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2일 주일[(백)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시어, 복음 권고의 서원으로 주님께 축성받아 자신을 봉헌한 축성 생활자들을 위한 날로 삼으셨다. 이에 따라 교회는 해마다 맞이하는 이 축성 생활의 날에 축성 생활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한다.
한편 한국 교회는 ‘Vita Consecrata’를 ‘축성 생활’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봉헌 생활의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바꾸었다(주교회의 상임위원회 2019년 12월 2일 회의).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요셉 성인과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서 하느님께 봉헌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읍시다. 특별히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2024년 11월 21일-2025년 10월 28일)를 맞아 교회 안에서 각별한 봉헌의 삶을 선택한 축성 생활자들을 위하여 이 미사 중에 함께 기도합시다.
초 축복과 행렬
제1양식: 행렬
1. 정해진 시간에 신자들은 행렬하여 들어갈 성당 바깥의 적당한 장소나 소성당에 모인다. 신자들은 불을 켜지 않은 초를 손에 들고 있는다.
2. 사제는 미사 때처럼 흰색 제의를 입고 봉사자들과 함께 나온다. 사제는 제의 대신에 플루비알레를 입을 수 있다. 플루비알레는 행렬이 끝나면 벗는다.
3. 신자들은 초에 불을 켜고 그동안 아래의 따름 노래를 부른다.
◎ 보라, 우리 주님이 권능을 떨치며 오시어
당신 종들의 눈을 밝혀 주시리라. 알렐루야.
<또는 다른 알맞은 노래를 부른다.>
4. 노래가 끝나면 사제는 교우들을 바라보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고 말한다. 이어서 사제는 보통 때와 같이 교우들에게 인사하고, 아래의 말이나 비슷한 말로 오늘 예식의 뜻을 새기며 적극 참여하도록 권고한다.
+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사십 일 전에 우리는 주님의 성탄 축제를 기쁘게 지냈습니다.
오늘은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한 거룩한 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식으로 율법의 규정을 지키시고
당신을 믿는 백성을 만나셨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은 한나와 시메온 두 노인은 성전에 나와서
성령의 비추심으로 주님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쳐 증언하였습니다.
우리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이 자리에 모여 왔으니
그리스도를 맞이하러 하느님의 집으로 나아갑시다.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오실 때까지는
파스카 신비를 거행하며 빵을 나눌 때
우리는 그분을 만나고 알아 뵈올 것입니다.
5. 이 권고 다음에 사제는 팔을 벌리고 아래의 기도를 바치며 초를 축복한다.
+ 기도합시다.
모든 빛의 샘이며 근원이신 하느님,
오늘 모든 민족들을 비추시는 계시의 빛을
의로운 시메온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어
이 초에 +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이 초를 손에 들고 하느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백성의 정성을 굽어보시어
현세에서 덕을 닦아 마침내 영원한 빛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또는>
참빛이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빛을 창조하시고 온 누리를 비추시니
신자들의 마음을 밝혀 주시고
성전에서 저희가 바치는 이 초의 광채로
마침내 모든 이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사제는 말없이 초에 성수를 뿌린다. 그리고 행렬을 하기 전에 향로에 향을 넣는다.>
6. 그다음에 사제는 부제나 봉사자에게서 준비된 촛불을 받아 들고 행렬을 시작한다. 부제는(부제가 없으면 사제가) 다음과 같이 외친다.
+ 평화의 행렬로 주님을 맞이하러 갑시다.
<또는>
+ 평화의 행렬을 합시다.
<경우에 따라 모두 응답한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7. 모두 촛불을 들고, 행렬을 하는 동안 아래의 후렴 “다른 민족들에게는”을 찬가(루카 2,29-32)와 함께 부르거나, 따름 노래 “시온아, 너의 신방을” 또는 다른 알맞은 노래를 부른다.
◎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옵니다.
○ 주님, 당신 말씀대로 이제는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하소서. ◎
○ 제 눈으로 당신 구원을 보았나이다. ◎
○ 당신이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구원이니 ◎
<또는>
◎ 시온아, 너의 신방을 꾸미고 임금님 그리스도를 모셔라.
하늘의 문이신 마리아를 맞이하여라.
마리아가 새로운 빛, 영광의 임금님을 데려오셨네.
샛별이 뜨기 전에 동정녀가 아드님을 품에 안고 오셨네.
시메온은 아드님을 두 팔로 받아들고 백성에게 외쳤네.
이 아기는 삶과 죽음의 주님이시며 세상의 구원자시다.
8. 행렬이 성당으로 들어갈 때에 미사의 입당송을 노래한다. 사제는 제대 앞에 이르러 경의를 표시하고, 경우에 따라 분향한다. 그다음에 자리로 가서, 행렬 때 플루비알레를 사용했으면 그것을 벗고 제의로 갈아입는다. 대영광송을 노래한 다음에 관례대로 본기도를 바친다. 그리고 보통 때와 같이 미사를 계속한다.
제2양식: 성대한 입당
9. 행렬할 수 없는 곳에서는, 신자들은 손에 초를 들고 성당 안에 모인다. 사제는 흰색 제의를 입고 봉사자들과 몇몇 신자들과 함께 문간이나 신자들이 예식에 잘 참여할 수 있는 알맞은 자리로 나온다.
10. 사제가 초 축복을 위하여 정해 놓은 자리에 도착하면, 신자들은 초에 불을 켜고 그동안 따름 노래 “보라, 우리 주님이(3항)”나 다른 알맞은 노래를 부른다.
11. 이어서 사제는 인사, 권고, 초 축복을 앞의 4-5항과 같이 한다. 그다음에 노래를 부르며 제대를 향하여 행렬을 한다(6-7항). 미사에 대해서는 8항의 규정을 지킨다.
입당송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앞에 엎드려 간절히 비오니
사람이 되신 외아드님께서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셨듯이
저희도 깨끗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저희 자신을 봉헌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1-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원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 들어가신다. ◎
○ 영광의 임금님 누구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이 영광의 임금님이시다. ◎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2,14-18
14 자녀들이 피와 살을 나누었듯이,
예수님께서도 그들과 함께 피와 살을 나누어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15 죽음의 공포 때문에 한평생 종살이에 얽매여 있는 이들을
풀어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6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17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18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그리스도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시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2-40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33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34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35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6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37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38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39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40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또는>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32
22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23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24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25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26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27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28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29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30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31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32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기쁨이신 주님, 주님의 교회를 보살펴 주시어, 지상의 사명에 봉사하도록 부름받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기후 위기와 전쟁으로 불안한 이 세상을 굽어보시어,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고 인간의 생명이 존중받으며 평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3. 태아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 현실의 어려움에서 부부들을 보호하시어, 태아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생명을 위협하는 모든 것을 멀리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4. 교구(대리구, 수도회)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의 주님, 주님께 향하는 저희 공동체에 강복하시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본받고 증언하며 실천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세상을 구하시려고 흠 없는 어린양으로 자신을 봉헌하신
외아드님의 제사를 받아들이셨으니
교회가 기쁨에 넘쳐 봉헌하는 이 예물도 기꺼이 받아들이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원하신 성자께서는 오늘 성전에서 봉헌되시어
성령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영광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밝혀지셨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를 기쁘게 맞이하며
천사들과 성인들과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제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나이다.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구원을 보았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시메온의 기다림을 채워 주셨으니
이 성체를 모신 저희가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받고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듯이
저희도 기쁘게 주님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며, 동시에 교회가 축성 생활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된 순간을 묵상하며,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드리는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저는 봉헌의 순간을 기억합니다.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을 때입니다. 서품 예식 중에 ‘모든 성인 호칭 기도’ 시간이 있습니다. 그때 교구장님을 비롯한 서품식에 참석한 모든 분이 무릎을 꿇고 새 사제들이 주님이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사제가 될 수 있기를 청하면 모든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서품 대상자들은 바닥에 엎드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며 기도합니다. 그렇게 엎드려 있는 동안 신학교에서 있었던 시간이 떠오릅니다.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던 분, 은사 신부님, 함께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웠던 동료, 갈등과 번민의 시간이 떠오릅니다. 모든 성인 호칭 기도가 끝나면 엎드렸던 서품 대상자들은 일어나서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합니다. 이는 단순히 유대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드리는 헌신의 표현입니다. 봉헌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갈망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위해 살고, 무언가를 위해 헌신하며, 더 큰 가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자신의 책 ‘월든(Walden)’에서 삶의 본질을 찾기 위해 숲에서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삶에서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버려야 한다"라고 말하며, 헌신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충만함을 찾고자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이러한 단순함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있습니까? 저는 보스턴에 있는 월든 호수를 몇 번 다녀왔습니다. 미국의 위대함은 경제와 문화에 있는 것 같지만, 그 뿌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같은 사상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전은 단순한 물리적 건물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과 한나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며, 평생 기다려온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성전은 하느님과 깊은 만남과 이웃과의 관계를 성화하는 공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성전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일 수도 있지만, 가정과 직장, 우리의 일상 속 관계가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너 관계" 이론은 성전을 관계의 공간으로 확장해 줍니다. 우리가 이웃과 진정으로 만나고 사랑할 때, 그곳이 곧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군대에서 군종 신부님은 전방 철책선을 찾아와서 병사를 위해서 미사를 봉헌합니다. 그때는 철책선이 제단이 됩니다. 찬 바람 부는 초소가 성전이 됩니다. 저도 광야에서 미사를 봉헌했던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께 예배드렸던 광야, 그 광야가 제단이고, 바위가 제대였습니다.
오늘은 축성 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수도자들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며, 세상에 사랑과 희망의 빛을 비추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축성 생활은 수도자들만의 특권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자기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 헌신하며 축성 생활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는 사랑의 헌신을 통해, 직장인은 정직과 성실로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일상에서 하느님을 기억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우리의 축성 생활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작은 길(Little Way)"을 통해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일상의 작은 일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축성 생활의 정신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 봉헌 축일에 우리는 초를 축성합니다. 촛불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며, 소멸하면서도 다른 이에게 빛과 온기를 전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2024년 추운 겨울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촛불을 넘어 응원봉을 들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우리의 작은 빛도 누군가에게는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세상에 빛과 희망을 전할 수 있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을 맞아 우리의 삶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우리의 삶을 누구에게 봉헌하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부르시며, 우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랑과 희망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된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
복음: 루카 2,22-40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인 축성 생활자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인 동시에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와 요셉은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시고 올라가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축성 생활자들, 수도자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 날을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들이 더욱 신원에 맞는 걸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기도하자고 초대하셨습니다.
그들이 각자 부여받은 고귀한 성소와 카리스마를 기쁘고 충만하게 실현하도록 기도하는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히 선별되고 축성된 수도자로서의 신분에 걸맞게 하루하루 모든 순간을 거룩하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을 위한 사도직 활동도 중요하겠습니다만,
그에 앞서 한 작은 수도자로서, 주님의 겸손한 종으로서, 기도 안에 기쁘고 환한 얼굴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도자들이 자신이 발한 삼대 서원이 하느님 나라와 지상의 교회를 위해 얼마나 큰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살아간다면,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더라도, 거룩하고 맑게 살아 존재 자체로
교회와 세상 앞에 큰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수도자들의 ‘존재’ ‘신원’은 마치 날카로운 날이 서 있는 양날의 검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매일 가슴을 치면서 거듭 자신을 갈고닦으며,
주님의 종이라는 수도자로서의 신원에 걸맞게 살고자 발버둥 칠 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세상의 빛이요
등불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존재 자체로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위한 멋진 이기(利器)로 변모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도자로서의 신원을 망각한 채, 흥청망청, 빈둥거리며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절규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 우리끼리만 희희낙락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과 교회 앞에 그 어떤 증거도 되지 않고, 그저 놀림거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수도자라는 존재 자체, 신원 자체가 하느님과 동료 인간을 해치는 흉기(凶器)로 돌변하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주님 봉헌 축일
<우리의 삶이 주님의 축성을 충만하게 채워내는 삶이 되기를>
성탄을 지낸 지 벌써 40일이 지났습니다.
이날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모세의 이 율법 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굳이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갈라 4,4-5)
바로 이날,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노인과 밤낮으로 단식하며 메시아를 기다렸던 한 과부가 구세주를 뵈었습니다.
바로 이날을 기념하여, 원래는 성모 취결례축일로 지내오다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에 '주님 봉헌 축일'로 개정하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날을 1997년(1월 6일)에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축성 생활의 날'로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지내고 있는 축성 생활자들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남장협 부설기관인 ‘축성생활신학회’는 2015년 '봉헌 생활의 해'를 지낸 후 10년이 되는 시점에서 다시금 축성 생활의 의미를 상기하고, 수도 생활의 쇄신과 수도자의 정체성 확립과 수도 성소 확산을 위해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지낼 것을 건의했고, 이를 남장협과 여장연은 주교회의에 공식 요청했으며, 주교회의는 작년(2024년) 3월 춘계 정기총회에서 「교회헌장」 ‘인류의 빛’ 반포 60주년인 올해 11월 21일부터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 반포 60주년인 2025년 10월 28일까지 1년여 간 ‘한국 교회 축성 생활의 해’를 지내도록 승인했습니다.
'봉헌생활'이란 <교회법> 573조 제1항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
이는 여섯 가지 의미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감도 아래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 따르는 신자들”이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이 성령의 감도로 이루어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봉헌 생활>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봉헌 생활은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당신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
(제1항)
둘째, “복음적 권고의 선서를 통하여”, 곧 봉헌생활은 복음적 권고인 가난, 정결, 순명의 삶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위의 문헌 <봉헌 생활>에서는 “그리스도처럼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헌된 삶”(제22항)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자기의 집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건설을, 자신의 구원이 아니라 세상 구원의 삶임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셋째, “하느님 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애덕의 완성을 추구하고”라는 표현은 곧 봉헌생활은 사랑의 완성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전력을 쏟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가 반포한 '수도생활의 쇄신 적응에 관한 교령'인 <완전한 사랑>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복음적 권고의 실천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느님이신 스승의 가르침과 모범에서 그 기원을 이끌어 온다.”
(제1항)
결국 봉헌 생활은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아내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사랑의 완성을 이루었듯이, 봉헌의 삶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사랑의 삶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건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새로운 특별한 명의로 헌신하고”라는 표현으로, 봉헌 생활의 축성은 세례에 의한 축성에 깊이 근거하며, 이 축성을 더 완전히 표현하는 특별한 축성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황 바오로 6세의 사도적 권고'인 <복음의 증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특수한 축성으로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였고, 세례의 축성으로 이루어진 근본적 봉헌을 더욱 완전히 실현시키고 있다.”
(제4항)
다섯째,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어, 천상적 영광을 예고하려고”라는 표현으로, 봉헌 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생활을 예표하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제44항)과 <봉헌 생활>(제26항)에서는 봉헌은 “미래의 부활과 천국의 영광을 더 잘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생활은 교회 안에서 빛나는 표징이 되고, 천상적 영광을 예고해줍니다.
여섯째,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되는 고정된 생활양식이다”라는 표현을 통하여, 봉헌 생활은 모든 것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바치는 삶임을 말해줍니다.
곧 일시적 충동에 따라 사는 임시적인 삶이 아니라, 공적인 선서로 평생토록 지속되는 고정된 생활 형식임을 말해줍니다.
이를 <봉헌 생활>에서는 “가없는 헌신”(104항)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과 '축성 생활의 날'을 맞이하여, 우리의 삶이 진정한 참 제물로 바쳐지는 삶이 되고, 주님의 축성을 충만하게 채워내는 삶이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1.연중 제3주간 토요일 히브11,1-2.8-19 마르4,35-41
믿음의 여정, 믿음의 전사
“믿음이 답이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시편96,1)
다산어록 2월 주제는 형창설안(螢窓雪案)으로, ‘책상 안 반딧불과 창밖의 눈빛을 등불 삼아 공부한다’는 뜻으로
갖은 고생을 다해 가며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공부란 환경에 굴하지 않는 꾸준함’이란 뜻으로 이런 공부야말로 한결같은 믿음의 자세를 뜻합니다.
옛 현자의 말씀이 깊은 묵상자료가 됩니다.
“시는 시대의 진실한 울음이다. 우리는 시를 닮기 위해 시를 읽는다.”<다산>
“시경(詩經)에 있는 시삼백편의 시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생각이 거짓이 없다’는 것이다.”(詩三百 一言以幣之 曰 思無邪)<논어>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참신한 말마디입니다.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시들이야 말로 그대로 구원입니다.
사랑하면 누구나 시인이 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공동 시편성무를
기도로 바치는 ‘믿음의 훈련’은 얼마나 믿음생활에 큰 축복인지요!
역시 믿음의 훈련, 믿음의 습관화입니다.
제 평생 정주수도생활에 항구할 수 있도록 결정적 도움을 준 것도, 힘들 때 마다 선물처럼 찾아 와
믿음을 북돋아 준 '반가운 손님’과도 같은 무수한 자작시自作詩들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두 짧은 애송 자작시 나눔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님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님향해 흐르는 강!”
오늘 강론 주제는 믿음입니다. 믿음보다 수행생활에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참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불신불립, 믿음이 없으면 도대체 설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도대체 불안과 두려움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요, 믿음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도 한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해도 신뢰를 받는 믿음의 사람은 선한 이웃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믿음’을 주제로 한 제1독서 히브리서 11장은 정말 장관입니다.
40절까지중 일부를 다루지만 마치 믿음의 찬가처럼 들립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믿음의 전사들의 실화를 읽다보면 우리도 저절로 용기백배,
믿음의 전사가 된 기분입니다.
수도원 제 주변에는 이런 ‘믿음의 장군’같은 자매님들이 많습니다.
또 우리 가톨릭교회는 믿음의 순교자들이 참 많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런 믿음의 도반들이 우리의 믿음 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 내용을 일부 소개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곧 이어 믿음으로 살았던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모세, 창녀 라합,
무수한 판관들 이름들이 하늘의 별처럼 떠오르고 이 계보는 가톨릭교회를 통해서도
오늘까지 면면히 계승됩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특히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하며 결론같은 다음 말마디가 깊은 감동을 줍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실상을 대하는 느낌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살다가 믿음 속에 죽어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의 인간임을 깨닫게 되고,
이런 깨달음은 더욱 하느님을 찾게 하니 ‘믿음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저절로 타고난 믿음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거센 돌풍속 호수 한복판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풍전등화의 위기상황입니다.
흡사 세상바다를 항해여정중의 교회공동체는 물론 다양한 공동체들을 상징합니다.
얼마나 많은 공동체란 배들이 세상 바다의 격랑 속에 조난당하거나 파선당하는지요!
이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천하태평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문제는 외부의 풍랑이 아니라 내면속 마음의 풍랑입니다.
제자들의 내면은 그대로 공포와 두려움에 혼비백산 혼란상태인데, 반면 예수님은 지극히 침착한 모습에
내적고요를 누리시니 참으로 깊은 믿음을 반영합니다.
제자들의 반응과 주님의 응답이 대조적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깨어 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Be silent! Be still!)
명령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집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인 예수님은 하느님의 위력을 발휘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곁에 두고 믿음 부족으로 경거망동하는 제자들입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Why are you afraid? Have you still no faith?)
그대로 믿음 약한, 믿음 없는 우리들을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묻습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우리가 평생 믿음 생활에 화두로 삼고 살아야할 물음이자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중에 주님과 날로 사랑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믿음도 날로 성장,
성숙되어갈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 내적고요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 역시 이런 구사일생의 체험이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믿음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어 성공적 믿음의 여정을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찬미받으소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루카1,68). 아멘.
2/2(일) [(백)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되새김 구절
1. 하느님께서 우리를 성전으로 부르시며, 우리를 통해 세상에 빛을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서 사랑과 희망을 실천하며, 우리의 삶을 온전히 봉헌하는 축성된 삶을 살아갑시다.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조재형 신부)
2. ‘축성(祝聖, consecration)되다’ 라는 말의 의미는 성화(聖化)되다, 성(聖)스럽게 변화되다, 거룩하게 되다,
신성하게 되다, 봉헌되다, 라는 말과 유사합니다.
오늘 축성 생활의 날은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이 아기 예수님처럼 자신의 모든 시간과 미래,
삶 전체를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애당초 타고난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의 여정중에 주님과 날로 사랑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믿음도 날로 성장,
성숙되어갈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주님 안에서 내적고요와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복음의 제자들 역시 이런 구사일생의 체험이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2/2(일) [(백) 주님 봉헌 축일(축성 생활의 날)], 오늘의 기도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7)
주님!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과부의 마음속 말을 들으시듯, 미처 말이 되지 않는 제 마음 헤아려 들어 주소서.
성전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당신을 떠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 면전에서 기도하게 하소서.
밤낮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에 감싸여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부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일(일) 6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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