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18일 화요일[(녹) 연중 제6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2월 18일 화요일[(녹) 연중 제6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1(30),3-4 참조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하느님,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6,5-8; 7,1-5.10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7,1 주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거라.
내가 보니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2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놈과 암놈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수놈과 암놈으로 한 쌍씩 데려가거라.
3 하늘의 새들도 수컷과 암컷으로 일곱 쌍씩 데리고 가서,
그 씨가 온 땅 위에 살아남게 하여라.
4 이제 이레가 지나면, 내가 사십 일 동안 밤낮으로 땅에 비를 내려,
내가 만든 생물을 땅에서 모두 쓸어버리겠다.”
5 노아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10 이레가 지나자 땅에 홍수가 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9(28),1ㄱ과 2.3ㄱㄷ과 4.3ㄴ과 9ㄷ-10(◎ 11ㄴ)
◎ 주님이 당신 백성에게 강복하여 평화를 주시리라.
○ 하느님의 아들들아, 주님께 드려라. 그 이름의 영광 주님께 드려라. 거룩한 차림으로 주님께 경배하여라. ◎
○ 주님의 소리 물 위에 머무네. 주님이 넓은 물 위에 계시네. 주님의 소리는 힘차고, 주님의 소리는 장엄도 하네. ◎
○ 영광의 하느님 천둥 치시네. 그분의 성전에서 모두 외치네. “영광이여!” 주님이 큰 물 위에 앉아 계시네. 주님이 영원한 임금으로 앉으셨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4,2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4-21
그때에 14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밖에 없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하고 분부하셨다.
16 그러자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17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18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너희는 기억하지 못하느냐?
19 내가 빵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
빵 조각을 몇 광주리나 가득 거두었느냐?”
그들이 “열둘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0 “빵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주었을 때에는,
빵 조각을 몇 바구니나 가득 거두었느냐?”그들이 “일곱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78(77),29-30 참조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6주간 화요일

 

1995년의 일입니다. 저는 우체국장 하는 형제님의 권유로 우체국 보험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담이 되었지만, 우체국 보험은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2년 후인 1997년에 IMF가 시작되었습니다. 형님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제게 부모님을 모셔야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저는 급한 대로 교구 신협에서 대출을 받아, 부모님이 거처할 집을 마련했습니다. 우체국 보험이 만기가 되어 대출금을 갚을 수 있었습니다. 달라스 성당에 와서도 은행 계좌를 보았습니다. 입출금 계좌를 적금 계좌로 변경했습니다. 1년이 지나면서 적금 계좌에서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예전에 본당 신부님이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우들이 정성껏 봉헌한 교무금과 헌금을 잘 관리하는 것도 사목자의 책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달란트 관리를 잘한 종은 주인에게 칭찬받고 더 많은 달란트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사막에 방주를 만드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일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는 노아와 가족 그리고 노아가 데리고 들어간 동물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에게 노아의 방주는 어떤 의미일까요? 첫째는 인간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함석헌 선생님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갈 수 있었는데 억울함을 풀어준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가 구원의 방주입니다. 둘째는 재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준은 입니다. 돈이 있으면 집을 살 수 있고, 돈이 있으면 여행도 가고,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도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목적도 돈을 벌기 위해서입니다. 셋째는 건강입니다. 인간관계가 좋아도, 재물이 많아도 건강하지 못하면 인간관계와 재물이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가 나빠져도, 재물을 잃어도 건강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은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구원의 방주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방주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커다란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구원의 도구이며,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밖에 남은 자들은 홍수에 휩쓸려갔습니다. 이 방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혼란 속에서도 신자들이 머물며 구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베드로전서 3 20~21절은 방주를 세례와 연결하여 말합니다. "방주 안에서 물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은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방주의 물은 세례의 물과 같습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죄에서 깨끗해지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며, 구원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방주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경고를 받고 경외심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도 이와 비슷합니다. 때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세상의 눈에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새기며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방주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무지개를 통해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는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이 언약은 단순히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구원의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이 구원의 언약을 계속해서 새롭게 합니다. 우리는 이 언약을 믿고, 하느님의 약속 안에서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4장에서 "노아 때와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시대처럼, 종말의 날도 우리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올 것입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기 전에 준비된 자들만이 구원받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주를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삶은 정말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방주, 곧 교회와 믿음의 삶 안에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기도 생활, 성사 참여,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바로 우리의 방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방주를 준비할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는 그 방주 안에서 하느님께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며, 구원을 향한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복음마르 8,14-21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6주간 화요일

 

<'한 개의 빵'>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달마누타 지방에서 바리사이들과 표징에 대한 논쟁이 있은 후에, 배를 타고 벳사이다로 건너가던 중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렸다.'

(마르 8,14-16)

그러나 분명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마르 8,14) 있었습니다. 

 

그 한 개의 빵은 대체 어떤 빵인가요?

사실 그 빵은 마르타에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루카 10,42)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직 필요한 하나인 빵’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전부인 하나인 빵’ 입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하더라도 이 ‘하나’를 가지지 못하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 되고마는, 이 '한 개'만 가지게 되면 모든 것을 가지는 것이 되는, 그런 ‘빵’입니다. 

여기서 ‘배’가 교회의 표상이라면, ‘빵’은 바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마르 8,15)

대체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란 무엇인가요? 

 

그들의 삶의 방식, 곧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고, 남에게 보이기 위하여 행동하며, 잔치에 가면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라는 위선적인 바리사이들의 삶의 방식과 소유와 권력과 화려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헤로데의 삶의 방식입니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녀야 할 누룩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말씀’이 아니고서야 무엇이겠습니까?

비록 씨앗으로 뿌려지지만 육십 배, 백배의 열매를 맺을 그 ‘말씀의 누룩’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모든 삶을 부풀리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누룩인 말씀의 빵’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마르 8,17)

그리고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 8,21)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닫다'(σινιετε)라는 단어는 ‘나란히 서다’, ‘함께(같이) 서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한 개의 빵'을 깨닫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이신 우리 주님, 그리스도 곁에’ ‘나란히 함께’ 서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오니, 오로지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임,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17.연중 제6주간 월요일                                                       창세4,1-15.25 마르8,11-13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라

                                          “존엄한 품위의 삶; 인내의 믿음과 회개”

 

광기(狂氣)의 시대입니다. 역사의식, 시대정신, 상식의 회복과 공부가 절실합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사는 회개의 삶 또한 절실합니다. 

지금 지옥은 텅 비어 있다는 언젠가 읽은 컬럼이 생각납니다.

악마들이 다 뛰쳐 나와 세상 곳곳에서 유혹하며 활개를 치고 있다 합니다.

 

정말 깨어 있어 악마들편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국내외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봐도 실감하는 사실입니다.

단의 이념이나 편견은 언제나 눈먼 맹목의 광기에 흐를 위험이 다분하기에 중용의 균형잡힌 상식적 삶이

참으로 절박한 시절입니다.

 

요즘 수도원 게시판을 보면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에 속한 외국 수도형제들의 부고 소식이

계속 줄을 잇고 있습니다.

생몰연대를 헤아려 보니 대부분 90세 전후입니다.

90을 넘는 분들이 극히 드뭅니다. 모두가 한생애 충실히 수도승답게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새삼 기껏 살아야 15년 정도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충고와 더불어

‘자비롭고 지혜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깨어 삶의 제자리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옛 현자 다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학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은 늘 일상에서 자신을 정비한다.

‘나는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며 나를 찾았다.’”

다산이 매일 새벽마다 마당을 쓸 듯 저 역시 매일 새벽마다 강론을 쓰며 저를 찾습니다.

“깊기만 하고 고립되고, 넓기만 하면 산만해지니, 어른이라면 겸험의 폭과 높이를 두루 갖춰야 한다.”

깊이와 넓이를 갖춘 전방위적 공부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얼마전 써놨던 소망을 밝히는 “당신은” 이란 시 한 대목도 생각납니다.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깊고 넓은 바다예요.”<2025.2.12>

 

참으로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바다처럼 깊고 넓은, 지혜롭고 자비로운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창세기 독서와 마르코 복음에서 우리는 죄에 손상된 무지에 눈먼 사람들을 만납니다.

오늘 창세기 카인과 아벨은 참 풍부한 묵상자료를 제공합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해야함을 배웁니다.

악마의 유혹에 떨어져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죄가 만연되기 시작하는 시점입니다.

첫째 번 카인에게 주어진 시험 상황이 엄중합니다.

 

‘세월이 흐르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삶의 신비, 하느님 섭리의 신비입니다. 누구나 카인의 질투와 분노에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감정을 최대한 인내하고 자제하며, “왜?”라는 의문을 접어둔채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참고 견뎌내며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켰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와 유사한 이해할 수 없는 불공정하다 싶은 ‘하느님의 신비(?)’스런 사건도

참 많이 일어나는 우리 일상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한없는 인내와 순종의 믿음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다음 주님의 충고가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마지막 회개의 기회였는데, 비교하지 말고 하느님의 처분을 묵묵히 믿음으로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충분히 미풍으로 끝낼 수 있었을 상황인데, 카인은 악의 유혹에 빠져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

급기야 미풍은 태풍이 되었고 수습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질투, 분열, 폭력, 죽임이 뒤따르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카인의 후예도 됩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는 물음은 “너 어디 있느냐?” 아담에 대한 물음을 연상케 합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마지막 기회였는데, 부전자전 아담처럼 카인의 반응도, 비겁하게 솔직하지 못하고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거짓말에 적반하장입니다. 

 

이어 카인에게 주 하느님의 심판이 뒤따르자 정주의 삶은 끝났고 땅에서 축출되어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정처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계속되어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무지의 질투에 눈멀어 저지른 악행의 결과가 참혹합니다.

새롭게 부각되는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에 눈멀기는 마르코 복음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다 보는 데 바리사이들만 보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눈뜬 맹인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무지의 악'인 확증 편향, 편견에 눈멀어 있기 때문입니다.

눈만 열리면 예수님의 삶 전체가 하늘의 표징들이요 얼마전의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역시

빛나는 하늘의 표징인데 이를 까맣게 잊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나는 단호한 반응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신후 지체없이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집착없이 홀가분하게

자유로이 떠나는 뒷모습이 참 멋집니다.

오늘날도 무지의 인간 현실은 변함없이 반복됩니다.

카인과 바리사이들,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끝까지 어떤 처지에서든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회개와 더불어 자신의 자리와 몫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삶이

절실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무지의 치유에 결정적 도움이 되어 우리 모두 자비롭고

지혜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18(화) [(녹) 연중 제6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신앙인들에게 구원의 방주는 무엇일까요? 노아의 방주는 단순히 커다란 배가 아닙니다. 방주는 구원의 도구이며, 공동체의 상징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자들은 구원을 받았지만, 밖에 남은 자들은 홍수에 휩쓸려갔습니다. 이 방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회를 떠올리게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죄와 혼란 속에서도 신자들이 머물며 구원을 준비하는 곳입니다.

(조재형 신부)

 

2.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오니, 오로지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임,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신후 지체없이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집착없이 홀가분하게

자유로이 떠나는 뒷모습이 참 멋집니다.

오늘날도 무지의 인간 현실은 변함없이 반복됩니다.

카인과 바리사이들, 우리의 부정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끝까지 어떤 처지에서든 신비스런 하느님의 자유를 존중하고, 지극한 인내의 믿음으로

회개와 더불어 자신의 자리와 몫에 충실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자신의 존엄한 품위를 지키는 삶이

절실합니다.(이수철 신부)

 

2/18(화) [(녹)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이 가진 빵이 배 안에는 한 개 밖에 없었다.'

(마르 8,14)

주님!

실상 필요한 빵은 한 개면 충분합니다.

제게는 이미 당신이 있고, 당신만이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는, 진정 필요한 한 개의 빵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져도 당신이 아니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이오니, 오로지 제게는 당신만이 전부입니다.

당신이 저의 임, 저의 주님이십니다.

아멘.

 

- 2025년 2월18일(화) 7시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