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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김홍기의 <하하미술관>

김홍기의 <하하미술관>

 

1. - 분리불안과 관계중독에 빠진 나 -

 

새벽 두시가 되어 출판사에 마지막 원고를 넘겼습니다. 오전부터 블로그에 올린 글이 다음 메인에 올라 600여개 이상의 답변을 일일이 적어야 했고, 저녁엔 늦게나마 대학동기 모임에 얼굴을 비추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무선 인터넷을 켜고 블로그에 올라온 답변을 살펴 보았습니다. 어느새인가 블로그 관리에 엄청난 시간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항상 로그온 상태가 되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 이상한 심리는 과연 뭘까요?

 

올해로 블로그를 10년째 씁니다. 처음엔 일기장을 대신하는 도구였고, 유학시절엔 소중한 추억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는 앨범이었고, 한국으로 돌아와선 치열하게 국제 비지니스 시장을 돌아다니는 보부상의 경영학 단상 게시판이 되었습니다. 이 블로그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건 미술에 관한 글들 덕분이었지요.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시간은 행복합니다. 자료를 모으고, 비싼 원서도 덥석 사서 꼼꼼히 읽었습니다. 좁은 골목길을 톰방톰방 뛰어가는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캠버스의 여백을 밟고 다녔지요. 제 자신의 내적인 성장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파워블로거니 베스트블로거니 하면서 블러거들 사이에 경쟁이 생겨나, 제각기 고정 독자층을 키우는 일에 열을 올립니다. 저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일일이 댓글에 답을 달고 공감 표시를 합니다. 그렇게 온라인에 지나치게 신경쓰다 보니 제 자신의 중심이 비는 일이 생깁니다.

 

온라인에서 허망한 인기, 그 덫의 함정을 깨닫게 된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온라인에 있다는 것, 그것에서 분리되는 순간 공허함과 마음상함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 정체불명의 댓글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서운함을 느낀다는 것. 스스로 발견한 제 모습이었습니다. 글 하나를 쓰기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기대보다 못할 때, 만성적인 감정의 적자상태에 허덕입니다. 온라인 공간과 관계맺기에 실패한 것 입니다.

오늘은 저처럼 분리불안과 관계중독에 빠진 분을 위한 치유의 그림을 골랐습니다.

 

서정희의 작품속엔 바로 '발효의 시간' 이 녹아 있습니다. 숲속의 나무든 나뭇잎이든 꽃잎이든 어느 것 하나 같은 것 없이, '차이와 공감'의 목소리를 내며 서로에게 손을 내밀어 숨을 쉬며 껴안습니다.

 

제가 유학한 UBS는 벤쿠퍼 천혜의 자연을 캠퍼스내에 잘 육종시킨 곳 입니다. 제가 살던 기숙사 뒷편이 수목원인데, 다양한 종류의 나무와 꽃이 흐드러지게 핀 그곳에서 이종의 생물들이 조화를 맺고 살아가는 걸 봤습니다. 겨울이었나, 산책길에 저도 모르게 겨울 나목을 껴안아봤습니다. 따뜻한 나무의 피를 느꼈습니다. 집적된 시간의 톱니바퀴가 모여 숲이라는 거대한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걸 그때서야 배웠습니다.

너와 나가 모여 우리라는 숲의 섭생을 완성하는 것이거늘, 난 왜 그렇게도 차별화된 생만이 아름답다고 나를 몰아쳐왔을까? 차별화를 위해 관계를 조장하고 만들어온 것은 아닌가하는 반성을 했습니다.

 

만남은 우연으로 시작되지만, 관계가 발전하려면 '나' 와 '너'가 발효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관계를 구성하는 요소는 촘촘하게 연결된 설계도 같기 때문입니다.

 

힘들다고요? 당신을 지키는 사람들의 손길과 따스한 숨결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럼 당장 숲으로 가서 겨울 숲의 섭생을 보고, 한그루의 나무에도 얼마나 많은 지원군들이 있는지를 배우세요. 나비와 꽃과 그루터기. 관목, 벌레 모두가 엮여 있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힘을 거절하지 마세요. 좋은 향기 마시듯, 함께 흠향하고 힘을 내세요.

 

P.S.

최근 블로그에 올리는 글마다 댓글을 강박적으로 올리는 일을 접었습니다. 왠지 댓글을 올려주지 않으면, 공감해주지 않으면 사람들이 나를 떠날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네요. 좀 더 아름다운 이기주의자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나 자신의 정체성이 튼튼할수록 관계도 더욱 튼튼해진다는것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회사일에 엄청난 지장을 주면서까지 블로그 관리를 하진 않을 생각입니다. 이제 내면의 한계선을 그어야겠어요.

 

 

2. 추천의 말 <내 마음의 반창고 하나>  -신지혜 아나운서-

영화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는 허공을 가로지르는 검은 비닐봉지를 보여준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것은 큰 값어치를 지닌 것도 아니고 감탄할 만한 아름다움을 가진것도 아니며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감독은 그 검은 비닐봉지를 천천히 보여주면서 우리 일상의 소소한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사실 우리를 둘러싼 시공간을 채우고 있는 일상과 그 일상이 품고있는 오브제들을 깊게 들여다 보면 단단하게 압축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그 깨달음으로 우린 작고 반짝이는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애석한 것은 우리 대부분이 일상의 소소함을 가벼이 여기고 그럼으로 인해 주위에 편만한 아름다움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심미안을 가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재능의 대가로 주어지는 희열은 아닐까. 어쩌면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사람은 그래서 그 작고도 평범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느끼고 행복해 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김홍기 작가가 부러운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자신을 둘러싼 작은 우주에 눈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고 그 작은 것들에서 큰 가치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고 그 아름다움을 마음 가득 느끼며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바를 명확하게 글로,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의 글에는 음악이 있고 그림이 있으며 연극이 있고 사람들이 있고 세상이 있으며 우주가 있다. 그의 글에선 세밀하고 날카로운 감성이 깊고도 영롱하게 드러난다.

 

'샤넬, 미술관에 가다' 에 이어 그의 두번째 책이 나왔다. 그때의 설렘을 기억하며 기쁜 마음으로 원고를 읽다보니 새삼 그의 정갈한 마음에 감동을 얻는다. 그의 따뜻한 마음에 위로를 얻는다. 그의 다정한 말투에 마음이 놓인다. 작가가 밝혔듯 이 책은 그림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치유 받을 수 있는 그림 에세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영혼을 위로하고 애무해주는 그림으로 독자를 환하게 웃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온갖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상처투성이인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처방인지......

 

그림과 일상이 녹아 반창고를 만들고 내 마음의 상처 하나에 반창고 하나 붙여주는듯 하다. 눈물이 나도록 감사한 일이다. 우리의 마음에 이렇게 친근하게 다가앉아 괜찮아, 괜찮아, 그림을 보여주며 다독거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

 

조금씩 조금씩 웃다보니 드디어 크게 웃을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상쾌해진다. 덕분에 행복해진다. 세상에...깜짝 놀라며 그야말로 '코리안 뷰티'가 아닐까 생각한다

 

 

3. 저는 그림을 통해 '마음의 균열'을 메워주는 연두빛 희망을 찿았고, 그 희망은 다른 이에게 '반사'시킬 수 있는 마음의 여력을 얻었습니다.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더 상처를 잘 받고 약해집니다. 이 상처 후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서는 몇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트라우마'를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결단력과 의지, 나를 둘러싼 주변부에 대한 따스한 믿음과 응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지혜와 용기, 나를 사랑하는 일을 마음의 깊은 습관으로 배어나게 하는 것 입니다.

이성과 감성의 균형, 내적성장을 위해 열린마음을 갖는 일 입니다. 결국 소중한 나자신의 삶을 위해 걸어가야 할 길을 상징적으로 그리는 일 인 것 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에 서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을 위한 그림지기가 되어 아픔을 위로하는 큐레이터가 되고 싶습니다. 상처가 난 곳에 새 살이 돋고, 딱지가 눌어 붙은 곳이 다시 떨어지지 않도록, 마음의 아교를 녹여 싸매고 봉합하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하는 그림여행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관계맺기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분들, 인간에 대한 벽으로 불신의 벽이 커진 분들, 주부 우울증에 걸린 분들, 구조조정의 한파 속에 마음의 공황을 겪는 분들, 연애와 사랑에 지린 나날을 보내는 분들, 현대사회가 빚어낸 다양한 중독증에 걸린 분들, 생의 남루한 옷자락을 펴서 말리기엔 소심한 여러분을 위해, 제가 손을 잡고 가겠습니다. 

 

삶을 자세히 보면 한올로 모아지기 위해 여러개의 실이 만나서 결합되는 '꼬임' 이 필요합니다. 우리네 삶도 그렇습니다. 나와 같은 빛깔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줄을 지어 내 편이 되어주고, 나와 같은 꿈을 공유하며 함께 나아갈 때 그 꼬임의 촘촘함이 꿈의 진정성을 더욱 강화시켜 주지요.

 

어는 사회심리학 잡지에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기에 소개합니다.

'행복한 노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란 질문에 대한 답은 '성숙한 방어기제를 갖는 것' 이었답니다. 신체적 젊음이나 경제력이 아닌 자기존중과 관리, 일상의 다양한 감정을 긍정적으로 소화하고 넘길 수 있는 심리적 방어기제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넉넉한 마음씀씀이라고 할까요.

 

 

4. <닫는 글>  -마음의 벽에 건 그림 한장 - / 카를 슈피츠베크 - '가난한 시인'

 

손가락으로 자신이 지은 시의 운율을 세어보는 시인의 모습이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가난해도 행복한 저 시인의 표정이 내 얼굴에서도 발산되고 있는지, 거울을 찿아 확인해 보고 싶네요. 글을 쓰는 일은 행복합니다. 머리칼을 하도 쥐어 뜯어서 탈모가 더욱 심해진 걸 빼놓고는, 글을 쓰다보면 마음이 정리되어 좋습니다. 마음속 밑비닥까지 내려가, 그림을 통해 느꼈던 것들, 당시 나를 둘러싼 어려운 상황들을 기억해내어 남김없이 정리하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저는 마음에 일어나는 많은 변화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불쑥 마음의 심연에서 표피를 뚫고 나오는 이유 모를 섭섭함과 아쉬움, 상심, 우울....

 

글을 쓰면서 내가 이걸 왜 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중간에서 접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한편으론 글 하나하나를 완성해서 출판사에 보낼 때마다, 이 글이 과연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과 더불어 글을 쓰며 가벼워지는 제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영혼을 위로하고 애무하는 따스한 그림 에세이' 란 테마가 과연 어울릴까? 내가 누구를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 만큼 나 자신을 잘 추스리고 있는지 물어봐야 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이 이어졌습니다.

 

그 결과는 아주 좋은편 입니다. 자기배려에 대한 기본을 다시 익혔고, 익숙한 나머지 발견할 수 없었던 일상의 행복과 나 자신의 부족함을 조금은 껴안아볼 수 있었습니다. 긍정하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는 겨울잔설을 녹이는 햇발처럼 습한 마음의 한 구석을 어루만졌습니다.

 

치유라는 단어를 책에서 쓰다보니, 제가 대단한 미술치료사나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그저 짧은 생을 살아오면서 아프고 시릴 때마다 갤러리를 다니며 그림을 보아왔을 뿐 입니다. 그 그림들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며 위로를 얻었을 뿐입니다. 이제 그런 마음속 그림들을 꺼내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일 뿐 입니다.

 

어쨌거나 힘들고 버거웠던 지난날 생의 무게를, 그림과 글을 통해 이제 내려 놓습니다. 글을 마치는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기회가 제게 주어졌다는 것 자체에 감사합니다.

 

 

5. 예전에 글을 잘 쓰고 싶다고 했을 때, 문학을 전공한 친구가 작문연습을 위해 필사해야 할 두사람의 작가가 있다고, 그 중 한명이 바로 '오정희' 선생님이라고 하더군요. 그 후로 김훈과 더불어 오정희의 글을 항상 일기장에 적어놓는게 제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번에 나온 작품집 제목이 끌립니다. '돼지 꿈' 중년들을 위한 소설 입니다.

--- 끊임없이 내면을 향해 걸어 가면서도, 일상의 무게를 견디고 감내하는 중년여성들의 모습이 인상적 입니다.

 

 

6.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이 한때의 기대와 열정을 조금씩 포기하고 생활이라는 괴물과 타협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비감하고 또 서글픈 일 입니다. 애초에 인생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평범하고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의 한겹 안쪽을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실핏줄처럼 섬세하고 복잡하게 얽힌 기쁨, 열망, 사랑, 슬픔, 분노 등이 삶을 이루며 흐르고 있다. 우리네 인생이란 이 같은 추상적 단면들이 이루는 무늬의 연속이리라. 하지만 어느 한순간 찿아오는 섬뜩한 삶의 진실이 반드시 비애를 동반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 살아가는 누구든 그 애환이 일렁이는 마음의 무늬는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공감이 생의 작은 위안이 될지도 모른다.

 

 

 

 

모시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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