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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3월 31일 월요일[(자) 사순 제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3월 31일 월요일[(자) 사순 제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1(30),7-8 참조
저는 오로지 주님만 믿나이다. 가련한 저를 굽어보시니, 당신 자애로 저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본기도

하느님,
거룩한 성사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니
현세의 교회를 도우시어 영원한 나라로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5,17-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19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21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30(29),2와 4.5-6.11-12ㄱ과 13ㄴ(◎ 2ㄱㄴ 참조)
◎ 주님, 저를 구하셨으니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 주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당신은 저를 구하시어, 원수들이 저를 보고 기뻐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주님, 당신이 제 목숨 저승에서 건지시고, 구렁에 떨어지지 않게 살리셨나이다. ◎
○ 주님께 충실한 이들아,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거룩하신 그 이름 찬송하여라. 그분의 진노는 잠시뿐이나, 그분의 호의는 한평생이니, 울음으로 한밤을 지새워도, 기쁨으로 아침을 맞이하리라. ◎
○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당신은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니, 주 하느님, 영원히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

복음 환호송

아모 5,14 참조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43-5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이 제사의 은혜로
저희가 현세의 옛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워지고
천상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에제 36,2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리니, 너희는 나의 규정을 따르고 나의 법규를 어김없이 지켜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성찬의 신비로 저희 삶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이 백성의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육신의 쾌락에 빠지지 않고
영신의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은 3 31일입니다. 3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이제 하루 지나면 4월이 시작됩니다. 사람은 이렇게 의미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이야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의미일까요? 이는 단순한 지리적 변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 행위를 뜻합니다.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억압과 불의가 사라지고,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고, 모든 피조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인 상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오면 사막이 꽃동산 되리라. 사자들이 어린이와 뛰놀고, 참 세상과 기쁨의 그 나라가 오리라.”

 

시인 이상화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시인 이육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시인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끝나고 민족의 독립이 올 것을 희망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을 성찰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이야기했습니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이야기했습니다. 공자는 대동 사회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단테는 낙원을 이야기했습니다. 돌킨은 반지의 제왕에서 악이 사라지고 선이 다가오는 세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카뮈는 페스트에서 절망을 넘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니체는 '초인'이 다스리는 세상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새로움'을 이야기하면서 과거의 존재 방식을 넘어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하는 가능성을 이야기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했던 철학자, 사상가, 문학가가 있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선포하지는 못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했던 새 하늘과 새 땅을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는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새로운 시대가 이제 예수님을 통해 도래하고 있음을 알리는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는 단순한 정치적 왕국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이미 시작되었으나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통해 하느님 나라는 시작되었지만, 최종적인 완성은 종말론적 미래에 이루어집니다. 이사야의 새 하늘과 새 땅,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현실의 고통과 불의 속에서도 인간이 꿈꿔야 할 이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기존에 타락한 질서를 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입니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성경적 메시지뿐 아니라 인문학적 가치와도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비전은 단순한 종교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윤리와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기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길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찾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요한 4,43-54

 

혹독한 인생의 시련 앞에서...

 

사목자로 살다 보니 은혜로운 체험들을 많이 합니다.

그 중 한 가지가 세상 한 가운데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형제 자매들과의 만남입니다.

그분들의 때로 흥미진진한 지난 이야기들, 때로 슬프고 충격적인 스토리들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많이 배웁니다.

 

때로 공감도 해드리고, 때로 함께 울며 위로도 해드리는 그런 순간들이 저를 더 성장시키는 축복된 순간입니다.

 

이 한세상 살아가다 보면 그 누구든 예외 없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인생의 풍파를 만나게 되고

좌절도 겪게 됩니다.

때로 그 시련이 너무나 혹독해, 도대체 하느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을 겪게 하시는가, 한탄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왕실 관리도 그랬습니다. 왕실 관리라는 직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한 나라의 전권을 자기 손에 쥐고 있는 왕의 최측근으로서, 그리 잘 나가던 인생이었는데,

단 한 번도 큰 어려움 겪지 않고 승승장구해온 날들이었는데, 이번에 큰 암초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덜컥 중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부자였기에 아들의 치유를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봤겠지요.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누군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귀가 번쩍 뜨인 그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이윽고 왕실관리는 예수님 앞에 당도합니다.

어렵게, 정중하게 말문을 엽니다.

 

“선생님, 제 아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카파르나움에 있는데, 제발 저와 같이 내려 가셔서 좀 도와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계셨던 카나에서 누워있는 환자의 집 카파르나움까지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였습니다.

30Km 정도였으니, 약 80리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알았다. 지금 당장 가자. 모든 것이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보다는 책망 비슷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살짝 뜸을 들이며 미적미적거리는 예수님의 태도 앞에 왕실 관리는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체면도 뭣도 없습니다.

아들만 낫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아버지의 절박한 시선, 간절한 마음을 눈여겨보신 예수님께서 그저 딱 한 말씀만 던지십니다.

 

“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 왕실관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 ‘믿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라는 진리, 그분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

그분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시리라는 믿음, 그분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단 하나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을 조금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닙니다. 그리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곧 메시아 하느님이시라는 것,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치신 분이라는 것, 그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 모든 죄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사순 제4주간 월요일


<희망에 대한 이야기>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징과 증거들,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추어집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요한 4,47).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사실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 자체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셨을 때,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루카 7,7)라고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9)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혹은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소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3.30.장미 사순 제4주일(Latare주일) 

                       여호5,9ㄱㄴ.10-12  2코린5,17-21  루카15,1-3.11ㄴ-32

 

                                                   귀향歸鄕의 여정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아가는 삶”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오늘은 “즐거워하여라(Latare)” 입당송 첫 라틴어 문자대로 래타레 주일이라 부르는 사순 제4주일입니다.

또 기쁨을 상징하는 장미색 제의처럼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부활축제의 기쁨을 앞당겨 맛보는 주일이자 역시 귀향의 기쁨을 미리 체험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대로 집을 떠난 또 하나의 작은 아들인 우리의 귀향을 축하하는 미사잔치처럼 생각됩니다.

주님을 만난 기쁨을 노래하는 시편 34장 화답송도 흥겹기 한이 없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

“주님을 바라보아라. 기쁨이 넘치고,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좌우간 오늘 미사잔치에 참석하신 분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의 기쁨을 맘껏 누리시길 바랍니다.

 

어제 영문 주석을 읽으며 한 단어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homecoming(귀향;歸鄕)”이란 말마디가 참 반가웠습니다.

즉시 강론 제목을 “귀향의 여정”이라 정했습니다. 

 

제1독서 여호수아기에서 보듯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귀향의 여정중 길갈에 진을 치고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낸 다음날 그땅의 소출을, 누룩없는 빵과 볶은 밀을 먹으니

그대로 귀향의 기쁨을 미리 체험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역시 코린토교회 신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한

귀향의 기쁨을 고백합니다.

귀향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신선한 활력을 제공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를, 귀향의 기쁨을, 하느님의 의로움을 체험하는

이 복된 미사잔치 은총이 귀향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샘솟는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잃고 지내는지요! 고향이란 말만 들어도 마음이 설렙니다.

고향을 찾는 마음, ‘고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homesick at home)’ 역설적 존재인 사람들입니다.

고향을 찾듯이 영혼의 고향인 교회를 수도원을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되찾은 아들의 비유이자 자비로운 아버지의 비유라 부를 수 있는 복음은

늘 들어도 샘솟는 감동과 영감을 제공합니다.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정말 잘 들어나는 복음중의 복음, 순복음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자비로운 아버지, 큰 아들, 작은 아들 모두가 나를 비춰주는 거울같은 분들입니다. 

 

돌아갈 고향집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돌아갈 본향의 고향집은 궁극의 희망이자 목적지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향집을 잃고 무명의 존재가 되어, 존재감없이 자녀다운 품위를 잃고,

길을, 희망을 잃고 익명으로, 되는 대로, 함부로, 막 살아들 가는지요!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황하는 작은 아들은 바로 나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 극한 상황중에 있던 작은 아들에게 구원의 섬광처럼 떠오른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이었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절망의 좌절상태에서 용기를 내어 벌떡 일어나 아버지가 계신 고향집을 향해 귀향의 여정에 오른

작은 아들입니다.

귀향할 아버지의 집이 없어 절망중에 목숨을 끊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마지막 희망의 끈, 귀향할 아버지의 집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살아 있는 한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향의 여정중임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의 오매불망, 노심초사 작은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대로 우리를 기다리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작은 아들을 환대하는 아버지의 환호가 감동자체입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마시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로 이것이 자비로운 아버지의 마음이자 모습입니다.

자비로운 아버지를 만나 본래의 존엄한 품위를 되찾은 작은 아들입니다.

이어 베풀어진 즐거운 잔치는 그대로 또 하나의 작은 아들들인 우리의 귀향을 축하하는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닮았습니다.

아버지의 관대한 조치에 불평하며 항의하는 편협하고 옹졸한 큰 아들의 모습 또한 우리 어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반면교사가 되는 작은 아들, 큰 아들 모두가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격한 감정으로 아버지에게 항의하는 큰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호소가 감동적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 같은 다음 말씀은 복음의 큰 아들은 물론 교회에서 모범적 신자생활을 하는

큰 아들같은 이들에게 크고 긴 여운을 남깁니다.

바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진면목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한다.”

 

여전히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복음입니다.

오늘 사순 제4주일 다해 강론을 제가 “하느님의 기쁨”이란 제목으로 최초로 한 것은

1989년 3월5일 부제때이고, 무려 36년이 지난 오늘도 제가 전혀 변한 것 같지 않으니

순간 깊은 좌절감도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참으로 고맙게도 예수님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진면목을 보여주셨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빼다 닮은, 우리들이 닮아야 할 영원한 삶의 모범인

아버지의 외아드님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새삼 우리는 사랑 공부에 늘 영원한 초보자에, 늘 새로운 시작뿐임을 깨닫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자비로운 아버지를 닮아가는 우리 ‘귀향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아멘.


3/31(월)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게 오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기 시작하면,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길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찾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어가는 여정에 함께 가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 왕실관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 ‘믿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라는 진리, 그분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

그분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시리라는 믿음, 그분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단 하나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소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복음에서 참으로 고맙게도 예수님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진면목을 보여주셨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빼다 닮은, 우리들이 닮아야 할 영원한 삶의 모범인

아버지의 외아드님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이수철 신부)

 

3/31(월)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소서.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3월31일(월) 1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