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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3월 23일 주일[(자) 사순 제3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파스카 성야에 그리스도교 입문 성사들을 받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준비로 첫째 수련식을 이 주일에 거행한다. 이 수련식에서는 고유 기도문과 고유 전구를 사용한다.>

오늘은 사순 제3주일입니다. 거룩하시고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아들딸들을 결코 버려두시지 않고 아버지의 이름을 알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시어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끊임없이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시편 25(24),15-16
제 발을 그물에서 빼내 주시리니, 제 눈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나이다. 저를 돌아보시어 자비를 베푸소서. 외롭고 가련한 몸이옵니다.
<또는>
에제 36,23-2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어, 온 세상에서 너희를 모으리라. 너희에게 정결한 물을 뿌려, 모든 부정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리라.

본기도

하느님,
온갖 은총과 자비를 베푸시어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 탈출기의 말씀입니다.3,1-8ㄱㄷ.13-15
그 무렵 1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인 장인 이트로의 양 떼를 치고 있었다.
그는 양 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다.
2 주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한가운데로부터 솟아오르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났다.
그가 보니 떨기가 불에 타는데도, 그 떨기는 타서 없어지지 않았다.
3 모세는 ‘내가 가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아야겠다.
저 떨기가 왜 타 버리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4 모세가 보러 오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고,
떨기 한가운데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5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6 그분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7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8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13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분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15 하느님께서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신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3-4.6-7.8과 11(◎ 8ㄱ)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정의를 펼치시고, 억눌린 이 모두에게 공정을 베푸시네. 당신의 길을 모세에게, 당신의 업적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네.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

제2독서

<모세와 함께한 백성의 광야 생활은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0,1-6.10-12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2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3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4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6 이 일들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로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10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11 이 일들은 본보기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데,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마태 4,17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9
1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3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5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6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7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8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교회에 통찰의 은총을 주시어, 세상 일에서 소외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읽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용감히 전할 수 있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통치자이신 주님, 공직자들에게 성령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어,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깊이 성찰하고, 사회적 우애와 공동선 실현을 위하여 온 힘을 다하게 하소서.

3. 노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고령 사회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을 굽어보시어, 노인에 대한 사회 인식이 올바로 이루어지고, 세대 간 이해와 존중으로 그들의 삶이 은혜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본당 단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의 샘이신 주님, 본당 사도직 단체에 강복하시고 이끌어 주시어, 언제나 굳건한 믿음으로 사랑의 봉사를 실천하며 이웃과 사회의 복음화를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이 화해의 제사를 굽어보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도 형제들을 용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또는>
<사순 감사송 2 : 참회>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자녀들의 마음을 다시 깨끗하게 하시려고
구원과 은총의 시기를 특별히 마련하시어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나 덧없는 일을 피하고
영원한 구원을 향하여 힘쓰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84(83),4-5 참조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예수님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잘라 버리시지 않습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라고 하느님께 간청하시며,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시는 포도 재배인이십니다.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영원한 생명의 보증으로 이 세상에서 천상 양식을 받고 간절히 비오니
저희가 이 성사의 신비를 날마다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을 믿는 이들의 마음을 이끄시고
주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자비로이 은총을 베푸시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의 계명을 완수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일

 

트렌드 코리아 2025’에서 공진화라는 주제를 읽었습니다. 공진화란 생태계에서 여러 생명체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발전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생태계에서는 벌과 꽃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함께 발전합니다. 기업도 생태계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최근에 기업은 서로 협력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서로 발전하는 모델을 만들고 있습니다. 삼성은 텔레비전의 디스플레이를 엘지의 제품으로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애플과 앱 개발자들이 협력하며 더 나은 기술을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이 개념을 신앙에 적용해 보면, 세상의 공진화와 신앙의 공진화가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 즉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원리에 따라 움직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은 단순히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해방되었고, 광야를 지나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다져 나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의 삶이 힘들 때면 이집트에서의 생활을 떠올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 아는 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잊고 우상을 숭배하다가 결국 큰 시련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불 뱀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벌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였고, 모세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서 구리 뱀을 만들었습니다. 모세가 만든 구리 뱀을 본 사람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갑니다. 신앙이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요구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공진화는 단순한 적응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모세가 율법을 통해 이스라엘을 이끌었다면, 예수님은 사랑과 은총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에게 회개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에서 우리는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하게 살던 아들이 결국 깨닫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쁨으로 그를 맞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도 사랑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도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순간에 회개했던 죄인은 예수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앙의 공진화는 바로 이러한 과정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서는 단순히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는 과정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신앙을 키워 갔듯이, 우리 신앙도 회개를 통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신앙의 공진화를 이뤄 나갈 것인가? 우리 자신부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신앙이 약해지고, 세상에 휩쓸려 하느님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시대에 적응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라 변화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단순히 전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삶 속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가족 안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실천할 때, 그것이 곧 신앙의 공진화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을 따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회개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음루카 13,1-9

사순 제 3주일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고!

 

예수님 시대 통치자들 입장에서 가장 골치아픈 지역이 있었다면 다름 아닌 갈릴래아 지방이었습니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고,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비교가 될 정도로 낙후된 지역이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로마 식민 통치나 허수아비 헤로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폭동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었으니,

눈엣가시 같은 지방이기도 했습니다.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갈릴래아 대학살 사건도 그 지방 사람들이 폭동을 음모했다는 정보가

빌라도의 귀에 입수되어 초래된 사건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대학살 사건 때문에 갈릴래아 지방의 분위기는 흉흉했었는데, 하필 그즈음에 실로암 연못

근처에 있는 높은 탑이 무너져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압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대학살 사건이나 실로암 탑 붕괴로 인한 압살 사건에 대해서

하느님으로부터의 진노 내지는 책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실수와 부족함으로 인해 저질러진 인재를 하느님과 연결시키지 말라고

엄중히 분부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이 자주 직면하게 되는 불운은 하느님의 책벌이라기보다는 경고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더불어 갑작스레 닥친 날벼락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보다 악해서 그런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아남았다고 안심하지 마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불완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에게 불행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행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 메시지로 여겨야겠습니다.

시련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해야 마땅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은 대부분 지금 현재 내 삶이 크게 불행하지 않고, 크게 요동치지 않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며,

함부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는 조만간 큰코다칠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불행은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순간에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류 전체를 향한 종말도 그렇게 번개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노력입니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고,

순간순간 정성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자주 바라보고, 어쩔 수 없는 죄투성이 인간임을 주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하며,

주님 은총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홀로 설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틈만 나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의 은총에 호소함을 통해 은총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7)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복음루카 13,1-9
사순 제 3주일

<회개란 ‘믿는 일’,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여러 고을을 들러 가르치실 때의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4.)

여기서 '회개'가 강조됩니다.
사실 ‘회개’란 먼저 '죄'를 지었음을 알아야 가능합니다.
그런데 갈릴래야 사람들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고, 왜 그것을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대체 ‘회개’란 무엇을 말하며, ‘죄’란 무엇을 말할까요?

오늘 제1독서는 이를 밝혀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제1독서의 맥락 안에서 ‘죄의 본질’과 ‘회개의 본질’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먼저, ‘죄’란 무엇을 말하는가?
대체 무엇이 죄인가?

성경에서 ‘죄’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과 관련하여 크게 ‘두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무지의 죄’이고, 또 하나는 ‘망각의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무지의 죄’를 깨우쳐줍니다.
곧 ‘하느님을 모르는 죄’입니다. 

사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시기 전까지는 그들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자신들의 성조들과의 약속을 맺으신 하느님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후손들과는 인격적인 만남이 없었고 그들은 하느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집트인을 살해하고 미디안으로 도피해서 양을 치고 있을 때, 호렙 산에서 나타나신 하느님께서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한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탈출 3,4)
얼마나 놀랬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살 떨리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모세인 줄을 아무도 모르는 이곳에서, 피하여 도망해 온 이곳에서, 일종의 수배자 신세인 자신을 아는 이가 있다니!
더구나,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탈출 3,5)하시니, 참으로 황당하고 기절초풍할 일이 아닌가?
이 귀양지가 무슨 거룩한 곳이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아버지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탈출 3,6)


그러니 그분은 아직 성조들의 하느님이실 뿐, 그 후손들과는 직접 관계를 맺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곧 그들은 아직 하느님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가려고 내려왔다고 하십니다. (탈출 3,7-8)


그리고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있는 나다.
...이것이 영원히 불릴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대대로 기릴 나의 칭호이다.”
(탈출 3,14-15)

여기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우선 세 가지를 밝혀줍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없는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재 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이방인들의 신처럼 이름의 한계 안에 갇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무한하신 분’이라는 것이요, 셋째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하느님으로 ‘늘 계시는 분’임과 동시에 ‘장차 보게 될 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실제로 파라오에게 행한 열 재앙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고, 또한 홍해를 건네는 탈출을 통해 당신께서 구원자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시고 체험시켜주십니다. 

나아가, 손을 잡아 붙들어 주시고 계약을 맺으시고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그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고, ‘무지의 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이미 체험하고 알게 된 그분을 끊임없이 망각하고 배신합니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빠져나온 이들 중에서는 칼렙과 여호수아만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고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졌으며, 마침내는 이방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떠나갔으며, ‘망각의 죄’에 떨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바빌론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제1독서의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주 하느님께서 저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저희와 함께 계시며, 저희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며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하느님께 맡겼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라는 바위에서 영적 양식과 음료를 마시고 그리스도인이 된 ‘코린토인들’에게, 조상들이 모세와 함께 바다를 건너는 세례를 입고 구원자이신 주 하느님을 알게 되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으나 또 다시 광야에서 하느님을 망각하고 죄를 지어 죽어 널브러졌던 사실을 본보기로 주었음을 환기시키며, 종말에 다다르기까지 죄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고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4.)

이는 우리가 멸망하게 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죄가 무엇인지’를 보았습니다.

곧 그것은 하느님께서 ‘구원자 주님’이심을 모르는 ‘무지의 죄’와 그것을 알고도 무시하고 배척했고 거부한 ‘망각한 죄’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인가?

사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래아에서 맨 처음으로 ‘복음’을 선포하실 때, 동시에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회개란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그렇습니다. 

여기에서 ‘회개’란 ‘믿는 일’입니다. 
곧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는 일인가? 
그것은 우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기쁜 소식)’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신 주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왜 이 선포가 ‘복음’(기쁜 소식)이 되는가?

그것은 구체적으로, 우리 자신이나 세상이 다스리는 나라, 곧 죄와 속박으로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에덴에서 벌어진 축복(원복)의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상의 죄와 압제로부터의 ‘해방의 기쁜 소식’임과 동시에 그 ‘축복의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서 '가까이 왔다'는 말의 원어의 뜻은 ‘손아귀 안에 있다. 손에 들려 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손에 들려 예수님과 함께 왔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선언이었습니다. 

혁명적인 전환을 촉구하는 선언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메시아와 메시아가 가져올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고 희망하고 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메시아 대망 사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선구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올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그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선언이었습니다.
자신이 하느님이 아니고는 말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선언은 그 나라를 들고 온 예수님 당신 자신이 ‘메시아’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로 당신을 구원자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이 ‘복음(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 곧 ‘예수님이 구원자 주 하느님이요, 동시에 당신 손에 들려 함께 가져온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기쁜 소식(복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믿지 않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윤리적인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 역시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거나 망각하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 '복음'이 이루어졌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복음’을 믿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결국 '회개'란 무지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다스림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희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요,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 주님께서는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우리의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고 돌보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소서.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망각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사랑을 거부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그 사랑을 베풀며 증거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22.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

                                                             “하닮의 여정”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새벽 성무일도 독서기도시 시편 136장 26절까지 매 구절마다 반복된 후렴이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였습니다.

자비하신 주님을 찬미함으로 시작된 하루입니다.

 

오늘은 그 유명한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이라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자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환히 보여주는 복음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은 대자대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마음이자 하느님의 얼굴입니다.

바로 우리 삶은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 자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오늘 화답송 후렴도 자비하신 주님을 노래합니다.

미카 예언자도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 해 주시리라.”

 

자비하신 주님을 고백한후,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사, 또 저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달라 우리를 대신하여 기도하는 미카 예언자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비를 배워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평생 배워가며 자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의 평생숙제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공부는 덕을 쌓아가는 것이다. 덕이 있는 사람 곁에는 반드시 사람들이 모인다.”<다산>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지위를 얻고, 녹을 받고, 명성을 얻고, 장수를 누린다.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받는다.”<중용>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에게 더해가는

참 좋고 큰 덕이 바로 애덕愛德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요?

바로 오늘 복음이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또 우리는 누구인지 거울처럼 비춰주는 복음입니다.

마치 하느님 자비의 거울같은 복음입니다. 부단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입니다.

 

자기 몫을 챙겨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작은 아들을 회개로 이끈 것은 바로 자비로웠던

아버지의 추억이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자기 중심의 삶이 참 자유가 아닌 방종이었음이 확연히 드러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극한의 곤궁한 처지에 있던 작은 아들은 비로소 제정신이 들고 아버지를 생각하며 회개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철저한 회개를 통해 제정신을 찾은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합니다.

은총의 사순시기, 부단한 회개를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의 집으로 귀향하는 홈컴잉(home-coming)의  시간입니다.

 

오매불망 날마다 길목에 서서 작은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보자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한, 제 집무실에 걸려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입니다.

가엾이 여기는 이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느님은 바로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작은 아들의 회개의 고백을 듣는둥 마는둥 아버지는 당신 종들에게 명령하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찐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 마음이, 이 사랑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이요 사랑입니다.

이리하여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했으니 바로 회개한 우리들을 위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거지같은 삶에서 회개를 통해 자녀로서의 고귀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같은 우리들입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상징하는 작은 아들이요 우리들이라면, 평생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를 충실히 섬겨온

큰 아들은 당대의 의롭다 자부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물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아우의 귀향을 반기기는커녕 격한 반응을 보이는 큰 아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여지없이 폭로되는 큰 아들의 내면의 본색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자녀답게 산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종처럼 살았던 큰 아들입니다.

아우를 저 아들이라 부르며 적대적인 그 언행이 참으로 목불불견, 무자비합니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이 살았으면서도 마음은 멀리 떠나 있었음을 봅니다. 

 

제대로 ‘자녀답게’가 아닌 그냥 ‘종처럼’ 생각없이 아버지를 섬겼던 것입니다.

사람의 속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모범 신자의 정체일 수 있습니다.

 

큰 아들을 달래는, 회개를 바라시며 호소하시는 아버지의 반응입니다.

두 아들 사이에서 전전긍긍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두 아들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배웁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아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큰 아들, 작은 아들, 예수님 중 누구를 닮았는지요?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거룩한 미사잔치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도움이 됩니다.

 

“하늘의 하느님을 찬양들 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26). 아멘.


3/23(일) 사순 제3주일, 되새김 구절

 

1. 세상의 공진화는 적자생존을 따르지만, 신앙의 공진화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  회개의 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바로 신앙의 성장입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회개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청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양승국 신부)

 

3. 결국 '회개'란 무지의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옴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그 다스림으로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이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또 하나의 아들,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큰 아들같은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큰 아들, 작은 아들, 예수님 중 누구를 닮았는지요?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거룩한 미사잔치에 참여하도록 합시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하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도움이 됩니다.(이수철 신부)

 

3/23(일) 사순 제3주일, 오늘의 기도

 

복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멸망할 것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며,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3일(일) 8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