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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2012년 7월 8일 주일복음 <예언자는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2012년 7월 8일 주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 이동]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반역의 민족”이라고 지칭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이스라엘 민족에게 파견하시어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가시, 곧 사탄의 하수인이 몸을 찌르는 고통을 주시어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셨다고 한다. 바오로 사도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약함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은총과 능력을 깨닫는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시며 배척받으신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가난한 집안의 목수로만 여긴 것이다(복음).

 

제1독서 <그들은 반항의 집안이지만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될 것이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2,2-5
제2독서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12,7ㄴ-10

복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오시어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처음에는 깜짝 놀랍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비천한 집안의 출신이라는 사실과 그분의 현재 활동을 비교하여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난날의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예전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완고한 마음과 하느님에 대한 불신을 질책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경직된 생각을 알아채시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예레미야 예언자도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온갖 음모와 살해 기도를 당했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믿지 않으니 이제 예수님의 구원의 손길은 온 세상 사람들에게 펼쳐질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현실을 바라보려고 합니다. 우리도 나자렛 사람들처럼 편견과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편견과 고집에 따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활동은 우리의 생각 너머의 차원입니다. 주님을 받아들이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비우고 그 자리에 믿음을 채워야 합니다.

 

 

분당 요한성당 벽화

 

 


 

2012-07-08 오전 5:58:45 조회수 24 추천수 0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7“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세상 안에 살면서 날마다 예수님 삶의 신비를 마음에 새기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예수님은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마태 10,6)에게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며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사도들한테 ‘예수님 때문에’(18절) 법정에 넘겨지고 고문당하며 권력자들 앞에서 재판받더라도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머리를 써서 기나긴 변호연설을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 안에 있는 아버지의 영이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17-20절)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이미 박해를 선포하셨듯이, 기원후 80-90년경 마태오가 복음서를 쓸 때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인과 이방인한테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박해의 상황에 폭력으로 맞대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지도층 앞에서 재판받으실 때 입을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정치 재판에서 사람들이 갖가지로 고소해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렇듯 오늘 복음의 17-19절 말씀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 사신 그대로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한테 침묵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이사야서 53장의 고통 받는 주님 종의 모습과 사명을 연상시켰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7; 사도 8,32 참조)

사도들은 예수님 때문에 형제들과 가족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철저하게 고독을 체험할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한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마태 10,21-22) 그런 종류의 미움은 이미 구약시대 예언자들이 체험했던 것인데 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고, 결박과 투옥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돌에 맞아 죽기도 하고 톱으로 잘리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으며 양가죽이나 염소 가죽만 두른 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고 다녔습니다.”(히브 11,36-39) 이 대목은 우리 신앙의 선조들인 한국교회 순교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예언자들과 예수님이 걸어가신 이 길은 바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걸어야할 길이기도 합니다.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고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제자가 스승처럼 되고 종이 주인처럼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마태 10,24-25) 제자들은 스승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겪는 것을 기뻐했습니다.(사도 5,41-42 참조) 마지못해서나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게 고난을 견뎌냈고(1베드 4,14 참조) 특권처럼 여겼습니다.(필리 1,29 참조) 고난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콜로 1,24)을 자신의 몸으로 대신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한테, 박해를 ‘끝’까지 견딜 힘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로마 5,3-5 참조) 이 ‘끝’은 현세의 종말이며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 계시를 말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마침내 살해된 어린양과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묵시 5,12 참조)

제자들은 스승의 삶의 신비가 또한 그들 삶의 신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신비를 깊이 이해할 때 세상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은 죽음인 순교가 가능합니다. 현재 겪는 어려움과 갈등, 박해와 미움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없습니다. 더 큰 선을 끌어내기 위해 통과해야 할 문이기 때문입니다.


묵상(Meditatio)
성령님, 세상 안에 살면서 제 삶의 양식 때문에 사람들한테 미움 받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저를 자유롭게 해주십시오. “…모멸받는 두려움, 경멸받는 두려움, 질책당하는 고통의 두려움, 비방당하는 두려움, 사람들한테 잊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또는 실수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내 자신이 우습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의심받는 두려움에서, 오 주님, 저를 자유롭게 해주십시오.”(마더 데레사)


기도(Oratio)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성채이시니 당신 이름 생각하시어 저를 이끌고 인도하소서.(시편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