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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박완서의 글 <어른노릇>외...

박완서 <어른 노릇>

- 아름다운 미수연 -

 

 

근래에 있었던 일 중에 가장 즐거웠던 일은 피천득 선생님의 미수연(米壽宴)이었다. 때늦게 얻어걸린 감기가 나가지 않아 짜증스러웠는데 그 잔치에 참석하고 있는 동안 한번도 그 놈의 고약한 감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신기한 일이였다. 아마 그 안의 맑은 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이 미수니까 거기 참석한 후학들도 젊다고는 할 수 없는 연세들이었다. 이미 정년을 넘긴 제자분들도 적지 않았다. 요샌 손자들도 기를 빼앗길까봐 같이 자기도 꺼린다는 늙은이들 한테서 웬 맑은 기운? 하고 비웃을지도 모르나 확실히 그쪽 분위기는 숨통을 억누르는 이 세상의 혼탁한 잡스러움과는 판이한 단순하고도 초연한 무엇인가가 있었다.

 

선생님은 의자 속으로 가라앉을 듯 조용히 앉아 계셔서 거의 소년처럼 조그맣게 보였는데 그분 한테 배운 제자들은 서로 그분의 열정적인 강의를 기려 마지 않았다. 나는 그분 한테 직접 배운 바가 없는게 서운했지만 사람이 저렇게도 늙을 수 있구나 하고 그분의 늙음을 기릴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다.

 

나이 들수록 자신의 말년에 대한 근심은 더해만 간다. 마땅한 본을 보여주는 늙음의 선배가 귀하기 때문일 것 이다. 누구는 치매에 걸렸다느니 누구는 노망이 들었다느니 하는 정도가 연로한 친척이나 사회적인 공인들에 관해 들을 수 있는 근황인 것도 서글픈 일이지만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정정한 노인들의 노추이다. 나이가 들수록 확실해지는 아집, 독선, 물질과 허명과 정력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집착등은 차라리 치매가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늙음을 추잡하게 만든다.

 

그런 것들로 부터 훌쩍 벗어난 그분은 연세와 상관없이 소년처럼 무구하고 신선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런 비결은 전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가닥의 청풍처럼 잠시 쐴 수 있을 뿐인 것을...

 

그분은 말씀도 잘하셨는데 특히 가난하게 살던 얘기는 장내에 폭죽같은 웃음을 자아냈다. 자녀들을 가난하게 키운 얘기가 그렇게 재미있었던것은 지난 날을 미화시키고 싶은 늙은이들 마음에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난 속에서 키운 자녀들 중 하나라도 못됐거나 비뚤어지지 않고 다들 번듯하고 건강하고 번성하기 때문에 왕년의 가난을 그렇게 마음놓고 재미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개인이거나 한나라이거나 부패로 멸망하면 했지, 가난으로 멸망하지는 않는다. 굶어 죽을 정도의 가난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재미난 잔치로 부터 돌아온 밤 문득 그분의 글을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 글이나 읽고 싶은 게 아니라, '시'였었는지 '산문'이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은 회갑을 넘긴 제자들의 방문을 받고 즐거워하시는 글이었다. 아마 유난히 연세들은 제자들이 많이 참석한 잔치의 여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늘 가지런하지 못한 내 서재에서 원하는 책은 쉽게 찿아지지 않았다. 원하는 책이 찿아지지 않을 정도로 책이 많다는 것이 갑자기 혐오스러워졌다. 많음이 지겨워지면서 곧 기분 나쁜 감기 기운이 도져서 책 찿기를 포기했다. 작은 서재지만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책들이라면 너무 많은 것이다. 좋아하고 때때로 즐기는 책만 간직하고 계신 그 분의 절도가 부러웠다.

 

그분이 천진하다고는 하나 소년의 그것과는 달리 의연하고 당당한 것은 당신 주변에 허욕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명징한 지혜로움 때문일 것 이다. 늙음조차도 어떻게 늙느냐에 따라 뒤에 오는 사람에게 그렇게 되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준다. 어느 바닥에나 귀감이 있다는 건 축복이다.

 

 

^^^박완서 <어른 노릇>

- 나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 -

내가 고향에 감사하고 싶은 것은 훗날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이 나의 시골뜨기 근성에 힘 입은바가 크기 때문이다. 사교적인 모임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갈래의 우호적 또는 적대적, 정열적 혹은 타산적 관계의 渦中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조금 비켜나 있고 싶어하는 근성은 스스로를 비하하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점점 내 성격 형성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비켜나 있음은 차라리 편안하게 여기게 되었고, 와중에 있는것 보다는 약간 비켜나 있으면 돌아가는 모습이 더 잘 보인다는 것도 터득하게 되었다.

 

비켜나 있음의 쓸쓸함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사람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가장 잘 보이게끔 팽팽하게 조절할 때의 긴장감은 곧 나만이 보고 느낀 걸 표현해 보고 싶은 욕구로 이어졌다.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면 인간관계에서 비실비실 비켜나 있음이 촌스러울 뿐 아니라 떳떳치 못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조금은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글 쓰는 보람이다.

 

 

^^^박완서 <어른 노릇>

- 내가 꿈꾸는 나의 죽음 -

죽음과 동시에 느낄 수는 없게 되더라도 살아 있는 이들에게 느낌을 일으킬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것, 무한한 것의 일부로 환원하게 되는 것 아닐까.

피는 꽃을 보고 즐거워 하는 대신 꽃을 피우는 대자연의 섭리의 일부가 될테고, 육신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는 대신 무심한 바람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옷깃을 스치게 될 터이다. 또 자식들은 가끔 내 생각을 하며 그리워도 하고, 나를 닮은 목소리로 제 자식을 나무라고, 나를 닮아 잘 웃으며 열심히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나이 들어가는 모습에서,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죽은 에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자식들이 이 에미가 남기고 간 희미한 자국을 혐오하지 말고 따뜻이 받아들였으면 하는게 이 세상에 대해 내가 아직도 못 버리고 있는 미련 중의 하나다.

 

 

^^^박완서 <어른 노릇>

- 우리나라 정치판 -

우리나라 정치판 특히 대통령 자리는 결코 밟으면 안될 전철만 있지 귀감은 없는 자리건만 때만 되면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그렇게도 많이 줄을 서는 현상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미 자신의 분야에서 귀감이 돼온 분도 그 바닥에 한번 발을 들여 놓으면 헤어나지 못하는 걸 볼 때마다 그 분들에 의해 혹시 달라질 수 있을까하는 기대보다는 곰삭은 부패의 함정의 엄청난 흡인력을 보는 것 같아 안됐단 생각부터 든다. 아무도 정치에 대한 국민의 이런 싸늘한 냉소를 바로 보지 못하고는 감히 부패의 함정을 뛰어 넘을 수 없으리라

 

 

^^^박완서 <어른 노릇>

- 작가의 눈 -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는 악인한테서도 연민할 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찿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 세대를 뛰어넘는 '시대의 이야기꾼' 대한민국이 사랑한 작가 박완서 마지막 에세이-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주었다."

 

 

 

- 박완서 묵상집

 <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 '96년 부터 '98년 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다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모은 것이다.

- 들어주는 것 이상의 처방이나 충고를 삼가는

첫번째 이유는 한사람의 인생이 꼬이고 빗나간 원인은 실로 다양하고 복합적인 것 입니다.그걸 타인에게 정확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담자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털어놓는다는 그 자체에도 얼만큼의 치유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말하는이의 공정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건 아닐지라도 그는 항상 자기편에 서있기 때문에 남의 허물을 과장하고 자기 허물을 축소합니다. 자기가 손톱만큼 잘한 것에 도취하여 남의 숨은 공을 인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충고가 먹혀들리가 없지요.

그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그 길을 택하고 싶은 겁니다. 단지 무언가 불안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동의를 얻고 싶은 겁니다.

 

 

- (문학동네) 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심사평 - 박완서

신인들의 소설을 읽다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서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고 나면 한심해지는게 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소통능력에 대해서이다.

이번 심사도 등단한지 10년 이내의 젊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다기에 혹시 귀 어두운 사람이 음악회가서 남따라 박수치는 꼴이 될까봐 내키지 않았지만 젊은 목소리에 자극받고 싶은 호기심 또한 없지않아 동참하게 되었는데, 뜻밖에 즐겁고 유익한 체험이 되었다.

본심에 올라온 10여편의 작품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해서 모아놓으니 보기좋게 다양했다. 젊은 작가라는게 믿어지지 않게 우리 말의 결을 섬세하게 다룰줄 아는 우리 말의 장인같은 작가가 있는가 하면, 그 나이에 어떻게 우리네 사는 모습의 신산함, 슬쓸함, 어긋남을 이렇게 까지 깊이있고 잔잔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지, 탁월힌 리얼리스트의 맥이 건재함을 발견한 것 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신인의 작품을 읽는 즐거움은 뭐니뭐니해도 기성세대의 진부한 독법을 치고 들어오는 젊은 패기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이다. 그들의 민첩하고 거침없는 상상력엔 금기의 영역이 없다. 우리 눈에 견고하고 확실하게 존재하는 세상의 틈새에 숨어 확실하게 존재하는 세상을 움직이고 조롱하는 악도 선도 아닌 어둠의 공간을 보여주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풍부한 우주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미처 표현되어지지 않은 인간존재의 답답함을 무한한 우주공간에서 폭발시키는데 성공한 작품도 있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가 나름대로 실감나게 읽힌건, 존재의 진실이란게 과연 언어로 표현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

어쩌면 존재가 사라진 후 다른 존재에 남긴 공동(空洞)의 크기가 살다갔다는 존재증명의 전부가 아닐까 하는 최근의 내 두서없는 생각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노란띠좀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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