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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7월 2일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관계의 거리

2012년 7월 2일 [(녹)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말씀의 초대

남부 유다 출신의 아모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부 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이스라엘이 참된 예배를 드리도록 노력하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는 이들에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신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버지의 장사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일깨워 주신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힘없는 이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다 짓밟았다.>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6-10.13-16

복음 <나를 따라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18-22


 

오늘의 묵상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예수님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 모질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처럼 모질지 않고서는 예수님을 올바로 따르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입니다.
신학생 때에 교수 신부님께 들은 선교사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난날 프랑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올 때 부모와 함께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미지의 먼 땅으로 떠나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미사는 부모와 아들이 함께 드리는 마지막 미사로 여겨졌습니다. 부모는 떠나는 아들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발에 입을 맞춥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아들의 발을 축복해 주려는 것입니다. 아들은 혈육 간의 이별의 아픔을 견디며 부모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 줍니다. 그리고 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선교지로 향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인생의 여러 중요한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죽은 부모의 장사는 자식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이 모든 것에 앞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호한 결단입니다. 이러한 결단이 없으면 늘 핑계나 구실로 자신을 합리화합니다. 작은 어려움이 닥쳐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뒷전으로 미룹니다. 예수님께서 일깨워 주고자 하신 것도 바로 이 점일 것입니다.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성전 십자가의 길 제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돌아가심을 묵상합니다...^-^

 

2012-07-01 오후 10:44:02 조회수 124 추천수 6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2012년 나해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 관계의 거리




제가 아는 한 신부님은 유학할 때 여자를 알게 되어서 결국 사제의 옷을 벗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헤어져서 따로 살고 계십니다. 함께 살다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관계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께 너무 가까이 다가오려는 사람에게 조금 거리를 두십니다. 이 사람은 갑자기 열이 올라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쫓아다니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금방 사그라질 그런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처지가 머리 뉘일 곳도 없는 사람임을 확실히 하셔서 조금 더 차근차근 생각해보고 다가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불 안 가리는 사람은 그렇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그렇게 떠나가기 십상입니다.

 

또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더 가까이 두고 싶으시지만 뜨뜻미지근해서 계속 세상과 예수님을 저울질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는 싶으나 사람들로부터 불효자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그런 것 다 집어치우고 당신을 따르라고 잡아당기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뜨뜻미지근한 관계로 남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너무 가까이도 하지 말고 너무 멀리도 하지 마라라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관계를 유지시키는 기본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거리를 무시해서 서로 불이 붙어 결국 다 타 버리거나, 혹은 너무 멀어져서 냉랭해지게 됩니다.

 

이 말은 중간에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치 태양계의 별들이 태양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혹은 태양계 밖으로 튕겨나가지 않고 힘의 균형을 유지하며 도는 것과 같습니다. 이 힘의 균형이 깨지면 관계도 깨지게 되어있습니다.

 

지구가 바로 이런 균형 감각을 지닌 대표적인 별입니다. 태양으로부터 조금 더 멀어지면 너무 추워져 아무도 못 살게 되고 너무 가까워지면 더워서 못 살게 됩니다. 이 거리가 모든 이들의 관계에서 존중되어져야 할 합당한 거리입니다.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 거리인 것입니다.

 

저에게도 몇 년 전에 매우 가까이 다가오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자 스스로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같은 마음인데 확 타올랐다가 확 식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또 아주 오래 관계가 유지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신 예나지금이나 서로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만나면 만나고 안 만나면 그만인 관계의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진정한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멀어져가는 사람들에게 굳이 내 자리를 떠나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이 하룻밤 잠을 잘 때 50번 이상이나 뒤척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는데 어린아이는 종종 떨어지곤 합니다. 어른들은 뒤척일 때 한 번은 오른쪽, 다음엔 왼쪽으로 뒤척이지만 아이들은 한 방향으로 계속 뒤척여 침대에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해서 균형을 이루는데 비해 어린아이는 균형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 성숙해간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균형 감각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모든 관계는 이런 힘의 균형 속에서 형성됩니다. 초대교회 영지주의 이단은 육은 더럽고 악하며, 영은 깨끗하고 좋다고 했습니다. 또 유물론자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사람은 보이는 물질에 의해 좌우된다고 육체만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두 극단은 하느님이시면서도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균형 감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본 떨기나무가 그 나무와 불이 서로를 태우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있는 것을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그렇게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치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 남자와 여자, 하느님과 나, 사제와 신자 등의 모든 관계는 이 힘의 균형이 만드는 관계의 거리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중용이란 말이 항상 가운데는 아닙니다. 긴 막대를 손가락으로 떠받칠 때 왔다 갔다 하는 힘의 균형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관계에서 이 힘의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분이셨고, 이것은 우리들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균형이 깨어질 때 관계도 깨어지게 됩니다. 기찻길이 영원히 기찻길이 되려면 더 이상 좁혀지지도 또 넓어지지도 않는 항상 일정한 둘 간의 거리가 있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