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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김훈의 <풍경과 상처>- <흑산>소개글

김훈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

- 서문에서 -

나는 모든 일출과 일몰 앞에서 외로웠고, 뼈마디가 쑤셨다. 나는 시간속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비벼서 확인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몽롱한 언어들이 세계를 끌어들여 내 속으로 밀어 넣어주기를 바랐다.

 

- 산유화 - 북한산 -

~ 봄 ~

색色에 대한 인간의 애착이란 하도 간살맞은 것이어서, 봄산의 물가에서 움트는 어린 나무들 중에서도 특별히 사랑스러운 나무가 따로 있다. 대체로 편애의 근거는 검증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내가 편애하는 나무는 쓰잘데 없이 이리저리 가지를 뻗지 않고 요긴한 몇개의 가지만을 단정하게 경영하는 내핍의 나무다. 어떤 고매한 나무들은 천인단애의 바위틈에 운명의 입지를 정하고 바위가 허용하는 그 빈한한 수분에 의지하여 한 생애를 그 곳에 세운다.

그 나무들은 동반자 없는 그 절벽 위에서 홀로 꽃 피우고 잎 떨구며 눈비를 맞는다. 그런 나무들은 산 아래 계곡, 물 좋고 양지 바른 곳에 터전을 잡은 팔자 좋은 나무들 처럼 깨끗하고 윤기있게 퍼지는 것이 아니라, 옹이지고 뒤틀린 밑둥과 가지 속에 운명의 척박함을 스스로 갈무리 한다

 

~ 여름 ~

숲이 우거지고 산이 더운 육질의 숨결을 내뿜는 여름날, 나는 내 물가의 나무를 잃는다. 여름산의 물가에서 그 나무는 냉큼 찿아지지 않는다. 가지들이 움트던 봄날의 기억에 매달려 겨우 찿아내도, 그 나무는 이미 봄날의 개별적 단독자가 아니다. 여름산의 힘센 통섭統攝은 모든 나무들 속에 스며들어, 내 어린 나무는 온 산에 가득찬 푸르름의 보편성 속으로 가지를 뻗고 있다. 그리고 그 나무는 저 자신의 개별적 단독성을 여름산의 푸르름속에 합치시키는 기쁨의 빛으로 자신의 개별성을 다시 확보하고 있었다. 내 잃어버린 나무는 자신의 단독한 존재로서 푸르름의 보편을 이루고, 다시 그 보편한 푸르름을 받아들여 개별의 삶을 세우던 것이었다. 여름의 산 속에서 나는 멀리 제 갈 길을 가버린 물가의 나무로 부터 돌아선다

 

여름 골짜기에서 흐른다는 것은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렇게 저희들 끼리 동행하고, 수다스럽게도 두런거리고 우당탕거리며 말을 걸어오지만, 그것들이 걸어오는 말을 나는 해독하지 못하고 응답하지 못한다, 비가 걷히고, 두꺼운 구름장을 밀어내고 해가 비치면 여름의 젖은 산맥들이 뿜은 비린내와 들의 흙 비린내가 환호하는 엽록소의 들판에 가득하다

 

~ 가을 ~

가을의 빛은 익어가는 것들의 이룸과 죽음의 색깔들을 사정없이 폭로하지만 빛 자체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은 붉거나 누렇거나 검다. 그 색깔들은 봄날의 비릿한 신생의 색깔이나 자지러지는 발랄함의 색깔도 아니고, 지니간 여름날의 그 강성한 색깔도 아니다. 익어가는 것들의 색깔은 그 완숙의 절정 밑에 조락의 쓸쓸함과 죽음을 수락하는 처연함의 색깔이 깔려있다. 이룸과 죽음 사이의 구획을 허물고 삼투시켜, 그것들이 합쳐져서 드러나는 삶의 내용을 하나의 색깔이라는 구체적 현존 속에서 시각적으로 구현하여, 아직 살아서 보는 인간의 눈 앞에 '보이는 것'으로 펼쳐놓는 가을빛의 저 말하여지지 않는 신비를 초월자의 한 성정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풍경 앞에서의 내 주절거림은 갈 수 없는 곳을 바라보는 한 중생의 동어반복의 넋두리일 것이며, 그 주절거림은 자연 속에서 자재(自在)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의 내부의 부자유와 결핍에 의하여 주절거려지는 언어일 터이다.

 

강을 따라 흘러내리는 지리산의 산자락들은 첩첩연봉을 이루며 출렁거리고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은 넓어지고 대안의 산들은 멀어진다. 그 굽이치는 산하에서 가을의 빛들은 바스러진다. 산들은 잘 말라있다. 여름의 습기와 비린내가 빠져나간 산 속에서 나무와 나무사이의 공간은 헐겁고 서늘하다. 가을산의 나무들은 서로의 잎과 가지를 합쳐서 푸르고 강성한 산맥의 힘을 이루던 여름날의 밀생密生을 버린다. 가을에 나무들은 제 운명의 자리로 돌아가 뚝뚝 떨어져 서서 혼자서 겨울을 날 채비를 한다. 먹이와 땔감을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가진것을 모두 버리고 존재의 앙상한 뼈만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는 얼마나 부러운 족속들이랴. 가을 산, 나무와 나무사이의 냄새는 존재의 핵심부를 버티는 뼈의 향기이고, 떨어져 있는 것들의 간격의 냄새다.

 

 

김훈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

- 운주사 -

억새 - 11월의 엷은 잔광 속에서 그것들은 잔부스럼 같은 꽃을 피운다.

억새의 꽃은 흩어져 멸렬하기 위하여 피어나는 꽃이다. 그 꽃들은 죽을 때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바람 속으로 흩어진다.

추락하는 꽃들의 내면에는 영광과 치욕을 함께 소리지르는 아우성이 들끓고 있을테지만, 산화하는 꽃들의 내면에는 생애의 무게가 잘 빻아진 뼈의 가루들로 들어 있을 것 같다.

운주사로 가는 들녁에 억새는 구름처럼 피어있었다.

운주사의 와불--은 지금 산위에 쓰러져 있다. 보살은 몸에 병이 없으되 세상의 병을 빌려다가 앓는다 

 

김훈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

- 악기의 숲, 무기의 숲 (담양 수북) -

바람에 불려가는 눈발에 대숲을 스칠때 숲의 마른 잎들은 썰물 빠지는 소리로 서걱거린다. 겨울 대숲은 시달림과 더불어 아늑하다. 겨울 대숲은 눈보라에 저 자신을 모두 내 맡기고 눈보라와 더불어 평화롭다. 대숲의 속은 언제나 어둑시근하고 서늘하며 소슬하고 정갈하다. 눈보라에 쓸리울때 그 숲은 시달림과 평화를 비벼서 서걱이는 연두의 바다로 빛난다

 

~ 나무 ~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나무는 상징체계와 더불어 자란다. 세계를 꿈의 안쪽으로 편입시키려는 욕망이 마음속에서 나무들의 상징체계를 자라나게 한다. 어린 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남에 따라 그 상징체계들은 더욱 완연해 지는 것인데, 그렇게 자라나는 상징들은 꿈과 현실을 매개하면서 역사 속으로 전승된다.

내 마음 속에서 귤나무, 오렌지나무, 감나무 처럼 노란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들은 물질과 꿈 사이를 수천년 동안 헤매어온 연금술사의 나무들이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뽕나무는 기름진 문명의 생산성과 삶의 비옥함으로, 버드나무는 휘어늘어지고 넘쳐흐르는 관능과 유동성으로, 소나무는 구부러짐으로써 삶의 무게를 지탱해 내는 완강함으로 자리잡아 나무들은 마음의 지리부도 속에서 군생의 숲을 이룬다

 

 

 

박해현의 문학산책- 조선일보 2011.11.8.

- 김훈의 우직한 '촌스러움' -

'칼의 노래'를 쓴 소설가 김훈의 의식 속에서 남해(南海)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뜻해왔다. 남해는 충무공이 죽은곳을 기린 사당 이락사(李落祠)가 있는곳이다. 남해에는 정약전이 유배된 흑산도(黑山島)가 있다. 김훈은 십여년전 쯤 정약전에 대한 산문을 쓴적이 있다.

'절해고도의 유배지에서 인간의 언어로 고등어를 설명하는자가 되느니, 차라리 원양을 헤엄치는 등푸른 고등어가 되는 편이 더 유복했으리. 정약전은 섬에서 죽었다.'

정약전은 십여년 동안 어패류만 관찰한 책 '자산어보(慈山魚譜) 서문에서 "자(慈)는 흑(黑)이란 뜻도 있으며, 흑산이란 이름은 음침하고 공포심이 일어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자산이라고 일컬었기 때문" 이라고 밝혔다.

김훈은 최근 장편소설 '흑산'을 냈다. 정약전이 유배간 섬이 소설의 한축이라면, 그가 영영 돌아가지 못한 육지가 소설의 또 다른 축이다. 육지에선 부패한 관리들의 학정(虐政)에 시달린 백성들이 고향을 버린채 떠돌며 굶주린다. 권력은 울부짖는 백성을 매로 다스리며 주리를 튼다. 현실에 절망한 백성들의 입을 타고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예언이 돌아다닌다. 왕실은 천주교의 삿댄 무리를 뿌리뽑는다며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정약전이 갇힌 섬보다 뭇백성이 고통받는 뭍이 더 무서운 '흑산'이 된 시대였다.

이 소설에서 정약전은 "흑산을 자산으로 바꾸어 살련다" 고 한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것을 끊임없이 깨우친다. '자'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김훈은 정약전의 입을 빌려 배교(背敎)를 변명하지도 않고, 순교(殉敎)를 예찬하지도 않는다. 그는 정약전이 가치중립의 언어로 '자산어보'를 쓰게된 마음의 경로를 따라가려고만 했다. 그는 평소 "신념의 언어가 아닌 사실의 언어로 글을 쓰고싶다." 는 입장에 따라, 이번엔 어패류를 기록하는 정약전을 작가의 아바타로 삼았다.

김훈은 정약전이 '자산어보'서문에서 '흑산'이 아닌 '자산'을 쓴 까닭을 오랫동안 헤아리고 헤아렸던 모양이다. 김지하 시인이 '빛을 감춘 어둠'이란 뜻에서 '흰 그늘'이 민족미학의 핵심이라고 말한적이 있다. 김훈에게 전화를 걸어 '흰 그늘'이 떠오른다고 했더니, 그는 "흰 그늘은 아주 무서운 말"이라며 "김지하의 시 '빈산'을 다시 읽어보라"고 권했다. 김지하는 김훈이 청년이었던 1975년

'아아 빈산 / 이제는 우리가 죽어 / 없어져도 상여로도 떠나지 못할 저 아득한 산 / 빈산 ' 이라며 자신이 수감된 시대를 '빈산'에 비유했다. 김지하의 '빈산'은 얼핏 죽음의 산 같지만 '숨어 타는 숯'이 있기에 '내일은 한그루 새푸른 솔'이 될지도 모르는 생명의 산이다. 

김훈의 '흑산'에는 젊은 날 정약전과 김지하를 읽으면서 체득한 서정의 언어가 가득하다. 김훈 소설의 미덕은 그가 지나온 생(生)의 곰삭은 맛이 골고루 배어있다는 것이다. 

김훈의 과거 소설과 달리 '흑산'에서 수많은 등장인물을 동원했다. 정약전의 내면만 탐구하기보다는 그를 둘러싼 조선 후기 사회상을 다양하게 보여줌으로써 역사 속에서 '흑산' 너머로 가려는 인간 군상(群像)의 물결을 그려냈다.

김훈은 이번 소설에서 일러두기를 통해 "다양한 실존 인물이 나오지만 허구가 뒤섞여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온전한 실존 인물이 아니다"고 분명히 했다.

실화를 다룬 소설이라고 하면 전부 사실로 혼동하는 세태에서 의미있는 발언이다. 논픽션을 표방하지 않는 한 모든 소설은 허구의 산물이다.

김훈은 소설이 현실 구원의 언어가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작가답게 자신의 역사 소설을 역사라고 과장하지도 않았다.

소설을 이념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풍토를 경계하는 뜻도 담겨 있다.

소설은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일어날 듯한 이야기를 전하는 것임을 김훈이 다시 일 깨운 셈이다.

김훈은 이처럼 문학 앞에서 언제나 진지하다.

 

 

^^^요즘 서점에선 청춘의 감성을 대변하는 책들이 베스트셀러 명단에 많이 오르고 있다. 풍자와 익살, 조롱이 담긴 글일수록 인기를 끈다. 어느덧 이순(耳順)에 접어든 김훈의 소설에는 유머가 없다고들 한다 김훈은 '촌스러움'이라고 인정한다.

^^^김훈 소설은 경박한 청춘 언어의 질풍노도 앞에서 일자진(一字陣)을 치고, 참을 수 없는 문학의 무거움을 사수(死守)하는 듯 하다. - 조선일보 논설위원 -

 

 

 

 

율동공원 호반의 집- 봄의 산(2008.4.15) 전경

 

 

율동공원 호반의 집- 봄의 산(2008.4.16) 전경

 

 

율동공원 호수 - 여름의 산(2007.7.1) 전경

 

 

율동공원 호반의 집- 깊은 가을의 산(2006.11.7) 전경

 

 

율동공원 호반의 집- 겨울의 산(2008.2.8)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