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3월 24일 월요일[(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본기도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15ㄷ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
○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
○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비파 타며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
복음 환호송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정성껏 봉헌하는 이 예물을 받으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를 깨끗하게 하시고
모두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간절히 기도하는 백성을
주님의 오른손으로 지켜 주시고 깨끗하게 하시어
현세의 위로를 받으며 미래의 행복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생명의 탄생은 38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타난 생명은 죽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생명이 단성생식, 다시 말하면 자기복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환경이 변화면서 단성생식으로는 적응할 수 없었던 생명은 유성 생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성 생식을 하면서 생명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성 생식을 통해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성 생식은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부모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다양한 생명 형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유성 생식에서는 같은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도 서로 다른 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식물종이라도 유성 생식을 통해 다양한 꽃의 색깔과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한 생명체의 다양성을 넘어,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더 강력한 생태계를 만들고, 각 생명체가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다양성은 우연의 산물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는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조화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와 고향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 바세바와 같은 이방인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제외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가 구원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에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권위와 힘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나무를 손질하던 목수의 아들”로 여겼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제한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그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편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강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시기심은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통해 서로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모두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이방인 여인들의 이야기는 환영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구원의 계획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4,24-30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길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 속에 강력히 각인된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자부심을 지닌다는 것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택받지 못한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이민족들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 동물 중에서도 개로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혈주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입고 다니던 복장부터 남달랐습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웠으며 치렁치렁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옷 여기저기 성구갑이라고 성경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달고 다녔는데,
그것을 마치 큰 자랑거리, 훈장처럼 여겼습니다.
성구갑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인지 알아? 라고 외치는 표시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작스레 공식 석상에 섰던 한 장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습니다.
그냥 편안한 복장으로 출연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그가 입고 나온 군복 전면이 가관이었습니다.
그간 받은 훈장이란 훈장은 다 달고 나왔습니다. 그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 옛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자부심 가득한 유다인들을 절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 플레이 앞에 참지 않으십니다.
거침없이 당신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가감 없이 쏟아놓으십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이 말씀 끝에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동물도 아닌데, 예수님을 슬슬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합세해서 그분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일종의 살인미수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살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실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시국 앞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창궐하는 이 순간,
또 다른 예언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고,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처절한 기 싸움이 하루빨리 종식되는, 그래서 화해와 일치, 기쁨과 평화의 날이 빨리 다가오길
큰 목소리로 간구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
(즈카 2,14))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유유히 걷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23.사순 제3주일 탈출3,1-8ㄱㄷ.13-15 1코린10,1-6 루카13,1-9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만남, 광야, 회개”
요즘 다시 묻게되는 질문입니다.
정확히 33년전 1992년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 미사때 한 강론 제목,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물음입니다.
많은 이들이 길을, 진리를, 희망을, 빛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너무나들 과격하고 극단적 분열에 대립의 골이 너무 깊습니다.
국내외 세계적 현상입니다만, 강대국 사이에 있는 우리 한국은 더 합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에 이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애국가 가사를 자주 되뇌이곤 합니다.
좌우의 극단적 대립이 해방 80년을 맞이하는데도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역사입니다.
이런 악순환의 질곡에서 벗어나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반복되는 힘들고 어둔 상황중에도 가톨릭교회의 사순시기가 큰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이 참 희망이자 참 길이요 참 빛임을 확인하고 더욱 기도와 회개의 삶에 박차를 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깨어 화해와 평화, 일치를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풍전등화, 절체절명의 나라 상황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의 모세가 깨우쳐 주는 가르침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희망이자 빛이신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만납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이런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새 힘을 받고 살고자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만남중에 만남이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제1독서 탈출기에서 모세는 불타는 떨기 속에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소명을 받으며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받습니다.
모세의 인생에 결정적 전환점이 된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시자 깨어 있던 모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화답합니다.
그대로 미사중 우리에게 일어나는 현실같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네가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신발을 벗어라.”
어디나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땅이고 이런 신발을 벗은 겸손한 자세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이어 모세는 하느님의 이름을 계시받고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양떼를 치던 모세에게 삶의 목표와 방향이 주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구원해 내는 역사에로의 투신이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저하는 모세에게 조상들의 하느님이자 “나는 있는 나다”하고 대답하며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은
한마디로 모세의 말문을 막으시고 위로하시며 격려하십니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이와 일치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씀 늘 마음에 담고 사순시기 지내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길이자 희망이자 빛이신 주님을 만나 주님의 인도따라 살아갈 때 방황하지 않습니다.
둘째, 광야인생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바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에게 배우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에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 광야인생 여정입니다.
혼자가 아닌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는 광야여정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를 통한 주님 말씀이 광야여정중인 우리에게는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 아래 있었으며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 구름과 바다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와 하나가 되었고,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고,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바로 우리 광야여정의 예형을 보여주는 이집트 탈출후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영적으로 부단히 반복되는 우리의 인생 광야여정입니다.
새모세 예수님의 인도하에 세례와 이 거룩한 성찬례의 은총으로 주님과 함께 광야여정을
무사히 통과하는 우리들입니다.
광야인생여정 통과에 성찬례 미사은총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광야여정중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일은 둘입니다.
불평하지 말고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중 어떤 이들이 투덜거렸던 것처럼 여러분도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의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섰다하면 넘어집니다.
그러므로 서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새삼 광야인생여정중 투덜거리는 불평이 아닌 감사하는 일이, 자만이 아닌 조심스런 깨어 있는 겸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감사와 겸손은 광야인생 여정 통과에 결정적인 덕목입니다.
셋째, 회개를 생활화 해야 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광야인생여정중 살아갈수록 남는 것은 기도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사순시기야말로 기도와 회개의 시기입니다.
기도와 회개를 일상화, 생활화,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회개의 일상화를 위해 수도원의 일과표도 공동전례기도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잘 나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며 잘 살아보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빌라도에 의해 변을 당한 갈릴래아 사람들과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두 번 거푸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는 깊은 깨우침이 됩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회개하라 주어진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잘살고 못살고는 도토리 키재기입니다.
예외없이 하느님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회개하라고, 기도하라고, 사랑하라고, 겸손하라고, 찬미하라고, 감사하라고 연장되는,
하루하루 날마다 선물로 주어지는 날들입니다.
오늘 복음 후반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바로 이런 진리를 보여줍니다.
흡사 포도밭 주인은 하느님, 포도밭 재배인은 예수님, 무화과나무는 우리같습니다.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자는 주인인 하느님께 애원하는 포도밭재배인은
그대로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시오.”
언제 주님이 불러갈지 모르는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삽니다.
예수님과 긴밀한 협력하에, 부단한 기도와 회개를 통해, 겸손의 열매, 사랑의 열매, 감사의 열매,
찬미의 열매를, 즉 구원의 열매를 맺으며 한 번 잘 살아보라고, 유예되는 인생입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내 삶의 무화과나무가 잘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잘 가꾸고 돌보는 일보다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광야여정중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참 좋은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잘 살게 하십니다. 아멘.

3/24(월)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시기심은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조재형 신부)
2.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고,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처절한 기 싸움이 하루빨리 종식되는, 그래서 화해와 일치, 기쁨과 평화의 날이 빨리 다가오길
큰 목소리로 간구합니다.(양승국 신부)
3.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유유히 걷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언제 주님이 불러갈지 모르는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삽니다.
예수님과 긴밀한 협력하에, 부단한 기도와 회개를 통해, 겸손의 열매, 사랑의 열매, 감사의 열매,
찬미의 열매를, 즉 구원의 열매를 맺으며 한 번 잘 살아보라고, 유예되는 인생입니다.
사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내 삶의 무화과나무가 잘 열매 맺을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
잘 가꾸고 돌보는 일보다 중요한 일을 없습니다.(이수철 신부)
3/24(월)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유유히 걷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24일(월) 9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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