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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감사일기

나에게도 음악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에게도 음악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에게도 음악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많은 볼륨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듣지 않을 방도가 없을 때 들어야만 하는 음악은 고통이요. 고문이다.

 

실제로 미군은 이라크전에서 생포한 포로들을 24시간 백열등이 켜진 독방에 가둬놓은채 미국 헤비메탈 밴드의 노래를 엄청난 볼륨으로 반복해 들려줬다고 한다. 포로들은 몽뚱이 찜질도, 물고문도 당하지 않았지만 "제발 그 노래는 이제 그만" 하면서 내부정보를 털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동네에 치킨집 하나가 새로 문을 열면 풍선으로 만든 아치 앞에서 반나의 유니폼을 입은 여자들이 대형 앰프로 음악을 틀며 춤을 춘다. 치킨집 주인과 아르바이트 하는 여자들만 신나서 들떠 있고, 나머지 모든 주민들이 괴로워 한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막지 않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트럭을 불법으로 세워놓고 불법으로 잡화를 팔던 상인들에게 최근 아예 점포를 내줘 양성화 했다. 최근에 휴게소에 들러보니 이 상인들의 가게는 트럭에서 점포로 바뀌었을 뿐 화장실 가는 길목에서 음악을 펑펑 틀어대는 것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단체효도 관광길에서 술 한잔 걸친 어른들 중에 이 음악에 맞춰 덩실덩실 춤추는 이들을 본적이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이 '폭력적 음악'을 지나친다

.

어느날 일본인 중국인 관광객이 요즘들어 부쩍 많아진 남대문 시장에 갔는데, 숭례문 도로변에 트럭을 세워놓고 엄청난 볼륨으로 녹음해 놓은 생선파는 광고를 하고 있다. 관광 온 그 사람들이 한국말을 알지는 모르지만 순간 내 얼굴이 공연히 화끈해진다. 

 

가끔 남한산성에 자주 올라가는 편이다. 그런데 소형 라디오를 바지춤에 차고 커다란 볼륨으로 뽕짝을 들으며 산에 올라오는 중년의 남자를 보는 경우가 3~4번은 있었다. 그럴때 마다 생각한다. 이어폰을 꽂고 혼자 들으며 올라가지 저렇게 꽝꽝거리며 올라가는 마음은 폭력적 마음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한국사람들은 유난히 노래에 관대하다. 모였다 하면 노래 한곡 하는 것이 주요 레크레이션이다. 공원에 야유회 온 사람들이 대형 앰프로 공원 전체를 장악해도 별로 항의하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몇년전에는 서울 지하철 열차안에 설치된 TV에서 자막 뿐 아니라 소리가 나오게끔 했는데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하철에서 할 일도 없는데 TV나 보고 가면 좋지 뭘." 하는 반응이 많았다.

 

미국은 공공장소의 소음을 까다롭게 규제하고 있다. 특히 국립공원에서의 소음규제는 매우 엄격하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해가 저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관광객들의 말소리외에는 어떤 인공적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거대한 자연의 조각 예술 앞에서는 뉴욕 필의 교향악이나 소프라노 조수미의 아리아도 한낱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그랜드 캐니언은 소음 뿐 아니라 조명도 엄격히 규제해 인근의 통나무집 숙소외에는 불빛을 찿아보기 어렵다. 달빛에 교교히 물드는 대자연을 감상하라는 배려일 것이다.

 

일상의 시간과 장소에서 앰프로 중독된 음악을 듣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이런 음악을 퇴근길에 만나면 발목에 모래주머니가 달린듯 갑자기 더 피곤해진다. 우리 모두에게는 음악을 듣지 않을 권리가 있다. 

 

 

 

 참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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