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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운자(韻字)를 부르기에* (呼韻·호운)―서영수각(徐靈壽閣·1753~1823)/양근성지 윤점혜상 외 2장

 

운자(韻字)를 부르기에* (呼韻·호운)

 

시장과 먼 곳에다 살 곳 정하고
약초 심고 이엉 엮어 집을 지었네
꽃 앞에는 술이 있어 함께 취하나
버들 아래 문 있어도 찾는 이 없네
방과 방엔 책과 그림 가득 채우고
부엌에는 생선과 나물 넉넉하여라
지극한 즐거움이 여기 있나니
속인들 조롱해도 괘념치 않네

 

卜居遠朝市(복거원조시)
種藥又誅茅(종약우주모)
酒有花前醉(주유화전취)
門無柳下敲(문무유하고)
圖書常滿室(도서상만실)
魚菜更餘庖(어채갱여포)
至樂元斯在(지락원사재)
不嫌俗子嘲(불혐속자조)

 

―서영수각(徐靈壽閣·1753~1823)

조선일보/ 가슴으로 읽는 한시(2012.6.2)이다.안대회 교수의 평이다.

명문 사대부 집안의 부인이자 어머니인 서영수각의 시다. 귀부인이 마음속에 담고 있는 행복이란 무엇이었을까? 우선 조정이나 시장과는 먼 곳에 살 집을 정하기로 한다. 집을 마련한 뒤에는 약초를 심고 초가지붕을 해서 얹으리라. 그 집에서는 무엇을 하며 지낼까? 화단에 꽃이 피면 마시고 취할 수 있는 술을 넉넉하게 장만해놓되 찾아오는 사람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다. 방안에는 책이 가득하고 부엌에는 물고기와 채소가 넉넉하게 있다. 바라는 것은 이것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겠지. 뭐든지 할 수 있으련만 저렇게 쓸쓸하게 책이나 읽고 나물이나 먹으며 살까 하고. 하지만 가진 자의 행복이 꼭 화려함에 있는 것은 아니잖은가? 그녀는 그것을 말하고자 했으리라.

* 시의 운자를 다른 사람이 부르자 거기에 맞춰 시를 지었다는 뜻.


 

문인이자 수학자인 '서영수각'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여류문인를 꼽으라고 하면 단연 서영수각이다. 그녀는 192편의 시와 수필을 남긴 문인이면서 수리학자로 역사에 남아 있다.
서영수각(徐令壽閣)은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아버지 서형수와 안동 김씨 김창협의 증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맑고 자질이 뛰어나고 글읽기를 좋아했다. 특히, 시를 좋아하여 늘 도연명의 '전원으로 돌아가리(歸田園)'를 암송하였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병약하여 입은 옷이 무거울 정도로 파리하고 가냘펐다. 하지만 집안 일이나 웃어른을 모시는 것에 빈틈이 없었고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생활을 하였다.
14세에 홍인모와 결혼하여 3남 2녀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집안은 친정과 시가가 모두 명망 있는 양반가였다. 할아버지는 이조참판을 지내고 시집인 홍씨 가문도 재상을 많이 배출한 양반가였다. 그녀는 유교적 사회가 요구하는 유순하고도 순종적인 여성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영수각은 결혼해서 처음은 가풍을 배우고 아이를 기르고 남편 뒷바라지에만 전념했다. 그러다가 결혼 10년이 넘어 집안이 안정되어서야 자신의 문학적, 수학적 재능을 화려하게 꽃 피웠다. 물론 여기에는 남편 홍인모의 적극적인 외조가 큰 힘이 되었다.


자식에게 정치의 정도 가르친 어머니
남편 흥인모에게 있어 영수각은 도학자적 정신과 시문생활의 반려자였다.
어느 날, 홍인모는 자신이 우연히 던진 시율을 부인 서영수각이 답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재질의 놀라움을 표현했고 이때부터 아들들과 함께 그녀의 시와 산문을 모아두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녀의 시와 글 192편은 남편 홍인모의 시집 「족수당집」, 6권에 '부영수각고'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영수각이란 당호도 남편이 지어준 것을 보면 이들 부부는 가장 이상적인 삶을 구가한 평등부부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의 다양한 학문적 소양은 자식이라는 거목에게 질 좋은 거름이 되었다. 영수각은 밤이면 아들에게 직접 글을 가르쳤다. 잠자리에 들때는 조용히 경전을 외워 주고 시문과 격언을 들려주었다. 정치에 몸담을 아들에게 백성을 위한 정치의 올바른 도리를 가르쳤다.
"왕에게 곧게 간(諫)하다가 화를 입되 두려워하지 않는 신하보다는 어진 정사를 베풀어 사지(死地)의 백성을 건져내는 신하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활민(活民) 즉, 백성을 살게 하는 정치가 정도라고 믿고 가르친 것이다. 맏아들 홍석주는 좌의정을 지냈는데 성품이 겸허하고 언행이 평민과 같아 주위의 우러름을 받았다. 그의 학문적 기초와 도가적 사상, 그리고 슬기로운 몸가짐 모두 어머니 영수각의 가르침에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그녀는 자녀들에게 부귀영화는 화의 근원이므로 항상 성실하고 검소한 생활을 지키도록 가르쳤다.


수리학자로서 재능 발휘
한편, 서영수각은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간편히 푸는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냈다. 개평방(開平方) 방정식, 삼각형 등 난해한 공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낸 것이다.
"어머니는 수학을 상당히 좋아하셔서 언젠가 <주학계몽>을 본 일이 있는데 거기에 나온 나눗셈, 분수계산, 가감법 등을 보시고 왜 이렇게 번거롭고도 어리석게 풀었는가 하시고 당신 나름대로 그것을 계산해 내었습니다. 훗날 중국에서 들여온 「수리정온」이란 책을 가지고 어머니가 해놓은 것과 비교하여 보니 그 이론이 똑같았다."
이는 아들 홍석주가 쓴 영수각의 행장의 일부분이다. 이글을 통해 보듯이 영수각은 수학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영수각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자신의 발전은 물론 자녀를 모두 학자와 정치가로 키워 놓았고 71년의 수를 누렸다.

 삼국시대부터 개화기까지 여성인물 35명을 재평가하는 차원에서 소개한 자료집 「한국역사속의 여성인물」(上)을 펴냈다.

이들 35명중에는 고구려와 백제 창업의 주역이었던 소서노, 남편이 비문을 남겨 사랑을 표현한 `고려 최고의 사랑받는 아내' 염경애, 조선시대의 인물로 시문과 수학에 밝았던 서영수각, 제주도의 여성사업가 김만덕, 항일투쟁에 나선 윤희순 등이 있다.

이 자료집에 따르면 소서노(BC 66∼ BC 67)는 거의 빈 손으로 졸본부여에 도착한 주몽에게 토지와 노예를 제공함으로써 고구려 창업에 기여했다. 그러나 주몽이 첫째부인 예씨의 소생 유리에게 왕위를 넘겨주자 소서노는 친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남하, 백제를 창업했고 백제인의 정신적 지주가 됐다.

조선시대의 김만덕(1739∼1812)은 기생살이 경험을 바탕으로 객주집을 운영, 제주의 거상으로 성장한 인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업가로 불리우는 그녀는 흉년기에 육지에서 곡물 4백50석을 들여와 구호곡으로 내놓는 넓은 도량을 보였다. 당시의 임금인 정조로부터 치하와 함께 상을 받았다.

서영수각(1753-1823)은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공식을 간편히 푸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특히 개평방 방정식 등 난해한 공식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냈다.

여성 실학자인 이빙허각(1759-1824)은 가정실학백과의 최고봉이라 할 `규합총서'를 저술, 양반가 부인들의 교양있고 수준높은 삶의 양태를 상세히 보여줬다. 모두 5책으로 구성됐고 주식, 의복 등 실생활에 필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또 천문지리 등에 대해 쓴 `청규박물지', 자작시와 산문이 실려 있는 `빙허각고략'등도 남겼다.

구한말 의병대장 유홍석의 며느리인 윤희순(1860-1935)은 `안사람 의병가' 등을 지어 여성들이 일제에 맞서 궐기할 것을 읍소했고 여자의병을 모아 남자의병을 위한 취사, 세탁을 맡았다.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쇠똥과 찰흙 등을 채집, 화승초에 쓸 화약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 이 자료집의 집필에는 박용옥 성신여대 교수, 이배용 이화여대 교수, 강영경 숙명여대 강사, 권순형 강릉대 강사, 한희숙 숙명여대 교수, 이순구 국사편찬위위원회 연구사, 허미자 前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


 

천주교 양근성지 동정 순교자 윤 점혜 아가다 상

 

천주교 양근성지 '순교의 큰 칼 아래' 조각

 

'순교의 큰 칼 아래' 조각 안내문

◈ 빨마가지~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종려나무' 가지를 일컫는 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