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1월 28일 화요일[(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본기도
복된 토마스를 뛰어난 성덕과 거룩한 학문의 본보기로 세워 주셨으니
저희가 그의 가르침을 깨닫고 그 삶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0,1-10
형제 여러분, 1 율법은 장차 일어날 좋은 것들의 그림자만 지니고 있을 뿐
바로 그 실체의 모습은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해마다 계속해서 바치는 같은 제물로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이들을 완전하게 할 수 없습니다.
2 만일 완전하게 할 수 있었다면,
예배하는 이들이 한 번 깨끗해진 다음에는 더 이상 죄의식을 가지지 않아
제물을 바치는 일도 중단되지 않았겠습니까?
3 그러한 제물로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될 뿐입니다.
4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5 그러한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6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기꺼워하지 않으셨습니다.
7 그리하여 제가 아뢰었습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8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제물과 예물을”, 또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당신께서는 원하지도 기꺼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들은 율법에 따라 바치는 것입니다.
9 그다음에는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10 이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단 한 번 바쳐짐으로써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보소서, 당신 뜻을 이루려 제가 왔나이다.
○ 주님께 바라고 또 바랐더니, 나를 굽어보셨네. 새로운 노래,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을, 내 입에 담아 주셨네. ◎
○ 당신은 희생과 제물을 즐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의 귀를 열어 주셨나이다. 번제물과 속죄 제물을 바라지 않으셨나이다. 제가 아뢰었나이다. “보소서, 제가 왔나이다.” ◎
○ 저는 큰 모임에서 정의를 선포하나이다. 보소서, 제 입술 다물지 않음을. 주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
○ 당신 정의를 제 마음속에 감추어 두지 않고, 당신 진리와 구원을 이야기하며, 자애와 진실을 큰 모임에서 숨기지 않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31-35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지혜 7,7-10.15-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복된 토마스를 기리며 드리는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저희도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살아 있는 빵이신 그리스도의 성체로 저희의 힘을 북돋아 주시니
복된 토마스를 기리는 저희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사랑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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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달라스 성당은 48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2년 후면 50년이 됩니다. 교우들은 지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성당을 기억합니다. 처음 시작은 다운타운에 있는 성당이었다고 합니다. 그성당의 이름을 ‘다운타운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시내 중심가에 있어서 주차에 어려움이 있었고, 교우들이 늘어나면서 성당 신축과 이전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교우들은 신축하기 전에 임시 성전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그 성당의 이름을 ‘창고 성당’이라고 불렀습니다. 창고 성당에서 지내는 동안 지금의 본당을 신축하였고, 본당 설립 40주년이 되는 2017년에 지금의 성당이 완공되었습니다. 성당 신축 과정에서 모든 교우가 마음을 모았습니다. 성당의 건물은 다르지만, 성당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같습니다. 우리는 다운타운 성당이나, 창고 성당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로운 성당이 우리에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율법과 계명으로 이어지는 신앙을 다시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34년 사제 생활하면서 많은 곳에 있었습니다. 성당은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 적성, 시흥5동에 있었습니다. 많은 추억과 기억이 있습니다. 슬픔과 기쁨이 있었고, 고독과 위로도 있었습니다. 교구청에서도 있었습니다. 사목국, 청소년국, 성소국에 있었습니다. 교우들과의 만남보다는 교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생각이 다른 사제들과의 갈등과 연대가 있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영신 수련’을 공부했습니다. 어느덧 20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공부했던 영신 수련은 제 사제 생활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뉴욕에서는 ‘미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일했습니다. 뉴욕에서 코로나 팬데믹을 겪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5년의 임기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뉴욕에서 동북부 ME와 꾸르실료를 맡았습니다. 모든 일에 열정적인 봉사자들을 보았습니다. 저는 작년 2월에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왔습니다. 이곳에서 임기를 마치면 더 이상 새로운 사목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이제 제가 사목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제는 착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겁니다. 사제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신 참 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겁니다.
예전에 집안 어르신들이 이렇게 이야길 하셨습니다. ‘사제가 될 사람은 이제 집안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르신들은 사제가 되면 말씀도 높여서 해 주셨습니다. 사제가 하는 일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몸을 축성하기 때문입니다. 강론을 통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독신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고 사목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순명을 통해서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34년간 사제직을 수행하면서 참 많은 시간을 흘려보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신자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외로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나에게 줄 것이 있는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도 가능할 것입니다. 내가 신세를 진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는 것 또한 사람의 도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가장 굶주리고, 헐벗고, 아픈 사람을 형제처럼 대하라고 하십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들 또한 형제처럼 대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모두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라고 하십니다. 달라스 성당에서는 새 신자 환영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선물도 드리고, 새로 오신 분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식사합니다. 한국에서 오신 분, 타 주에서 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고, 같은 신앙을 가졌기에 모두 가족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낯선 곳에서 생활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신앙을 가진 분들의 따뜻한 환대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모두 같은 형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마르 3,31-35
성모님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라 성모님을 극찬하고 칭송하는 예수님의 말씀!
하느님의 인류 구원 역사 여정 안에서 성모님의 역할과 기여를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존재,
그분의 탁월한 신앙과 동정성을 부정하고 폄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성모님의 동정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삼는 복음 구절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마르코 복음서입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마르 3,32)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출가하신 다음 성모님께서는 이제 내 역할은 다 끝났다,
큰 짐 덜었다, 이제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노년을 보내야지, 사실 분이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안테나는 오로지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습니다.
오늘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몸은 건강할까? 식사는 제때 하고 있을까?
무슨 도움이라도 되어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그렇게 노심초사하면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모님에게 걱정스런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당대 나름 시국을 주름답던 주류 세력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 대사제들과 맞서서
날선 대화를 주고받는데, 절대로 뒤로 물러서지 않고 논쟁을 거듭하니, 저러다 제 명대로 못 살겠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새운 성모님께서는 날이 새자마자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성모님 일행을 본 사람들이 예수님께 그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찾아오셨다고.
위 표현에 따라 성모님의 동정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신이 나서 외쳤습니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 외에도 적어도 아들 2명, 딸 2명을 슬하에 두었다.’
성모님의 동정성은 허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정통 교부들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 시대 형제, 자매라는 용어는 협의적으로도 사용되었지만, 광의(廣義)적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동일한 부모에게서 출생한 자녀들도 형제 자매라고 불렀지만, 사촌, 팔촌 등 친척들에게도 형제,
자매라고 칭했습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형제들과 누이들은 성모님의 친 자녀들이 아니라
사촌이나 오촌 형제자매들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 치더라도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4-35)는 예수님의 말씀은
걱정이 되어 찾아가신 성모님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억울하고 큰 상처가 될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이 대목을 묵상하다보니,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위 말씀은 성모님을 힘들게 하신 말씀, 성모님을 무시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은 성모님을 가장 극찬하고 칭송하는 말씀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연중 제3주간 화요일
마르코 3,31-35
아버지를 버려야 진짜 나의 삶이 시작된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군중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혈육의 관계를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자유로운 어른’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부모나 가족의 뜻에 휘둘리면 아직 독립한 어른은 아닙니다.
가끔 주위에서 아이들이 가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아이들이 가출할까요?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 없는 곳에서 잠시라도 살고 싶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엄마, 아빠의 뜻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독립하여 어른이 되고 싶다는 뜻입니다.
가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서 진정으로 자유롭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부모에게 빚진 게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상 가출해도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다는
생각에 행복할 수 없고, 자존심 때문에 다시 들어가지 못하면 나쁜 길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니얼 페리는 웰튼 아카데미의 밝고 열정적인 학생으로,
새로 부임한 교사 존 키팅의 영향 아래 연기에 대한 자신의 진정한 소명을 발견합니다.
셰익스피어 공연에 대한 니얼의 열정은 엄격하고 성공을 중시하는 아버지 페리 씨의 기대와
극명히 대비됩니다. 무대 위에서 느끼는 기쁨과, 훗날 의대 진학을 포함해 제대로 된
”미래를 준비하라는 아버지의 강압 사이에서 갈등하는 니얼은 자기 주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합니다.
니얼이 학교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서 중요한 역을 맡게 된 순간, 그는 마침내 인생의 목적을
찾았다고 느끼며 벅찬 행복감에 사로잡힙니다. 여기에 힘을 실어준 인물이 오늘을 살고 꿈을 찾으라는
키팅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를 알게 되자 즉시 연극을 그만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고
명령합니다. 니얼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으면서도 연극에서 찾은 자유를 놓치기 싫어
갈등하며,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합니다. 키팅 선생님이 “오늘을 잡아라(Carpe Diem)”라고
격려하지만, 니얼은 아버지의 요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몰래 공연을 강행합니다.
공연이 대성공을 거둔 직후, 페리 씨는 니얼을 나무라며 웰튼 아카데미에서 퇴학시키고
군사학교로 보내겠다고 위협합니다. 깊은 상실감과 압박감에 사로잡힌 니얼은 아버지의 기대와
자신의 꿈을 결코 조화시킬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다시 아버지와 맞설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파멸적 절망감에 굴복하고,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그의 나약함은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에 맞서지 못한 데 있었기에,
그 결말은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니얼이 아버지를 넘어서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버지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키팅 선생이 아버지를 대체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아버지가 주는 것만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른이 되려면 부모보다 더 많이 주는 부모를 찾아야 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로운 어른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에릭 리델은 1902년 중국에서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의 자녀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는지 직접 체험했습니다.
성장하면서 교육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뛰어난 달리기 재능을 발견했고,
곧 ‘나는 스코틀랜드인(The Flying Scotsman)’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육상계에서
명성을 얻었음에도, 그는 모든 재능이 하느님께서 더 높은 목적을 위해 주신 것이라 믿었습니다.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 자격을 얻었을 때, 그가 가장 자신 있던 종목인 100m 경기가
주일(主日)에 열릴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주일을 오로지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날로 지켜야 한다는 그의 신앙적 확신과 충돌했고, 가족은 물론 영국 대표팀 관계자들도
그에게 종목 포기를 말리고 출전하라고 강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여겨, 결국 가장 잘 뛰는 100m가 아닌 400m에 나가
예상을 뒤엎고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습니다.
이후 많은 이들이 에릭 리델을 비난하거나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는
“나를 지으신 하느님께서는 내가 달릴 때 기뻐하심을 보신다.”라고 고백하며,
같은 신앙을 지닌 사람들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었습니다.
올림픽 후에는 세상적 명예를 누릴 수 있는 길을 마다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사로
지내며, 현지인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습니다. 일본군의 억류 캠프에 갇히는 시련을 겪었을 때에도
함께 수용된 사람들과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지내며 서로를 돌보았습니다.
1945년 뇌출혈로 사망하기까지,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난 이들과 사귀어야만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가족들이 됩니다.
부모의 뜻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아직은 모기처럼 세상에 집착하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사람을 만나지 진정한 하느님 가족의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관계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만이 우리를 독립된 어른으로 만들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말합시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27.연중 제3주간 월요일 히브9,15.24-28 마르3,22-30
예수님 중심의 삶
“섬김의 자유”
"옳은 길을 걷는 이에게는,
하느님 구원을 보여 주리라.
티없이 걷는 이에게는
좋은 것 아니 아끼시나이다."(시편50,23ㄴ;84,12ㄴ)
친지가 보내준 ‘MBC 사우회보’중 사장과의 인터뷰기사중 말미, “인터뷰를 마치고, 지향하는 리더쉽을 물었다.
‘서번트 리더쉽(Servant Leadership)이란다. 인터뷰 내내 의장석을 비워둔 채 마주한 까닭이 거기 있었다.”는
기사내용을 잊지 못합니다.
종의 서번트(servant)와 섬김의 서비스(service) 같은 어원입니다.
서번트 리더쉽은 섬김의 리더쉽이요, 그대로 복음의 덕목입니다.
오늘 새벽에 읽은 옛 현자의 지혜도 나눕니다.
“배워서 남 주는 큰 공부를 해야 한다. 나만을 위한 공부는 내 속에 고여 나를 해친다.”<다산>
“아침부터 부지런히 선한 일을 행하면 순임금의 무리요, 부지런히 이익을 추구하면 도적의 무리이다.”<맹자>
결국 예수님 중심의 섬김과 나눔의 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이 궁극으로 가르쳐 주는 바도 예수님 중심의 섬김과 나눔의 삶입니다.
율법학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악의적인 폄훼가 도를 넘었습니다.
예수님의 구마행위에 대해 이들은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 또는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주장합니다.
무지에 눈먼 율법학자들입니다.
확증 편향의 편견과 왜곡,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보편적 어둔 모습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론입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사실 내적분열보다 큰 적은 없습니다.
나라나 공동체가 망하는 경우도 밖에서의 침략보다도 안에서의 분열에 기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내적일치의 공동체라면 아무리 약해도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내적분열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공동체도 개인도, 사탄도 속수무책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리하기 이를데 없는 사탄이 자기 동료인 사탄을 쫓아내는 자중지란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은연중 사탄을 쫓아내는 유일한 길은 사탄이 아닌 사탄보다 더 힘 좋은
예수님 당신뿐임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힘센 사탄을 포획하여 쫓아낼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임은 지금까지 무수한 구마사례들이 입증합니다.
악령에 대한 유일한 대책은 성령뿐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유비무환, 사탄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이런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에 따른 섬김과
나눔의 삶뿐이며 당대 제자들이 이렇게 살았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답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영원한 죄가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바로 너무나 자명한 예수님의 성령에 따른 구마행위를 목격하고도 더러운 영에 들렸다는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폄훼를 지칭하니 무지의 절정입니다.
사람이 하느님 중심을 벗어났을 때 얼마나 무지하고 악해질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이 이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불가사의입니다.
악성 가짜뉴스들의 범람에 악의 오염시대, 악의 보편화 시대요, 악령들린 이들도 날로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상식적이고 정의로운 이가 희귀하게 생각되는 참 괴이한 가치전도의 시대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눈먼 열심의 광신이요 맹신이요 바로 이런 이념이나 사교에 중독된,
자기가 누군지 모르는 이런 무지한 이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무서운 중범죄자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정말 무지의 광신이나 맹신에는 답이 없습니다. 백약이 무효입니다.
작금의 혼란한 현실을 보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 바로 너무나 자명한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성령은 예수님 안에, 사람들 안에,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선한 모두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성령을 통해 현존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는 이런 선의 현존을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러했고 정상인들이 보기에는 전혀 어렵지 않은 성령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현존에 마음을 닫아버리면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이 용서하고 싶어도, 접근하고 싶어도 문을 닫아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래서 회개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완고히 닫아 버리면 하느님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그의 길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만일 자유롭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자유는 반대까지도 선택할 수 있게 합니다.
바로 율법학자들의 선택이 그러했으니, 마음을 닫아버린 잘못된 자유의 선택이 성령모독의
용서받지 못할 결과까지 초래한 것입니다.
그러니 선택의 자유요, 선택의 은총입니다.
주님을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에 따른 섬김의 삶을 사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의 은총인지
또 사탄에 대한 최고의 처방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히브리서가 예수님을 선택한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해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그분은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재산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온갖 죄악의 짐에서, 사탄의 사슬에서 자유롭게 해 주실 분은 새 계약의 중개자 예수님뿐이요,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광신과 맹신의 무지의 병을 치유하여
참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자, 하느님의 자녀들아,
주님의 빛을 따라 걸어들 가자."(이사2,5). 아멘.
1/28(화)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모두 같은 형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인류 역사 안에서 수많은 신앙인들 가운데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뜻을 잘 실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예수님의 알쏭달쏭한 말씀은 성모님을 가장 극찬하고 칭송하는 말씀이 될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에릭 리델은 언제나 가족이나 주변인들의 기대보다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따랐으며, 같은 뜻을 품은 이들에게 영적인 형제이자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만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복음적
가르침을 몸소 보여 주었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어떤 것인지를
세상에 드러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전삼용 신부)
4. 성령을 모독하는 죄, 바로 너무나 자명한 사랑을 거스르는 죄입니다.
성령은 예수님 안에, 사람들 안에, 세상 안에 존재하는 선한 모두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에서 성령을 통해 현존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활동하는 이런 선의 현존을 보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이 바로 그러했고 정상인들이 보기에는 전혀 어렵지 않은 성령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안에서 하느님 사랑의 현존에 마음을 닫아버리면
어떻게 하느님이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이 용서하고 싶어도, 접근하고 싶어도 문을 닫아버리면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이래서 회개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완고히 닫아 버리면 하느님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결코 그의 길을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수철 신부)
1/28(화) [(백)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 , 제28일차 기도
복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모두 같은 형제’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주고,
도움을 주고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바로 내 형제요 어머니입니다.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것을 치우신 것입니다.”
아멘.
- 2025년 1월28일(화) 4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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