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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1월 29일 수요일[(백) 설]/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1월 29일 수요일[(백) 설]/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로마 미사 경본』: 기원 미사 25-1 / 『미사 독서』 Ⅳ: 기원 미사 16-1
<또는 새해 기원 미사(『로마 미사 경본』: 기원 미사 25 / 『미사 독서』 Ⅳ: 기원 미사 16)를 드릴 수 있다.>

오늘은 조상을 기억하며 차례를 지내고 웃어른께 세배를 드리며 덕담을 나누는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인 설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깐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뿐임을 잊지 말고, 주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입당송

마태 28,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본기도

시작이시며 마침이신 주 하느님,
오늘 새해 첫날을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봉헌하오니
온갖 은총과 복을 가득히 베푸시어
저희가 조상들을 기억하며 화목과 친교를 이루게 하시고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 민수기의 말씀입니다.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0(89),2와 4.5-6.12-13.14와 16(◎ 17ㄱ)
◎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 산들이 솟기 전에, 땅이며 누리가 생기기 전에,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은 하느님이시옵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한 토막 밤과도 같사옵니다. ◎
○ 당신이 그들을 쓸어 내시니, 그들은 아침에 든 선잠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 같사옵니다. 아침에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리나이다. ◎
○ 저희 날수를 헤아리도록 가르치소서. 저희 마음이 슬기를 얻으리이다. 돌아오소서, 주님, 언제까지리이까? 당신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

제2독서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4,13-15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시편 145(144),2
◎ 알렐루야.
○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5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36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37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38 주인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구원의 주님, 말씀과 성찬의 식탁을 차리는 교회를 도와주시어, 주님을 세상에 증언하며 주님을 찾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마침내 교회로 이끌 수 있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정의로우신 주님, 공직에 몸담고 있는 이들에게 지혜와 사랑의 은총을 주시어, 그들이 자신의 사명을 올바로 깨닫고, 맡은 일에서 배려와 친절로 정성을 다하게 하소서.?

3. 세상을 떠난 조상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설을 맞아 조상들을 위하여 기도드리니, 이 세상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최선을 다한 그들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게 하소서.

4.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빛이신 주님, 신앙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저희를 이끌어 주시어,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어둠을 밝히는 성실한 신앙인이 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새해 첫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감사와 찬미의 예물을 봉헌하오니
저희가 언제나 주님의 뜻을 따르며
한 해 내내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한국 고유 감사송 2 : 창조와 구원의 하느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하고
특히 오늘 설날을 맞이하여 더욱 정성 들여 찬양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주님께서는 시간의 주인이시며 위대한 예술가이시니
하늘에서는 해와 달과 별들의 무리가 조화를 이루고
땅에서는 모든 생명이 평화로이 한 가족을 이루게 하시나이다.
또한 저희 조상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으며
때가 차자 아드님의 완전한 파스카 제사를 받아들이시고
저희가 주님의 자녀로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셨나이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저희에게 생명의 영을 주시어
부활하신 아드님을 만나게 하시고
이 세상에서 양식과 건강을 주시며
더 큰 자유와 행복의 나라로 이끄시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는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히브 13,8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시다.

영성체 후 묵상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이렇게 말하지만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서로 복을 빌어 주며 시작하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을 잊지 맙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친교의 제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올해도 저희가 주님의 보호로 모든 해악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언제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설날

 

가위바위보 할 때 삼세판이라는 말하곤 했습니다. 한 번에 결정하면 아쉽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에서 무승부가 되면 세 번째에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하면 아쉬움도 덜어내고, 지더라도 깨끗하게 승복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번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첫 번째는 교회 전례력으로 시작되는 새해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4주 전을 대림 제1주일로 정하였습니다. 교회는 대림 제1 주일을 새로운 한 해로 시작합니다. 대림초는 4개를 준비합니다. 대림초 4개는 춘하추동, 동서남북을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주인이심을 뜻합니다. 대림초는 희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니 희망을 갖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높은 산은 깎아내리고, 골짜기는 메우시며 굽은 길은 곧게 펴시는 분입니다. 참된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공정을 세우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품어주시는 아버지처럼,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처럼 하느님의 아들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에 기쁨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십니다.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면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두 번째는 양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1 1일입니다. 이 양력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올해가 2025년이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지 2025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양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국가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기준이라는 걸 인정하는 겁니다. 사회의 모든 조직은 양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운전면허증, 여권과 같은 신분증은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졸업장과 같은 학력 증명서도 모두 양력으로 표기됩니다. 회사에서 급여를 정할 때도 양력을 기준으로 합니다. 비행기, 기차, 호텔을 예약할 때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생일, 결혼기념일, 서품 기념일, 축일도 그 기준은 양력입니다. 세 번째는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시작하는 새해의 첫날 입니다. 음력의 기준은 자축인묘지사오미신유술해로 시작하는 열두 동물입니다. 저는 토끼띠입니다. 올해는 뱀띠의 해입니다. 올해는 을사년(乙巳年)’ 뱀의 해입니다. 뱀은 다양한 문화권과 종교에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고대인들은 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뱀은 뱀이 자연의 순환, 지혜,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12지신 중 뱀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진 동물로 나타납니다.

 

성경에서는 뱀에 대해서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유혹의 상징입니다.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뱀이 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뱀에게 물리면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어쩌면 그런 점에 착안해서 인간을 유혹한 상징으로 을 나타냈을지 모릅니다. 저도 산행 중에 뱀을 만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뱀을 피해서 돌아갔습니다. 뱀이 저를 피해서 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뱀은 구원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구리 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고, 그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겪지만, 이를 통해 성장과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뱀은 인간의 연약함을 상징하지만 동시에 지혜와 재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뱀에 대해서 성서는 양면성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악의 유혹은 과감하게 물리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 새해에는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을사년을 맞아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공동체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더 큰 영적, 지적 성숙을 이루면 좋겠습니다.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2025년에는 모두가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로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다. 당신 하신 일을 당신 종들에게, 당신 영광을 그 자손들 위에 드러내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설날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한달전 이미 지난 해와 작별인사를 하고 새해를 맞이했지만, 오늘 설날을 통해 다시 한번 새로운 마음,

새로운 각오로 새출발을 할 수 있으니 참으로 좋습니다.

 

새해 벽두를 맞이할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야속하게도 세월이 어찌 이리 빠른지, 돌아보니 그야말로 활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빠르게 건너온 세월입니다.

다들 한분 한분 먼저 떠나가시니, 이제 곧 내차례겠지, 하는 생각에 인생의 덧없음을 온몸으로 깨닫습니다.

 

그래서 설날 때 마다 새롭게 마음을 다잡습니다.

꽃같이 좋은 시절 만끽했으니, 미련이나 아쉬움 내려 놓고 이제 남은 날들 하루하루에 감사하면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그날까지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다는, 그런 마음.

 

그래서 길고 긴 황금연휴지만, 어디 멀리 휴가라도 가고 깊은 생각을 멀리 떨치고 한 송이 어여쁜

꽃 같은 아이들 위해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열심히 짜장 소스를 만들고 탕수육을 튀깁니다.

 

오늘 두 번째 독서인 야고보 서간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 4,14)

 

특별히 설날 아침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고 추모하는 분들, 제삿상 건너편에 앉아계신 분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

나라며 가문, 공동체나 가정 전체를 쥐락펴락, 좌지우지했던 사람들...

 

그 권세, 그 위세가 백 년, 천 년 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0년, 50년 지나가니,

그 모든 분들, 마치도 한 줄기 연기처럼, 흔적도 없이 우리네 눈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우리 역시 불과 10년, 30년, 50년 후면 어쩔 수 없이 그분들 뒤를 따라나서겠지요.

 

생각할수록 참으로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 어찌 보면 야고보 서간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상위 가치들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서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하느님께만 기인합니다.

 

뭐 엄청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전투적으로도 살지도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않되겠습니다.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 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마주한 가족들, 친지들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봐야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이 세상 소풍의 둘도 없는 동반자들입니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도착할 때 까지 서로 배려하고 서로 도와주라고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소중한 인연들입니다.

 

오랜 만에 가족 친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설 명절은 서로를 향한 더 많은 배려와 지지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내 목소리는 좀 많이 줄이고, 상대방의 말을 더 많이 경청해야겠습니다.

공동체가 좀 더 살아나기 위해, 내가 좀 더 작아지고 겸손해지며, 좀 더 부드러워지고 온유해져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설날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과 사람의 아들이 갑자기 오실 것임을 명심하라는 말씀(루카 12,39-40)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지금 내가 그 어떤 어려움에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축복을 느끼는 자는 진정 복된 자입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처럼 ‘축복’은 궁극적으로 ‘하느님 존재 자체’를 깨우쳐줍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레크)는 ‘어떤 것을 선사함’이요, ‘주어진 선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명체만이 ‘축복’을 받을 수 있고, 무생물은 하느님께 봉사하기 위해 ‘축성’될 뿐입니다. 

‘축복’이란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곧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이요,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그러니 ‘축복기도’는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축복을 주셔도 그 축복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 주십시오. 

당신의 축복이 실현되도록 그가 응답하게 하소서!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그렇게 축복기도를 하면 먼저 자신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던 상대를 축복해주는 그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자신 안에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신 안에서 그에게 ‘위하는 마음’을 북돋으신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변화됩니다.

바로 이 소박한 ‘축복기도’가 우리에게 당신의 권능에 응답할 수 있는 장을 열어 줍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도록 공간을 열어 드리게 됩니다. 

그래서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한해 되길 빕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28.화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1225-1274) 기념일

히브10,1-10 마르3,31-35

 

                         누가 '하느님의 한가족',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하느님의 뜻을 살행하는 사람들”

 

"내 영혼은 밤에도 당신을 사모하오며,

 아침에도 내 마음 당신을 그리나이다."(이사26,9)

 

오늘 복음은 짧지만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강렬합니다.

우리의 내적시야를 한없이 넓고 깊게 해 줍니다.

복음 내용을 구체적으로 인용하며 나눕니다.

예수님 둘레에는 군중이 에워싸고 있고 군중들은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를 상징하는 듯, 지금 미사장면과 흡사합니다.

이어 전개되는 대화입니다.

 

“보십시오.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예수님께서는 즉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반문하신후,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십니다.

흡사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 주님의 제대 주변에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내 누이요 어머니다.”

 

참 충격적인 강렬한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참가족인가? 에 대한 답을 줍니다.

바로 장소와 시간, 국적과 인종, 종교와 언어, 문화를 초월하여 그가 언제 어디에 있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는 누구나 예수님의 참가족이자 하느님의 한가족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그리스도교가 아니더라도 비록 무신론자라도 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면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참가족이라는 것입니다. 

 

혈연가족을 넘어서 참으로 넓고 깊은 의미로서의 모든 인류를 일치시킬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래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나오는 듯 싶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했던 두 예도 생각납니다.

 

“노년의 품위 유지의 우선적 순서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탐욕의 근원인 돈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혈연가족은 얼마나 많은지요!

너무나 자주 주변에서 목격하는 일들입니다.

하느님 믿음 중심의 연대가, 참으로 견고한 하나의 공동체,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를 형성해 줍니다.

 

바로 이의 생생한 증거가 당대 예수님 중심의 제자공동체요, 명실공히 평생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여기 요셉 수도형제들 공동체요, 그리고 미사에 참석한 형제자매들 모두가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 공동체에 속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예수님의 참가족,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할 수 있는 구원의 기회는 누구나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할수록 거기 삶의 중심에서 예수님도 만날 수 있고

마리아 성모님은 물론 무수한 성인성녀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며, 예수님의 참가족으로서 형제애도

연대의식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을 실행했던 주님의 예스맨이 마리아 성모님이셨고 다음 말씀이 성모님의 순종의 믿음을

요약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부전자전이기보다는 모전자전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그대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합니다.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을 닮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에 거푸 2회 나오는 예수님의 고백과 일치합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우리 모두의 공통적 하나의 고백이 있다면 참삶의 의미가 되는

이 고백하나뿐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참가족이자 하느님의 한가족에 속하는 교회의 모든 성인성녀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천사박사(Doctor Angelicus)라 일컫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빛나는 모범입니다.

13세기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49세까지 100% 삶을 연소시킨 성인이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성인보다 27세를 더 살고 있네요.

 

가톨릭교회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쌍벽을 이뤘던 대학자였고 당대에는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성 보나벤투라와 함께 명성을 날렸던 성 도미니꼬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였습니다.

성인에 관한 인품과 전설적 일화 몇을 소개합니다. 

 

“그는 천품이 유순하고 더할 나위 없이 순결한 일생을 살았고, 오직 진리만을 사랑하며,

신적학문과 인간의 학문을 두루 관통하여 통달하고 있었으며, 마치 태양처럼 자신의 높은 성덕으로

세상을 뜨겁게 하고 자기 학문의 광채로 세상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성인은 1273년 12월 성 니콜라오 축일 미사후 절필하였는데 조수가 그 이유를 묻자,

성인은 “나는 계속할 수가 없어. 내가 이제껏 쓴 것들을 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이 비하면

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해.” 대답합니다.

성인의 겸손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성인은 인간 구원에는 '믿을 것을 아는 것, 추구할 것을 아는 것,

해야 할 것을 아는 것" 셋이 필요하다 역설하였습니다.

 

만 49세 사망시 유언으로 침대에 누운채 하늘을 보며 남긴,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한 고단한 삶이었는지 깊은 감동을 줍니다.

그가 선종전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나눴다는 대화도 감동적입니다.

문틈에서 엿들었던 동료수사가 전하는 전설적 일화입니다.

 

“토마스야! 넌 참으로 나에 대해 참 잘 말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면 좋겠니? ”

토마스가 예수님께 드리는 답은 예수님의 친구들이자 제자들인 우리 모두의 언제나 소원과 일치합니다.

“주님! 오직 당신만을 원합니다(Nothing but youself, Lord!).”

더불어 생각나는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Lord! I love you).”

더불어 생각나는, 늘 나눠도 늘 새롭고 좋은, 마음 설레게 하는 제 자작 애송 고백시도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무려 27년전 고백시이지만 지금도 그 마음, 그 사랑은 그대로입니다. 

새삼 한평생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데 전심전력을 다했던 예수님의 참가족에 속한 성인들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수행함으로 예수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과 더불어 예수님의  참가족 공동체가 이뤄주십니다.

 

"주님을 길이길이 의지하라.

 주 하느님은 영원한 바위이시다."(이사26,4). 아멘.


1/29(수) [(백) 설]...되새김 구절

 

1. 고대인들은 뱀이 탈피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롭게 태어나는 동물, 지혜로운 동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동양 철학에서 뱀은 뱀이 자연의 순환, 지혜, 그리고 생명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12지신 중 뱀은 날카로운 통찰력과 결단력을 가진 동물로 나타납니다.(조재형 신부)

 

2. 뭐 엄청나고 대단한 것 같지만 우리네 인생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 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찰나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 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기념하는 천사박사(Doctor Angelicus)라 일컫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빛나는 모범입니다.

13세기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성인의 생몰연대를 보니 만49세까지 100% 삶을 연소시킨 성인이었습니다.

 

만 49세 사망시 유언으로 침대에 누운채 하늘을 보며 남긴,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 기다리고 있었네.”

임종어도 그가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한 고단한 삶이었는지 깊은 감동을 줍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임종어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Lord! I love you).”(이수철 신부)

 

1/29(수) [(백) 설]...제 29일차 기도

 

복음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

(루카 12,37)

 

주님!

깨어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여 그리워하게 하소서.

그리움 속, 제가 이미 행복한 것은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임이 나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 2025년 1월29일(수) 8시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