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3월 22일 토요일[(자) 사순 제2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본기도
영광스러운 이 성사로
세상에 사는 저희가 천상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시니
하느님께서 계시는 그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가도록
저희의 삶을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4-15.18-20
주님, 14 과수원 한가운데 숲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15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18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19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20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을 성실히 대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자애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복음 환호송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말하리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거룩한 제사를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시고
저희를 죄악에서 건져 주시어
언제나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아들아, 네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그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여
풍성한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께 간청하는 이들의 기도에 자비로이 귀를 기울이시어
주님 뜻에 맞는 것을 청하고
바라는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엘파소에서 76세의 자매님이 ‘나물, 대추, 호도, 고춧가루, 버섯’을 가지고 왔습니다. 12시간 운전해서 왔습니다. 농산물을 팔아서 본당에 봉헌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왕복 24시간 운전해야 하는 고된 일정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성전 건립할 때 물건을 많이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76세 어르신이 기분 좋게 엘파소로 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자고 했습니다. 다행히 물건이 잘 팔렸고,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듣는 말이 있습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봐!" 가족 간에도, 친구끼리도, 직장에서도 참 자주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드시는지요? "입장 바꿔 생각해 봐"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 속 조언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태도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봅니다. 둘째 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돈이 다 떨어지고, 돼지나 치며 힘겹게 살다가, 아버지를 떠올립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도 나보다 잘 사는데, 내가 차라리 품꾼이라도 되어야겠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끌어안고 환영합니다. 잔치를 벌이고 좋은 옷을 입혀 줍니다. 이 장면만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맏아들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한 번도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몫의 재산을 다 써버리고 돌아온 동생이 오히려 더 큰 환대를 받습니다. 형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것 같습니다. "나는 평생 성실하게 살았는데, 왜 저렇게 쉽게 용서받지?"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탕자의 입장에서 형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탕자는 형이 억울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했을까요?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어떨까요? "내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 얼마나 기쁜 일인데!" 입장을 바꿔 보면, 같은 상황이라도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탕자의 비유뿐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입장을 바꿔 생각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들은 오랫동안 억압받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시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자신들도 과거에 억압받았던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방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희도 이방인을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는 살면서 "나는 힘든 시절을 다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어!"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약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의 이 가르침은 단순히 오래된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불법 체류자에 대한 강력한 단속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쫓겨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번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그들은 폭력과 가난을 피해 어렵게 국경을 넘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탕자처럼 무언가를 찾아 떠났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국 사회가 그들에게 조금 더 따뜻한 시선을 보낼 수는 없을까요?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박해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경험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억압하는 입장이 되어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한때 박해받던 입장으로 돌아가 생각해 본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것“은 단순한 조언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탕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공감이 삶 속에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루카 15,1-3.11ㄴ-32
행동이 아니라 욕구에 집중하라. 그게 나다!
‘헬과 마리’라는 두 남녀가 있었습니다. 헬은 아주 험상궂게 생겨서 사람들이 다 싫어했습니다.
그런 헬이 어느 날 아리따운 아가씨 마리를 만납니다. 가슴 깊이 찾아든 사랑의 열정으로
용기를 내어 청혼을 했지만 마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헬의 마음을 아신 하느님은 헬에게 가장 온화한 사람의 얼굴 가면을 선물하십니다.
헬은 그 가면을 쓰고 다시 마리를 찾아가 청혼합니다. 마리는 결혼에 응합니다.
결혼하고서도 헬은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면 속에 감추고 삽니다.
헬은 마리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므로 온 힘을 기울여 마리를 보살폈고
마리는 참으로 행복하였습니다.
그런 마리의 행복이 헬에게도 크나큰 기쁨이요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헬의 행복을 질투한 친구가 헬의 집으로 놀러왔습니다.
그리고 마리가 보는 앞에서 헬의 가면을 벗겨버립니다.
그 순간 가장 놀란 사람은 마리도 헬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헬의 험상궂은 얼굴은 이미 거기에 없었고 가면과 같은 인자하고 친절한 얼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 위에도 가면이 있는 것을 안 헬의 친구는 그것을 벗어봅니다.
그런데 헬의 이전 얼굴이 친구에게 있는 것이었습니다.
막스 비어의 ‘행복한 위선자’라는 책의 내용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그 행위로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차리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행위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장 정확히는 ‘욕구’로 드러납니다.
본성이 욕구입니다.
사랑하면 겉모양이 아무리 험상궂어도 속에는 사랑의 본모습이 있고
아무리 착한 행동을 해도 바라는 것이 험악하면 그 사람의 본 얼굴은 험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보지 말고 지금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살펴야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가 바로 자신의 본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의 문제는 자신들의 욕구가 아닌 행위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로만 의인이라 믿었습니다.
자신들의 행동에 자신들이 속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선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속은 음탕한 마음으로 간음하고 있었고
화나는 마음으로 살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이었지만 속은 깨끗하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겉은 죄인이지만 속은 예수님을 따르고 싶은 세리와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세리와 죄인들의 편이 될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이 아닌 속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비유말씀의 형은 아버지 밑에서 죄라는 것을 지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동생은 온갖 죄를 짓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나서야 아버지께 돌아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을 대하는 자세를 보며 분통을 터뜨립니다.
왜 죄만 짓고 온 놈을 자신보다 더 잘 대해주느냐는 것입니다.
큰아들의 죄는 이것입니다. 동생이 지은 죄를 은근히 부러워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동생은 흥청대었습니다. 이것에 화가 난 것입니다.
그도 마음으로는 그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욕구로는 이미 죄인이지만 겉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니 의인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 동생은 이제야 아버지 밑에서 죄 안 짓고 형처럼 일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곁에 있고 싶어 했습니다. 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나의 본성입니다.
남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화가 나면 나도 죄를 짓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하는 행동을 보며 화를 내는 사람은 그 죄인들이 받을 심판을 받게 됩니다.
제가 한 본당을 떠나기 직전 한 자매님이 저에게 감사인사를 왔습니다.
형제님이 외도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저에게 1년 전에 상담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매일 1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라고 했고 그분은 그것을 지켰습니다.
남편이 회개한 것은 아니지만 자매님이 변했다고 합니다.
그전엔 남편이 미워서 죽겠었는데 지금은 남편이 불쌍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 뻔히 알아도 식사도 차려주고 이불도 깔아주며
잘 주무시고 나가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적입니다.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내가 회개를 했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불쌍해보여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이 고통임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되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는 갈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가 고통임을 알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작은 아들의 길을 밟아야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고 이것을 아신 분은 성모님과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
죄를 지어본 우리들이 아직까지 죄를 짓는 사람들이 행복하겠다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본성이 죄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죄를 안 짓는 것이 더 큰 행복임을 안다면 그 사람의 가면 뒤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사랑에 대한 깨달음>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참으로 벅찬 아름다움입니다.
떳떳하게 성공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돌아가는 길이기에 더더욱 가슴 저미도록 아름답습니다.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는 일, 참으로 이토록 아름다운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회개는 죄에 대해 뉘우침과 통탄을 넘어서, 그 죄로부터 일어나 아버지께 돌아가는 행위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이라는 내면적인 통회와 ‘돌아옴’이라는 외면적인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의 ‘뉘우침’과 ‘돌아옴’ 뒤에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는 넘어지고, 무너지고, 부서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름 아닌 아버지의 집에서 받은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 미리 마련해 두었던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신발을 신겨줍니다(루카 10,20-22 참조).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방종으로 유산을 다 탕진하리라는 것을 훤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허비할 때에도 결코 그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당신을 거부하고 배신할 때마저도 결코 그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리라고 믿고 희망하며 좋은 옷과 반지와 신발을 '미리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주셨습니다.”(로마 5,8)
이것이 바로 아들을 향한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믿고 희망하며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비록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결코 멈출 수 없는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 말입니다.
바로 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새로운 삶에로 태어나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 대신 가죽옷을 입었듯이(창세 3,21) 아버지로부터 ‘옷과 반지와 신발’을 받고 자신의 신원을 되찾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가슴으로 뉘우치는 것을 넘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넘어, ‘새로운 탄생’에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으시는,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비록 보잘 것 없는 죄인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전부인 양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지극하신 사랑 말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자신의 죄보다도 더 깊은 하느님의 사랑을 보며, 상처가 깊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깊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순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갑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과 함께 이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리라.
가서,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하리라."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21.금요일 사부 성 베네딕도 별세 축일 창세12,1-4 요한17,20-26
떠남의 여정
“마지막 떠남, 죽음”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는
하느님의 얼을 지니셨기에
세상의 영화를 업신여기고 버렸도다.”(입당송)
오늘은 참 아름다운 축일입니다. 바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인 우리는 오늘 사부 성 베네딕도의
별세 축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흡사 성인의 천상축일인 죽음의 날이 축제처럼 느껴집니다.
사실 아름답게 살다가 아름답게 떠난 분들의 죽음은 슬픔보다는 모두가 축제의 선물처럼 느껴지는
기쁨 충만한 장례미사들입니다.
성인의 마지막 떠남인 아름답고 거룩한 임종장면을 소개하는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님이 쓴
<베네딕도 전기> 37장 내용은 읽을 때 마다 늘 새로운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내용중 길다싶지만 일부를 소개합니다.
‘그분은 임종하시기 엿새 전에 당신을 위해 무덤을 열어 두라고 명하셨다.
곧이어 그분은 열병에 걸리셨고 심한 열로 쇠약해지기 시작하셨다.
병세는 날로 심해져서 엿새째 되던 날 제자들에게 당신을 성당으로 옮겨 달라고 하셨다.
그분은 거기서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영하심으로써 당신의 임종을 준비하시고, 쇠약해진 몸을
제자들의 손에 의지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기도를 하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흡사 불가의 거룩한 고승들의 죽음을 보는 듯, 아니 그 이상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롭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성 프란치스코 <태양의 노래>에 나오는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음조차 선물로 감사찬미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임종도 참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이 아름답습니다.
문득 가톨릭 교회의 3대 거장, 성인 경지에 이르렀던 문학에 최민순 신부, 음악에 이문근 신부,
성서에 선종완 신부 세분이 생각납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하는 성가에, 강론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퇴장성가는 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노래를
불러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런 준비가 성인의 말씀처럼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초연한 삶을,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게 합니다.
저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이 프란치스코 수사입니다.
저에게는 성 요셉, 성 베네딕도, 성 프란치스코 세 수호성인이 있으며, 앞에서는 성 요셉이 좌우 양편에는
성 베네딕도와 성 프란치스코가 있습니다.
더불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자작 좌우명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기다리는 정주의 산, 성 베네딕도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향해 맑게 흐르는 강, 성 프란치스코”
이렇게 사는 것이 제 소박한 소원입니다. 이어지는 임종후 성인의 환시를 본 두 형제의 증언입니다.
말그대로 하늘길을 따라 아버지의 집으로 귀가하는 성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그분의 방에서부터 동쪽을 향해 하늘에 이르기까지 똑바로 나 있는 길을 보았는데,
그 길에는 양탄자가 깔려 있고 수많은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러자 그 위에 빛나는 옷을 입은 존엄한 분이 나타나시어 이길이 누구를 위한 길인지 알겠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모른다고 하자, “이 길은 주님께 사랑받는 베네딕도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다”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시더라는 것이다.’
이래서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천상고향집으로의 귀향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희망의 죽음을 향해 사는 이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제와 같은 삶을,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것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떠남의 여정이 아름다울 때, 마지막 떠남인 죽음도 아름다운 축제일 수 있습니다.
정말 잘 살았는가는 공동체에 남긴 결과를 보면 압니다.
공동체에 평화의 일치를 남겼느냐 혹은 분열의 불화를 남겼느냐를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그의 평생 삶입니다.
참 좋은 명품인생을, 선물인생을 살았는지는 성 베네딕도처럼 죽음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사실 성 베네딕도의 생애를 보면 떠남의 여정임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누르시아 고향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수비아코로, 수비아코에서 몬테가시아노로, 마지막 몬테가시아노에서
천상고향의 죽음의 떠남으로 요약되는 생애입니다.
성인의 죽음의 떠남을 노래하는 미사중 부르는 부속가 전반부도 아름답습니다.
“새빛 선물 가져오는 위대하온 지도자를 기념하는 안식일,
성총받은 그 영혼이 노래하는 찬미가는 마음속에 울리네.
동쪽길로 올라가는 아름다운 성조 용모 감탄 울려 퍼지네.”
오늘 우리는 복음과 독서에서 떠남의 모범인 예수님과 아브라함을 만납니다.
십자가의 길 죽음에 앞서 예수님의 마지막 고별기도(요한복음17장)가 감동적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남은 모든 믿는 이들을 위한 고별기도가
오늘 복음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믿는 이들 모두의 일치를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이요 이를 위해 우리에게 남겨 주신 최고의 선물이
바로 이 거룩한 성체성사 미사입니다.
제1독서의 아브라함이 떠남의 장면도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겠고,
‘너는 복이 될 것이다’(you will be a blessimg).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이어지는,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 다섯 살이었다(창세12,4)’ 라는 대목이 신선한 감동입니다.
말그대로 떠남의 여정에 충실했던 75세 고령의 나이에 상관없이 영원한 현역의 영원한 청춘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에게 주어진 축복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에 완성의 여정중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삶자체가 복이 었던 예수님처럼, 아브라함처럼, 세상의 복이 되어 살다가 떠나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삶이겠는지요!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아름다운 떠남의 여정을 살 수 있도록 좋은 도움을 주십니다.
강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떠남의 여정이 되기를 소망하며 쓴 좌우명시 일부를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3/22(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 출애굽기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가르침, 그리고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요구되는 공감과 배려. 이 모든 것이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탕자의 입장에서 용서를 받아야 하는 사람이고, 때로는 맏아들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공감이 삶 속에서 실천되기를 바랍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조재형 신부)
2. 내가 회개를 했다면 죄를 짓는 사람들이 불쌍해보여야 합니다.
죄 짓는 것이 고통임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없는 사람이 회개한 사람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되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은 삶으로는 갈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죄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가 고통임을 알기를 원하실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작은 아들의 길을 밟아야합니다.
죄를 짓지 않으시고 이것을 아신 분은 성모님과 예수님밖에 없으십니다.(전삼용 신부)
3. 시나이의 성 이사악은 말합니다.
“자신의 죄를 아는 이가 기도로 죽은 이를 살리는 이보다 위대하다.
~ 자기 자신 때문에 한 시간 동안 우는 이가 온 세상을 통치하는 이보다 위대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이가 천사들을 보는 이보다 더 위대하다.
바로 이러한 회개를 두고 오늘 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뻐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가톨릭 교회의 3대 거장, 성인 경지에 이르렀던 문학에 최민순 신부, 음악에 이문근 신부,
성서에 선종완 신부 세분이 생각납니다.
제 장례미사때 입당성가는 “오 아름다워라”로 시작하는 성가에, 강론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고백시로, 퇴장성가는 위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태양의 노래를
불러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이수철 신부)
3/22(토)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루카 15,18)
주님!
죽어 눕혀서가 아니라 살아서 제 발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소서.
뉘우치고 돌아가서 행동으로 죄를 고백하게 하소서.
뻔히 알면서도 믿어주시고 기다려주시는 죄보다 더 깊은 아버지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돌아서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2일(토) 7시10분 -
'매일미사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묵]2025년 3월 24일 월요일[(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3.24 |
---|---|
[매묵]2025년 3월 23일 주일[(자) 사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5.03.23 |
[매묵]2025년 3월 21일 금요일[(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3.21 |
[매묵]2025년 3월 20일 목요일[(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1) | 2025.03.20 |
[매묵]2025년 3월 19일 수요일[(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신부님 강론 4개 (0) | 202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