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3월 21일 금요일[(자) 사순 제2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숨겨진 그물에서 저를 빼내소서. 당신은 저의 피신처이시옵니다.
본기도
저희를 거룩한 참회 생활로 깨끗하게 하시어
다가오는 축제를 성실한 마음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7,3-4.12-13ㄷ.17ㄹ-28
3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4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12 그의 형들이 아버지의 양 떼에게 풀을 뜯기러 스켐 근처로 갔을 때,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네 형들이 스켐 근처에서 양 떼에게 풀을 뜯기고 있지 않느냐?
자, 내가 너를 형들에게 보내야겠다.”
17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뒤따라가 도탄에서 그들을 찾아냈다.
18 그런데 그의 형들은 멀리서 그를 알아보고,
그가 자기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
19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20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21 그러나 르우벤은 이 말을 듣고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낼 속셈으로,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하고 말하였다.
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 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
르우벤은 그들의 손에서 요셉을 살려 내어
아버지에게 되돌려 보낼 생각이었다.
23 이윽고 요셉이 형들에게 다다르자,
그들은 그의 저고리, 곧 그가 입고 있던 긴 저고리를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졌다. 그것은 물이 없는 빈 구덩이였다.
25 그들이 앉아 빵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보니,
길앗에서 오는 이스마엘인들의 대상이 보였다.
그들은 여러 낙타에 향고무와 유향과 반일향을 싣고,
이집트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26 그때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동생을 죽이고
그 아이의 피를 덮는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27 자, 그 아이를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 버리고,
우리는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자.
그래도 그 아이는 우리 아우고 우리 살붙이가 아니냐?”
그러자 형제들은 그의 말을 듣기로 하였다.
28 그때에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가다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내었다.
그들은 요셉을 이스마엘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이 이루신 기적을 기억하여라.
○ 그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켜, 양식을 모두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이라네. ◎
○ 사람들이 그의 발에 족쇄 채우고, 목에는 쇠사슬 옭아매었네. 마침내 그의 말이 들어맞아서, 주님 말씀이 그를 보증하셨네. ◎
○ 임금이 사람을 보내 그를 풀어 주고, 민족들의 통치자가 그를 놓아주었네. 그를 왕궁의 주인으로 내세워, 모든 재산을 다스리게 하였네. ◎
복음 환호송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45-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45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46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의 종들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거룩한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고
그 신비를 믿음과 선행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영원한 구원의 보증인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가 주님의 뜻을 성실히 실천하여
약속하신 구원을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의 백성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선행에 힘쓰고
언제나 주님의 보호를 받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성경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구약의 요셉과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삶을 보면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아들 형제 중에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결국 요셉을 은 20닢에 팔아버립니다. 예수님도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닢에 팔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했지만, 나중에 그 배신이 더 큰 구원의 길이 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당해 이집트로 팔려 가고, 예수님은 제자에게 배신당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배신의 원인을 보면 비슷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질투받았고,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와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기들보다 더 뛰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보면 실력 좋은 사람이 미움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조직에서 튀면, 그를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깁니다.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간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감옥에서도 꿈을 해석하면서 기회를 잡았습니다. 결국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요셉과 예수님에게서 한가지 공통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좌절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시면서 끝까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실패와 어려움을 겪을 때, 이 요셉과 예수님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화를 준다. 성령을 받아라.”
우리는 작은 상처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데,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한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용서란 뭘까요? 용서는 약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용서는 내가 더 강하기 때문에, 그리고 더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한 건 그가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이미 그 아픔을 극복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인생에서 억울한 일,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요셉과 예수님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복수를 선택할 수도 있고, 용서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 더 위대한 길인지, 한번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은 배신당하고, 고난을 겪었지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구원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때로 요셉의 형들처럼 질투할 수도 있고, 유다처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요셉처럼 용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지금의 삶에서 배신과 상처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2. 전삼용 요셉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어쩌면 성체의 적을 만드는 교리교육?
오늘 복음은 ‘못된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와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포도밭 주인 외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죽일 수도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이 주시는 이익만을 생각하지, 그분이 우리에게 없애려고 하시는 고통의 원인을 우리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새입니다.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죠. 이 참새가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았던 새라는 것을 몰랐나요? 그리고 참새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참새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3월 20일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사람을 이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참새는 다른 야생동물들과 달리 사람들의 집 근처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야생동물들은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꺼리지만, 참새는 사람들과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참새의 자연적인 적들로부터 참새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새에게는 뱀, 족제비, 매와 같은 자연적인 적들이 존재하는데, 이들 모두 사람을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호막처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을 둘러보면, 참새들이 지붕 밑에서 둥지를 틀 수 있는 장소들이 많습니다.
또한, 농지와 같은 환경은 참새들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중요한 장소인데, 사람들은 자연적인 적들을 차단하고 집짓기를 쉽게 만들어 주며, 먹이를 풍부하게 제공한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 우리는 참새가 우리와 함께 살며 자연의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일본의 나가노현의 산악지대는 원래 참새가 많이 살던 곳이었으나, 사람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지 않게 되면서 참새들도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흥미로운 참새의 비밀은, 참새가 농업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참새는 때때로 모여서 곡식을 쪼아먹기도 합니다. 농부들에게는 마치 쌀 도둑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참새가 사라지면 농업에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고 합니다. 참새가 먹는 해충들이 증가하면서, 오히려 농업에 큰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는 1958년, 마오쩌둥 주석이 쌀 수확량 감소를 보고하며 “쌀 이삭을 쪼아먹는 참새는 해로운 새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베이징의 모든 농부와 노동자들이 참새를 없애는 작전을 시작했죠. 그 결과, 2억 마리 이상의 참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고 쌀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4,0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참새를 잡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참새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입니다. 우리는 세계 어디에서나 참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참새의 날'이 존재하는 이유죠. 참새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가까운 이웃이지만, 매우 경계하고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그 이웃은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이웃인 참새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참새를 해치는 시대는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새와 함께 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참새와 함께하는 삶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원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존재들을 존중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 알아봄, 스브스뉴스, 유튜브]
예수님은 인간에게 이 참새와 같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만 싫어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면 그분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예전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저의 경험으로 알아보자면, 바로 이 세 가지 물음이었습니다.
1. “나는 누구의 자식인가?”, 2.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3.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어머니가 의심될 때 다른 것은 고통의 원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사랑받고 있는가?’ 또한 사랑으로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라는 믿음이 있어도 자신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존감’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때 이것보다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뭐 하고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을 때는 내가 사제가 되어야 하는지, 세상에서 결혼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를 때였습니다.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것이 어머니가 주는 ‘밥’입니다. 젖을 먹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 밥을 통해 내가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 밥을 통해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받아들여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합니다.
부모의 사랑만으로는, 그러나 내가 진짜 누구인지, 내가 진짜 사랑받는 존재인지, 내가 진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하나의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진짜 만들고 낳으신 창조자를 만나야 합니다. 부모는 나에게 다시 생명을 넣어줄 수 없습니다. 그 창조자가 이 세 가지 문제를 다 해결해주는 당신 ‘밥’을 주시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입니다.
저는 구역 판공을 하며 냉담자들을 만나 면담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하나같은 특징은 그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 곧 참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체의 적이 되는 교리교육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왜 참새와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성체가 주는 효과를 제대로 이해시켜야 합니다.
냉담자들이 발생하지 않게 만들려면, 교회에서 오늘과 같은 포도밭 소작인이 만들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가장 강력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3. 이영근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금요일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울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20. 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17,5-10 루카16,19-31
하느님 중심의 삶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편51,12)
사람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과연 사람이 희망이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후반부 말씀이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사람이, 내가 문제입니다.
누구나 정도의 차이일뿐 문제아問題兒요 살아 있는 생물生物의 나는 나도 모릅니다.
정치 역시 생물이라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결국 하느님 중심의 삶에로 귀결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끊임없는 기도의 삶이,회개의 삶이 답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요, 역시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이 답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가 좋은 깨달음을 줍니다.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이라면 설사 세상이 나를 돕지 않아도 하늘이 나를 돕는다.”<다산>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임했으니 두 마음을 품지 말고 근심하지도 말라.”<시경>
정말 이런 믿음으로 사는 자가 하느님 중심의 올곧은 삶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갈림없는 순수한 한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두 삶의 양상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과연 나는 어느쪽입니까?
하느님을 떠난 무지한 나 중심의 삶을 사는 자에 대한 묘사요, 이사야를 통해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 떠나 있다.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이런 내면의 삶이라면 아무리 좋은 외적 환경이라도 내면은 지옥일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삶을 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하느님을 내내 잊거나 잃은, 생각이 없는, 영혼이 없는, 의식이 없는 순전히 무지한
자기 중심의 욕망 추구의 육적 삶을 사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부자가 그러합니다.
부자의 내면이 이러할 것입니다만 그는 이것도 모를 것입니다.
모르는 이는 알려줘도 모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의 지혜에 이르기는 참 가깝고도 한없이 먼 길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내적공허는 외적 화려함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내적공허는 여전할 것입니다.
그림같은 선명한 대조가 우리의 생각을 묻습니다.
어떤 부자는 익명인데 가난한 거지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라자로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를 뜻하며 ‘가난한 이’에게는 잘 들어맞습니다.
정말 어떤 부자가 사람이었다면 그에게 구원의 표징과도 같은 라자로와 나눴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상실한 괴물같은 어떤 부자에게 라자로는 그냥 하나의 사물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이런 가난한 이웃들과 무관한 익명의 괴물같은 내면이 황폐된 부자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인 하느님 중심의 구원의 삶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해에도 걱정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런 사람이,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사람이 진짜 행복하고 자유로운, 내적 부요의 살아 있는
참 사람입니다. 이런 뿌리없이, 중심없이 표류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이런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어떤 부자가 이러했을 것이며, 반면 외관상 가난했던 문앞의 라자로는 역설적으로 하느님께
깊이 뿌리내린 가난한 부자요, 내적 자유와 평화를 누렸으리라 생각됩니다.
사후 이들의 처지는 완전히 바뀝니다. 불길 속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어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 호소합니다.
아브라함 곁에는 라자로가 있습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요 회개요 사랑의 실천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으니 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형성된
단절과 불통의 구렁입니다.
어떤 부자는 다급하게 라자로를 자신 집에 보내어 다섯 형제가 고통스러운 이곳으로 오지 않도록
경고하게 해 달라고, 그리하여 그들이 회개하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만 아브라함의 대답은
지극히 냉철합니다.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회개가 어려운 무지로 굳어진 완고한 마음들인지 오늘날 불신의 사람들을 보면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과연 거룩한 은총의 사순시기, 나는 누구인지 거듭 묻게 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끊임없는 회개와 배움을 통한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의 여정에 항구하도록 도와줍니다.
“주님,
구원의 기쁨을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주소서.”(시편51,14). 아멘.
3/21(금)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는 때로 요셉의 형들처럼 질투할 수도 있고, 유다처럼 배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요셉처럼 용서할 수도 있고,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혹시 지금의 삶에서 배신과 상처로 힘들어하고 있다면, 그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조재형 신부)
2. 3월 20일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우리가 몰랐던 참새의 비밀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중국에서는 1958년, 마오쩌둥 주석이 쌀 수확량 감소를 보고하며 “쌀 이삭을 쪼아먹는 참새는 해로운 새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따라 베이징의 모든 농부와 노동자들이 참새를 없애는 작전을 시작했죠. 그 결과, 2억 마리 이상의 참새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해충이 급격히 늘어나고 쌀은 잘 자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4,00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기근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은 참새를 잡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어떤 부자는 익명인데 가난한 거지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라자로 이름 뜻은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를 뜻하며 ‘가난한 이’에게는 잘 들어맞습니다.
하느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사람이 진짜 행복하고 자유로운, 내적 부요의 살아 있는
참 사람입니다. 이런 뿌리없이, 중심없이 표류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세상입니다.
삶이 두렵고 불안한 것은 이런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이수철 신부)
3/21(금)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참으로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1일(금) 8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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