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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4월 2일 수요일[(자) 사순 제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4월 2일 수요일[(자) 사순 제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69(68),14
주님, 저의 기도가 당신께 다다르게 하소서. 은총의 때이옵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애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은 참된 구원이시옵니다.

본기도

하느님,
의로운 이에게 상을 주시고
참회하는 죄인을 용서하시니
죄를 고백하는 저희를 자비로이 용서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9,8-15
8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9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10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11 나는 나의 모든 산들을 길로 만들고 큰길들은 돋우어 주리라.
12 보라, 이들이 먼 곳에서 온다.
보라, 이들이 북녘과 서녘에서 오며 또 시님족의 땅에서 온다.
13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14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15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8-9.13ㄷㄹ-14.17-18(◎ 8ㄱ)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네.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 주님은 말씀마다 참되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꺾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세우시네. ◎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복음 환호송

요한 11,25.26 참조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의 힘으로 저희가 옛 악습을 끊어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3,17 참조
하느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선물을 받고 비오니
이 성사로 저희가 심판을 받지 않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을 자애로이 지켜 주시어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며
지극히 좋으신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사야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 시대에 활동하며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예고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라는 표현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모성애적 사랑으로 묘사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어머니의 사랑은 조건 없고 희생적이며,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아이를 위해 헌신합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설령 인간의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랑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이걸 단순히 교리적으로만 받아들이면 좀 어렵고 멀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문학 작품을 통해 이 사랑을 더 쉽게, 그리고 깊이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 장 발장은 감옥에서 19년을 살고 나왔습니다. 어디를 가든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미리엘 주교가 그를 받아주었습니다. 그런데 장 발장은 은식기를 훔쳐 달아납니다. 우리가 주교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경찰 불러! 저 도둑놈 잡아!" 이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오히려 경찰에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도둑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은식기를 주었습니다.”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알료사라는 수도승입니다. 알료사는 형과 동생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사랑과 용서를 선택합니다. 그의 스승, 조시마 수도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 하지만 사랑은 고통과 함께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밤, 성냥팔이 소녀는 거리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기억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성냥불을 켜면서 소녀는 할머니의 따뜻한 품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결국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하느님은 결코 예수님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사랑이 완성됩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의 이야기입니다. 수녀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 사랑이 거창한 게 아닙니다.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는 것, 용서하기 힘든 사람을 마음으로 품어 보는 것, 외로운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것, 이런 작은 실천이 바로 십자가 사랑의 시작입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지만, 교회에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이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소경의 갈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갈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진리를 보여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산에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5,17-30

 

올바른 심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 걱정 때문

 

우린 흔히 사람들의 평가에 자주 휘둘리고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곤 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의 평가가 다 옳지는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더라도 모든 사람이 나를 

평가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휘둘리다가 망하는 예가 한둘이 아닙니다. 

 

작가 니콜라이 고골의 대표작은 「외투」입니다.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에서 하급 관리로 일하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 바시마치킨의 일상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서기관으로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은 그는 다른 사람들의 무시와 비웃음에도

자기 직분에 매우 충실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업무에 대한 만족감은 물론 애정도 있어서

별다른 취미 생활도 갖지 않은 채로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그것은 이 혹독한 러시아의 추위를 막아줄 새 외투가

필요해진 것입니다. 무수히 고쳐 입었던 낡은 외투가 더 이상 수선 불가하다는 재봉사

페트로비치의 말에 따라 그는 큰마음을 먹고 새 외투를 마련하기 위해 절약을 시작합니다.

 

밥을 굶고, 집에 불을 끄고, 움직임을 최소화해 옷과 신발을 아껴가며 그는 드디어 재봉사의

손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외투를 건네받습니다. 그 황홀한 순간과 기쁨은

그의 동료들에게도 전해져, 이들은 아카키를 파티로 초대합니다. 

 

하지만 파티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강도를 만나 외투를 빼앗기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됩니다. 외투를 되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그는 한 고위층 인사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가 엄청난 핀잔과 멸시를 겪게 되고, 그 결과로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카키의 모습을 한 유령이 나타나 사람들의 외투를 빼앗아 가기 시작하고,

그를 핍박했던 고위층 인사가 자신의 외투를 던지고 혼비백산 달아나면서 소설은 결말에

다다릅니다. 계급적 관료 세계에서 늘 말단에 머물러야 했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가

유령의 모습으로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주먹”을 내미는

마지막 장면은 유쾌한 전복이 누구의 평가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람은 왜 사람들의 시선에 휘둘릴까요? 결국 타인의 판단이 자기 ‘생존’에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소설 ‘외투’는 주인공의 자유는 죽어서야 비로소 얻어집니다.

죽으면 생존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실 수 있으셨을까요? 당신 생존을 책임져 줄 아버지께

좋은 평가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옳게 평가하실 수 있는 분은 아버지 한 분뿐이라는 것이고 당신이 아버지와

대등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판단 또한 올바를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한 판단에 항상 자기 이익을 위한 의도가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판단에서도 자유로운데, 오직 자기 생존의

문제에 대해 더는 걱정하지 않게 해 줄 누군가에게 좋게 평가받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디슨이 7살이 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그가 어머니에게 조심스럽게 편지 한 장을

건넸습니다. 교사로부터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가 읽어달라고 부탁하자, 어머니 낸시는

조용히 편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천재입니다. 이 학교는 그의 교육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더 좋은 교육을 받게 하십시오.”

에디슨은 감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미소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니, 엄마가 너를 직접 가르칠 거란다. 너는 특별하니까.”

 

그날 이후 낸시는 직접 아들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에디슨은 어머니의 사랑과 신뢰 속에서

마음껏 실험하고 탐구하며 자랐습니다. 그는 후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믿어주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어머니 덕분이다.”

 

수십 년 후, 어른이 된 에디슨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그 오래된 편지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더 이상 교육시킬 수 없습니다.”

에디슨은 그 편지를 들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날 어머니는 학교의 평가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정의하는 새로운 문장을 써준 것이었습니다.

“너는 천재야.”

 

그 한마디는 세상의 모든 평가를 무너뜨리고, 에디슨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세계를 바꾸는 수많은 발명을 가능케 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는 평가받아야 합니다. 나의 생존을 위해 의지해야 할 대상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자기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오직 창조자뿐입니다.

생존의 문제에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죄를 지으면서 어떻게 하느님께 좋게 평가받는다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자녀로서 예수님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4주간 수요일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요한 5,24)

그것은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곧 신적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025.4.1.사순 제4주간 화요일                                        에제47,1-9.12 요한5,1-16

 

생명의 샘, 생명의 강

"예수님이 벳자타 못이자 생명의 강이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시편51,12.14)

 

오늘은 4월 첫날입니다.

날마다 읽어보는 옛 현자들의 말씀집, 4월 주제는 거피취차(去皮取次)입니다.

노자도덕경 12장에 나오는 도덕경을 관통하는 주제로 ‘이상에 취하지 말고 일상에 몰두하라’는 뜻입니다.

멀리 밖에서 답을 찾지 말고 하루하루 날마다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 안에서 답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뜻입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다(the more spiritual..., the more real)’라는,

또 ‘네 정도만큼의 세상이다(As you are, so is the world)’란 말마디와 일맥 상통합니다.

이어지는 4월1일, 오늘의 말씀입니다.

 

“사자는 갈기가 없더라도 사자다. 선비는 궁한 처지에도 비굴하지 않다.”<다산>

“부귀함도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함도 이 뜻을 바꾸지 못하며,

위험도 이 뜻을 굽히지 못하니, 이래야 대장부라 할 수 있다.”

 

어느 처지에서든 의연하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순종할 때, 늘 주님과 함께 할 때 이런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아주 예전 써놨던 ‘산과 강’이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강은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산곁에 있다

 

 나는

 흐르고 흘러도

 여전히

 님곁에 있다”<1999.1.18.>

 

내가 주님을 떠났지 주님이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늘 함께 하시는 은총의 샘, 생명의 샘 주님입니다.

또 하나 주님과 일치의 기쁨을 노래한 ‘강’이란 요즘의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강이

 강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맑게 흐르는 강이에요”<2025.2.12.>

 

은총의 샘, 생명의 샘이신 주님과 일치할 때, 우리 또한 은총의 샘이, 생명의 샘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은총의 강, 생명의 강이신 주님과 일치할 때, 우리 또한 은총의 강, 생명의 강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계신 주님이 바로 오늘 복음의 진짜 벳자타 못입니다.

그러니 생명의 샘, 벳자타 못을 멀리 밖에서 찾아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가 우리가 뿌리내려야 할 주님 은총의 강, 생명의 강가입니다.

요한 복음에는 다음 일곱가지 표징이 나옵니다.

 

1.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2,1-11)

2.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심(4,46-54)

3.양문 옆 못에서 불구자를 고치심(5,1-18)

4.5천명을 먹이심(6,1-15)

5.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6,16-21)

6.태생 소경의 치유(9,1-41)

7.나자로의 부활(11,1-44)

 

바로 일곱 표징의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어제 두 번째 표징의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세 번째 표징에 해당됩니다.

양문 옆 벳자타 못가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진 이등

온갖 병자들이 치유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그대로 오늘의 병자들 가득한 비참한 인간 현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중에는 무려 38년 동안 앓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주님을 만나자 즉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가니, 숙명의 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부활의 삶이 펼쳐집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 주시는 건강 은총으로 지체없이 벌떡 일어나 내 ‘운명애(아모르 파티;Amor Fati)’를 발휘하여,

내 책임의, 운명의 들 것을 들고 당당히, 의연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일어나지 않음이 죄임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다시 시작할 때 참 탄력 좋은 파스카의 삶입니다.

 

진짜 치유의 못, 생명의 샘, 베자타 못은 바로 늘 함께 계신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이어 주님이 다시 그를 만났을 때 주시는 조언은 그대로 사순시기를 지내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새삼 심신의 건강, 영육의 건강이 하나임을 깨닫습니다. 죄의 암세포가 영혼과 육신에 퍼지지 않도록 애당초 죄를 짓지 말것이며,

죄를 짓더라도 즉시 회개를 통해 용서를 받을 때 비로소 영육의 치유에 건강이겠습니다.

죄가 많으니 병도 많은 세상, 영육의 건강에 회개가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내용도 참 신선하고 은혜롭습니다.

성전에서 솟아 흐르는 물이 강을 이루니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바로 죽음의 세상 바다를 살리는 주님 은총의 강, 생명의 강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은총의 샘이자 은총의 강이요, 생명의 샘이자 생명의 강입니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서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을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주님 은총의 강가에, 생명의 강가에 뿌리 내려 풍부한 덕의 열매들을 내는 영혼들은 행복합니다.

그대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또 우리 모두 주님과 하나 되어 세상을 살리는 주님 은총의 샘, 은총의 강으로,

주님 생명의 샘, 생명의 강으로 세상에 파견되니 이 또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네.”(시편23,1-2). 아멘.


4/2(수)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조재형 신부)

 

2. “당신의 아들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더 이상 교육시킬 수 없습니다.”

에디슨은 그 편지를 들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날 어머니는 학교의 평가를 지워버리고,

자신의 아들을 정의하는 새로운 문장을 써준 것이었습니다.

“너는 천재야.”

 

그 한마디는 세상의 모든 평가를 무너뜨리고, 에디슨을 자유롭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는 세계를 바꾸는 수많은 발명을 가능케 했습니다. (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요한 복음에는 다음 일곱가지 표징이 나옵니다.

 

1.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일(2,1-11)

2.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심(4,46-54)

3.양문 옆 못에서 불구자를 고치심(5,1-18)

4.5천명을 먹이심(6,1-15)

5.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6,16-21)

6.태생 소경의 치유(9,1-41)

7.나자로의 부활(11,1-44)

 

바로 일곱 표징의 주님께서 시공을 초월하여 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복음입니다.

어제 두 번째 표징의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세 번째 표징에 해당됩니다.

양문 옆 벳자타 못가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 비틀어진 이등

온갖 병자들이 치유를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으니,

그대로 오늘의 병자들 가득한 비참한 인간 현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중에는 무려 38년 동안 앓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주님을 만나자 즉각적인 치유가 일어납니다. 

(이수철 신부)

 

4/2(수)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2일(수) 8시3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