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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8일 토요일[(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2월 8일 토요일[(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니 또는
[백] 성녀 요세피나 바키타 동정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106(105),47
주 하느님, 저희를 구하소서. 민족들에게서 저희를 모아들이소서.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송하고, 당신을 찬양하여 영광으로 삼으오리다.

본기도

자비로우신 주 하느님,
저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공경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위대한 목자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3,15-17.20-21
형제 여러분,
15 예수님을 통하여 언제나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칩시다.
그것은 그분의 이름을 찬미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16 선행과 나눔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물입니다.
17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20 영원한 계약의 피로, 양들의 위대한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끌어올리신 평화의 하느님께서
21 여러분에게 온갖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시어
여러분이 당신의 뜻을 이루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마음에 드는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ㄱ.3ㄴㄷ-4.5.6(◎ 1)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주님의 제대에 예물을 올리오니
너그러이 받아들이시어 저희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1(30),17-18 참조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또는>
마태 5,3.5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안에 참된 믿음이 자라나게 하소서.
우리 주 …….

기도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원효대사가 당나라로 유학하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나던 중, 밤이 되어, 한 동굴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한밤중에 갈증을 느낀 원효대사는 옆에 있던 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마십니다. 물은 상쾌하고 갈증을 해소해 주었기에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침이 되어 주변을 보니, 자신이 물을 마신 것은 실제로 해골 속에 고여 있던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는 극도의 혐오감과 구토를 느낍니다. 원효대사는 이 경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습니다. 자신이 밤에는 해골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물이 상쾌하고 만족스럽게 느껴졌지만, 낮에 해골임을 알자 혐오스럽게 느껴졌다는 점에서, 현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나쁨은 외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들어낸다"라는 일체유심조의 깊은 진리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유명한 명제를 우리에게 남겼습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을 통해 생각하는 마음(정신)을 존재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는 감각이나 외부 세계가 의심스러울지라도,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데카르트는 세계를 이해하려면 생각하는 주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불교는 모든 세계가 마음의 투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둘 다 마음(정신)을 경험과 존재의 본질로 삼습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라는 사유를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를 확인했다면, 불교는 "일체유심조"를 통해 세계 자체가 마음의 작용임을 드러냅니다. 데카르트는 자아의 확실성을 통해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고, 불교는 자아를 초월하여 마음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일이 많았던 날이 있었습니다. 성당 컴퓨터를 새로 설치하는데 문을 열어 주면 좋겠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제가 워낙 일찍 일어나니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성당에 관리인이 없고, 이른 시간이라서 기꺼이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봉사하려는 마음이 고마웠습니다. 사제관 난방에 필요한 필터를 갈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기다렸습니다. 필터는 6개월에 한 번은 갈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고맙게도 형제님이 필터를 갈아주었습니다. 93세 어르신을 위한 병자성사가 있었습니다. 건강하셨던 어르신인데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병원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성지순례 가서 토요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청년들과 만날 기회가 적었는데 토요일에 있는 청년 미사를 봉헌하니 청년들을 만나서 좋았습니다. 미사를 마치고 나니, 구역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송년, 구역 장기 자랑에서 1등 한 구역이 뒤풀이한다고 모였습니다. 덕분에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일이 많다고 짜증 내면, 아침부터 문 열어 달라는 부탁에 짜증을 내면 하루가 길고 힘들었을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이요, 하느님의 뜻으로 여겨집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거라 생각하니 감사할 일입니다. 성당의 문을 여는 것도 제게 열쇠가 있기 때문이니 감사할 일입니다. 짚신 장수와 우산 장수의 어머니는 비가 오면 짚신 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짚신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으면 우산장수 아들을 걱정했습니다. 우산이 팔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비가와도 좋습니다. 우산장수 아들이 우산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이 맑아도 좋습니다. 짚신장수 아들이 짚신을 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바뀌는 겁니다. 동양의 현인 장자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들보나 기둥 재목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는 유용하지만 구멍을 막는 데에는 소용없다. 그것은 쓰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는 하루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고양이만 못하다. 그것은 재주가 다르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밤에는 벼룩을 잡고 터럭 끝도 볼 수 있지만 낮에 나와서는 눈을 뜨고도 큰 산조차 보지 못한다. 그것은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게는 큰 울림을 주었던 말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쓰임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재주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다 본성이 있습니다. 그 쓰임과, 재주, 본성이 다를 뿐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교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많은 분이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인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평화와 참된 행복을 만나면 좋겠습니다. 귀소본능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는 루가복음 15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렸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복음마르 6,30-34

 

진정한 쉼은 주님 현존 안에 머물 때 가능합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가도, 또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되는 부분이 제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적절한 균형 감각입니다.

 

기도와 일 사이의 균형, 일과 쉼의 안배, 말과 침묵의 균형, 밀고 당길 줄 아는 능력...그러다보니 언제나

막판 몰아치기의 전문가, 언행 불일치의 대표주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참으로 눈여겨볼 만 합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래서 분주히 움직이셨습니다.

 

이 고을, 저 고을 옮겨 다니셨습니다.

몰려드는 군중의 필요성을 원없이 충족시켜주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뿐만 아니라 제자들까지 상습 피로에 시달렸고, 이러다 과로사하겠다는 위기감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이랬습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

 

세상 살이에 지친 우리들, ‘나와 다른 그’로 인해 지친 우리에게도 휴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아무리 하루온종일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드러누워 뒹굴거리고 있어도,

더 피곤한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참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는 쉼터 같은 존재, 선물 같은 존재와 시간을 보내야 될 것입니다.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 존재, 더불어 보내는 시간이 힐링이 되는 그런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야말로 참 휴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편안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 나약한 인간들인지라 언제나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환대 받던 존재에서 환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란 순식간입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더 많은 배려와 예의, 친절과 존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결국 진정한 휴식, 참된 쉼, 깊은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분은 인간 존재가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궁극적, 최종적으로 나아가 머물 곳은 주님 면전 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 그분 앞에 편안히 앉는 것이 참된 휴식입니다.

그분과 눈을 마주치고, 그분 앞에 머무는 것이 참된 쉼입니다.

그분께 내 모든 상처 보여드리고 맡겨드리는 것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비결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향한 ‘배려의 마음’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향한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파견 받았던 사도들이 돌아오자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건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세기 2,3)는 <창세기>의 울림을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쉼'은 하느님께서 창조된 모든 것에게 ‘복을 내려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음’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쉬게 하고, 그들이 한 모든 일에 복을 내리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쉼’ 안에서 당신이 바로 ‘주님’임을 알게 하시는 일입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에서 <호세아서>의 울림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호세 2,16-22 참조)

그러니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이는 <민수기>(27,15-17)의 표현을 연상시켜줍니다.
거기서 모세는 하느님 백성이 '목자 없는 양처럼'(민수 27,17; 1열왕 22,17) 되지 않도록 한 사람을 세워달라고 간청합니다.


목자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양떼를 위한 음식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광야에서 만나를 불러들이고(탈출 16장), 엘리사가 백 명을 먹이기 위해 빵의 양을 늘렸듯이(2열왕 4,42-44), 예수님께서도 이제 그러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을 음식을 마련하기에 앞서, 먼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 6,34)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말랐던 것은 바로 ‘진리’인 ‘생명의 말씀’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에로 인도하는 이가 바로 '참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어야 합니다. 

오늘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진리인 말씀의 양식’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사진설명: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7.연중 제4주간 금요일                                                        히브13,1-8 마르6,14-29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섬김의 삶
                                                 “자녀답게, 제자답게”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흰눈덮인 산야를 보니 저절로 솟아나는 자작 애송 고백시입니다. 
오늘 읽는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일의 본질을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일을 맡아도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다.”<다산>
“공자는 곡식 창고 관리가 되어서는 ‘회계를 정확하게 했을뿐이다’라고 하시고,
가축을 기르는 관리가 되어서는 ‘소와 양이 잘 자라게 했을 뿐이다’라고 하셨다.”<맹자>


분명, 다산 정약용의 삶이, 맹자의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도, 주님의 제자다운 삶도 이러할 것입니다.
메르켈의 회고록이나 김대중 육성 회고록중 평생 어느 자리에 있던 최선을 다해 노력한 삶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말그대로 한결같이 끝까지 노력하는 천재의 삶이었습니다.
70대 넘어 읽는 책 대부분이 위인들의 평전이나 자서전, 회고록입니다.


지난 월요일 2월3일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었습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입춘을 맞이하여 큰 길운이 있기를 바란다)”,
또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입춘을 맞이하여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라는 카톡문자를 받기도 했습니다.


모두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기원하는 조상들의 지혜와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는 글귀입니다.
어제 내린 눈으로 온세상이 새하얗습니다.
예전 써놓은 '나 이런 일을 알고 있다' 자작 애송시가 생각납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 되어 님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내린 
 하얀길 마냥걷다가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입춘이 지나 흰눈덮인 산야를 보니 흡사 봄속에 겨울이 들어온 느낌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를 연상케 합니다. 마르코 복음 사가의 의중을 짐작하게 합니다.
이또한 주님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한다 싶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견하다’와 ‘오천명을 먹이시다’ 주님의 맹활약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헤로데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다-세례자 요한의 죽음’이란 실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마침 생명의 봄안에 죽음의 겨울이 포위되어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 장면은 어둡고 춥습니다. 헤로데의 우유부단과 경거망동을 보면 그가 삶의 줏대가 없는
중심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봅니다.
헤로디아의 부추김에 넘어가 의롭고 거룩한, 무죄한 세례자 요한을 참수한 후, 예수님 소식에
세례자 요한이 환생한듯 전전긍긍 불안해 합니다.


어찌보면 빛과 진리, 정의를 상징하는 세례자 요한과 어둠과 거짓, 불의를 상징하는 거악의 일당인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그의 딸과의 대결같지만, 하느님과 악과의 싸움입니다. 


악의 승리인 듯 하지만, 빛속의 어둠이자 생명의 봄속의 죽음의 겨울과 같아 결코 어둠이 빛을,
죽음이 생명을 이길수 없습니다.
빛에 저절로 사라지는 어둠이요, 오는 봄앞에 저절로 물러나는 겨울입니다.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은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튼 터치하듯
그 뒤를 이어 맹활약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면면히 계승되는 바튼 터치는 오늘의 천주교 신자들인 우리에게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면면히 흐르는 장강(長江)과도 같은 하느님 구원섭리의 강물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최선을 다하는 응답속에 펼쳐져가는
하느님 구원섭리의 손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우리나라의 역사를 봐야할 것입니다.


얼마동안 험난하겠지만 현재의 과도기적 상황을 통과하면서 민주공화국으로, 문화강국으로
우뚝서리라 믿습니다.
재작년 2023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부터 지금까지 계속된, 앞으로도 계속될 
예수님의 십자가와 태극기앞에 취침전, 기상후 바치는 만세칠창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 수도원 만세!”


오늘 히브리서가 참 고맙게도 우리의 더불어 삶에 좋은 지침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참된 공동체 안에 몸담고 하느님의 자녀다운, 주님의 제자다운 섬김의 삶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는 참 좋은 삶의 지침을 줍니다.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히브리서를 통해 주시는 삶의 지침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응답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에서 우리의 실천적 노력의 협조가 필수입니다.


“1.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2.손님 환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3.감옥에 갇힌 이들을, 학대받는 이들을 자신이 겪는 것처럼 기억해 주십시오.
 4.혼인을 존중하고, 부부의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고, 불륜이나 간음을 금하십시오.
 5.돈 욕심에 얽매여 살지 말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무엇보다 마지막 다음 대목이 중요합니다.
 6.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눈만 열리면 온통 보고 배울 믿음의 성인들이자 믿음의 지도자들이요 믿음의 이웃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다운, 주님의 제자다운 삶이 하느님을 기쁘게, 감동하게 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 좋은 믿음으로 자녀답게, 제자답게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로다.”(시편271ㄱ). 아멘.


2/8(토)  [(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렸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조재형 신부)

 

2. 주님, 그분 앞에 편안히 앉는 것이 참된 휴식입니다.

그분과 눈을 마주치고, 그분 앞에 머무는 것이 참된 쉼입니다.

그분께 내 모든 상처 보여드리고 맡겨드리는 것이, 참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비결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보십시오! 세례자 요한은 순교의 죽음을 맞이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튼 터치하듯
그 뒤를 이어 맹활약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면면히 계승되는 바튼 터치는 오늘의 천주교 신자들인 우리에게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면면히 흐르는 장강(長江)과도 같은 하느님 구원섭리의 강물을 막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최선을 다하는 응답속에 펼쳐져가는
하느님 구원섭리의 손길입니다.(이수철 신부)

 

 

2/8(토)  [(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8일(토) 6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