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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23일 목요일[(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23일 목요일[(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66(65),4 참조
하느님,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을 노래하게 하소서. 지극히 높으신 분,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하늘과 땅을 다스리시니
저희 기도를 인자로이 들으시어
이 시대에 하느님의 평화를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한 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7,25―8,6
형제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25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26 사실 우리는 이와 같은 대사제가 필요하였습니다.
거룩하시고 순수하시고 순결하시고 죄인들과 떨어져 계시며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십니다.
27 그분께서는 다른 대사제들처럼 날마다 먼저 자기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치고
그다음으로 백성의 죄 때문에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으십니다.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에 이 일을 단 한 번에 다 이루신 것입니다.
28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8,1 지금 하는 말의 요점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대사제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시어,
2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세우신 성소와 참성막에서
직무를 수행하시는 분이십니다.
3 모든 대사제는 예물과 제물을 바치도록 임명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대사제도 무엇인가 바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4 만일 그분께서 세상에 계시면 사제가 되지 못하십니다.
율법에 따라 예물을 바치는 사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5 모세가 성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지시를 받은 대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성소의 모상이며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성소에서 봉직합니다.
하느님께서 “자, 내가 이 산에서 너에게 보여 준 모형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6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0(39),7-8ㄱㄴ.8ㄷ-9.10.17(◎ 8ㄴ과 9ㄱ 참조)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두루마리에 저의 일이 적혀 있나이다. 주 하느님, 저는 당신 뜻 즐겨 이루나이다. 당신 가르침 제 가슴속에 새겨져 있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 당신을 찾는 이는 모두, 당신 안에서 기뻐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구원을 열망하는 이는 언제나 외치게 하소서. “주님은 위대하시다.”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7-12
그때에 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8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9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10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11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1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념하여 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저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오니
이 거룩한 신비를 정성껏 거행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23(22),5 참조
주님이 제게 상을 차려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고 또 믿게 되었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함께 나누고 비오니
사랑의 성령을 부어 주시어
그 사랑으로 한마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시는 예수님.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지난 12 31일입니다. 본당에서는 송년 미사를 준비했습니다. 2024년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새로운 한 해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미사를 마친 후에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던 본당의 행사를 정리해서 영상으로 보여드렸습니다. 전임 신부님의 송별 미사와 후임 신부의 환영 미사가 있었습니다. 부활절, 견진성사가 있었습니다. 성모의 밤, 청소년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의 캠프와 피정이 있었습니다. 27기 사목회의 임명장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26기 사목회 임원들에게 감사장을 드렸습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찬양의 밤이 있었습니다. 대건회 어르신들의 야유회가 있었습니다. 꾸르실료 봉사자들의 소풍이 있었습니다. 본당의 날 행사가 있었습니다. 걷기 대회가 있었습니다. 자선 음악회가 있었습니다. 성탄 미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2024년을 보내고, 우리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셨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연민의 마음이 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으로 병자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열병을 앓고 있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자비를 청하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이웃들이 지붕을 뚫고서 데려온 중풍 병자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10명의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예수님 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권위로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2025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외모나 언변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그가 입은 제의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사제가 아름답다면 사제가 사제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제의 아름다움은 복음을 전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병자를 위로하면서 시작됩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금도 없고, 은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야기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베드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십니다.” 교회를 박해했지만, 회개했던 바오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사제들이 있습니다.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 땀의 순교로 신앙을 증거했던 최양업 토마스 사제는 아름다운 사제입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명예, 권력, 재물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자의 아름다움은 신앙생활의 연륜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신자가 아름답다면 신자의 직분을 충실히 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보면 아름다운 신앙인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은 아름답습니다. 재산의 반을 나누어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던 자캐오는 아름답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갔던 사마리아 사람은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믿음을 보여 주었던 백인대장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바르고 예수님의 발을 씻어 드린 여인은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꽃동네의 시작이 되었던 최귀동 할아버지는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요셉의원을 시작한 선우경식 원장님도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화려한 건물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가 아름다운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신앙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율법은 약점을 지닌 사람들을 대사제로 세우지만, 율법 다음에 이루어진 맹세의 그 말씀은 영원히 완전하게 되신 아드님을 대사제로 세웁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 우리의 삶이 아름다움으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신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복음마르 3,7-12

 

우리 교회는 힘겹게 살아가는 양들에게 위로와 기쁨과 희망을 주고 있는지?

 

피정 오신 자매님들 통해서 요즘 대세인 몇몇 트로트 가수들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가수들께서 이런저런 고통과 상처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신다니, 참으로 감사한 동시에 부끄러움도 느낍니다.

교회가 주지 못하는 위로와 기쁨을 그분들이 대신 주고 계시니...

 

막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묵상해보니, 요즘 대세 트로트 가수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셨습니다.

요즘 봉독되는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 공동체의 신명나는 활약상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구세사의 주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군중들은 크게 환호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자체로 위로요 구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유다 지방 사람들뿐만 아니 예루살렘 도시 사람들, 이두매아 사람들, 요르단 강 건너편 사람들,

북서쪽에 위치한 티로와 시돈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군중이 한꺼번에 밀려들었습니다.

군중의 특징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례가 올 것인데, 조금이라도 빨리 치유의 은혜를 입고자 새치기를 하고,

뒤에서 밀고 난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전장치 겸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십니다.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구해보라고 이르십니다.

거룻배에 타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밀어 육지에서 약간 떨어트려 놓으십니다.

그리고 분위기를 좀 가라앉힌 상태에서 차분하게 말씀을 선포하시고 치유 활동을 재개하십니다.

 

군중이 예수님께로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은총을 입기 위해서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와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겸손하신 하느님, 우리 인간을 향한 극진한 사랑과 자비의 표현인

예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통수단이라고는 특별히 없었던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먼 길을 걸어서 왔습니다.

먼 길을 걸어오느라 무척이나 지쳤을 것입니다.

목마르고 굶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로지 예수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새 세상을 열어주실 메시아의 말씀을 듣겠다는 목적으로

그 먼 길을 거의 달려오다시피 했습니다.

 

교회를 찾는 우리의 발걸음이 그들처럼 가벼웠으면 좋겠습니다.

미사참례 차 성당을 찾는 우리들의 마음이 그들처럼 설레었으면 좋겠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축제에라도 가듯이,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듯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듯 그렇게 사람들이 교회로 오길 바랍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구성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기차고 신명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교회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그 옛날 초기 교회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지친 성직자·수도자들은 상습 피로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비명 속에 양떼들 사이에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세상 사람들은 남녀노소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시원한 구원의 청량음료를

원 없이 마시고 있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예수님은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들은 이들이 온 유다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곳에서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십니다. 

그들이 치유를 받고자 몰려왔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악령들은 예수님을 보기만 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마르 3,11)라고 외쳐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습니다.

사실 <마르코복음> 곳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에게 뿐만 아니라, 치유 받은 이들과 제자들에게도 함구령을 내리시며 당신의 신원을 장막으로 가리십니다. 
왜일까요?

 

당신이 메시아임을 세상에 드높이 선포해야 함이 마땅할 터인데도, 왜 당신의 신원을 꼭꼭 감추실까요?

심지어는 당신의 가르침마저도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2)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 야훼 하느님께서도 파라오를 마음이 완고하게 하셨고, 그것은 주 야훼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하심이었습니다. 

대체 왜 이처럼 당신의 신원을 알리지 못하게 할까요? 

그것은 ‘때’가 아닌 까닭이었습니다. 

곧 당신의 참된 모습이 드러날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어, 아직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르코 복음>은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마르 1,1)이라는 말로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진실한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곳은 엄밀한 의미에서 딱 한 군데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그곳’에서 비로소 예수님께서 함구령을 내린 그 신원이 밝혀질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때’ 입니다. 

그때, 마침내 십자가 아래에서 백인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십자가’를 관상할 때라야 신앙의 눈이 열리고, 비로소 당신을 참되게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면서, 그 비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곧 성전을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지듯, 우리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의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알고 바라고 믿고 있는 하느님이 부서지고서야, 곧 자신이 온전히 비워지고서야, 자신을 온전히 사랑으로 내어주신 그분을 보고서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보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진면목(참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제야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 미사 중에 ‘휘장’이 찢어지듯 찢어진 그분의 살과 피를 마시며, 그 사랑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 우리 주님을 관상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22.연중 제2주간 수요일                                                               히브7,1-3.15-17 마르3,1-6

                                                             사랑의 법

                                                  “예수님은 분별의 잣대”

 

사랑하기에도, 기도하기에도, 공부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인생입니다.

아깝게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때로는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안남은 인생휴가인데 새삼 무슨 휴가인가 하는 생각에 휴가를 접은지 수십년이 지났습니다. 

내 인생 마치는 날 천상병 시인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먼저다”, 옛 대선 후보의 모토가 생각납니다.

어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람이, 사랑이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람을, 사랑을 중심에 놓고 보면 결론은 단순명쾌하게 나옵니다.

전혀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대한 분별의 잣대임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처신했는가?

생각하면 역시 답은 자명해집니다.

안식일뿐 아니라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분별의 잣대 예수님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슷한 사례가 이어집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주변의 경계하는 시선에 아랑곳 없이 그 고유의 자유로운 처신으로 두려움없이 용기있게

한쪽 손이 오그라든 불쌍한 사람을 주시하며 말씀하시니 첫눈에 들어온 불구의 사람입니다.

 

“일어나 가운데로 서라.”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좌절과 자존감의 상실로 위축된 모든 이들이 그 악순환의 사슬을 끊고 분연히 일어나 예수님 앞에,

삶의 중심 자리에 서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늘 화두처럼 마음에 담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이어 주님은 바리사이들에게 양자택일의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선이나 악이냐?

살림이냐 죽임이냐?

선택해야 하고 답은 이미 제기하는 물음 안에 있습니다.

 

양비론이 들어설 여지가 없습니다.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교황님 말씀도, ‘선을 행하라’ 무수히 말하는 시편도 연상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부터 불순했고, 상식도 양심도 오염되어 있어 올바른 분별을 못합니다.

비열하고 비겁하며 애당초 정직성과 성실성이 결여되어 있으니 말그대로 인간실격입니다.

 

이들은 묵묵부답 입을 열지 않았고, 주님은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 보시며,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몹시 슬퍼하십니다.

정말 완고한 마음 역시 마음의 중병입니다.

그동안 무수히 들어 온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시편 말씀도 생각납니다. 

 

수행의 노력을 게을리하면 세월 흘러가면서 마음은 절로 편협해 지고 굳어지고 쪼그라들기 마련입니다.

주님께는 사람이, 사랑이 먼저입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즉각적인 사랑의 명령입니다.

 

“손을 뻗어라.”

 

이또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흡사 “마음을 뻗어라,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마음역시 오그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집니다. 손과 더불어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져 심신이 치유되었을

불구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실정법을 초월하는 두 가지 원칙을 배웁니다.

더 큰 선이 거부되지 않는 한, 선을 행하는 것은 항상 정당화 된다는 것이며, 진실로 사랑에 찬 행동은

비록 법을 위반하더라도 결코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법앞에 모든 법은 상대화됩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사랑이 아닌 안식일법이 절대화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 역시 절대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사랑의 법에 따라 주일을 못지킬 수도 있는 것이니, 새삼 사랑이, 예수님 마음이

최종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마음에 정통해 있었듯이, 예수님 마음에 정통해 있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3,2)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의 빛이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밝힙니다.

새삼 사랑밖에 길이 없음을, 답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어제에 이어 착한목자 예수님의 진면목이 잘 드러납니다.

둘이자 하나인 ‘착한목자’이자 ‘대사제’가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입니다. 히브리서가 시편110장 4절은 근거로 옳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너는 멜키세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예수님처럼 ‘목자’이자 ‘사제’로서의 둘이자 하나인

신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목자직의 영성과 사제직의 영성을,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배우며 살게 하십니다. 아멘.

 


1/23(목)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교회의 아름다움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당신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아름다움은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서 부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 우리의 삶이 아름다움으로 채워지면 좋겠습니다. 아름다움을 원하신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면 됩니다. 그런 아름다움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예수님을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구성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활기차고 신명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우리 교회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그 옛날 초기 교회처럼, 오늘 우리 교회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오늘 우리 교회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까?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지친 성직자·수도자들은 상습 피로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비명 속에 양떼들 사이에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굶주린 세상 사람들은 남녀노소 그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시원한 구원의 청량음료를

원 없이 마시고 있습니까?(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손을 뻗어라.”

 

이또한 마음이 오그라든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흡사 “마음을 뻗어라, 마음을 활짝 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마음역시 오그라들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해집니다. 손과 더불어 오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져 심신이 치유되었을

불구자입니다.(이수철 신부)

 

1/23(목) [(녹)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제23일차 기도

 

복음 <더러운 영들은“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소리 질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이르셨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마르 3,12)

 

주님!

저의 무지를 깨우쳐주소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신앙의 눈을 열어주소서.

완고함의 장막을 부수소서.

당신 십자가에 저를 매달고 사랑으로 살게 하소서.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당신의 신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23일(목) 7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