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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6월 26일 [(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자아존중감을 키우자

2012년 6월 26일 [(녹)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기도를 들어주시어 아시리아의 침공에서 유다를 구해 주셨다. 이사야는 아시리아의 임금 산헤립이 되돌아가고 예루살렘 도성이 수복되었음을 알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인간이 살아가는 데 지켜야 할 기본 태도이다(복음).

 

 

제1독서 <나는 이 도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니, 이는 나 자신과 다윗 때문이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9,9ㄴ-11.14-21.31-35ㄱ.36
복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오늘의 묵상

신학생 때 읽었던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 감동의 여운이 여전해서 소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안셀모 밀리와 프랜시스 치점은 친구로서 같은 사제의 길을 걷습니다. 안셀모는 교회 내에서 높은 지위와 명예를 누리며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반면 불우한 소년기를 보내고 사제가 된 프랜시스는 외모도 볼품없어 보였고, 사람들에게 오해와 무시를 받으며 살아갔습니다. 그는 중국 오지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숱한 고난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습니다. 이 소설은, 외견상 실패와 고난의 삶을 살지만 참다운 인간상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공과 명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것을 이룬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닮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은 분명 다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인생의 궁극적인 성공과 행복을 하느님의 기준으로 바라보며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서만 보신다고 믿으며 진실하게 사람들을 사랑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산 사람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성전 십자가의 길 제7처~ 기력이 다하신 에수님게서 두번째 넘어지심을 묵상합니다...^-^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2012년 나해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
자아존중감을 키우자







제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중학교 때부터 경영학을 전공하려는 마음을 가졌었고, 대학도 학과를 먼저 보고 선택하였습니다. 물론 군대 가기 전에는 다른 과 학생들이 경영학을 사람들 등쳐먹는 학문이라 하여 사기과라고 놀려대기도 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을 얼마만큼 잘 이용해서 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최대화 하느냐가 경영학의 관건이니 그렇게 놀림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였고 부끄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복학해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도저히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비용 몇 십 원 줄이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해야 하는 비인간적인 학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평생 돈 몇 푼 때문에 걱정하고 머리 쓰며 살아가야 할 만큼 내 인생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삶이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제의 삶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저를 변하게 했던 것은 대학 들어가면서 복학할 때까지 5년 동안 꾸준히 읽었던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때문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인생을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정말 가치 있게 사신 분들이었습니다. 내 인생도 그 분들처럼 세상 걱정으로 아웅다웅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가치 있게 살고 싶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배워가면서 제 맘속에 꾸준히 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자아존중감이었습니다.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 Self-esteem)이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는 마음입니다.

 

자아존중감은 학업 성적, 리더십, 위기극복능력, 대인관계 등 삶의 많은 영역에 영향을 미칩니다. 특히 대인관계는 자아존중감과 정비례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서울과 경기도 권에 거주하는 고등학교 1학년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자아존중감이 가장 높은 그룹은 89.3%가 대인관계 최고 수준의 그룹에 속했습니다. 반면 자아존중감이 낮은 그룹은 78.0%가 대인관계 수준 역시 낮게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은 선상에서 자존감의 상처는 우울증으로 이어지고 자살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감과 자존심은 매우 다릅니다. 물론 둘 다 자신을 좋게 평가하고 사랑하는 마음이지만, 자존심은 타인과의 경쟁 속에서 얻는 긍정이며 자존감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긍정입니다. 이에 따라 자존심은 끝없이 타인과 경쟁해야 존재할 수 있으며 패배할 경우 무한정 곤두박질칩니다. 제가 보는 입장은 자존심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이고, 자존감은 겸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자신에 대한 확고한 사랑과 믿음이기에 경쟁 상황에 따라 급격히 변하지는 않습니다.

 

자존감은 보통 아이 때 부모에 의해 많이 결정이 됩니다. 예를 들면 자아존중감을 떨어뜨리는 행동은 부모가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는 것입니다. 13~14개월 정도 되면 아이들은 혼자서 수저를 쓰려하고 밥을 먹으려 합니다. 그때 부모는 주변이 밥풀로 덮이는 것을 싫어해서, 아니면 밥을 먹여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서 아이가 수저를 쓰는 것을 막고 부모가 억지로 시간에 맞추어 밥을 먹여주면 아이들은 배고픔이라는 자신의 몸에서 보내는 신호가 옳은지 아니면 엄마가 밥을 먹으라고 하는 것이 옳은지 혼동하게 됩니다.

 

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절대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엄마가 옳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게 되면서 아이들의 자아존중감은 낮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교육된 자아존중감보다도 신앙이 주는 자아존중감은 비교할 수 없이 큽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참으로 가치 있고 사랑받을만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에서 생기는 자아존중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남들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우선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자아존중감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난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냥 대충 살면 되지 뭐. 나는 죽어도 싼 놈이야!’라고 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게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남들에게도 그렇게 대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으로 자아존중감을 키웁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교만과, 육체와 돈의 노예로 살아갈 비천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영생을 누리는 훨씬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