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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1일 토요일[(녹) 연중 제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2월 1일 토요일[(녹) 연중 제3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96(95),1.6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존귀와 위엄이 그분 앞에 있고, 권능과 영화가 그분 성소에 있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를 자애로이 이끄시어
사랑하시는 성자의 이름으로 저희가 옳은 일에 힘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1-2.8-19
형제 여러분, 1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2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8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9 믿음으로써, 그는 같은 약속의 공동 상속자인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천막을 치고 머무르면서,
약속받은 땅인데도 남의 땅인 것처럼 이방인으로 살았습니다.
10 하느님께서 설계자이시며 건축가로서
튼튼한 기초를 갖추어 주신 도성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믿음으로써, 사라는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여인인 데다
나이까지 지났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약속해 주신 분을 성실하신 분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12 그리하여 한 사람에게서, 그것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처럼 수가 많고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는 후손이 태어났습니다.
13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14 그들은 이렇게 말함으로써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15 만일 그들이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16 그러나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리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도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7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이사악을 바쳤습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18 그 외아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19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사악을 하나의 상징으로 돌려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루카 1,69-70.71-72.73-75(◎ 68 참조)
◎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우리를 위하여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힘센 구원자를 세워 주셨네.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하셨네. ◎
○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그분은 우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거룩한 계약을 기억하셨네. ◎
○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대로, 우리가 원수들의 손에서 풀려나, 아무 두려움 없이, 한평생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의롭게 당신을 섬기게 하셨네. ◎

복음 환호송

요한 3,16 참조
◎ 알렐루야.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알렐루야.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 예물을 인자로이 받으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이 제물이 저희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4(33),6 참조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또는>
요한 8,12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성자의 살과 피로 저희를 기르시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풍랑을 가라 앉히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대한독립이라고 외치면 다음에 나오는 말로 떠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만세입니다. ‘만세(萬歲)’라는 말은 원래 황제에게만 쓰는 단어였습니다. 황제가 영원히 살라는 축복입니다. 황제가 건강해지라는 의미입니다. 황제가 영원히 다스린다는 의미입니다. 만세라는 말을 황제 이외의 사람에게 하면 역모와 역적의 혐의로 죽임을 당할 수 있었습니다. 이 단어가 황제 이외의 곳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적이 있습니다. 언제일까요? 1919 3 1 삼일운동 때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사람들이 말한 대한독립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아니라, 대한민국(大韓民國)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였을까요?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나라입니다. 그 대한민국은 성별로, 빈부로, 세대로, 이념으로, 귀천으로 차별되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이가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다하는 평등한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를 꿈꾸었기에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와서 만세를 외쳤습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만세는 믿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북경에서 세례받으면서 조선의 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양반을 중심으로 서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면서 천주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유교의 나라,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낯선 종교인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해하였습니다. 곧 끝날 것 같았던 천주교회가 박해의 엄중한 칼날을 견뎌내고 뿌리내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평생 노비와 백정으로 지내야 했던 백성들이 천주교회에서 만세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를 믿으면 노비도, 백정도, 여인도, 장애인도, 서자도 아무런 차별 없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안에서는 고귀한 왕족도, 지체 높은 양반도, 가난한 천민도, 백정도, 여인도, 서자도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만세를 꿈꾸었던 많은 신앙인이 재물을 빼앗겨도, 목숨을 빼앗겨도 신앙을 증거할 수 있었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사람들은 교회를 신뢰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치료하였고, 병원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을 가르쳤고, 학교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높은 첨탑의 교회가 있었습니다. 밀레의 그림 만종에서 보듯이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하루의 일을 마쳤습니다. 신앙이 생활이고, 생활이 신앙이었습니다. 박해의 시련을 겪으면서 교우촌은 신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지친 몸을 의탁하는 장소였습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나누는 장소였습니다. 기도와 생활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많은 성소가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영광이었기 때문입니다. 혼인의 조건은 재물, 능력, 학식이 아니었습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재물, 능력, 학식이 부족해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025년입니다. 천주교 신자이기 때문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맡길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이기에 믿고 혼인을 시킬 수 있을까요? 천주교 신자이기에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부족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 신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천주교 신자의 모습에서 어쩌면 양치기 소년을 보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부르심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떠난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죽은 사람까지 일으키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까지도 봉헌하는 믿음입니다.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가진 것을 빼앗길 수 있고, 믿음 때문에 건강을 잃어버릴 수 있고,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믿음은 함께 할 때 현실이 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주간 토요일

복음마르 4,35-41

 

때로 아니 계시는 듯하지만, 반드시 우리 신앙 여정을 굳건히 동반하시는 주님!

 

성향이 다른 여러 형제들이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다 보니 참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성격이 세상 느긋한 형제가 있는가 하면, 스팀 보일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급한 형제도 있습니다.

 

가끔 수도원 건물 화재경보기가 오작동할 때가 있습니다.

크게 알람이 울립니다.

그 순간이 한밤중이라 할지라도 초스피드로 튀어나와 상황을 체크하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반대로 절대 문밖 한번 내다 보지 않는 형제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작은 거룻배를 타고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의 앞부분을 이물 혹은 선수(船首)이라고 하고, 뒷부분은 고물 혹은 선미(船尾)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은 다들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 배의 뒷쪽에 누우셔서,

배개까지 베고 주무시고 계신 것입니다.

 

기상 상황이 너무 심각해지다보니, 베드로나 요한을 비롯한 성격 급한 몇몇 사도들이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천하태평이신 예수님을 보며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참으로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삼라만상의 주인이자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있는데도

제자들은 목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의 미성숙과 불신앙, 몰이해와 두려움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느릿느릿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십니다.

호수를 향해 외치십니다.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예수님께서 보이신 기적을 목격한 제자들은, 조금 전 집채만한 풍랑 앞에서 느꼈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 길이 먼 제자들, 당신을 향한 믿음도 부족하고, 이해의 폭도 넓지 않은 제자들을 향해

크게 나무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폭풍을 잠잠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능력이 그분 안에 현존하고 계심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옛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겪었던 체험을 고스란히 겪게 됩니다.

이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를 항해하는 여정 안에 높은 풍랑과 파도를 수시로 겪게 됩니다.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3주간 토요일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비유들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고, 저녁이 되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마르 4,35)

저녁이 되어 어둠이 닥쳐오는데도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때도 저녁이었습니다. 

 

그리고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새로운 출애굽’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는 이 여행에 거센 돌풍이 일고,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쳤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가지만, 동시에 온갖 환란과 위험과 함께 갑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의 위험에 수수방관으로 그냥 침묵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죽게 되었는데도 말입니다. 

대체 예수님의 이 침묵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예수님의 이 침묵은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지만, 동시에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사실 풍랑 속에서 주무신다는 것은 아버지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나타냅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자리에 들자마자 단잠이 깊사오니 든든히 살게 하심 홀로 주님 덕이오이다.”

(시편 4,9)

 

그러니 이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전적으로 아버지께 신뢰를 두고 계시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현존에 깨어있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이 바로 잠들어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막상 깨어나야 할 이들은 제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느님께서 우리의 청에 응답해주지 않으신다고 투덜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바로 그 때가 현존하신 그분께 의탁하고 믿음으로 응답해야 할 때임을 말입니다. 

 

시편 작가처럼, 주님께서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시 88,9-10)이심을 믿고 의탁해야 할 때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동행하심’에 대한 믿음과 의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불신을 깨우쳐주시고,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곧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하시며 광풍을 잠재웁니다. 

 

우리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고, 믿음으로 깨우십니다. 

‘새로운 출애굽’을 통해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침묵'은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의미합니다.

마치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의 침묵'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였듯이 말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그 거센 돌풍 속에서도 간직할 수 있었던 평화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시며 제자들의 믿음을 일깨우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시편> 작가처럼 ‘함께 계시는 주님’께 믿음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1.31.금요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학자(1815-1888) 기념일

            히브10,32-39 마르4,26-34

 

                                                           하느님의 나라

                                                             “꿈과 실현”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시편37,3)

 

흰눈 내리는 새벽 산책길, 다시 생각나 오래 전 ‘님의 편지’란 자작 애송시를 나눕니다.

하느님 나라를 그리는 마음에 문득 떠오른 시입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님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님의 편지 

 잔잔히 물결치는 마음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 보겠네”<2001.1.28.>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은 물론 그분을 따랐던 성인들의 평생 꿈이자 화두였고,

평생 하느님의 나라를 사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주 나누는 다음 행복기도 한 대목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언젠가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할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믿는 이들 모두의 공통적 목표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의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의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교육 원리를 배웁니다. 침묵중에 전개되는 무리없이 순리대로 너무 자연스런 흐름입니다.

도약이나 비약이 없습니다.

하느님 친히 묵묵히 하시는 일입니다.

침묵중에 주변 안팎을 잘 살피는 것이 참 중요하다 싶습니다.

눈만 열리면 주변 모두가 하느님 나라 비유의 소재가 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도자는 하느님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의 나라가 잘 실현될 수 있도록

옆에서 겸손히 협조하는 일이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 배나무의 예가 적절합니다.

거름줄 때, 약칠 때, 가지치기할 때 등 때에 맞는 인간의 협조의 노력 또한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긴요합니다. 

이어지는 겨자씨의 비유도 이와 흡사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인다.”

 

두 비유 모두가 땅을 소재로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성경이라 할 수 있는, 생명의 신비를 접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자연”과 멀어질수록

하느님 나라의 비유를 들기도, 이해하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나, 겨자씨의 비유는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펼쳐지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과정을

보여줍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 꿈을 실현해야 할 과제를 부여받고 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한없는 인내입니다.

 

사랑이 지혜입니다.

참으로 사랑이 아니면 개입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는 것이 관상의 사랑이자 지혜입니다.

이런 인내와 사랑은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꿈이, 확신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좋은 답을 줍니다. 

 

“여러분은 그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상을 가져다 줍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약속된 것을 얻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인내의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뒤로 물러서지 말고 믿어서 생명을 얻기위해 믿음의 인내와 더불어 끝없는 전진을 격려하는

히브리서 저자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생생한 꿈과 희망이 있기에 이런 인내의 믿음이요, 적극적 전진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요한 보스코도 사제도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에 빛나는 모범이 됩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 깨닫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 또한 그 한 사람의 성인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되도록

고무하고 격려하는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젊은이들의 스승이자 신부”로, 돈 보스코 또는 보스코 신부로 불려지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수도회인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하고

평생을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돈 보스코 청소년 센터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을 실시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존경했고, 항상 아이들에게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수도회 이름도 살레시오회입니다.

수도회를 창설한 후 청소년 교육에 매진한 보스코 신부의 유명한 어록 몇을 소개합니다. 

 

“체벌과 강요가 아니라 종교적 유대감을 통해 스승과 제자의 신뢰를 긴밀하게 해야 합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성 요한 보스코는 산업화라는 격변기 속에서 사회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빈곤하고 버림받은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몸소 실천한 교육자이자 영성가이며 뛰어난 저술가였습니다.

성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에게 천국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라는 유언을 남기고 1888년 1월31일,

바로 오늘 73세를 일기로 선종합니다. 

 

교황 비오 11세에 1929년 시복되고 1934년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성인은 편집자, 출판업자,

학생, 젊은이, 마술사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겨자씨 같은 존재가 성장하여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 수 있게 된 큰 나무가 된,

명실공히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한 돈 보스코 성인입니다. 

 

겨자씨 같이 작게 시작한 요셉수도원이 이제 많은 이들의 쉼터가, 배움터가, 샘터가 되었으니

하느님 나라의 꿈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네 앞길 주께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 주시리라.“(시편37,5). 아멘.


2/1(토) [(녹) 연중 제3주간 토요일] ,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님을 봅니다. 묵묵히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갔던 시몬을 봅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던 피와 땀을 닦아 드리던 베로니카를 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주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했던 죄인을 봅니다. 믿음은 함께 할 때 현실이 되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조재형 신부)

 

2. 폭풍우가 다가올 때 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흔들리는 우리 배 안 어딘가에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로 아니 계시는 듯 하지만, 반드시 우리들의 여정에 함께 동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고통이나 시련 여부에 상관없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늘 존재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와 이해하지 못할 현실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십니다.(양승국 신부)

 

3.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젊은이들의 스승이자 신부”로, 돈 보스코 또는 보스코 신부로 불려지는 성 요한 보스코 사제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을 위한 활동을 하는 수도회인 살레시오 수도회와 살레시오 수녀회를 창설하고

평생을 어린이와 청소년 교육에 헌신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돈 보스코 청소년 센터에서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직업교육을 실시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존경했고, 항상 아이들에게 그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수도회 이름도 살레시오회입니다.

수도회를 창설한 후 청소년 교육에 매진한 보스코 신부의 유명한 어록 몇을 소개합니다. 

 

“체벌과 강요가 아니라 종교적 유대감을 통해 스승과 제자의 신뢰를 긴밀하게 해야 합니다”

“청소년은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랑받기에 충분합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도록 사랑하십시오.”

(이수철 신부)

 

2/1(토) [(녹) 연중 제3주간 토요일] , 오늘의 기도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오늘의 말 · 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앉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주님, “비록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시 22,4)

아멘.

 

- 2025년 2월1일(토) 6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