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16일 주일[(녹) 연중 제6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하느님,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원할 성채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위하여 저를 이끌어 주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바르고 진실한 마음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하셨으니
저희에게 풍성한 은총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마땅한 거처가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7,5-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12.16-20
형제 여러분, 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이렇게 선포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어째서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16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17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18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이들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7.20-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17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20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21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23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24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25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복의 근원이신 주님, 복음을 전하는 교회를 살펴 주시어, 가난하고 굶주리며 우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며 주님의 기쁜 소식을 온전히 증언하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많은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를 굽어보시어, 소통의 힘으로 갈등을 이겨 내고 화해하며, 공동선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3.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치유의 주님, 낫기 힘든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보살펴 주시어, 그들의 아픔을 없애 주시고 건강을 회복하리라는 희망으로 활기를 얻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혜이신 주님, 모든 가정을 주님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어, 거룩해지고 주님의 작은 교회로서 역할을 다하며 서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주님의 뜻을 충실히 실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그들은 실컷 먹고 배불렀네. 주님이 그들의 바람을 채워 주셨네. 그들의 바람을 저버리지 않으셨네.
<또는>
요한 3,16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진미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참생명을 주는 이 양식을 언제나 갈망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6주일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톱’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화가 난 뱀은 톱을 노려보다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입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기력을 회복한 뱀은 톱을 몸으로 칭칭 감았습니다. 톱이 숨을 멎도록 하였습니다. 결국 뱀은 톱에 몸이 잘려 죽고 말았습니다.” 뱀이 참 어리석은 것 같습니다. 만일 뱀이 처음 상처를 받아들이고 톱을 무시했다면 입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상처를 입었어도 톱을 무시했다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뱀만 그럴까요? 저도 어릴 때 뱀처럼 행동한 적이 있습니다. 친한 친구와 장난하다가 친구가 저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화가 난 저는 친구의 책을 찢었습니다. 친구도 화가 나서 제 연필을 부러트렸습니다. 저도 화가 나서 친구의 가방을 찢었습니다. 결국 선생님이 아셨고, 친구와 저는 무척 혼이 났습니다. 그냥 공책이 찢어진 걸 무시하고 친구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연필이 부러지는 일도, 책이 찢어지는 일도, 가방이 찢어지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일도 없었을 겁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서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큰 피해를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다 태운다.”
장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글을 남겨 주었습니다. 제목은 ‘빈 배’입니다. “배로 강을 건널 때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치면 비록 성급한 사람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으면 비키라 소리친다. 한 번 소리쳐 묻지 못하면, 다시 소리쳐 묻고 그래서 안되면 세 번 소리쳐 묻는다. 또 그래도 안 되면 나쁜 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까는 화내지 않고 지금은 화내는 까닭은 아까는 빈 배였고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을 비우고 생의 강을 흐른다면 누가 해하겠는가.” 멀리 미국에 있지만 한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뉴스는 연일 정치에 관한 소식을 전합니다. 법과 원칙에 의해서 시비가 가려질 겁니다.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안정을 찾을 겁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저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뉴스를 보는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듣고, 음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본당에서도 그렇습니다.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감정이 생기면 일이 복잡해지곤 합니다. 작은 상처를 무시할 수 있다면, 나의 마음을,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폭풍우 속에서도 평온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신앙은 먼저 행하면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먼저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자라는 겁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우리는 행복의 기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원하는 것을 채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고통과 슬픔은 먹구름처럼 다가오지만 그것이 하늘의 태양을 없애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 뒤에 밝게 드러나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걸어간 길입니다. 예언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 고통,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이 시대의 신앙인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부유할지라도, 성공했을지라도, 권력을 가졌을지라도, 풍족한 삶을 살고 있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지 않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것은 재물, 권력, 명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것은 사랑, 헌신,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서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입니다.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6주일: 다해
복음: 루카 6,17.20-26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옵니다!
얼굴을 보아하니 ‘이 세상에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는 표정으로 살아가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니, 그 정도면 이 혹독한 세상에서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기에 그리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며,
살아생전 연옥체험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대로 제가 보기에도 ‘정말이지 하느님께서도 너무하시지?
정말 하느님이 계시긴 한 건가?’ 할 정도로 힘겹고 참담한 삶을 살아가시는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얼굴은 ‘이 세상에서 나처럼 행복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하는 얼굴이었습니다.
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참으로 상대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한 가지 생각,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그렇게 사소한 일에 핏대까지 올리며 아등바등 살아가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 어쩔 수 없이 제한된 우리네 인생 안에서 하루하루 가급적 만족하고 살려고 노력하며
작은 것에서 기쁨을 찾아야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인간의 삶, 뭐 그리 대단히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기를 쓰고 올라가 봐야 그 끝에 대체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수백 수천억을 모아봐야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겠습니다.
내 가장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 동료들, 친구들과 일상 안에서 나누는 사소한 기쁨,
사실 그것보다 큰 행복은 찾기가 힘듭니다. 함께 걸어가는 이웃이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그것처럼 제게 있어 큰 행복은 다시 또 없었습니다.
행복과 관련해서 지금에야 깨닫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네 삶 가운데 행복의 순간은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의 씨앗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깊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행복은 결핍 가운데, 부족함 가운데, 시련이나 역경 가운데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 공동체를 방문할 때였습니다. 감사하지만 부담스러운 극진한 환대가 매일 계속되었습니다.
매 끼니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습니다. 매일 저녁 밤늦은 시간까지 성대한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시고...그 대신 운동량은 지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한 일주일 정도 반복되니 세상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반대로 바쁜 일이 있어 본의 아니게 몇 끼니를 건너뛰었습니다.
이윽고 촉각을 다투는 일들을 대충 마무리 짓고 나니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가까운 순대국밥 집에 가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8천원짜리 순대국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니
너무나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나왔습니다.
우리가 매일 느끼는 결핍, 갈증, 배고픔, 부족함, 피곤함, 외로움, 슬픔...이런 요소들이 사실은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있는 행복에 대한 개념, 곰곰이 한번 되새김질해보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곁들여
묵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장엄한 어조로 행복의 길을 선포하십니다.
천국에 오르는 길을 아주 쉽고도 명료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소유가 아니라 가난임을, 창이나 칼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임을 선포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6주일: 다해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5,1-12)에서는 산상설교로, 루카 복음에서는 평지설교로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카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의미이다.
루카 복음에서는 4개의 축복이 나온 다음 4개의 저주가 나오는데 이렇게 축복과 저주가 쌍을 이루게 한 것은
축복의 의미와 효과를 더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는데 복음 내용을 잘 조명해주고 있다.
“사람이 힘이 되어주려니 하고 믿는 자들은 천벌을 받으리라.
그러나 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5-8절).
성경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따라서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 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하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축복이 현재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유하다.
이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는 모두 형제들의 도움이 필요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23절).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15.연중 제5주간 토요일 창세3,9-24 마르8,1-10
“너 어디 있느냐?”
-새 에덴동산이자 생명나무인 예수님-
파스카의 삶
“주님, 당신께서는 대대로
저희에게 안식처가 되셨나이다.”(시편90,1)
화답송 후렴이 큰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오늘도 옛 현자의 말씀에 호감이 갑니다.
파스카의 겸손한 삶에 어울리는 모습이자 말씀입니다.
겸손과 예의와 더불어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겠습니다.
“꽃향기를 맡기 위해서는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한다.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다산>
“육포 한 묶음 이상을 예물로 갖춘 자를 나는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논어>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장면과 마르코 복음의 장면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그대로 파스카의 신비를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에덴동산 낙원은 실낙원이 되었고, 사천명을 먹이신 복음의 기적은
낙원의 회복인 복낙원이 된듯합니다.
실낙원과 복낙원, 아담과 예수님의 대조가 극명합니다.
흡사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인 파스카의 신비를 연상케 합니다.
선악과 나무 열매야 말로 넘어선 안될 마지막 한계였습니다.
흡사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 상자처럼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는 순간 시작된 재앙이자 불행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했습니다.
이제 한계를 넘음으로 시작된 지옥의 현실은 오늘날 역시 무수히 목격됩니다.
“너 어디 있느냐?”
바로 이 질문이 분기점입니다.
이 질문은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에 대한 물음은 바로 우리 모두에 대한 물음이겠습니다.
바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고 있는가 묻습니다.
정말 깨어 제자리에서 제대로 준비된 삶을 살았다면, “예, 저 여기 있습니다.” 대답하고
즉시 뛰쳐 나갔을 것입니다.
아담이 용기가 있는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부르심에 회개로 응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알몸이 두려워 숨었고, 주 하느님의 추궁에 대한 답이 적반하장,
비겁하게도 오히려 자기의 잘못이 여자를 아내로 주신 하느님께 있다는 듯이 하느님께 책임을 전가합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하느님이 책임이 있고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철면피, 후안무치의 답변에 하느님의 실망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아담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한순간 속절없이 무너지는 순간입니다.
이어지는 하느님의 추궁에 여자의 변명입니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사람과 여자 둘다 책임적 존재가 되는데 실패했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구차하고 비겁한 핑계나 변명이 아니라 용기있는 솔직한 회개였습니다.
핑계와 변명, 바로 사람이나 여자뿐 아니라 여전히 계속되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 부정적 현실입니다.
다윗의 즉각적인 회개의 응답,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고백도 생각나고,
“I was wrong!(내가 잘못했다!)”의 명수였다는 인도의 성자 간디의 일화도 생각납니다.
죄에 대한 결과 선고의 벌은 역순으로 뱀에, 다음에는 여자에, 마지막 사람에게 내려집니다.
마지막 하느님 처사에 대한 묘사가 참 엄중합니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불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였다.’
이런 비상조치를 취한 하느님이지만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을 것이며 정말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할 당신의 효성스런 아드님 예수께서 나타나실 날만 학수고대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담이 우리의 절망이라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회복된 복낙원, 새 에덴동산입니다.
바로 그 생생한 증거가 오늘 복음의 4천명을 먹이신 일화에 오늘 지금 거룩한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전례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린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반영합니다.
광야의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일곱 개의 빵을 받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 하십니다.
이어 물고기 몇 마리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 하시니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일곱 바구니, 먹은 사람은 사천명 가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진인사대천명 믿음의 기적입니다. 예수님의 믿음에 감동하신 하느님의 응답이자
군중들의 응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믿음에 감동한 군중들이 감춰뒀던 빵을 모두 나누어 먹으니 참 풍요한 기적입니다.
무지한 군중의 인기와 호기심, 열광을 피해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타고
미련없이 떠나는 예수님의 뒷모습이 참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공성이불거, 공을 이루면 거기에 머물지 말라는 노자의 지혜가 생각납니다.
주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 예수님이야말로 새 에덴동산 복낙원이자 생명나무가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파스카 미사전례를 통해 앞당겨 실현되는 새 에덴동산에서 예수님의 생명나무 열매인
성체를 모심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내 삶의 꽃자리, 제자리에서 날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날마다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아멘.
2/16(일) [(녹) 연중 제6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참된 행복은 축척을 통해서가 아니라 버림을 통해서 온다는 것, 참된 기쁨은 올라감이 아니라
내려섬을 통해서 온다는 것을 설파하십니다.
비록 죄인이고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비참한 우리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언제나 굳건히 내 안에 자리하시고
내 인생을 동반해주시니 깊이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부끄럽더라도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내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매 순간을 감사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어느새 행복은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가난은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우리 마음의 개방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조욱현 신부)
4. 아담이 우리의 절망이라면,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회복된 복낙원, 새 에덴동산입니다.
바로 그 생생한 증거가 오늘 복음의 4천명을 먹이신 일화에 오늘 지금 거룩한 성전에서 거행되는
미사전례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린 군중을 가엾이 여기는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자비심을 반영합니다.
광야의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일곱 개의 빵을 받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 하십니다.
이어 물고기 몇 마리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 하시니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일곱 바구니, 먹은 사람은 사천명 가량이었습니다. (이수철 신부)
2/16(일) [(녹) 연중 제6주일], 오늘의 기도
복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은 소유함에 있지 않다고 선포하십니다.
가난할지라도, 슬픔 속에 있을지라도,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박해를 받을지라도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슬픔, 고통, 아픔을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를 향한 하느님의 무궁무진한 사랑과 자비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5년 2월16일(일) 8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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