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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25일 토요일[(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25일 토요일[(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바오로 사도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철저히 교육받은 유다인이었다.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그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극적으로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열정적인 사도가 되었다. 8세기부터 거행하여 온 이 축일은 10세기 말 로마 전례력에 들어왔다. 교회는 회심 없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일치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일치 주간’의 마지막 날로 정하였다.

입당송

2티모 1,12; 4,8 참조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맡은 것을 의로운 심판관이 마지막 날까지 지켜 주시리라고 확신하노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를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으니
오늘 그의 회심을 경축하는 저희가
그의 모범을 따라 진리의 증인이 되고
언제나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일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2,3-16
그 무렵 바오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 “나는 유다 사람입니다.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서 태어났지만 이 도성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 전래의 엄격한 율법에 따라 교육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모두 그렇듯이
나도 하느님을 열성으로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4 또 신자들을 죽일 작정으로 이 새로운 길을 박해하여,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포박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5 대사제와 온 원로단도 나에 관하여 증언해 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서 동포들에게 가는 서한까지 받아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와
처벌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내가 길을 떠나 정오쯤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내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7 나는 바닥에 엎어졌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나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8 내가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자,
그분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9 나와 함께 있던 이들은 빛은 보았지만,
나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소리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10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님께서 나에게 이르셨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들어가거라.
장차 네가 하도록 결정되어 있는 모든 일에 관하여
거기에서 누가 너에게 일러 줄 것이다.’
11 나는 그 눈부신 빛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
나와 함께 가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
12 거기에는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따라 사는 독실한 사람으로,
그곳에 사는 모든 유다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3 그가 나를 찾아와 앞에 서서,
‘사울 형제, 눈을 뜨십시오.’ 하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그 순간 나는 눈을 뜨고 그를 보게 되었습니다.
14 그때에 하나니아스가 말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15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16 그러니 이제 무엇을 망설입니까?
일어나 그분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며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9,1-22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21 그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놀라며,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자들을 짓밟은 자가 아닌가?
또 바로 그런 자들을 결박하여 수석 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22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차게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증명하여,
다마스쿠스에 사는 유다인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7(116),1.2ㄱㄴ(◎ 마르 16,15 참조)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겨레들아. ◎
○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5,1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5-18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15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17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18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바오로 사도를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주님의 영광을 널리 전하게 하셨으니
이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저희의 믿음도 성령의 빛으로 밝혀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갈라 2,20 참조
나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노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 하느님,
복된 바오로 사도가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교회를 돌보게 하셨으니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 마음에도 그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사도 성 바오로의 회심.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바오로 사도 회심 축일

 

미국에서 사제가 된 신부님이 이런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신학생 때 교구장님과 대화할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이 교구장님께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주교님, 신학교의 규칙을 완화하면 더 많은 신학생이 사제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주교님께서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교구장님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열 사람의 불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병들게 합니다. 열 사람의 교만한 사제는 공동체에 깊은 상처를 줍니다. 열 사람의 욕심 많은 사제는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의 불성실과 교만 그리고 욕심을 비난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본받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성실한 사제는 교회를 성장시킵니다. 한 사람의 겸손한 사제는 공동체에 큰 위로를 줍니다. 한 사람의 청빈한 사제는 교회를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합니다.” 그러자 신학생은 규칙을 잘 지키는 신학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업에서도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여러 상품이 아닙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특정한 상품이 매출을 선도합니다.

 

사목자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완벽한 카리스마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사목자입니다. 열정이 있고, 아는 것이 많고, 능력이 뛰어난 사목자입니다. 신자들은 그런 사목자를 만나면 뛰어난 선장을 만난 것처럼 편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그런 사목자와 함께하면 신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비전은 있지만 모든 것을 함께 상의하는 사목자입니다. 일의 진행이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신자들이 함께 참여하며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과 함께하고 역할을 분담하기에 사제는 쉽게 지치지 않고, 기도하는 시간을 더 가질 수 있습니다. 함께 하기에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에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의존형의 사목자입니다. 선장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사목자입니다. 책임은 지지 않지만, 성과도 얻기 힘이 듭니다. 좋은 협력자를 만나면 좋지만, 의견이 갈리면 공동체가 갈등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목자는 외로운 등대처럼 때론 고독과 고통을 감수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파수꾼은 홀로 깨어서 공동체를 보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모든 것을 자신이 주도하려 하는 신앙인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의견을 잘 듣지 않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과정의 중요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일의 성과를 먼저 생각합니다. 결단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지만 자칫 주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둘째는 비전은 있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끝까지 청취하는 신앙인입니다. 이런 분들이 레지오를 하면 단원이 늘어나고, 늘어나는 단원 때문에 프레시디움을 나누기도 합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싱싱한 것처럼 주변에 늘 사람이 함께합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하는 것의 소중함을 먼저 생각합니다.

셋째는 비판적인 신앙인입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잘 보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허물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편입니다. 본당 단합대회를 산으로 가자고 하면 바다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바다로 가자고 하면 산으로 가자고 하는 편입니다. 많은 사람의 의견으로 결정된 것에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별도로 지내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으로 이루어진 그의 회심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바오로 사도는 많은 이방인의 눈을 뜨게 하여 그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하느님께 돌아서게 하였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바오로 사도의 열정과 헌신은 사도행전과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과 재물에 대한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나태함과 교만을 끊어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 대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복음마르 16,15-18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

바오로 사도의 신앙 여정은 정말이지 극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원래 유다인 중의 유다인이었으며 바리사이 중의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다교 측에서보면 전도양양한 청년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그가 주님께서 낚아채십니다.

그 과정도 정말이지 놀랍습니다.

그날도 다마스쿠스란 도시에 그리스도교인들이 비밀집회를 지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분기탱천한 그는 그들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의 애마(愛馬)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정신없이 말달리던 어느 순간 그는 갑작스런 몸의 이상증세를 느끼며 낙마(落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강골이었던 그는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체험과 동시에

두 눈이 멀어버리게 됩니다.

갑작스런 인생의 밑바닥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실체와

대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생일대의 전환점, 다시 말해서 회심의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사실 ‘바오로’라는 이름의 뜻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당시 하층민들이나 종들이 애용하던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원래 이름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크고 위대한 사람’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가에서나 사용되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위풍당당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한 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스스로를 귀족, 잘 나가던 사람으로 여겼던 사울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티끌이요, 종이요, 작은 자, 무(無)였구나.” 하고 깨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의미의 바오로로 바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서간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대충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였습니다.

스포츠에 무척이나 심취해 있었습니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라면 답답해 미칠 정도로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코린토 1서에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1코린 9,26-27)

그리고 어느 날 노인이 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7-8)

뿐만 아니라 회심한 이후에도 복음 선포자로서만이 아니라 천막을 만드는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삶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졌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투잡’을 한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를 일컬어 학자들은 ‘백 개의 팔을 지닌 사람’이라는 별명까지 붙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대목이 한 가지 있습니다.

한때 혈기왕성한 촉망받는 유대교 젊은이로서 율법을 준수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일에

선봉장 역할에 충실했던 그였습니다.

삶의 모든 에너지를 주님을 박해하는 데 앞장섰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마 이후 일련의 회심과 쇄신의 과정을 거친 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말을 갈아탑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이런 고백에 도달하게 됩니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필리 3,8)

오늘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그 거룩한 삶의 전환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시킬 것인가 한번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에너지를 주로 어디에다 집중시키는지 반성해볼 일입니다.

혹시라도 언젠가 모두 썩어 없어질 유한한 육체에만 모두 투자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재미거리만 찾아다니는 것은 아닌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 삶을 주님의 뜻에 걸맞게 재구성하는 영적인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소명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세 번 반복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비그리스도인 유대인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유대 군중에게 자신의 소명을 밝히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을 맹렬히 박해하던 자신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교사가 되었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먼저 자신이 유대인이며 바리사이의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 대한 열성으로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골수분자였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을 언급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자렛 예수님과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음을 말합니다. 

곧 다마스쿠스로 인도되어 하나니아스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때 하나니아스는 바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선택하시어, 그분의 뜻을 깨닫고, 의로우신 분을 뵙고, 또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사도 22,14-15)

이 말 속에는 신앙생활의 원리가 세 가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선택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곧 바오로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선택한 바람에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회개했기에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으로 우리는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먼저 찾아오심, 먼저 베푸신 사랑을 말해줍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깨닫고, 그분을 뵙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깨닫게 해주시고, 당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당신께서 깨우쳐 주시기에 깨달을 수 있고,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시기에 들을 수 있고, 당신을 보여주시기에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고, 신앙을 주십니다. 

세 번째는 '보고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는 그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신원은 파견하신 분에게 속한 이이며, 우리의 사명은 파견하신 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심이란 단순히 죄에서 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된 부르심을 찾는 일’입니다.

곧 ‘참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있어야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성인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르심이 하느님한테서 온 것이라고 느끼고 전적으로 응답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엘스버그,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성인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24.금요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 기념일

                                                                                                           히브8,6-13 마르3,13-19                                                                       

                                                           믿는 이들의 신원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오늘 복음을 통해 믿는 이들의 신원이 잘 들어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시는 내용입니다.

 

우선 배경은 산입니다.

상징적으로 산은 살아계신 하느님과 만나는 장소입니다.

불암산을 배경한 요셉수도원을 제가 늘 자랑스러워하는 까닭입니다. 

날마다 늘 불암산 앞에 설 때 마다 저절로 솟아나는, 자주 인용해도 늘 정답게 느껴지는 사랑의 고백,

행복의 고백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오늘 복음 첫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의 신원 및 성소, 믿는 이들의 공동체 성격이 잘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성소의 주도권은 순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는 사람들을 가까이 부르시어, 당신 중심의 공동체를 설립합니다.

안으로는 당신과 함께 지내는 주님의 제자들이요, 밖으로는 파견되어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는 주님의 사도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 예나 이제나 주님의 공동체에 속한 이들의 둘이자

하나의 신원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사도답게 사는 일이 우선적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뽑힌 열둘의 면면도 참 다양합니다.

역시 공동체의 다양성의 일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했을 때만이 가능함을 봅니다. 

 

성소의 신비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어 뽑으신 제자들이자 사도들이니 우리가 왈가불가 할 수 없음은

오늘날 주님의 공동체에 속하는 우리 성 요셉 수도공동체만 봐도 자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셨는데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의 존재도 참 불가사의입니다.

 

새삼 성소의 은총도 본인이 끝까지 가꾸고 돌봐야 하는 노력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배반자 유다는 반면교사처럼 성소자들에게 끊임없이 경각심을 주는 상징적 존재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이들은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 속하여 주님의 제자답게,

주님의 사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평생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기도하고 공부하는 제자요,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면서

사도로서의 삶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영원한 현역의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우리의 자랑스런 신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열두 사도들 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레미야를 통한 예언이 마침내 새계약의 중개자 대사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새계약이 실현됨을 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세워진 더 나은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들의 생각 속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주님과의 새계약의 실현을 날마다 실감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끊임없이 주님은 우리의 생각속에 당신의 법을 넣어주고 우리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어

주님과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하시니 더욱 주님의 제자다운, 주님의 사도다운 삶이겠습니다.

저절로 시편을 고백하게 되니 열두제자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편 성구(40,9)입니다.

 

“내 주여, 내 기쁨은 당신 뜻을 따름이오니,

 내 맘속에 당신 법이 새겨져 있나이다.”

(O my God! my delight is to do your will,

 and your law is within my heart)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55세 생애요, 저는 성인보다 21년을 더 산 셈이니 더욱 분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칼빈파가 득세했던 제네바의 주교가 되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책임을 다했던 성인입니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더불어 인문학 및 신학지식이 풍부했으며, 온화하고 점잖은 성품을 지녀 성별과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예의를 갖춤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

그리고 곤경에 처한 여성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훗날 “신사성인”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영적지도와 형성에 관한 대표적 저술에는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이 있습니다.

성인은 제네바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외교사절로 로마와 파리를 오가며 교황 클레멘스 8세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간의 동맹을 맺도록 주선할 때 앙리 4세의 성인에 대한 평입니다.

 

“제네바에서 오신 이분은 독실하고 학식을 갖춘 분입니다.

독실할뿐 아니라 신사 그 자체입니다. 매우 드문 조합입니다.”

 

또 하나 그가 겪은 결정적 체험입니다.

그가 에비앙에 있을 때 살레시오 눈 앞에 갑자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 말합니다.

 

“내가 한때 순교를 갈망했던 것처럼, 그대도 순교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허나 나처럼 그대도 순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 자신만의 순교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을 겪은후 더욱 독실한 삶을 실천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선량한 친구, 강한 인내심과 온화한 성품, 해박한 지식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탁월한 강론 능력으로 명성을 떨칩니다.

 

성인은 영적동반자인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 함께 1610년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를

안시에 설립하기도 합니다.

1622년 12월28일 뇌졸중으로 쓰러진후 마지막으로 “저는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두었고,

주님께선 제 염원을 들어주어 저를 고통의 구렁텅이와 죄악의 늪으로부터 꺼내 주실 것입니다.”고백후

갑자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임종을 맞이합니다. 

 

이어 살레시오는 1661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복되고 3년후 시성되며, 1877년 교황 복자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언되고,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와 기자,

청각장애인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후대에 더욱 평가받는 성인입니다.

성인에 대한 평과 어록도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드문 영성”<앙리4세>

“사부아의 보석”<교황 바오로 6세>

“하느님의 사랑을 잘 아는 박사”<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위대한 스승”<교황 베네딕도 16세>

“그의 융통성과 선견지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교황 프란치스코>

 

성인의 어록입니다.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인내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애가 강하면 더욱 상처를 받습니다.”

“분노는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미움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지 말고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성찰해야 함에도 섣불리 남을 판단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행위입니다.

판단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오락에 빠지지 마십시오. 아무리 건전한 놀이라도 그것에 애착하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질투는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불신과 부정이 개입되기 쉽습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대서 생기는 반면에 질투는 그 사람을 불신하는 데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판단하므로, 우리가 그 비위를 맞추기는 불가능합니다.”

 

모두가 금과옥조의 조언으로 주님의 제자다운, 사도다운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제자답게, 사도답게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1/25(토)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되새김 구절

 

1.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유혹, 높은 데서 뛰어내려 보라는 유혹, 권력에 대한 유혹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본과 재물에 대한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세상과 타협하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권력이라는 우상을 섬기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신앙인에게도 똑같이 다가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내 안에 있는 나태함과 교만을 끊어내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면서 주님께 대한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도록 청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위풍당당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낙마한 후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면서

바오로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스스로를 귀족, 잘 나가던 사람으로 여겼던 사울은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체험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아, 정말이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구나.

티끌이요, 종이요, 작은 자, 무(無)였구나.” 하고 깨우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의미의 바오로로 바꾼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55세 생애요, 저는 성인보다 21년을 더 산 셈이니 더욱 분발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칼빈파가 득세했던 제네바의 주교가 되어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책임을 다했던 성인입니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더불어 인문학 및 신학지식이 풍부했으며, 온화하고 점잖은 성품을 지녀 성별과

계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예의를 갖춤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

그리고 곤경에 처한 여성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훗날 “신사성인”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이수철 신부)

 

1/25(토) [(백)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제25일차 기도

 

복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여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걷고,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게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1월25일(토) 6시4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