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1월 27일 월요일[(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본기도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9,15.24-28
형제 여러분,
15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24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25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26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27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28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2-30
그때에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제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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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주간 월요일
1592년은 ‘임진왜란’이 시작된 해입니다. 임진왜란이 있기 전에 율곡 이이는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습니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무신정권이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는 예견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태평성대’에 십만의 군사를 모집하는 것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율곡 이이의 의견을 듣고 십만 명의 군사를 양성했다면 임진왜란은 발발하지 않았을 겁니다. 설사 임진왜란이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선을 침략하고, 명나라까지 침략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야망가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선을 침략할 만큼 야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에 통신사를 직접 보냈습니다.
그런데 통신사로 다녀온 두 사람의 의견이 달랐습니다.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黃允吉)과 김성일(金誠一)이 선조에게 보고했습니다. “황윤길은 보고하기를,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러한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했습니다. 선조가 ‘수길(히데요시)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물었습니다. 황윤길이 아뢰기를,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라고 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통신사의 의견이 같았다면 선조는 임진왜란을 대비했을 겁니다. 이때 선조가 황윤길의 의견을 들었어도 임진왜란을 대비했을 겁니다.
한국의 신학교, 성지, 수도원을 생각합니다. 아직은 젊은이가 많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젊은이는 줄고 있습니다. 원인을 알면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름대로 원인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음식이 맛있으면 사람들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교회가 잃어버린 맛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말씀’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중풍 병자, 소경, 나병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치유되었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서 떨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풍요와 발전을 위해서 마르타의 삶에 충실했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한 마리아의 기도가 부족했습니다. 가족이 모여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주한 중에도 늘 기도하셨습니다.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얻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하셨습니다. 몸을 위한 여행과 휴가도 좋지만, 영혼을 위한 피정이 필요합니다. 셋째는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인 서적을 가까이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영혼의 빈 창고에 세상의 것들이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에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욕망이 함께 했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서적과 신문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넷째는 ‘미사’입니다. 주일미사 참례 자가 줄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만찬을 하시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눠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 이는 여러분을 위해 내어 줄 내 몸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희생과 나눔의 재현입니다. 미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아야 합니다. 다섯째는 ‘나눔과 친교’입니다. 나눔과 친교가 적어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가진 걸 기꺼이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이, 과부, 고아, 병든 이, 노예, 이방인도 친교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천국을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 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3,22-30
의인들의 존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드러내는 명확한 표지입니다!
요즘 자주 듣는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평소 늘 젊잖고 예의 바르던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불리던 사람들 입에서조차
깜짝 놀랄 정도의 욕이 튀어나와 깜짝 놀란답니다.
하도 어이없는 일,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일, 그야말로 웃픈 일들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니
벌어지는 에피소드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많은분들의 생활 리듬이 깨진 관계로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습니다.
열이 받쳐 새벽 두시 세시까지 잠이 않오니, 자연스레 관련 뉴스를 지속적으로 접하고,
겨우 겨우 아침에 일어나고를 반복한답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 장본인들은 저리 실실 웃으며, 말을 돌리고, 별의 별 해괴망측한
스토리를 만들어가며 상황을 즐기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애꿎은 사람들이 받으니,
이 또한 얼마나 억울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 사탄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이란 노골적으로 하느님 반대편에 서서 인간을 악으로 빠져들게 하는 사악한 무리들입니다.
이 시국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사탄 같은 존재들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실감합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는 거짓말이 청산유수처럼 줄줄 흘러나옵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천박한지 듣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름 확고한 의지와 강한 충성심으로 무장해있지만, 그 끝이 죽음이요 멸망인지 모르고
불나방처럼 불속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이 참으로 가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라는 말이 저절로 입에서 튀어나옵니다.
하도 답답해 이렇게나마 정말이지 지극히 소극적이고 정제된 표현을 시도해보는 저를 보고 사탄의 자식,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마귀라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토록 나라 전체와 국민 전체를 사분오열 갈기갈기 찣어놓는 사탄의 무리들이
조속히 무대 뒤로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위안이 되는 측면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위기 상황 앞에서 옥석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부각되었고, 일제강점기때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등등
의인이 출몰했다는 것입니다.
이토록 참담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마냥 죽어라 죽어라 하지 않습니다.
아무 개념 없는 사람들만 윗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와중에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는 의인들이 등장합니다.
중차대한 위기 상황이 극적으로 타개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애국자들이 등장합니다.
저는 요즘 참으로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지내면서도, 이 비참한 우리나라의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제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의 양심을 건드리십니다.
용기를 내게 하십니다.
진리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사탄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루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는 의인의 삶으로 엮어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마르코 3,22-30
성체를 모독한 자에게 회개의 기회가 주어질까?
오늘 율법 학자들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듭니다.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과 악령을 구분할까요?
진짜 부모가 주는 것과 가짜가 주는 것의 차이를 알면 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평화’입니다. 그래야 자녀가 착하게 자라 세상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안’을 준다면 그것은 창조자에게서 오는 영이 아닙니다.
이것이 영을 분별하는 가장 완전한 기준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거나 마귀가 나간 존재들이 느끼는 것은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보고도 율법 학자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성령은 믿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초대’와 같습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초대장’입니다.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나,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난 별들은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성령도 그러한 표징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
성령과 같습니다. 이 초대장을 거부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 초대장의 가치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한 아들이 회개는 힘이 들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아버지의 자비를
믿고 회개를 할 수는 있었습니다. 그가 회개하기 어렵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 안에 양심이 있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그 양심은 ‘정의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게 만드는 게
양심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들어주며 음식도 흘리지 않게 먹게 되고 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여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준까지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양심 때문에 지옥에도 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에 무조건
양심이 발현하여 성장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사람들은 거짓말과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양심을 속이는 일을 종종 하게 됩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결국 하느님의 초대까지
거부하거나, 심지어 그 초대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양심상 하느님께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초대는 하느님의 피와 같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조롱하였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고 차라리 그분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하기보다는
지옥에 가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중요한 갈등 구조는 전과자 장 발장과, 법과 정의를
절대시하는 경찰관 자베르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됩니다. 장 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자비로
새 삶을 살게 되고, 자베르는 “범죄자는 결코 변할 수 없다”고 믿으며 장 발장을 악으로 단정합니다.
그러나 시가전 중 자베르가 위기에 처하자 장 발장은 복수 대신 “이 사람이 악령인지, 혹은 진정한
선인지”를 고민하던 그를 살려 주어, 오히려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자베르는 이 모순을 견디지 못합니다. “악이라고 믿었던 자가 선행을 한다면, 내가 믿어 온 법과
정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양심의 충돌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세운 절대적 틀을 무너뜨릴 자유를
얻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마르코 3,29)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악령’으로 치부하거나 거부하는 행위는
스스로 구원의 길을 막아버리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예수님의 초대를 뒤늦게 후회하면서도,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라는 절망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 것과도 닮았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용서가 찾아왔음에도 스스로를 옭아매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 자베르의 비극이며,
이는 성령을 거부하는 영혼의 파멸을 경고하는 대표적 사례가 됩니다.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국보 1호 숭례문을 방화한 사람은 다시 잘 살아 보자는 나라의 초대에
응해서 편하게 잘 살 수 있을까요? 한국 국민들이 자신을 용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어서
세상에 다시 나오더라도 자신이 움츠러들어 온전히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어떤 여성 인권 주의자는 왜 하느님이 남성이어야 하며 성체를 불로 태우고 성체에 욕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오늘 복음대로 하면 그녀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어떻게 세례를 받고 자신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한 성체를
계속 받아모실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한 번만 부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계속 당신 피의 용서로 부르십니다.
성령은 “내가 너의 부모야!”라고 하는 부모의 피가 섞인 초대장입니다.
부모를 만나는 길은 평화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여러 번의 초대를 계속 거부하는 것도
결국 그 초대가 악하다고 여기는 것이기에 나중에 양심이 하느님의 마지막 초대에 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양심을 우리 안에서 떼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양심상 되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일이 없도록 합니다.
4. 이수철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26.연중 제3주일(하느님의 말씀 주일, 해외 원조 주일)
느헤8,2-4ㄱ.5-6.8-10 1코린12,12-30 루카1,1-4;4,14-21
참 좋은 교회 공동체
“전례공동체, 한몸공동체, 해방공동체”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 드려라.
온 누리여, 주님께 노래 불러라.”(시편96.1)
너나할 것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작금의 험하고 힘든 세상입니다.
다음 두 성구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2027년 서울세계청년대회 모토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르6.30)
지난 1월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복음중 한구절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그리고 다시 시작하십시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새롭게 시작함이 바로 파스카의 삶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자 해외 원조 주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주일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19년 8월30일 성 예로니모 축일에 선언하셨습니다.
성 예로니모의 두 말씀도 생각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
“성경을 자주 읽으십시오. 그대의 손에서 거룩한 책을 절대 내려놓지 마십시오.”
오늘 방금 흥겹게 부른 시편 19장 화답송과 이어지는 시편 말씀도 흡사 말씀 예찬처럼
하느님의 말씀 주일에 잘 어울립니다.
“주여 당신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오이다.”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을 참되어 어리석음 일깨우네.”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말씀의 빛입니다.
참된 삶은 물론 공동체 형성에 말씀 공부의 위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옛 현자 다산 정약용의 지혜도 우리의 말씀공부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파의 껍질을 벗겨야 속살이 드러나듯이, 공부의 핵심을 찾지 못하면 쓸모없는 지식만 머리에 쌓인다.
의리의 정밀함과 미묘함은 마치 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다.”
새삼 한결같은 말씀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삶의 진수를 깨닫고 참 좋은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말씀의 은총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 참 좋은 교회공동체를 발견했습니다.
사람은 공동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누구나에게 공동체 소속 욕구는 본능적입니다.
첫째, 전례공동체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전례가 삶의 꼴을, 공동체의 꼴을 만들어 줍니다.
가톨릭교회의 영성은 전례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 느헤미아서와 복음도 공동체 전례를 배경으로 합니다.
제1독서에서 율법학자이자 사제인 에즈라의 지도하에 온 백성이 몰문 앞 광장에서 공동전례에 참석합니다.
흡사 미사공동전례에 참석한 우리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에즈라는 성경을 읽고 백성은 모두 귀를 기울입니다.
에즈라가 위대하신 하느님을 찬양하자 온백성은 손을 쳐들고 “아멘, 아멘!” 화답합니다.
그런다음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합니다.
말그대도 경청공동체, 찬양공동체, 경배공동체입니다.
느헤미와 총독과 사제 에즈라와 백성을 가르치던 레위인들은 감격에 벅차 우는 백성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니
그 내용이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오늘은 주 여러분의 하느님께 거룩한 날이니 슬퍼하지도 울지도 마십시오.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단술을 마시십시오.
주님께서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힘이니, 서러워들 하지 마십시오.
오늘은 거룩한 날이니, 조용히 하고 서러워하지들 마십시오.”
바로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인 “오늘” 미사공동전례를 통해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께서 공동체에 베푸시는 기쁨이 바로 우리의 진짜 힘입니다.
둘째, 한몸공동체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익집단도, 이념집단도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살아 있는 유기적 한몸 공동체입니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요 우리는 하나하나 그 지체가 됩니다.
모두의 얼굴을 한데 모으면 그리스도의 얼굴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수족에 속합니다.
사도 바오로가 바로 주님안에서 일치의 한몸 공동체의 진리를 설파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몸이 되었습니다.
지체는 많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몸의 지체가운데에서 약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요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도록 지체들이 서로 똑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어느 하나 반박할 수 없습니다.
고립단절의 혼자라는 환상이 지옥입니다.
우열의 비교가 아닌 상호보완의 한몸공동체요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형제의 장점을 질투할 것이 아니라 자랑하고 고마워해야 합니다.
공동체가 붕괴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이런 한몸공동체의 모델입니다.
한몸공동체를 육성하는데 공동전례의 영향은 절대적입니다.
그러니 전례공동체와 한몸공동체는 하나입니다.
셋째, 해방공동체입니다.
참으로 모두를 자유롭게, 행복하게 하는 주님의 해방공동체입니다.
바로 희년의 영성입니다.
희년은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나자렛에서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면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도 2025년을 정기 희년(2024.12.24.-2026.1.6.)으로 선포하시며
칙서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희망의 순례자’가 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희년선포의 내용이 장엄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말그대로 자유와 해방의 선언입니다.
말그대로 구원의 기쁜소식이요 모든 질곡으로부터 해방과 자유의 선언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희년의 영성이요 치유와 해방공동체의 실현입니다.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Today is the day).
언젠가 그날이 아닌 오늘 살아야 하는 희년의 영성, 해방공동체임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마침내 희년의 기쁨과 자유, 해방이 복음이 실현되었다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년, 매일이 희년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좋은
전례공동체, 한몸공동체,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해 주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1/27(월) [(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제가 좋아하는 말을 함께 묵상하면서 새로운 한 주간을 지냈으면 합니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오히려 언제나 상호 간에 또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려고 애쓰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이 비참한 우리나라의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제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의 양심을 건드리십니다.
용기를 내게 하십니다.
진리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사탄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루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는 의인의 삶으로 엮어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예수님으로부터 치유를 받거나 마귀가 나간 존재들이 느끼는 것은 기쁨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찬미합니다. 이런 결과를 보고도 율법 학자들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전삼용 신부)
4.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마침내 희년의 기쁨과 자유, 해방이 복음이 실현되었다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년, 매일이 희년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좋은
전례공동체, 한몸공동체,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해 주십니다. (이수철 신부)
1/27(월) [(녹) 연중 제3주간 월요일], 제27일차 기도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이 비참한 우리나라의 현실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을 제 두눈으로 똑똑히 확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군가의 양심을 건드리십니다.
용기를 내게 하십니다.
진리를 선포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중요한 표지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의 하루도 사탄의 존재를 드러내는 하루가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명명백백하게
만천하에 드러내는 의인의 삶으로 엮어가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2025년 1월27일(월) 3시4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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