으로 자녀를 키운 이들의 자녀들의 당당하고 자유로운, 자존감 높은,

정체성 또렷한 처신에서도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사랑 많이 받은 이들이 사랑할 줄도 알고 또 사랑도 많이 받습니다.

성장과정중 부모로 부터의 사랑결핍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 위축되고 아파해 하며

허기를 느끼며 춥게 지내는 지요!  

 

예수님은 다윗 이상으로, 세상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온몸에 받고 있음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사랑에 정통해 있었기에, 그리도 당당하고 의연하며 자신감 넘치는, 자유로운 처신입니다.

사랑 많이 받고 사랑 많이 할수록 정체성 또렷하고 자존감 높은 참나의 실현이요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자유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아오스팅 성인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반영이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음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기에,

하느님 사랑을 그대로 반영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유일한 법은 다음 사랑의 계명,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3,34)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법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자 사랑이요, 최종적인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신 주 예수님이라 고백하고, 2025년 희년에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신

주 예수님이라 고백하며 희망의 순례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고백이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합니다.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여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우리의 사랑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올바른 분별의 지혜와 사랑을 발휘하며 자유롭게 살게 하십니다.

역시 아녜스 성녀의 고백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갈망하던 거룩하신 성부여,

 당신께 나아 가나이다."(성모의 노래 후렴). 아멘.


1/22(수) [(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체적인 혈통이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조재형 신부)

 

2.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세상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어야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어깨를 감싸며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이런 안식의 참 의미를 살게 합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뻗어라.”

(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여러 아녜스 자매들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아녜스는 ‘순결’ 또는 ‘양’을 뜻합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고작 13세에 순교한 성녀입니다.

성덕과 산 햇수는 무관함을 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는, 바로 성덕의 잣대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성녀 아녜스는 아가타, 세실리아, 루치아와 함께 로마의 4대 순교 성녀에 속합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자유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아오스팅 성인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반영이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이수철 신부)

 

1/22(수) [(녹)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제22일차 기도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뻗어라.”

(마르 3,5)

 

주님!

주고받을 줄 아는 복된 손이 되게 하소서!

주고 싶은 것만 주고 받고 싶은 것만 받는 손이 아니라

주고 싶지 않아도 주고, 받고 싶지 않아도 받는 손이 되게 하소서!

선악과를 움켜쥔 탐욕과 불순명의 손이 아니라

못과 창을 받아들인 사랑과 신뢰의 손이 되게 하소서!

손을 뻗어 당신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들이고 움켜쥔 것을 나누어주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22일(수) 6시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