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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조·성가·기도문

감회가 있어―이덕무(李德懋·1741~1793)/옛길박물관 외출복 3장

 

감회가 있어

농부의 별은 새벽녘 공중에서 반짝이고
안개 뚫고 서리 맞으며 동편 논으로 나간다.
시고 짠 세상맛은 긴 가난 탓에 실컷 맛보았고
냉대와 환대는 오랜 객지 생활에서 뼈저리게 겪었지
부모님 늙으셨으니 천한 일을 마다하랴
재주가 모자라니 육체노동하기 딱 어울린다.
경략(景略)*의 달변이 없으니 이(虱)를 문질러 잡으랴
온화한 낯빛으로 촌 노인네 마주해야지.


有感(유감)

農丈人星曉暎空(농장인성효영공)
烟霜衝冒稻陂東(연상충모도피동)
酸醎已熟長貧日(산함이숙장빈일)
冷暖偏經久旅中(냉난편경구려중)
親老那能辭鄙事(친로나능사비사)
才踈端合役微躬(재소단합역미궁)
談非景略何捫虱(담비경략하문슬)
姑把溫顔對社翁(고파온안대사옹)

 

 

*‘경략’은 중국 동진(東晉)의 정치가 왕맹(王猛)의 자(字). 그는 남과 대화하면서 이를 문질러 죽이는 등 방약무인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조선일보/가슴으로 읽는 한시(2012.7.14)이다. 안대회교수의 평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장관(靑莊館) 이덕무가 20대 후반의 어느 해, 가을걷이하는 논두렁 위에서 시를 썼다.

 

충청도 천안에 소유한 논에서 그는 해마다 벼 열 섬씩 수확하여 생활을 꾸렸다. 그리 힘들 것도 없으련만 새벽같이 일 나가며 이런저런 감회가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난다. 가난뱅이라서 시고 짠 세상맛도 실컷 맛보았고, 객지에서 남들의 냉대도 뼈저리게 겪었다. 불쑥 인생의 고달픔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그래도 이렇게 농사를 지을 수 있으니 다행이 아닌가? 불평없이 몸을 움직여 일을 해야지. 아무래도 서울 샌님의 몸으로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을 하고, 낯이 선 농부들과 어울리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으리라. 먼동 트는 논두렁길을 걸어가는 초보 농사꾼 선비의 서툰 몸놀림이 눈에 선하다.



앗싸요즘 드라마 <닥터 진]에서 보면 서출인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님이라 못 부르고...벼슬길도 막히고...농사일도 반쪽이라 제대로 못하고...신분제의 사슬에 묶여 그 울분이 가슴에 꽤나 쌓여 있으리...^-^

 

신분제가 없는 현대사회에 태어남을 행복해 했건만...보이지 않는 신분제가  생기는 것 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바벨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ㅠㅠ...^-^ 

 

 

 

 

이덕무[李德懋]

[인명] 조선 말기 학자(1741~1793). 자는 무관(), (), (), 청장()이다. 박학다식하였으며 개성 뚜렷한 문장으로 이름 떨쳤으나, 서출()이라 크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중국 청나라 건너가 학문 닦고 돌아와 북학 발전 기초 마련하였다.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 함께 사가() 이른다. 저서청장관전서 있다.[출처]백과사전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는 서자의 집안. 반쪽의 핏줄이다. 본가(本家)의 적자(嫡子)가 아니니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니 살림을 꾸려 갈 녹봉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 놓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온전한 양반들만의 세계에 끼워 주지도 않으면서, 또 다른 반쪽의 핏줄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비웃으며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책만 읽는 이런 이덕무를 두고 책만 읽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 라고 놀렸다. 어떤 의미론, 참 슬픈 별명이다.

조선사회의 깨어있는 지식인으로서 양반이지만 신분을 넘어 서자의 능력을 인정해주었던 ‘연암 박지원’이나 ‘담헌 홍대용’ 같은 실학자들을 스승으로 여러 벗들과 동고동락하며 학문과 개혁을 꿈꾸던 이덕무는 조선의 제22대왕 정조(正祖)의 개혁정치의 바람을 타고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그때가 이덕무 나이 마흔이었다.

이덕무와 벗들은 정조가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화시키며, 역대의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학문 연구의 중심기관이자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 기관으로 거듭 태어나게 했던 규장각(奎章閣)의 검서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 아닌 백성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 중국 중심의 학문이 아닌 우리 조선의 학문, 후에 실학(實學)이라고 불릴 학문을 했던 이덕무와 그 벗들은 그렇게 100%는 아니더라도 약간이나마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정신은 조선의 개혁가들에게 이어졌다.

[출처] 83.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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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여자 외출복...우리 엄마만 해도 위와 같이 솜을 넣어 만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입성을 바느질해서 만들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