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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쌀 빚을 탕감해달라고 관아에 바친다-정초부

 

쌀 빚을 탕감해달라고 관아에 바친다

(呈分司乞蠲戶米·정분사걸견호미)

 

호젓한 집을 개울가 응달에 장만하여

메추라기와 작은 숲을 나눠 가졌는데

썰렁한 부엌에는 아침밥 지을 불이 꺼졌고

쓸쓸한 방아에는 새벽 서리만 들이친다.

초가삼간에는 빈 그릇만 달랑 걸려 있고

쌀알 한톨은 만금이나 나간다.

낙엽 쌓인 사립문에 관리가 나타나자

삽살개는 짖어대며 흰 구름 속으로 달아난다.

 

 -정초부(鄭樵夫·1714~1789)

 

 

 

幽棲寄在澗之陰(유서기재간지음)
分與鷦鷯占一林(분여초료점일림)
冷落山廚朝火死(냉락산주조화사)
蕭條野確曉霜侵(소조야확효상침)
三椽小屋懸孤磬(삼연소옥현고경)
一粒長腰抵萬金(일립장요저만금)
落葉柴門官吏到(낙엽시문관리도)
仙尨走吠白雲深(선방주폐백운심)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시조(2012.4.28) 이다. 안대회 성대 교수가 시조평을 했다.

 

가난뱅이 시인의 낭만적인 넋두리 시다. 영조 시대의 노비 시인 정초부의 초가집으로 쌀 빚을 갚으라고 아전들이 쳐들어왔다. 그에게는 갚을 쌀도 없었고 버틸 권력도 없었지만 다행히 시를 쓸 능력은 있었다. 며칠 굶은 궁상을 늘어놓아 빚을 갚을 처지가 못 됨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메추라기와 산자락을 나눠 차지했다니 그의 삶은 메추라기처럼 미약해보이고, 삽살개가 짖어대며 흰 구름 속으로 달아났다고 하니 조금만 더 몰아세우면 그도 곧 영영 인간 세상을 버릴 것만 같다. 시를 아는 관리라면 연민의 정이 들어 그냥 되돌아갔으리라. 시는 때때로 논리가 정연한 문서보다도 더 강한 힘이 있다.

 

김홍도가 그린 <도강도(渡江圖)>란 그림이 있다. 넓은 강을 건너는 모습을 그린 산수화다. 김홍도의 그림치곤 그리 이목을 끌지 못하는 축에 드는지 이 그림을 두고 관심있게 논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 이 그림은 이상하게 끌리는 데가 있다. 아마도 한강 어디쯤인가를 묘사한 듯한 이 그림에 붙어있는 화제(畵題) 때문이다. 화제로 쓰인 시는 이렇다.

 

 

동호의 봄물은 쪽빛보다 푸르러
백조는 선명하게 두세 마리 보이네.
노젓는 소리에 모두들 날아가고
노을 지는 산빛만이 강물 아래 가득하다.
東湖春水碧於藍 白鳥分明見兩三
搖櫓一聲飛去盡 夕陽山色滿空潭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이 해 저무는 강의 고즈넉한 풍경을 묘사한 시다. 그리 어렵게 쓴 시가 아니다. 그러면서도 빛깔과 공간이 아주 잘 어우러져 시정(詩情)과 화의(畵意)가 담뿍 느껴지는 좋은 시다. 그러나 작자명을 밝히지 않아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김홍도가 지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의 작품일까? 이 시는 놀랍게도 노비가 지은 시다.

 

정조 시대에 양근에 살던 정초부(鄭樵夫)라는 나무꾼 노비가 있었다. 그는 성명이 정봉(鄭鳳)이요 호가 운포(雲浦)나 모두들 정초부라고 불렀다. 초부는 나무꾼의 한자어니 정씨 나무꾼이라는 뜻이다. 그는 참판을 지낸 여동식(呂東植) 집안의 노비였다.

 

노비가 어떻게 저런 뛰어난 시를 짓게 되었을까? 그는 어릴 때 나무하러 산으로 보내면 주인집 아들이 책을 읽는 것을 부러워하며 구경하곤 했다. 가끔은 나무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도 따라 외웠다. 그들 곁에서 들은 내용을 몰래 익혔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그는 제법 식견이 있고 시를 잘 짓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나무하는 틈틈이 시를 지었는데 사람들 사이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지금의 팔당대교 상류인 월계(月溪) 어디쯤엔가 살면서 나무를 해다 한양에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김홍도의 그림에 적힌 작품도 나무를 팔기 위해 오고가며 본 풍경에서 나온 시임이 틀림없다. 서울로 나무를 팔고 돌아가다가 보게 된 동호대교 부근 어딘가의 아름다운 저녁 풍경에 매료되어 나온 작품이리라. 노비의 시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다듬어지고, 서정적이다. 하기는 노비라는 신분에 집착해서 시를 해석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 시는 세상에 널리 퍼져서 정초부는 식자들 사이에서는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이름이 났다고 해서 정초부의 인생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월계에서 나무하며 시짓는 시인으로 평생을 보냈다. 한편으로는 주인이 그를 노비에서 풀어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노비로서 나무하며 먹고사는 가난한 시인이지만 서울의 고관이나 저명한 문인들이 교통요지인 이곳을 지날 때 그를 찾아보려했다.

 

신광수란 유명한 시인도 여주를 가기 위해 월계를 지날 때 "여기에는 노비 정봉이란 사람이 시를 잘한다"며 그를 만나려 했으나 만나지 못했다. 몹시 아쉬워하며 "아침에는 나무 팔아 배 위에서 쌀을 얻고, 가을에는 나무에 기대 산 속에서 종소리를 읊네."(賣柴朝得江船米, 倚樹秋吟峽寺鍾)라고 정초부의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리는 시를 지었다. 나중에라도 꼭 만나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주변 고을의 수령들도 시회가 있으면 그를 불러서 함께 시를 짓기도 했다.

 

정초부는 이름이 알려진 이후에도 나무꾼 생활을 그만두거나 명성을 이용해 세력 가진 자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월계의 나무꾼이라는 이름에 만족했다. 지은 시에는 이름도 쓰지 않고, 그저 초부(樵夫)라고만 썼다. 남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초부라고 했다. 자신을 낮췄다고 해서 식자들이 그를 노비니 나무꾼이니 무시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경기도와 강원도로 가는 주요한 길목이었던 월계를 지키는 특별한 명사가 되었다. 심지어는 그가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월계를 지나는 사람들은 초부를 기억하고 그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다.

 

김홍도의 격조높은 그림에는 그 옛날의 나무꾼 시인이 말없이 작품을 얹고 있다. 굳이 그가 이름이 정봉이요 노비였단 사실을 밝힐 필요가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인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면, 전에 비해 그림도 풍경도 시도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을 어쩌랴!

 

이 글은 명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의 글 입니다.(거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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