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3일[(녹)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서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그에 대한 응답으로 끝난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통하여 회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박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며 그들을 격려하신다(복음).
제1독서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14,2-10
복음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0,16-23
오늘의 묵상
페루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동창 신부가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했습니다. 저는 그에게서 선교 생활의 어려움과 보람을 들었습니다. 동창 신부는 페루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살며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 페루에 갔을 때에 피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온몸이 가려워서 한동안 잠도 못 잘 정도였답니다.
피부병의 원인은 벼룩처럼 생긴 벌레 때문이랍니다. 그 벌레는 개에 기생하는데, 아이들이 개와 함께 놀 때 아이들에게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동창 신부는 아이들을 보면 반갑게 껴안곤 하였는데, 이때에 아이들에게 붙어 있던 벌레가 그 신부에게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벌레는 현지에 사는 사람들의 옷 속에 살아도 그들을 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먹는 음식 속에 벌레를 쫓는 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창 신부도 현지 주민이 먹는 음식에 적응하자 더 이상 벌레가 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심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러 또다시 떠나는 동창 신부를 보면서 그가 이리 떼가 아닌 벼룩 떼 가운데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익히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제자들을 박해와 어려움이 예상되는 곳으로도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의지할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분당 요한성당 벽화
2012-07-12 오후 1:3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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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Clelia Barbi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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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클렐리아 바르비에리는 1847년 2월 13일 이탈리아 볼로냐(Bologna) 외곽의 페르시체토(Persiceto)에 있는 분드리에 디 산 지오반니(Bundrie di San Giovanni)라는 마을에서 주세페 바르비에리(Giuseppe Barbieri)와 지아친타 난네티(Giacinta Nannetti)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다른 출신을 갖고 있다. 아버지 주세페 바르비에리는 가장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지아친타 난네티는 마을에서 가장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지역의 의사인 지아친타의 삼촌 집에서 하인으로 일했고 어머니는 부유한 피에트로 난네티(Pietro Nannetti)의 딸로 자랐다. 많은 논란 끝에 주세페와 결혼한 지아친타는 노동자의 가난을 받아들이고, 부유한 집에서 나와 시아버지인 산테 바르비에리(Sante Barbieri)의 초라한 시골집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돌처럼 단단한 믿음과 온전한 그리스도교적 삶을 만들어갔다. 어머니의 소원대로 성녀 클레리아는 태어나자마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녀에게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가도록 어린 나이부터 가르쳤다. 어느 날 성녀 클레리아는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면 성녀가 되는지에 대해 묻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린 클레리아는 바느질과 방적 기술을 익히고 거친 털을 짜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1855년 콜레라가 번졌을 때 8살이었던 성녀 클레리아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사 삼촌의 배려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은 성당 근처에 있는 편안한 집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녀 클레리아는 하루하루를 더욱 성스럽고 열심히 살게 되었다. 그녀는 집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성당에서 기도를 하였다. 보통 성인식 때 첫영성체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교리적으로 완벽하게 준비된 그녀는 1858년 6월 17일 11살의 나이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이 날은 성녀 클레리아의 미래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왜냐하면 그 날 처음으로 영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과 성모님의 슬픔은 그녀의 성스러운 영혼을 더욱 고무하였다. 동시에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게 되었으며 기도와 선행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성광 앞에서 그녀는 부동의 자세로 오로지 기도에 전념하였고 집에서는 힘든 일을 하는 다른 소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조숙한 그녀는 삼베를 짜는 힘든 일이 주업인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기도를 늘 간직하고 있었고 때로는 동료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녀는 세상일에 열심인 마르타(Martha)는 아니었지만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힘겨운 노동 현장에서 일하면서 그녀의 가냘픈 손은 힘겨운 삶의 흔적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로지 사랑과 헌신에 몸을 바친 마리아(Maria)는 아니었지만 잡념을 갖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헌신적인 삶을 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거나 무시했다.
그녀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기뻤고 그녀의 기쁨은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주로 나타났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그녀를 가장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동료들에게로 이끌었다. 그녀의 강렬한 믿음은 하느님의 가난한 자들에게 그녀의 모든 것을 주게끔 했다.
이 시기에 교회에는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라는 모임이 있었다. 그들은 주로 남자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냉담하는 이들을 신앙에로 인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어느 나이 든 학교 교사가 이 모임을 이끌고 있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이 모임에 참여하였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처음에 조교로 들어갔던 그녀는 놀라운 역량과 준비성으로 선임 회원들까지 인도하게 되었다. 제법 솔깃한 청혼을 거절한 젊은 아가씨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그들의 지도자로 뽑고 사도적이고 명상적인 삶을 채택하였다. 이 헌신의 삶은 성체성사를 받는데서 비롯되어 인근 마을의 농부와 노동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당시는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기에 그들의 생각이 곧바로 현실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1868년 5월 1일 정치적인 문제가 해결되면서 성녀 클레리아와 그녀의 동료들은 ‘교사의 집’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하여 그들의 생각을 현실로 만들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교 교리교육 봉사자회와 공식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는 후에 그녀가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 (The Congregation of Minims of the Sorrowful Mother)를 설립하는 초석이 되었다. 교사의 집으로 옮긴 후 의심할 여지없이 하느님의 힘으로만 가능한 비범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녀의 기도에 담겨진 믿음과 헌신적인 사랑은 늘 놀라웠다. 그들의 작은 공동체에는 믿음과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가득했고, 창의력과 상상력이 충만한 선교는 조직을 통한 선교가 아닌 보이지 않는 말씀을 통한 선교였으며 성녀 클레리아는 움직이는 영혼이었다.
처음에 설립한 작은 단체가 점점 그 수를 늘려가면서 교리교육과 종교적인 방향성을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든 어린 학생들의 수도 늘어갔다. 사람들은 성녀 클레리아를 점차 믿음의 지도자와 선생님으로 보게 되었다. 그들은 그녀를 ‘어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나이 22세 때의 일이었다. 성녀 클레리아는 수녀회를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후 잠잠했던 결핵이 재발해 볼로냐에서 선종하였다. 성녀 클레리아가 설립한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 자 수녀회는 이탈리아 전역과 인도 그리고 탄자니아까지 확장되어 갔다. 오늘날 그녀의 발자취를 따르는 수녀들은 지속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돕고 있으며 300여명이 35개 공동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2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성녀 클레리아 바르비에리는 교회 역사상 가장 어린 수도 공동체의 설립자이다. 그녀는 1968년 10월 2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9년 4월 9일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굿뉴스 자료집에서 발췌 |
누구나 때로는 힘들어 하지만
어머니의 신앙 속에서 성녀되기를 꿈꾸었고 11살 첫영성체 때 십자가의 신비를 느낀 아이
하느님 생각으로 기쁜 나날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에 몰두하였고
23세로 선종하기까지 '슬픔의 어머니의 작은자 수녀회'를 설립하여 교회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로 수도 공동체를 설립하게 되신
성녀 클렐리아 님이시여 첫 영성체하는 아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하여 님의 고결한 기도를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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