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기쁘게 마셔라.
본기도
이 참회와 기도의 때에 저희 마음을 바로잡아 주시어
파스카 신비를 올바로 깨닫고 열심히 살아
형제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47,1-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이 빠진다 해도. ◎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이 세상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께서 주신 이 예물을 봉헌하오니
이 제사가 저희 육신의 삶에 도움이 되고
저희 영혼에는 불멸의 영약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천상의 성사로 저희 마음을 깨끗하고 새롭게 하시어
저희 죽을 몸이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이 백성이 언제나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게 하시고
인자로이 돌보시어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이스라엘에는 생명을 풍요롭게 해 주는 갈릴래아 호수와 생명이 살 수 없는 사해(死海)가 있습니다. 먼저 갈릴래아 호수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요? 갈릴래아 호수는 물이 흘러가는 곳입니다. 이 호수는 주변에 생명을 주는 수원으로, 농경지에 물을 공급하며 사람들과 생명체들이 함께하는 곳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물이 흘러가는 것, 즉 나눔과 소통의 의미입니다. 나눌 때 진정한 생명이 자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서로 소통하고 나눌 때, 그 안에서 진정한 연대감과 사랑이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사해는 어떨까요? 사해는 물을 흘려보내지 않고, 오직 흡수만 합니다. 그럼에도 사해는 말 그대로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사해는 비유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의 사랑과 은혜를 움켜잡고 나누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고독과 공허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고, 베풀고, 사랑할 때 비로소 생명이 시작된다고 하겠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8장에서 나온 말로, "가장 높은 선(善)은 물과 같다."라는 뜻입니다. 노자는 물의 덕(德)을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를 설명합니다. 물의 덕은 다음과 같습니다. 겸허함(謙虛),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가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겸손하게 흐르는 물처럼, 인간도 교만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남을 돕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로움(利),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강제적으로 어떤 것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바위를 깎고 길을 만듭니다. 이는 ‘유연한 강함’을 의미합니다. 무위자연(無爲自然), 물은 인위적으로 어떤 틀에 맞추려 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을 따릅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정신을 실천하는 존재입니다. 융통성과 적응력, 물은 어떤 그릇에 담기든지 그 형태에 맞춰 변화합니다. 이는 환경에 순응하고 조화를 이루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청정함과 정화(淨化), 물은 더러운 것을 씻어내고 맑게 합니다. 우리도 마음을 깨끗이 하고 타인을 정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겸손과 사랑과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물처럼 살아가는 삶은 곧 겸손과 사랑, 그리고 이웃을 위한 희생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물과 관련한 예수님의 이야기가 2번 나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켰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표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고, 어머니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도 우물가에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지금 네가 마시는 물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생명의 물이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샘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물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물이 힘이 있고, 물이 영적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물을 그렇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물은 단순히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가까이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고 말라 버려지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아야만 영적으로 충만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38년 동안 병고에 시달렸던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꼭 물속으로 들어가서 씻어야만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면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를 주님과 함께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는 통로입니다. 기도, 전례 참여, 단체 활동 등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주님의 샘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특히 성체성사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될 수 있고, 주님의 크신 사랑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체성사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몸과 피를 나누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눔의 궁극적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고 소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갈릴래아 호수처럼 사랑을 흘려보내고, 서로를 보살피고 돕는 삶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물처럼 흘려보내는 삶을 살면, 우리 주변에 많은 이가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함께 사랑을 나누고 소통하는 삶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요한 5,1-16
순종을 위해 가슴을 찢은 만큼 은총이 스며든다
저는 항상 교회에 반항하며 살았습니다. 처음에 사제가 되고자 하는 부르심을 어렸을 때부터
받기는 하였습니다. 25살까지 저항하였습니다. 계속 저항했다면 사제가 되는 축복은 받을 수
없었습니다. 신학교 때는 유학 가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저는 거부의 의사를 밝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승낙하기는 하였으나 교수와의 갈등으로 논문도 힘겹게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순종이 없었다면 성서 석사학위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제가 되어서 다시 유학 가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교님이 한 달 기도해보라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시 교수님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가장 힘든 일입니다.순종이란 것이.
덕분에 교의 신학 석박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은총의 크기가 커질수록 순종의 무게도
커졌습니다. 본당 생활을 조금 하다가 보니 교구청으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저는 못 참고 2년 반 만에 주교님께 내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교구 영성관으로 가서 6년 동안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역사만 이렇겠습니까?
신앙은 단 한 가지, 순종을 배우는 과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38년이나 병이 고쳐지기를 바라며 매일같이 벳자타 연못에
나와 있는 한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가가 먼저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는 당연한 것을 물어보는 예수님이 이해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합니다.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이 하려고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예수님은 많은 병자가 있는데, 이 병자의 무엇을 보고 고쳐주셨을까요?
우선은 이 병자가 은총을 바라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매일 38년을 같은 병원에 다니며
병을 고치려고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은 그 병을 반드시 그 병원에서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희망의 크기는 믿음의 크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해 보입니다. 다른 많은 병자들도 그런 희망과 믿음을 가지고
벳자타 연못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병자가 38년 동안이나 희망하도록 내버려 두신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게 하려고? 바로 ‘순종’입니다.
영화 『가라테 키드』에서 스승 미야기는 제자인 다니엘에게 이해되지 않는 반복적인 작업
(자동차 닦기, 바닥 닦기, 페인트칠 등)을 지시합니다. 다니엘은 순종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노동이라고 생각하며 항의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진짜 대련 상황에서,
그 모든 반복적인 동작들이 몸에 익어 방어 기술로 쓰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은 비로소 스승에게 순종한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결과적으로 큰 은혜와 승리를 얻게 됩니다.
이런 일이 신앙에서도 일어납니다. 성녀 파우스티나는 예수님으로부터 환시와 계시를 받았지만,
고해신부가 그것이 진정한 계시인지 시험하기 위해 그녀에게 모든 환시를 기록하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내적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질 듯 힘들었지만, 파우스티나는 고해신부를 통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모든 환시를 멈추고 기다렸습니다.
결국 고해신부는 그녀의 순종을 보고 그녀가 받은 계시를 기록하도록 허락했고,
그 기록들은 훗날 세상에 『하느님의 자비의 일기』로 전파되어 전 세계 수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상의 성 비오 신부(Padre Pio da Pietrelcina)는 교회로부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약 2년여 동안 공식적으로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하거나 고해성사를 주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 당국은 비오 신부의 성흔(오상)의 진위에 대한 의혹과 그의 인기에 따른
혼란을 염려하여 이러한 금지령을 내렸습니다. 비오 신부는 이 금지령 앞에서 매우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교회의 결정에 대해 철저히 순종하며 겸손하게 인내했습니다.
마침내 1933년 교회는 금지령을 철회했고, 성 비오 신부는 다시 공식적으로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집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성덕과 겸손한 순종의 모범은 더욱 널리 알려졌고,
많은 신자들에게 큰 은총을 끼쳤습니다.
은총은 선물입니다. 선물을 주는 사람은 그 받는 사람에게 무언가 기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거저 주는 젖 안에도 실제로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이 기대를 저버릴수록 젖을 주고 싶은 마음도 감소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오늘이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병자가 아무 생각 없이 일어나사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갈 수
있도록 자기를 낮출 수 있도록 38년을 기다리신 것입니다. 38년은 그 병자가 순종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에 유다인들은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은총을 주는 이에게는 반드시 순종의 그릇으로 다가가야 함을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증거합니다.
우리는 가정에도 있을 수 있고, 회사에도 있을 수 있고, 나라나 교회 안에 속해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공동체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은총이 다릅니다.
가끔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은총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순종이 없고 능력만 있는
사람은 그 조직에 위해가 될 수 있기에 은총을 주는 이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언제나 순종의 능력을
첫째로 꼽을 수밖에 없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아이에게 그 아이가 달라는 것을 다 사준다면 부모의 권위가 실추되고
가정은 콩가루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심부름이라도 시키고 용돈을 주는 것입니다.
은총을 받기 위해 먼저 그릇을 준비합시다. 그 그릇은 순종입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을 받으시기 위해 어떤 순종의 그릇을 준비하셨습니까? 주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겠다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이 은총의 그릇을 준비하는 기도를 매 삼종기도 때
되풀이합니다. 그냥 바치지 말고 은총의 그릇이 된다고 여기며 삼종기도를 바치면
많은 은총을 이 세상에서부터 받는 은총의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저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사랑의 표지로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니라,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면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들것에 들고 다니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31.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사65,17-21 요한4,43-54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창조, 꿈의 현실화”
“성 요셉이여, 저희 나라를 위해 빌어 주소서.”
성 요셉 성월 3월 마지막 날, 성인의 전구를 청하며 바치는 기도입니다.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다시 한 번 불러 보는 만세칠창중 하나입니다.
백척간두, 풍전등화, 누란의 위기의 절박한 나라 현실에, 나라 걱정에 저절로 나오는 기도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인간은 서로 물들고 물들이는 존재다. 내가 누군가로 인해 물들 듯이 나 또한 누군가를 물들일 수 있다.”<다산>
“묵을 가까이 하면 검어지고, 붉은 물감을 가까이 하면 붉어지니 이웃을 가려서 살고,
덕이 있는 사람과 사귀라.”<소학>
이웃중의 이웃이, 참 좋은 이웃이 주님입니다. 주님은 늘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 늘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느님 나라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의 정주의 삶은 안주의 정체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입니다.
다음 제가 자주 고백하는 ‘행복기도문’ 일부를 바꿔 묵상해 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창조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느님 나라'이옵니다.”
결코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 참으로 주님과 함께 할 때 하루하루가 고유한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이
현실화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의 고백이 참으로 고무적입니다.
우리를 치유하고 위로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오늘 우리를 통해 실현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나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여기서 창조란 히브리말 ‘바라(bara)’가 세 번 나오는데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생명의 충만(fullness of life)’인 창조를 뜻하는 말입니다.
바로 주님은 놀랍게도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이런 창조활동을 계속하십니다.
창조와 구원이 동시적으로 이뤄지는 미사은총입니다.
하나하나가 예루살렘인 우리를 즐거움으로, 또 기쁨으로 창조하시고 이런 즐거움과 기쁨으로 창조된 우리는
하느님의 즐거움이, 기쁨이 된다 하십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역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시인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적 예언이요 하느님 꿈의 실현을 노래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드높이 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꿈을 현실화하여 살게 합니다.
예언자들이야 말로 진정 영적혁명가이며 영감과 감동을 선사하는 분들입니다.
이어지는 예언도 우리를 즐거움과 기쁨으로 충만케 합니다.
“예루살렘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 받았다 하리라.”
하느님의 예언자가 아니고 어디서 이런 고무적인 시적 예언을 접할 수 있을런지요.
꿈을, 하느님 꿈을, 하느님 나라 꿈을 잃은 세상은 죽은 세상입니다.
숨쉬기 위해 수도원을 찾는다는 어느 자매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꿈대로 이뤄지니 말 그대로 꿈의 현실화입니다.
만개하기 시작한 파스카의 봄꽃들!
바로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래전 써놨던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 있는 것들은 꿈꾸지 못한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
살아 있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흡사 봄꽃을 피워내는 ‘파스카의 꿈나무’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서의 모든 위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하느님의 꿈나무, 꿈꾸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대표적인 분입니다. 봄이 되면 떠오르는 ‘예수는 봄이다’ 라는 자작시입니다.
“예수는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
봄이 입맞춘 자리마다
환한 꽃들 피어나고
봄의 숨결 닿은 자리마다
푸른 싹 돋아난다.
예수님 봄이다
봄은 사랑이다, 봄은 생명이다”<1999.3. >
꿈을 잃은 무지하고 난폭한 이들이 시도한 폭력적 비상 계엄이요 내란입니다.
하느님 꿈을, 하느님 나라 꿈을 잃고 탐욕에 포로되어 자초한 오늘날 인류의 온갖 불행이요 재앙들입니다.
아무리 머리 좋고 공부 많이 했어도 문약하고 꿈이 없어, 볼 눈을 들을 귀를 잃고 무지와 폭력의 도구가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평범성입니다.
디테일 안에 숨어 있는 악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꿈은 바야흐로 오늘 복음의 파스카의 꿈나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됩니다.
바로 왕실 관리의 아들을 말씀으로 살리시는 예수님입니다.
왕실관리와 예수님이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고 바로 그 순간 열이 떨어졌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합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고, 하느님의 꿈은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실현됩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파스카의 봄꽃’ 피워내는
‘파스카의 꿈나무’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4/1(화)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가 함께 나누고 소통할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갈릴래아 호수처럼 사랑을 흘려보내고, 서로를 보살피고 돕는 삶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물처럼 흘려보내는 삶을 살면, 우리 주변에 많은 이가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도 함께 사랑을 나누고 소통하는 삶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주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주님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조재형 신부)
2. 은총을 받기 위해 먼저 그릇을 준비합시다. 그 그릇은 순종입니다.
성모님께서 은총을 받으시기 위해 어떤 순종의 그릇을 준비하셨습니까? 주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겠다는 존재가 되셨습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들것에 들고 다니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고 바로 그 순간 열이 떨어졌고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집안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합니다.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고, 하느님의 꿈은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실현됩니다.
(이수철 신부)
4/1(화)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들것에 들고 다니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1일(화) 4시2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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