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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21일 화요일[(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21일 화요일[(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아녜스 성녀는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초반 로마의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열네 살 무렵의 어린 나이에 순교하였다. 성녀는 청혼을 거절한 것에 앙심을 품은 자의 고발로 신자임이 드러났으나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 준 그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하였다. 교회는 아녜스 성녀를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증언하고자 정결을 지킨 순교자로 기억한다. 성녀는 한 마리 양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표현된다.

입당송

보라, 이제 순결한 예물, 정결한 희생 제물인 용감한 동정녀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양을 따른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세상의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이들을 선택하셨으니
복된 순교자 아녜스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저희가 한결같은 그의 믿음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희망은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합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6,10-20
형제 여러분, 10 하느님은 불의한 분이 아니시므로,
여러분이 성도들에게 봉사하였고 지금도 봉사하면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보여 준 행위와 사랑을 잊지 않으십니다.
11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2 그리하여 게으른 사람이 되지 말고,
약속된 것을 믿음과 인내로 상속받는 이들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13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
당신보다 높은 분이 없어 그러한 분을 두고 맹세하실 수 없었으므로,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하시면서,
14 “정녕코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너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5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끈기 있게 기다린 끝에 약속된 것을 받았습니다.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모든 논쟁을 그치게 하는 보증이 됩니다.
1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상속받을 이들에게
당신의 뜻이 변하지 않음을 더욱 분명히 보여 주시려고,
맹세로 보장해 주셨습니다.
18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에 관하여
거짓말을 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가지로,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19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0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1(110),1ㄴㄷㄹ-2.4-5.9와 10ㄷ(◎ 5ㄴ 참조)
◎ 주님은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신다. ◎
○ 당신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시고, 당신 계약을 영원히 세우셨네. 그 이름 거룩하고 경외로우시다. 주님 찬양 영원히 이어지네. ◎

복음 환호송

에페 1,17-18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3-28
2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24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26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28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26-31)와 복음(마태 13,44-46)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일찍이 박해와 싸워 이긴 복된 아녜스의 생명을
제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듯이
그를 기리며 드리는 이 예물도 어여삐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묵시 7,17 참조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그들을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 주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성인들 가운데 복된 아녜스에게
동정과 순교의 두 월계관을 함께 씌워 주셨으니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모든 악을 용감히 이겨 내고
마침내 천상 영광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녀 아녜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가지 덕목, 희망과 믿음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과 더욱 깊이 연결되게 합니다. 희망은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기다리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절망에서 구해내며,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빛을 보게 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낙관적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향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계획을 믿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이정표와 비슷합니다. 희망은 목표와 비슷합니다. 저의 희망은 교사나 군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되었지만, 저의 희망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제의를 입습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믿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해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 이루어지는 겁니다. 믿음은 희망이라는 이정표를 따라서 대상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믿음은 다분히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믿고, 자녀를 믿습니다. 37년 전입니다. 저는 약속 시간을 깜빡 잊고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저를 믿어 주었던 친구는 어두운 다방 구석에서 저를 6시간씩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도착하니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올 줄 알았어요!’ 저를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기다려 주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다르지만, 깊은 조화를 이룹니다. 희망은 미래를 향한 기대이며, 믿음은 지금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주고, 믿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그분은 희망과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믿으며, 부활의 희망을 품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우리가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완벽한 모범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계신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연대하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희망과 믿음은 우리 신앙의 두 기둥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은 우리가 그 구원 안에 살아가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희망과 믿음은 사랑의 두 날개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고 믿음을 실천하며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온전히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복음마르 2,23-28

 

사람이 우선입니다!

 

농어촌 마을에서 살다 보니, 농촌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열악한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재배되고 있는 효자 농작물들이 있습니다. 쌀, 보리, 옥수수, 고추, 마늘, 양파, 고구마,

감자, 사과, 감, 배...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이 있었는데,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 천년전 부터 곡식을 경작해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 23,26)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 두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 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마르 2,24)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

(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

(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마르 2,27)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저희에게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20.연중 제2주간 월요일                                                            히브5,1-10 마르2,18-22

                                                                    분별의 잣대

                                                               “사랑 또는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단식논쟁-새것과 헌것”입니다.

저는 논쟁은 가급적 삼가며 괄호안에 넣고 침묵하는 편입니다.

이보다 시급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을뿐 아니라 사실 논쟁은 결론이 없음은 물론

분열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요 서로의 관계도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면 떠오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수십년전 일화이고 수차례 인용했지만 지금도 생생합니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났던 장상으로 기억합니다.

“밥안먹고 교만한 것보다는 밥먹고 겸손한게 낫다”라는 지극히 평범단순한 언급입니다.

단식하고 남판단하는 교만보다는 단식 않고 남판단하지 않는 겸손이 낫다는 것입니다. 

수행하다 보면 비교와 더불어 판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침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구원의 잣대는 단식이나 침묵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 모든 수행 덕목은 상대화 됩니다.

침묵이 대부분인 독거 노인 경우 같은 경우는 침묵보다는 말해야 하고, 가난이 일상화된 이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합니다.

많이 먹고 많이 말하는 편에 속한 사람이 유념하여 실천해야할 단식과 침묵입니다.

 

그러나 영성생활에 단식이나 침묵이 유익한 것은 분명합니다.

수행의 원칙은 자발적 사랑입니다.

단식을, 침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발적 사랑으로 수행할 때 진정 자유로울 수 있으며 남판단하지 않은 겸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단식은 인간의 법이나 사랑의 환대는 신적 법이기에 단식에 우선하는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랑 때문에 단식도 일단 보류하는 것입니다.

단식의 대원칙은 이미 주님이 분명히 밝혔습니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의 대원칙입니다.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이 겸손하고 지혜로워 이처럼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하느님만이

아는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처럼 단식하지 않느냐?”

질문하는 사람들은 바로 무지의 반영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단식이 아니라 사랑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단식은 상대적이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기쁘게 지내야 할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고 나머지는 축제인생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수행은 결코 경쟁 대상이 아닌 자발적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하며 사랑의 잣대로 분별되어야 합니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사랑의 잣대로 분별해야 할 함을 주님은 한마디로 정리해 주십니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의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으로 늘 새포도주의 현실 내용을 담아내야할 새부대의 마음을, 사고를,

의식을 지니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마음을 분별의 잣대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했을까?” 생각하며 끊임없이 내 이해지평을, 사고지평을,

마음을 넓히고 깊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분별의 잣대는 사랑 또는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분별의 잣대로 삼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히브리서가 위대한 대사제 예수님의 정체를 명쾌하게 밝혀 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대사제다.”

 

하느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신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순종을, 겸손을, 비움을 배우는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는다면 날로 구원의 근원인, 예수님을 닮게 되고 진정 분별의 잣대인

지혜와 사랑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똑똑하고 착하다’라는 말보다는 ‘지혜롭고 자비롭다’라는 표현이 예수님께 적절하고

이런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의 현현인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1/21(화)[(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희망과 믿음은 우리 신앙의 두 기둥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은 우리가 그 구원 안에 살아가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희망과 믿음은 사랑의 두 날개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고 믿음을 실천하며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온전히 봉헌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저희에게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의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으로 늘 새포도주의 현실 내용을 담아내야할 새부대의 마음을, 사고를,

의식을 지니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마음을 분별의 잣대로 삼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1/21(화)[(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21일차 기도

 

복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르 2,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저희에게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21일(화) 7시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