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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3일 월요일[(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2월 3일 월요일[(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블라시오 주교 순교자 또는
[백] 성 안스가리오 주교

입당송

시편 106(105),47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32-40
형제 여러분,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해야 하겠습니까?
기드온, 바락, 삼손, 입타, 다윗과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하여 말하려면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여러 나라를 정복하였고 정의를 실천하였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사자들의 입을 막았으며,
34 맹렬한 불을 껐고 칼날을 벗어났으며,
약하였지만 강해졌고 전쟁 때에 용맹한 전사가 되었으며
외국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35 어떤 여인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식구들을 다시 맞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더 나은 부활을 누리려고,
석방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고문을 받았습니다.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37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38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39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40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1(30),20.21.22.23.24(◎ 25 참조)
◎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마음을 굳게 가져라.
○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사람들 보는 데서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 ◎
○ 당신 앞 피신처에 그들을 감추시어, 사람들의 음모에서 구해 내시고, 당신 거처 안에 숨기시어, 사나운 구설에서 구하시나이다. ◎
○ 포위된 성읍에서 당신 자애로 내게 기적을 베푸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 겁에 질린 나머지 제가 말씀드렸나이다. “저는 당신 눈앞에서 쫓겨났나이다.” 그러나 당신께 도움 청할 때, 애원하는 제 소리 들어 주셨나이다. ◎
○ 주님께 충실한 모든 이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주님은 진실한 이들은 지켜 주시나, 거만한 자에게는 호되게 갚으신다. ◎

복음 환호송

루카 7,16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20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1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2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3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4 이미 여러 번 족쇄와 쇠사슬로 묶어 두었으나,
그는 쇠사슬도 끊고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5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6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7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9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11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12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13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14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15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16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17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18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19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20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참조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오징어 게임 시즌 2를 보고 있습니다. 3년 전에 오징어 게임이 처음 나왔을 때도 보았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습니다. 넷플릭스 상영 순위 1위를 기록하며 많은 사람이 보았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친숙한 게임을 보여주었고, 인간이 자본이라는 거대한 괴물 앞에 한없이 약하다는 것도 보여주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은 적자생존, 약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이기적인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게임에는 자비와 양심은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했던 것은 그 게임이 현실 세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 2는 오징어 게임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오징어 게임을 만든 사람을 찾아가서 그 게임을 더 이상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실패하면서 주인공은 다시 오징어 게임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선포합니다. 이 게임은 비인간적인 게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게임을 하면 단 한 사람만 남고 모두가 죽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받게 될 상금은 옆에 있는 사람의 목숨값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게임을 중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인공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성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좋은 옷 입고, 맛있는 음식 먹고 신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집 앞에서 빌어먹던 라자로는 세상에서 종기투성이로 배고프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아브라함 품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부탁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나면 영원한 생명의 세상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를 청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라자로와 같은 거지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알려주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죽은 사람이 가서 이야기해도 듣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욕망의 덫에 걸리면, 열등감의 덫에 걸리면, 게으름의 덫에 걸리면 영원한 생명이 눈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포도원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포도원을 돌보면서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시간이 가도 오지 않았고, 소작인들은 포도원이 이제 자기들의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때가 되어도 소작료를 보내지 않자, 하인을 보냅니다. 소작인들은 겁도 없이 주인이 보낸 하인을 때리고, 쫓아냈습니다. 주인은 아들은 알아볼 거로 생각했습니다. 주인은 아들을 보냈습니다. 소작인들은 아들을 죽이면 포도원이 영원히 자기들의 것이 될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보낸 아들마저 죽여버렸습니다. 주인은 화가 났습니다. 소작인에게서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맡겼습니다. 소작인들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포도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소작료는 무엇인가요? 겸손과 인내입니다. 나눔과 헌신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사제들이 독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신념과 세상의 것들을 전하려고 한다면, 사제들이 교회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자기의 뜻을 먼저 이루려고 한다면 이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던 마을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에 걸린 사람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 곁에서 시중을 들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건강을 회복하였으니, 가족들에게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과 비움은 우리를 건강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내 마음에 원망과 미움이 있다면,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나눔과 비움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곧 따뜻해지고, 행복해질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복음마르 5,1-20

 

악령이 활개를 치는 순간!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다가왔습니다.

 

그는 무덤가에서 홀로 살고 있었는데, 당시 유다 문학 안에서 무덤은 ‘악령의 집’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이 수시로 활개를 치니 한 인간으로의 기본적인 삶은 끝났다고 보면 정답입니다.

 

충혈된 눈, 온 몸의 상처, 기괴한 몰골, 엄청난 파괴력, 음산한 분위기...사람들은 다들 그를 보면

무서워서 줄행랑을 치곤했습니다. 왕따도 그런 왕따가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그의 거처는 인간 세상에서 멀리 떨어진 무덤 속 토굴이었습니다.

 

악령의 괴롭힘으로 고통 받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께서 악령에게 이름이

어떻게 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주 특별한 대답이 입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제 이름은 군대(軍隊)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마르 5,9)

 

악령의 이름은 독특하게도 ‘군대’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 군대는 6100명의 사병과 726명의 기병, 합해서 총 6826명의 군사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군대라는 표현은 그 사람 안에 수많은 악령이 활개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스무 마리가 아니라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 있었습니다.

악령들은 수가 엄청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똘똘 뭉쳐 그 사람 안에 들어가 괴롭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 군대라는 표현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

 

악령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 그 이면에 깃들어진 죽음의 문화가 곧 악령들입니다.

극단적 이원화, 부익부빈익빈의 현실, 집단이기주의, 물질만능주의, 경제지상주의, 학벌주의,

외모지상주의, 왕따 현상, 마약, 자살에의 유혹...

 

이 모든 악령들이 우리 주님의 권능과 자비에 힘입어 하루 빨리 사라지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이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바랍니다.

 

군대라는 악령 집단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은 그야말로 인간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한 인간의 끝에서 당신의 일을 시작하십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도 악의 세력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악령이 활개를 치면서 한 인간을 극단으로 몰고 갈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인생에서 하느님이 부재(不在)하실 때입니다.

내 삶에서 성령께서 부재하시는 순간이 곧 악령이 활동하는 순간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자비하신 하느님 현존 체험 안에 머물러야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 그분과 나 사이의 가느다란 끈을 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여겨지는 부재 체험 가운데서도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서 내 곁에 현존하고 계신다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때로 여기가 끝인가 보다 느껴질 때도 하느님께서 개입하실 순간이 멀지 않았음을 꼭 기억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첫 ‘이방인 선교사’>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인데, 게라사인 지역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시고 호수를 건너오셨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다에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셨듯이, 이제는 또 다시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은 무덤에서 나와 예수님께 마주 왔습니다.(마르 5,2) 

그리고 이제 그에게서 영들의 군대가 나가고, 그는 '옷을 입고 제 정신으로 앉아'(마르 5,15) 있었습니다.

곧 더러운 영에 들렸던 왜곡된 인간성을 버리고, ‘제 정신이 든’ 것입니다.

 

‘제 정신이 들었다’는 것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와 같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루카 15,17-20)는 것, 곧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사람으로 되었다.’(에페 4,21-24)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옷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바오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를 옷 입듯이 입었다'(갈라 3,27)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마귀를 내쫓는 이 이야기는 병을 고치는 다른 이야기들의 범위를 넘어서, 사탄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돼지 떼들의 익사는 이 고장에 대한 마귀들의 권세가 끝났음을, 곧 그곳이 더러움에서 해방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어둠은 빛을 반기기보다 오히려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렸던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마르 5,19)

이렇게 그는 첫 ‘이방인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곧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리는 ‘자비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5,20)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알려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일과 자비를 베푸신 일'을 깨달아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우리도 ‘주님께서 하신 일’과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가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제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의 말씀 앞에 앉아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되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를 증거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주일 주님 봉헌 축일(축성생활의 날)        

                                                                                                말라3,1-4. 히브2,14-18 루카2,22-40

 

                                                     봉헌의 축복, 봉헌의 여정

                                                           “영적 승리의 삶”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생활의 날입니다.

예수님 탄생후 40일째 되는 날, 마리아 요셉 부부가 아드님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친 날입니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 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입니다.

얼마나 하느님의 법에 충실한 마리아, 요셉 부부였는지 깨닫습니다.

 

또 오늘은 자신을 특별히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축성생활의 날’이기도 합니다.

2025년 희년과 ‘축성생활의 해’에 맞이하는 축성생활의 날이 참 각별합니다.

한국 남자수도회, 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를

주제로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유아빠스는 “예수님 곁에 가까이 머무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한다.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분에게서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사랑의 에너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예전 수도원을 자주 찾았던 어느 교구 사제의 “저에게 여기 요셉 수도원은 영육이 피곤하고 지쳤을 때

찾는 영적 주유소와 충전소입니다.”라는 고백도 생각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은 믿는 이들 모두의 봉헌 축일이기도 합니다.

한두번 봉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살아 있는 그날까지, 봉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봉헌 축일입니다.

세상에 ‘봉헌’이란 말보다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봉헌의 삶입니다. 

 

봉헌의 삶은 존엄한 품위의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평생 살아내야 할 봉헌 축복의 삶입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행복, 봉헌의 생명, 봉헌의 축복, 봉헌의 아름다움등 봉헌은 바로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 봉헌이란 말의 개념조차 이해못할 것입니다.

제대 앞 봉헌된 꽃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삶을 살아갑니다.

작년 후반기 많이 나누며 행복해 했던 ‘꽃’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꽃 한송이를 선물하며 미안해 하던, 지금은 타계한 어느 자매에게 드린 덕담의 시도 생각납니다.

수없이 인용했어도 늘 새롭고 좋아 인용합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하느님 눈에는 봉헌된 우리 영혼들이 다 그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을 여러분 발견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봉헌된 삶의 빛나는 모범이 바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는

예수님의 부모요, 성령의 인도따라 봉헌의 삶에 항구하다가 주님을 만난 시메온은 아름답고 품위 있는

봉헌 삶의 모범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평생 봉헌 삶의 인도자와 보호자는 성령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어 성령에 이끌려 성전에 들어갔다가 봉헌되시는 주님을 만난 시메온입니다.

그대로 다음 묘사대로 말라키 예언의 실현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시메온과 함께 이 거룩한 주님 봉헌 축일 미사를 통해 봉헌된 주님을 만나,

정화되고 성화되는 영적 레위의 후손들인 우리들입니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니 주님 마음에 들리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기 예수님을 만나 팔에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르는 시메온입니다.

이 시메온 찬가는 우리 가톨릭교회 모든 신자들이 매일 평생 끝기도 때마다 부르는 아름다운 찬가로,

이 찬가의 은총이 우리 모두 복된 선종을 맞이하게 할 것입니다. 첫절이 특히 아름답습니다.

 

“주님, 이제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말그대로 시메온의 봉헌생활 축복의 절정 체험입니다.

시메온과 쌍벽을 이루는 봉헌 삶의 대가가 한나 예언자입니다.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기며

거룩하게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한나 역시 봉헌 삶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봉헌 삶도 보고 배웁니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친후 귀향한 마리아, 요셉이요,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하고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으니, 그대로 부모의 봉헌 삶을 보고 배운 예수님께 쏟아진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세상에 봉헌의 축복을 능가할 축복은 없습니다. 아니 봉헌자체가 이미 축복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치유제도 봉헌 축복의 삶뿐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유념할 사항이 있습니다.

봉헌의 삶은 늘 순탄대로의 평온한 삶도, 온실속의 따사로운 삶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시메온의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바로 이를 입증합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은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봉헌된 삶의 모범인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성인성녀들이 겪었던 무수한 고통과 시련,

고난을 생각하면 힘과 용기가 샘솟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봉헌 삶의 현장 중심에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이 자리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피와 살을 나누어 지니시고, 죽음의 권능을 쥐고 있는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키시고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신 파스카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우리들 도와 주실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봉헌 삶의 중심에 이런 주님이 늘 살아 계시어 함께 해주시니,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어떠한 처지에서든 봉헌 축복의 삶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2/3(월)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아끼는 돼지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악령을 쫓아내는 것보다, 병든 사람을 치유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예수님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악령들을 쫓아내시어 근처에 있는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천 마리나 되는 악령 들린 돼지 떼들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려 달려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악령들의 무리, 군대라는 표현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악령들을 바라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2/3(월) [(녹) 연중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르 5,17)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 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오늘도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 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3일(월) 2시1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