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10일 월요일[(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또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님의 화관, 영원한 동정의 화관을 받았네.
본기도
복된 동정녀 스콜라스티카를 기억하며 비오니
그를 본받아
저희가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주님 사랑의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시작입니다.1,1-19
1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2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3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4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5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물 한가운데에 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를 갈라놓아라.”
7 하느님께서 이렇게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에 있는 물과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르시자, 그대로 되었다.
8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9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 아래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뭍을 땅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싹을 돋게 하여라.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땅 위에 돋게 하여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땅은 푸른 싹을 돋아나게 하였다.
씨를 맺는 풀과 씨 있는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사흗날이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물체들이 생겨,
낮과 밤을 가르고, 표징과 절기, 날과 해를 나타내어라.
15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빛물체들이 되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큰 빛물체 두 개를 만드시어,
그 가운데에서 큰 빛물체는 낮을 다스리고
작은 빛물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리고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 이것들을 하늘 궁창에 두시어 땅을 비추게 하시고,
18 낮과 밤을 다스리며 빛과 어둠을 가르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나흗날이 지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당신이 이루신 일을 기뻐하시리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 하느님,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시옵니다. 존엄과 영화를 입으시고, 광채를 겉옷처럼 두르셨나이다. ◎
○ 땅을 기초 위에 든든히 세우시니, 영영 세세 흔들리지 않으리이다. 바다로 땅을 옷처럼 덮으시니, 산 위까지 물이 가득 찼나이다. ◎
○ 골짜기마다 샘물 터뜨리시니, 산과 산 굽이굽이 흘러내려, 하늘의 새들은 그 곁에 깃들이고,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나이다. ◎
○ 주님, 당신 업적 얼마나 많사옵니까! 그 모든 것 당신 슬기로 이루시니, 온 세상은 당신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하옵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 가운데 병자들을 모두 고쳐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아가 8,6-7)와 복음(루카 10,38-4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복된 동정녀 스콜라스티카를 기리는 저희가 놀라우신 주님을 찬양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님 앞에 엎드려 청하오니
그의 공로를 기꺼워하셨듯이
저희가 바치는 제사도 기쁘게 받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
<또는>
시편 27(26),4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선물을 나누어 받고 비오니
저희가 복된 스콜라스티카를 본받아
예수님의 수난을 깊이 새기며
오로지 주님의 뜻만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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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신부 강론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있습니다. 뽕나무밭이 변해서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입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온 사람은 한국의 변화를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지저분하고, 무질서하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했던 기억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0년 만에 한국에 오면 풍요롭고, 깨끗하고, 질서정연하고,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벗어난 한국은 가난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한과 북한은 3년간 전쟁을 겪었습니다. 모든 시설이 파괴된 폐허 위에서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열심히 일했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라는 신념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습니다. 저는 온몸으로 그런 시간을 체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기억은 ‘연탄가스, 만원 버스, 암표 장사, 승차 거부, 재래식 화장실, 달동네’였습니다. 지금 한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인터넷을 무료로 사용합니다. 한국에서 최고면 세계에서 최고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한국은 경제, 문화, 의료, 디지털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생활하면서 저도 ‘상전벽해’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0년이니 25년 전입니다. 본당에 주일학교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습니다. 주일 미사에 50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가정 방문하면서 태권도 사범 하던 분을 만났습니다. 저는 본당에서 태권도를 가르치자는 제안을 했고, 자매님은 기꺼이 수락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태권도는 본당 사목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도복을 무료로 주었고, 태권도를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은 도복을 입고 학교에도 가고, 장터에도 가고, 임진강에 가서 놀았습니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태권도를 배우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수녀님은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태권도 배우는 아이들이 세례받았고, 부모님도 세례받았습니다. 아이들은 국기원에 가서 승단 시험도 보았습니다. 본당의 날에는 아이들이 태권도 시범도 보여주었습니다. 10명이 시작한 태권도는 제가 떠날 무렵에는 100명이 넘었습니다.
2010년이니 15년 전입니다. 태풍 ‘곤파스’가 한반도를 지나갔습니다. 제가 있던 본당에도 곤파스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성당에 있던 야산의 흙이 흘러 근처 아파트의 축대 벽이 무너졌습니다. 뉴스에도 나왔고, 서울시장도 다녀갔습니다. 저는 시장님에게 야산을 낮추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또 태풍이 불어도 안전할 거라고 했습니다. 시장님은 저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구청장님을 만나서 야산을 낮추는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구청장님도 기꺼이 저의 의견을 들어주었습니다. 트럭 1,000대 분량의 흙을 옮겼습니다. 흙은 주민들의 텃밭을 가꾸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게 야산은 10미터 정도 낮아졌고, 성당에는 1,000평이 넘는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교우들과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철쭉도 사고, 벚나무도 사고, 장미도 샀습니다. 아카시아와 잡목으로 지저분했던 야산은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변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성모의 밤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윷놀이도 했고, 성당 마당에서 아이들은 물놀이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1독서에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상상과 생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빛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하늘을 만들고, 물을 만들고, 해와 달, 별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정도는 되셔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되셔야지 만물의 주인이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분이 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옷깃만 스쳐도 병이 낫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정말 장난이 아니십니다. 어디가 아픈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부터 아픈지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예수님 곁에서 옷만 만져도 모든 병이 저절로 치유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 그 정도는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넘치는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분들의 업적과 자랑도 아닙니다. 너희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너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하얗게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뉘우치고, 하느님께, 예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지난 모든 것은 덮어주고 당신의 나라에 다시 들어올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상전벽해’가 될 것입니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복음: 마르 6,53-56: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예수께서 겐네사렛 땅으로 가셨을 때 수많은 사람이 예수께로 몰려왔다.
예수께 한결같이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찾아왔다.
수많은 군중이 자기 필요성에 의해 예수님을 찾는 것을 결코 비웃을 수는 없다.
우리 자신이 그런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분을 섬기고
따른다고 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수 있다.
그 우상은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수 있듯이
우리 안에 잘못 가지고 있는 하느님 상이 무너지게 되면 많은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신앙을 버리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 나의 편의를 위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기계적인 하느님은 버림을 받게 된다.
그러한 하느님은 진정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당에 다니는 것이 하느님을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만들어 놓고
참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는 않는지 반성하면서, 우리 자신은 이제 예수님이 필요하고 찾는다면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인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
3. 이영근 신부님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오늘 독서는 '태초의 창조’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온 곳, 곧 겐네사렛 땅에서의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설교집).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곧 ‘믿음으로 새롭게 창조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요한 20,27)
사실 손을 댄 이는 우리지만, 만지신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는 손을 대었을 뿐,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를 당신 심장으로 끌어당기신 분은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이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디를 가시든 그들은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지며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는 옷자락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몸을 받아먹습니다.
그러니 사랑의 전류가 만땅 충전된 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9.연중 제5주일 이사6,1-2ㄱ.3-8. 1코린15,1-11 루카5,1-11
우리 자신을 날마다 자주 비춰 보아야 할
“하느님의 거울”
날마다 “나는 누구인가?” 묻는 자가 수도자입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물어야 질문입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 등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답은 하나 “주님을 찾는 주님의 사람이다!”입니다.
오늘 세 독서는 모두가 주님을 만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은 어부들이 주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부르심의 주도권은 주님께 있음을 봅니다.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내용입니다.
호숫가에서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수님은 두 배 가운데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뭍에서 조금 저어 나가게 한 다음, 그 배에 앉으시어 군중을 가르치십니다.
우연스런 장면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주님은 시몬을 염두에 두셨음이 분명합니다.
새삼 우리 삶에 결코 우연은 없고 하느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음을 깨닫는 장면입니다.
시몬의 배에는 예수님과 시몬 단 둘 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신후 먼저 시몬에게 말을 건넵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같습니다.
깊은 데가 어디 일까요?
깊은 데는 저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오늘 지금 여기 내 삶의 자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깊은 데’서 주님과 함께 삶의 그물을 내려 ‘삶의 의미들’을 잡아 올려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계신 곳은 그 어디나 깊은 데입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시몬의 허무감이 물씬 배어있는 대답입니다.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고백이 그대로 시몬의 인생고백처럼 느껴집니다.
평생 애써온 삶이지만 허무하고 무의미한 인생이었다는 고백처럼 들립니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 만사 헛되다’ 외치던 허무주의자 코헬렛의 탄식도 생각납니다.
주일미사를 마치면서 드리는 시편 127장 말씀이 연상됩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로다.”
바로 여기에다 더하고 싶은 행복기도 다음 대목입니다. 늘 되뇌어도 늘 새롭고 좋은 고백기도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여기에 하나 더하고 싶은 다짐의 고백시도 생각납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주님과 함께 하는 충만한 기쁨의 삶이 바로 꽃같은 봉헌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시몬이 주님을 만난 순간의 기쁨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곧 이어 스승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자 어부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시몬의 허무가 충만한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 주님을 발견함과 동시에 참나를 발견한 시몬입니다.
참으로 시몬이 오매불망 간절히 찾던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평생 고기잡이 하면서 늘 허기에 가득했던 시몬이 삶의 참의미이신 주님을 만나자 허무의 빈자리는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찼던 것입니다.
시몬의 고백이 충격적 감동을 줍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인으로서 자신의 참모습을 본 시몬입니다.
‘스승님’의 호칭에서 ‘주님’이란 호칭으로 바뀝니다.
아마도 시몬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주님 사랑의 기적 체험이 됐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 시몬입니다.
주님을 만남과 동시에 이뤄졌을 회개로 시몬의 마음은 깨끗해지고 겸손해졌을 것이며,
그 마음 자리는 주님의 기쁨과 평화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대로 이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난 우리의 마음도 그러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빛이신 주님을 만날 때 사라지는 마음 속 두려움과 불안의 어둠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의미에 시달리며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당신께 인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란 예언입니다.
시몬을 위시하여 어부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평생 호숫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구원의 출구’ 예수님을 만나 탈출하여 ‘삶의 방향’인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른 것입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운명이 바뀐 것입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요 상상이지만 만약 이 어부들이 ‘삶의 의미’이자 ‘삶의 방향’인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우리가 주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우연은 없습니다.
만약? 이란 가정적 질문은 다 부질없는 공허한 질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지금 이 자리 까지 ‘신의 한 수’처럼 인도해주셨음을 믿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분발하여 더욱 주님을 충실히 따르며 부여된 사명에 충실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고 오늘 여기서부터만 보십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 체험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한 이사야의 고백에 이어 전개되는 대화도 흥미진진합니다.
미사전례중 “거룩하시다”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큰 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시몬처럼 이사야도 주님의 거울에 비친 죄인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며 회개와 동시에
마음 역시 순수하고 겸손해졌을 것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듯 ‘주님의 거울’에 내 모습을 자주 비춰보는지요?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의 거울에 내 마음의 얼굴을 비춰보는 시간입니다.
이어 주님과 주고 받는 대화도 그대로 미사은총을 연상케 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이사야가 주님을 만나 깨끗해진 것처럼, 미사은총으로 죄는 없어지고 죄악은 사라져 깨끗해진 우리를
염두에 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주님을 기쁘게 했을 이사야의 참 통쾌한 응답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 말씀 잊지 않고 평생 마음에 담고 고백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은 파견에 따른 사명을 통해 완성됩니다.
사명 수행을 위해 주님의 부르심과 파견입니다.
이어 바오로 사도의 진솔한 소명체험 고백이 감동을 줍니다.
역시 ‘주님의 거울’에 환히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겸손과 순수의 사람 바오로입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는데,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이런 비상한 소명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소명체험이 대부분입니다.
아니 평범의 비범입니다.
하나하나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닌 대체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존재로 주님께 불림받은 우리들입니다.
유대인 랍비이자 신비가 여호수아 헷쉘의 말이 생각납니다.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무의미하고 허무한 무명의 ‘헛것’으로 살다가, 주님께 불림받음으로 참존재로,
거룩하고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마음의 얼굴을 주님의 거울에 비춰보면서 우리의 유일무이한 소명을,
성소를 새롭게 확인하는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아멘.
2/10(월)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계산하고 따지기보다는 순수한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너그럽게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은 ‘상전벽해’가 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기복적인 신앙이 아닌, 신앙으로 인해
자신이 변화하고 또 세상이 변화될 수 있는 조그마한 실천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거기에서 참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나 자신이 완성되어 가는 삶이어야 한다.
이러한 삶이 우리 가운데 조금씩 실천되도록 끊임없이 나 자신과 싸움을 해나가야 한다.(조욱현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께서 최선, 최상의 방법으로 지금 이 자리 까지 ‘신의 한 수’처럼 인도해주셨음을 믿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심기일전 분발하여 더욱 주님을 충실히 따르며 부여된 사명에 충실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과거를 묻지 않고 오늘 여기서부터만 보십니다.(이수철 신부)
2/10(월) [(백) 성녀 스콜라스티카 동정 기념일], 오늘의 기도
복음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56)
주님!
당신은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십니다.
손을 내미는 이는 제가 아니라 당신이며, 저를 붙드신 분도 당신이십니다.
손을 대기만 하면 먼저 어루만지시고, 찾기만 하면 먼저 찾아오시는 분도 당신이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마음이 항상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2025년 2월10일(월) 7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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