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17일 월요일[(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본기도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4,1-15.25
1 사람이 자기 아내 하와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임신하여 카인을 낳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님의 도우심으로 남자아이를 얻었다.”
2 그 여자는 다시 카인의 동생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기가 되고 카인은 땅을 부치는 농부가 되었다.
3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4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5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6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7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8 카인이 아우 아벨에게 “들에 나가자.” 하고 말하였다.
그들이 들에 있을 때, 카인이 자기 아우 아벨에게 덤벼들어 그를 죽였다.
9 주님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10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11 이제 너는 저주를 받아,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아우의 피를 받아 낸 그 땅에서 쫓겨날 것이다.
12 네가 땅을 부쳐도, 그것이 너에게 더 이상 수확을 내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될 것이다.”
13 카인이 주님께 아뢰었다.
“그 형벌은 제가 짊어지기에 너무나 큽니다.
14 당신께서 오늘 저를 이 땅에서 쫓아내시니, 저는 당신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하고,
세상을 떠돌며 헤매는 신세가 되어, 만나는 자마다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니다. 카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나 일곱 곱절로 앙갚음을 받을 것이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셔서,
어느 누가 그를 만나더라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니,
그 여자가 아들을 낳고는, “카인이 아벨을 죽여 버려,
하느님께서 그 대신 다른 자식 하나를 나에게 세워 주셨구나.” 하면서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하느님께 찬양 제물을 바쳐라.
○ 하느님,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온 땅을 부르시네.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너는 앉아서 네 형제를 헐뜯고, 네 친형제에게 모욕을 준다.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8,11-13
그때에 11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과 논쟁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12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6주간 월요일
군대에 가면 ‘사수와 부사수’가 있습니다. 사수는 오랜 경험과 능력을 갖춘 군인입니다. 사수는 이제 곧 제대를 앞두고 있습니다. 부사수는 이제 훈련을 마치고 부대에 배치된 신병입니다. 사수는 마치 암탉이 병아리를 돌보듯이 부사수를 돌봐줍니다. 내무반 생활, 행정 업무, 외출과 외박에 대한 것을 알려줍니다. 사수가 있기에 다른 선임병들이 부사수를 괴롭히지 못합니다. 사수에게 업무를 배우면서 부사수는 가끔 생각합니다. ‘사수가 제대하면 내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사수가 제대하고 나면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게 몸으로 배우면서 부사수는 진정한 사수가 됩니다. 저도 사수가 되었을 때, 훈련을 마치고 전입온 부사수에게 업무를 가르쳤습니다. 간혹 사수 중에는 부사수를 괴롭히고, 업무를 잘 가르쳐주지 않는 사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부사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인 형제 이야기,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카인은 아벨을 시기하여 들판에서 그를 살해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질문과 대답은 인간관계의 핵심을 묻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인가?" 이는 단순히 카인에게만 주어진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착좌 뒤 첫 방문지로 이탈리아 최남단의 람페두사를 찾았습니다. 람페두사는 전쟁과 가난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 거치는 중간 기착지와 같은 곳입니다. 교황님이 방문하기 전에 람페두사 해변에 한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교황님은 그 소식을 듣고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카인아)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이것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입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세 번째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 여기 형제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슬퍼하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야만성을 슬퍼하며, 또한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결정들을 용납하는 익명성의 야만에 슬퍼하는 은총을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이 표징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표징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 주신 것이 표징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표징입니다. 이미 표징은 차고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표징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보여주신 ‘표징’에 감사드리면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지켜야 할 "형제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 신앙 안에서 위로를 찾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삶입니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제 형제와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형제애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형제의 지킴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형제자매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당신의 자비를 전하며,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8,11-13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시며 하늘에서 오는 표징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의 원하는 것은 보다 스케일이 큰 표징이었습니다.
인간의 심리는 늘 그런 것 같습니다.
더 크고, 더 대단하고, 더 엄청난...예를 들면 이런 기적들이겠지요.
이집트 탈출에 성공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던 모세는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어 힘겨워하는 백성들을
위해 매일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이지 기이하고 신기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엘리야는 나라 전체에 3년간의 가뭄이 들게 한 뒤 비를 내리게 했습니다.
정말 대대적이고 엄청난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도 만나의 기적이라든지 3년 가뭄 사건 같은 눈에 확 띄는 기적,
좀 더 정신 번쩍 들게 만드는 제대로 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충분히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렬한 말씀과 그분이 행하신 치유와 구마 활동, 죽은 이들에 대한 소생사건,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뜨거운 사랑, 한없이 따뜻하고 섬세한 손길을 통해 그분의 신성,
그분의 메시아성은 충분히, 흘러넘치도록 우리에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또다시 ‘이거다’하는 표징, 제대로 된 확실한 표징을 또 요구하는 것일까요?
바리사이들은 애초부터 예수님께 대한 신뢰심, 열정적이고 호의적인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서 진지하게 열성적으로 전개해나가시는 인류구원사업을
흥미 어린 눈으로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예수님을 떠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오만방자하고 한심한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정말 크게 실망하십니다.
깊이 탄식하십니다.
여기서 보여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탄식은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마음의 표현입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련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탄식입니다.
얼마나 가슴 아프셨던지 아주 슬픈 어조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사를 통해 크신 하느님 자비와 우리 인간의 비참이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만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인생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 남부러울 것 없는 삶, 탄탄대로가 잘 보장된 삶을 뒤로 하고 세상 사람들 눈에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삶, 봉헌 생활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의 삶,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과 함께 당신 사랑의 기적을 계속해 나가시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시험>
오늘 복음은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 이어, 예수님께 대한 바리사이들의 시험을 전해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마르 8,11)
그들은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했습니다.
마치 모세 때에 광야에서 내린 ‘만나’(탈출 16장)나, 여호수아의 간구로 해와 달이 멈춰졌던 일(여호 1,12-14)과 같은 하늘에서 오는 초자연적인 표징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너뜨리기 위해서 시험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넘어뜨리기 위해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마태 4,3)라고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메시아인지를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는 지극히 도전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심문하듯이 예수님을 다그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 8,12)
이에 대해서 <마태오복음>의 병행 구절에서는 그들이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혀줍니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징은 분별하지 못한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의 표징밖에는 아무런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3-4)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의 시대의 표징을 드러내셨지만, 특히 바로 앞 장면에서는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도 드러내셨지만, 그들이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이기 때문임을 말해줍니다.
어쩌면 도처에서 드러내시는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그렇게 보면서도 여전히 무시하고 거부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그럴 것입니다.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이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대로, 그 무엇도 이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혹 우리가 그 사랑을 피해가고 거부해 버리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제 마음을 열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16.연중 제6주일 예레17,5-8 1코린15,12.16-20 루카6,17.20-26
참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이다
“믿음, 희망, 사랑”
여기 요셉 수도원 수도자들은 늘 행복합니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훈련이요 발견이자 은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왜 짧은 인생 절망하며 불행하게 삽니까?
너무 억울하고 허무하지 않습니까?
선물로 주어진 한 번뿐인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행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 모두의 권리요 의무요 책임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거룩한 주일 미사전례를 선택하여 하늘 나라 행복 잔치에 참여하고 있는 여러분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정확히 작년 9.29일부터 저를 행복하게 만든 시가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늘 나눠도 새롭고 좋아 또 나눕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2024.9.29.>
여기 불암산 기슭에 자리잡은 요셉수도원에 37년째 정주하면서 늘 바라보며 행복해 한 것이 불암산입니다.
또 지금도 여전히 많이 나누는 <행복기도> 다음 대목도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행복을 곁에 놔두고 왜 어리석게 불행하게 삽니까?
행복은 선택임과 동시에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눈만 열리면 무수히 발견되는 행복의 선물입니다.
어제 오후도 참 행복했습니다.
오늘 이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순수한 사랑으로 빛나는 인천교구 중3동 임마누엘 성당 별무리 청년회원들의
피정 지도 덕분입니다.
강의 내용도 청년회의 요청에 따라, “천국, 연옥, 지옥, 천사, 악마”를 주제로 하여 나눴습니다.
“천국은 인간의 궁극적 목적이며, 가장 간절한 열망의 실현이고, 가장 행복한 결정적 상태다.
천국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 나라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주셨다.”
이런 요지의 천국에 대한 강의였고,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함께 천국을 살아야 함을 강조했고, 모두가 면담고백 성사를 볼 때 보속도 동일했습니다.
피정 마치고 떠나는 동안 지상 천국 수도원에서 “주님과 함께 기쁘고 평화롭게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속으로 주었고 모두가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무엇보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시편 한 구절,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라는 내용도 생각납니다.
구체적으로 하느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하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승패는 선택과 훈련에 달려 있습니다.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선택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비로소 영적승리의 행복한 삶입니다.
첫째, 믿음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이 참 신선하고 명쾌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도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으리라.”
바로 미사에 참석한 여러분을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전반부 행복한 사람들의 내면 상태를 말해 줍니다.
이런 행복한 이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이들이 사람에게, 자기 몸에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덩굴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그대로 하느님이 아닌 자기를 선택하여 믿은 이들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후반부 불행한 사람들의 내면 상태를 말해줍니다.
둘째, 희망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희망이, 꿈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희망의 고백에 100% 공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의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사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 나셨습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이런 희망의 주님을 선택할 때 참행복입니다.
셋째,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되리라.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사랑을 선택할 때 궁극의 승리가, 참행복이 있습니다.
반면 외관상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불행을 선언하시는 주님입니다.
세상 것들 사랑에 빠지다 보니 하느님 사랑이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불행한 이들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탄식이요 회개에의 촉구이자 호소입니다.
하느님 없는 행복은 얼마 못갑니다.
삶의 허무와 무지를, 시련과 고난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지금 가난한 이들, 지금 굶주린 이들, 우는 이들을 돕고 함께 나누며 살라는
회개에의 촉구이자 호소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이웃도, 가난도, 정결도, 순종도 그리고 일상의 삶 모두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 다 지녔어도 그 내면에 믿음이, 희망이, 사랑이, 기쁨이, 평화가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모두를 일거에 충족시켜주는 분이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을 선택하여 하느님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두고 살 때 참행복이요,
이런 주님을 모시는 미사은총이 참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아멘,
2/16(일)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이 카인에게 물으십니다. "네 아우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카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 이 질문과 대답은 인간관계의 핵심을 묻습니다. "나는 내 형제를 지키는 자인가?" 이는 단순히 카인에게만 주어진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을 오늘날 우리에게도 던지고 계십니다.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우리의 무관심을 슬퍼하고, 세상과 우리 마음의 야만성을 슬퍼하며, 또한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을 초래하는 사회경제적 결정들을 용납하는 익명성의 야만에 슬퍼하는 은총을 주십사 주님께 청합시다. ‘누가 울고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이 세상에서 누가 울고 있습니까?”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네 아우는 어디에 있느냐?" 우리 곁에 있는 형제자매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아파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저는 제 형제와 자매를 지키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형제애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형제의 지킴이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형제자매의 고통에 눈을 감지 않게 하소서.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당신의 자비를 전하며, 당신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게 하소서.”(조재형 신부)
2.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마르 8,12)
오늘 우리도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일입니다.
사실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그 한가운데 있습니다.(양승국 신부)
3. 과학자 아인쉬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부류는 세상에는 기적이 없다는 사람들이요, 또 한 부류는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믿고 받아들이는 이의 눈에는 모두 것이 기적이요 신비입니다.
본 훼퍼 목사님이 갈파한 대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드러내는 성사'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제 마음을 열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랑을 선택하여 훈련할 때 참행복입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 행복한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 사랑을 선택한 이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되리라.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이수철 신부)
2/17(월) [(녹) 연중 제6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오늘의 말 · 샘 기도>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마르 8,12)
주님!
당신의 진실은 오늘도 저의 믿음을 다그칩니다.
불신으로 왜곡된 제 마음을 밝혀주소서.
가리고 눈 감은 제 마음을 열게 하소서.
도처에 드러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도처에 흐르는 당신의 사랑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신성을 보고 또 보고 보면서도 무시하고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17일(월) 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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