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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살며 춤추며"-헨리 나웬 신부 지음-28편

 

  "살며 춤추며"(1)

저자 : 헨리 나웬 신부

-머리 말- (1에서 8까지)

"집으로 가는 길"에서 기억하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글들을 모아둔 것입니다.

 

1, 나웬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내면의 방"이었다.

2, 내 휴가 계획이 마지막 순간에 취소되자 나는 당연히 실망감에 빠져들었다. 그날 밤,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춥고 어두운 서재에서 기도하기로 마음 먹었다.

3, 영성생활이 반드시 완벽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뿐 아니라 인간의 상처를 껴안고 그 안에서 일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발견하는 것임을 사람들은 배웠다.

4, 나웬은 우리가 자신의 깊은 불안 가운데서 우리 삶이 흔들리고 긴장하는 여러 극단(極端)을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5, 여러 극단은 우리가 그 안에서 순수한 영성생활을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말해 준다.

첫 번째 양극인 외로움과 홀로 있기(solitude)는 자신과 연관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무치는 외로움과 홀로 있고자하는 강한 요구가 함께 있음을 깨닫는다.

두 번째 양극인 적의와 환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결정한다.
사람들을 무조건 환대하는 대신 동료들을 적대시할 수 있음을 우리는 차츰 깨닫는다.

세 번째이자 나웬에게 가장 중요한 양극인 미망(illusion)과 기도(prayer)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결정한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 속에 감추인 기도라는 믿기 어려운 선물"(영적 발돋음)을 탐색하는 대신, 자기 운명을 온전히 통제하는 줄 알고 행동한다.

6, 영성생활이란 외로움과 홀로 있기,적의와 환대, 미망과 기도라는 양극을 끊임없이 오가는 움직임이다.

외로움과 적의의 미망(illusion)을 아프게 고백할수록 우리는 홀로있기와 환대와 기도로 우리 인생을 바라본다.

7, 나웬은 외로움*적의*미망을 지나치지 말라고 권한다. 바로 그것이 홀로 있기*환대*기도로 가는 길이다.

낡은 삶 한복판에서 새로운 삶을 만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겪는 모호성과 불확실성, 아픈 상황에 대한 신중하고 정직한 발언이 우리에게 희망과 쇄신을 가져다 줄 수 있다.

8, 미래에 대한 우리의 전망은 지금의 고통을 견디고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과 아픔을 나누는 데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참된 기쁨은 슬픔 속에 감추어져 있고 춤추듯 신나는 삶은
고통 속에서 출발함"을 보여 주신다. -계속됩니다.-


 

"살며 춤추며" (2)

저자: 헨리 나웬 신부

 

-머릿 말-

"집으로 가는 길"에서 기억하고 싶은 말들을
모아 정리한 것입니다. (9에서 16까지)

 

9, 수도승, 선교사로서 자신의 성소를 시험한 끝에
헨리 나웬은 오십대 중반에 이르러 학자의 삶을 포기하고 발달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목자가 되었다.

10, 헨리 나웬은 언제나 '집으로 가는 길'에 있었고, 하느님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위한 양식이 동료 나그네들에게 필요함을 알고 있었다. 나웬은 글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창조적 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듯 하느님과 우리의 친밀한 대화에도 형식과 훈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11, 나웬은 말하기를,

"영성생활을 제멋대로 사는 어리석은 삶에서 하느님께순종하는 삶으로 가고자 애쓰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또한 "우리 안에서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에 귀먹은 상태로 사는 것이 곧 어리석은 삶"이다.

12, 우리가 참여하는 많은 활동, 우리가 몰두하는 여러 관심사, 우리를 에워싼 많은 소리가 하느님께서 당신 현존을 알게 하시는 내면의 작은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

13, 진정한 영성 생활은, 우리가 하느님을 붙잡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겐 우리를 있는 그대로 붙잡아 주시는 하느님이 필요하다.헨리 나웬은 글을 통해 우리가 그럴 수 있도록 돕는다.

14,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사람은 겪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만의 고통을 겪는다."

나웬에 따르면,
육체적*정신적*정서적 고통은 삶 가운데 끼어든 하나의 교훈이며 친한 동료로 받아들일 수 있다.

15, 언젠가 그가 말했다.
"영성 생활은 당신의 좋지 않은 경험을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인간의 고통은, 기쁨과 평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기쁨과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의미를 상실해 어지럽고 일그러진 이 세상에서 나웬은 비록 모든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믿음직한 동지다.

16, "살며 춤추며"에는,영적 여정을 출발하거나 새롭게 하려는 이들을 지지하는 글, 어둡고 외로운 내면의 고통을 겪는 이들을 격려하는 글, 방향을 잃고 힘들어 하는 이들을 안내하는 등대 같은 성찰, 인생과 죽음을 향한 나그네 길을 재정비하여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지금"을 경험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도와주는 묵상이 두루 담겨있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 대하여, 아무도 미리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음에 담아두기 바란다.

우리 모두 제 보폭으로 제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살며 춤추며"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유웅열 신부님 글 올림.


 

모르는 곳으로 옮겨 가기
(영적 발돋음)

 

안전한 곳을 떠나 낯선 곳으로 옮겨 가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비록 그 '안전한 곳'이 우리에게 안전을 제공하지 못하고, '모르는 곳'이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 누리는 진정한 안전을 약속한다 해도 그렇다.

 

우리는 몸에 익숙한 것을 포기하고 우리가 잡고 있는 것 너머에 계시는 분께 손을 내밀수록 자신의 나약함을 알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비록 환영(幻影)에 대한 우리의 집착이 불완전한 삶으로 이끈다 해도, 사랑에 굴복하는 것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자신을 통제한다는 착각을 버리고 하느님께 손을 내미는 것은 그만큼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표시다.

하지만 하느님께 손을 내밀면 모든 아픔과 괴로움에서 해방되리라고 믿는 것 또한 착각이다.

오히려 우리가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갈 때도 많다.

 

예수님은,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사랑은 고통 속에서
순수해짐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기에 기도는 달콤하고 쉬운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의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방편인 기도는, 우리한테서 아픔을 없애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괴롭게 한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곧 괴로워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요,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은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하늘 자비가 감싸는 곳으로 들어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기도가 우리 중심에서 나올수록 더 많은 사랑과 아픔, 더 많은 빛과 어둠, 더 많은 은혜와 죄, 하느님과 인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중심으로 내려가 하느님께 손을 내밀수록 홀로가 홀로에게, 깊이가 깊이에게,가슴이 가슴에게 말할 수 있다. 사랑과 아픔을 발견하는 자리가 바로 그 곳이다.

 

"살며 춤추며" (3)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성소(聖所)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매일의 복음 묵상과 의식을 집중해서 하는 기도문 암송은 우리 내면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 내면은 잘 가꾸고 정돈하여야할 성소와 같다.

 

기도는 어떤 형식이든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는 방을 우리 안에 만들어 놓는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뽑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1코린 13,4)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천천히 암송하며 몇 주간을 보내면,

 

그것은 환영(幻影)이 아니라 분명한 형상(image)이었다.

 

내면의 방 벽에 붙어 있는 성경말씀으로 나는 기도와 사명 관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면의 방으로 안내하면서,

 

벽에 붙어있는 말씀이 우리 만남을 인도할 것을 나는 믿고 바란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내면의 방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을 보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기도와 묵상이 없으면 우리 내면의 방 벽은 텅 비고, 거기서 영감을 받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살며 춤추며"(4)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유웅열 신부님 글 올림.

 

날마다 놀라운 날

-영혼의 양식-

 

모든 날은 그날의 놀라움을 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거나 듣거나 느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때만 우리에게 다가 온다.

 

그것이 우리에게 슬픔으로 오든, 기쁨으로 오든 그날그날의 놀라움을 겁내지 말고 받아들이자!

 

그것이 우리 가슴에 새로운 자리를 열개 해, 거기서 새 친구들을 환영하고 더불어 나누는 인간관계를 즐기게 할 것이다.

 

"살며 춤추며"(5)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유웅열 신부님 글 올림.

 

 


집 떠나기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

 

오랫동안 나는,

"내 이름을 위하여 네 아버지, 어머니, 형제, 누이들을 떠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이 말씀이 가족을 떠나 결혼하지 않고, 수도원에 들어가든지, 아니면 선교사가 되어 먼 나라로 가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지금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그렇게 하는 사람들한테서 격려와 영감을 받는 건 사실이지만, 이제 나이를 먹어가면서
'떠나라'는 말에 더 깊은 뜻이 있음을 깨닫는다.

나는 우리의 정서 생활이 부모, 형제, 누이들과의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는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때때로 그 영향이 너무 커서 성년이 되어 부모 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정서적으로 묶인 사람들을 본다.

최근에 나는 여전히 아버지가 바뀌기를, 그래서 좀 더 친절한 아버지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나를 보았다.

또한 많은 친구가 어린 시절 가족관계에서 생겨난 분노, 앙심, 환멸 같은 감정의 족쇄에 묶여 있는 것을 보았다.

부모와 떨어져 산 지 오래되고, 심지어 부모가 세상을 떠났는데도 집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한테서 학대받은 희생자라고 생각할 수록 더욱 그렇다.

그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아픔을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이런 뜻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와 누이들을 '떠나라'는 예수님의 초대는 참으로 새롭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초대'에 선뜻 응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과거에 얽힌 정서적 족쇄에서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는가?

그럴 의지가 있는가?

 

우리는 정서적*영적으로 건강한 삶을 위해
먼저 이 물음과 씨름을 해야 한다.

 

"살며 춤추며"(6)- 2012년6월9일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자화상"
노인의 영광은 백발

 

정직하고 겁 없는 자화상으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기운을 선물하는 화가들만큼 이웃을 돌보는 모습을 훌륭하게
연출하는 사람도 드물다.

렘브란트는, '표현기법의 연구를 위한 모델'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인간성이라는 매개체로 영성을 추구하고자' 예순 세 폭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는 인간존재의 신비를 뚫고 들어가려면 자신의 어두운 지하실과 밝은 거실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렘브란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임을 알았다."

노년에 이르러 그는 인간경험의 핵심에 접근했고, 거기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비참함을 인식하고 '용기와 새로운 젊음'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적인 자기도취가 아니라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이들을 섬기기 위해 끊임없이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 없이는 결코 이웃을 돌볼 수 없다.

이웃을 돌보려면 자신의 상처 받기 쉬운 나약함을 치료제로 내놓아야 한다.

그러므로 늙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핀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늙어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몸소 체험하는 것이다.

바로 이 늙어가는 자신한테서 노인들에게 앞날에 대한 공포를 떨쳐버리도록 이끄는 힘이 솟아난다.

 

"살며 춤추며"(7)- 유웅열 글.
헨리 나웬 신부 지음.

 

 

권하고 싶은 말씀:

 

다독(多讀)의 의미는,여러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 또는 한 줄의 글을 여러번 읽어서, 그 글이 내포하고있는 뜻을 찾을 때까지 여러번 읽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글이든지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의미와 진리가 그 안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묵묵한 지지 : -마음의 길-

압바 티도에스는,
"순례란 사람이 자기 혀를 다스리는 것" 이라고 했다.

"순례는 곧 침묵이다."라는 말은, "침묵이야말로 앞으로 올 세상에 있을 가장 좋은 것"이라는 사막 교부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침묵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사람을 죄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이 금욕 주의적 가르침의 밑바닥에는 말이 우리를 세상 일에 빠지게 하고 얽혀들게 해 오염되지 않기란 무척 어렵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언뜻 들으면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얼마나 자주 토론장이나 회의장에서 또는 개인과의 대화나 모임에서 많은 말을 하고는 쓰디쓴맛을 느끼는가?

장황한 연설에서 알찬 열매를 거둔적이 몇번이나 있는가?

우리가 내뱆은 말 가운데 차라리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그런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지만 그렇게 해서 과연 얼마나 세상을 변화시키는가?

우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방식에 대해 말이 많다.

그런데 그 많은 말이 사람들과 자신에게 얼마나 유익한가?

우리는 틈만 나면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한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그 내용을 스스로 이해하는가?

그리고 그 말들이 듣는 이들에게 진정한 깨달음을 준 적이 얼마나 있는가?

말은 자주 우리에게 내적 패배감을 안겨 준다.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사소한 절망에 빠지거나 마음의 창을 흐리게 하는 안개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말은 주님을 섬기기보다 쓸데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여행길의 작은 주막에 오래 앉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게 한다.

순례는 곧 침묵이다.

 

"살며 춤추며"(8)- 유웅열.
헨리 나웬 신부 지음

 

내적 다툼
(자비를 구하는 외침)

예수님, 당신이 아버지께 드린 말씀은 침묵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저를 침묵으로 이끄시어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당신 이름으로 나오는 성실한말이 되게 하소서!

침묵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입으로 하는 침묵도 어렵지만 가슴으로 하는 침묵은 더욱 어렵습니다.

얼마나 많은 말이 제 안에 있는지요,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은 물론 친구와 적, 지지자와 반대자, 동료와 경쟁자들을 상대로 토론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말은 제가 얼마나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입니다.

제가 만일 당신 발치에 앉아 쉬며 제몸과 마음이 오직 당신 것임을 알아차리가만 해도, 저를 둘러싼 사람들과 공연한 말다툼을 쉽게 그만 둘 수 있을텐데요. 사실 그런 말다툼은 제불안과 두려움과 걱정을 드러낼 뿐입니다.

 

오, 주님,
제가 입을 다물고 당신께 귀를 기울이면 당신은 저에게 필요한 관심을 쏟아주실 것입니다.

제 가슴의 침묵 속에서 당신이 저에게 말씀하시고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주님, 저에게 그 침묵을 주소서.
제가 참고 견디며, 당신과 함께 머무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도록 도와 주소서.

 

"살며 춤추며"(9)- 유웅열
헨리 나웬 신부 지음

그늘 속 삶 ( 영혼의 양식)

 

 

우리는 가끔 미래를 내다보고 싶어한다.

"내년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오년, 십 년 뒤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하는 물음에는 답이 없다.

그러나 바로 다음 걸음을 내디딜 만한 빛은 충분히 있다.

한 시간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니, 내일은?

건강하게 사는 기술은 어둠에 묻혀 보이지 않는 것을 불안해하거나 불평하기 보다 지금 보이는 것으로 인생을 즐기는 데 있다.

바로 다음 걸음을 내디딜 빛은 충분히 있음을 믿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 우리는 기쁨으로 인생을 해쳐 나갈 수 있고, 자신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세상 모든 그늘을 한꺼번에 걷어 낼 거대한 빛 줄기를 구하는 대신 우리에게 있는 작은 빛으로 즐겁게 살자!

 

"살며 춤추며"- (10)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인간관계.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친밀한 관계와 만나고 싶지 않는 불편한 관계는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제 시간을 소중히 하고 시간의 흐름을 만끽 해야 하겠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어려움과 시련이 계속되지만, 그 가운데서도 그런 시련을 겪고 견뎌내어 서로 격려해가면서 고통가운데서 즐거움을 찾고, 순간마다 고비마다 환희와 신비가 곁들기에 우리는 짧은 시간에, 친구 서로 만나 위로하고 기쁨을 즐기기 위해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지 불편한 관계에서 억지로 만나는 것은 서로 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 상할 친구는 그 나름데로 삶의 철학이 있고 그의 품성에 맞게 살기에,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억지로 여러 사람과 많이 만나는 것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인생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즐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이 순간의 삶을 즐기지 못하면 영원한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놓아 버리기.
작성자 유웅열(ryuwy) 쪽지 번 호 73850
작성일 2012-06-20 오전 5:17:45 조회수 32 추천수 0

놓아 버리기 (열린 손으로)

이탈은 흔히 마음에 끌리는 것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간혹 마음에서 싫은 것을 놓아버려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실제로 후회나 증오 같은 어두운 힘에 집착할 수 있다.

앙갚음할 방법을 찾는 동안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복수와 증오심에 사로잡혀 당장 치유를 바라는 절박한 사람 앞에서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자신을 상상해 보라!

 

"살며 춤추며"- (11)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옳바른 선택으로 긍정적으로 살기,

축복과 저주,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30,19)

 

언제나 기뻐할 것,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

 

희망 속에 살아갈 것,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로마 12,12)

 

놓아버려야 하는 것들,

악한 언행,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에페 4,31)

 

악한 것,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1테살 5,22)

오늘은 이런 말씀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저의 생각과 말과 행동할 수 있도룩 주님의 평화로 저희를 이끌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늙어감 : 노인의 영광은 백발

"나이를 먹는 것은 어둠으로 가는 길인가, 빛으로 가는 길인가?"

이 물음에 누구도 분명하게 답할 수 없다.
그 답이 자신의 존재 중심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우리가 어떻게 늙어갈 것이며 어떻게 늙어가야 할 것인지 결정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이 예상이나 짐작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지 없는지는 그가 어떻게 오늘을 살아가는지에 달려 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의 마음속 자유 안에서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의 중심에서 우리는 일치인지 분열인지,황폐함인지 희망인지, 자아 상실인지 새로운 전망인지를 결단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죽는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다고 해서 저절로 방향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나이들어 죽는다는 사실이

어떤 사람한테는 창조적이고, 어떤 사람한테는 파괴적이며, 어떤 사람한테는 구속이 되고, 어떤 사람한테는 해방이 된다.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 추방당하거나 거절당하는 아픈 경험이 무엇보다 기쁘고 감격스런 기회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누가 노인들을 불러낼 것인가?

누가 노인들의 두려움을 몰아내고 격리*소외*황폐*절망*자포자기의 어둠에서 모든 사람이 보도록 준비된 빛으로 이끌 것인가?

어떤 젊은이가 자신이 몸담은 사회에서 용감하게 나서서 노인들을 배척하는 것은,곧 전통을 상실하고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바로 이 사람이 노인들을 보살피는 사람이다.

노인을 보살피는 것은, 곧 나이를 먹는 것은 빛으로 가는 길이며 희망과 새 삶을 주는 길이다.

 

"살며 춤추며"- (12)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노인의 영예

 

백발은 노인의 영광

"백발은 영광의 면류관 의로운 길에서 얻어진다."(잠언 16,31)

"젊은이의 자랑은 힘이고, 노인의 영광은 백발이다."(잠언 20.29)

 

풍부한 경험은 노인의 화관임

"노인들의 지혜와 존경받는 사람들의 지성과 의견은 얼마나 좋은가!
풍부한 경험은
노인들의 화관이고 그들의 자랑거리는 주님을 경외함이다." (집회 25, 5-6)

 

늙은 사람들이 할 일은 오로지 젊은이들에게 축복을 빌어주며, 우리들이 잘못하고 살아왔던 길을 걷지 않도록 기도하면서, 젊은이들을 들볶지 않도록 침묵과 인내와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우리들이 할 일은 오로지 젊은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 기를 살려주는 것입니다.

 

"숨어있는 기쁨을 찾기"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즐기는 습관은 몸에 배어있지 않다.

그보다 전쟁과 폭력과 범죄에 대한 '나쁜 소식'을 듣고 갈등과 투쟁을 목격할 준비는 언제나 되어 있다.

나는 언제나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으레 골치 아픈 문제와 괴로움, 실망과 낙담, 불안과 분노를 토해 내리라고 기대한다.

어쩌다 보니 슬픔과 아픔에는 익숙해 있으면서 세상의 은밀한 구석에 감춰진 기쁨을 보는 눈과 즐거움을 듣는 귀는 잃어버렸다.

 

내가 슬픔을 기대하는 곳에서 기쁨을 보는 친구가 있다.

그는 하느님께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여행하며 많은 사람을 만난다.

나는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동안 방문한 나라들의 어려운 경제 사정과 듣고 본 세계의 참상, 불의한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리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세계의 심각한 문제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입에 담지 않는다.

자기가 찾아낸 숨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이야기,희망과 평화를 가져다준 이야기, 온갖 시련 속에서도 서로 믿고 돕는 사람들 이야기, 하느님이 일으키시는 사소한 사건에 대해 들려준다.

 

때때로 나는 사람들에게 전해 줄만한 흥분되고 거창한 이야기, '신문에서 읽는 새소식'을 듣지 못해 실망한다.

그는 나의 선정주의에 응하는 법이 없다.
그냥 '나는 매우 작고 아름다우며 내게 큰 기쁨을 주는 무엇을 보았어'하고 말할 뿐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가져다준 기쁨에 자신을 몽땅 내 맡긴다.

그한테서 배워야 한다.

현장에 숨어 있는 진짜 기쁨을 '훔치는'법을 익혀, 그 기쁨을 훔쳐 모두가 보도록 높이 들어 올려야 한다.

그렇다,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과 평화롭지 못한 곳이 많으며 아직도 고통을 겪는 많은 사람을 나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좋아지기를 마냥 기다릴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작은 일들을 축하해야 한다.

나는 겁주는 깊은 어둠 속에서 한줄기 빛을 선택하고 죽음의 힘이 기능 부릴 때 생명을 선택하며 온갖 거짓으로 에워싸인 곳에서 진실을 선택하기!

 

이것이 진정한 수련이다.

지금까지 나는 인간 세상의 아프고 괴로운 현상에 마음을 쏟으려는 유혹에 넘어가, 사소하지만 분명하고 진실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기쁨과 즐거움에 눈이
멀어 있었다.

기쁨을 선택하면 그 보상으로 기쁨을 얻는다.


나는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가운데는 상처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괴로움 속에 있는 작은 기쁨과 즐거움을 찾기로 마음 먹을 때 삶은 축제로 바뀐다.

기쁨은 슬픔을 부정하지 않으며 더 큰 기쁨을 위한 기름진 토양으로 바꾸어 놓는다.

 

"살며 춤추며"-(13)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우리를 기쁨으로 이끄시는 성경말씀.

 

"청하면 받을 것이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하여 청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많은 어려움과 고난이 있기에 이들을 헤쳐나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악전고투, 인내와 참음으로 어려움을 견뎌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견딤과 노력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슬픔 속에서도 기뻐함"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합니다.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2코린6,10)

 

"환난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함"

"환난의 큰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기쁨이 충만하여, 극심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아주 후한 인심을 베풀었습니다."(2코린 8,2)

 

오늘 우리들은 우리곁에 숨어있는
기쁨을 찾아 누리시길 기원하며 참다운 행복을 이웃에게
나눠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셔라!

하느님께서 우리 과거를 지워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출발하게 하시는 것을 가로막는 무엇이 있다.

때로는 자신의 어둠이 너무 깊어 하느님께서도 어쩌실 수 없음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시는데 스스로 그것을 거절하고 종으로 고용되는게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나는 하느님 자녀로 온전한 신분을 회복하고 싶은가?

남김없이 용서받아 온전히 새롭게 살기를 바라는가?

자신의 철저한 교정(矯正)을 믿는가?

하느님을 향한 뿌리깊은 저항을 거두고 우리를 온전히 새롭게 하시는 하느님 사랑에 철저히 굴복하기를 바라는가?

하느님께 온전히 용서받으려면 기꺼이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그분 뜻대로 나를 치유하고 회복하며 새롭게 하시도록 내드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그 일에 자기 몫을 감당하려했다가는 고용된 종이되어 해결하지 못하고 끝내버린다.

고용된 종이되면 나는 여전히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저항하고 거절하며 내가 받는 삯에 불만스러워하다 다시 도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면 내 위엄을 옹글게 주장하며 앞으로 나도 아버지가 될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살며 춤추며"- (14)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부활은 신비한 변화입니다.

 

부활의 신비는, 이 세상에서 신비한 변화의 삶을 살아야 부활의 의미를 찾고 참된 부활을 맞을 준비를 하는 시기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삶을 위한 준비를 이 세상에서 해야만 하기 때문에 바로 오늘을 내 삶의 변화로 이끌 날이 되어야 합니다.

 

"죽을 몸을 불멸의 몸으로"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 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순식간에, 눈 깜박할 사이에, 마지막 나팔 소리에 그리될 것입니다.

나팔이 울리면 죽은 이들이 썩지 않는 몸으로 되살아나고 우리는 변화할 것입니다."(1코린 15,51-52)

 

어제 내가 잘못한 것을 반성하고 회개하여 오늘 새로운 삶을 살면서 부활의 신비를 누려야 합니다.

어제 내가 어떤 잘못으로 "사랑하는 아내"로부터 어떤 잔소리를 들었다면 그 잔소리에 감사를 드리고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변화"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아내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보내신 천사입니다.

 

거룩한 만남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보여주고자 오신 주 예수님,

사람들이 당신 사랑을 몸과 마음과 영혼으로 알게 하소서!

우리는 너무 자주 외롭고 사랑받지 못하여 눈물의 골짜기에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과 부드러움과 따스함, 보살핌과 자비를 느끼고 싶은데 오히려 어둠과 허무와 마비된 감각으로 괴롭기만 합니다.

오늘 밤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빨리 오소서, 생각하는 머리에만 오지 마시고,

우리 중심에, 열정과 정서와 감정에 오시어 당신 현존을 가장 깊은 우리 존재 안에 드러내소서!

우리 중심에 계신 당신을 경험하지 못하면 우리는 따스한 소속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사람과 사물과 사건에 매달리게 됩니다.

당신이 오시어 만져주시고 당신 사랑의 불로 타오르게 하실 때 우리는 비로소 자유롭게 되고 모든 거짓 소속감을 버릴 것입니다.

내면의 따스함 없이 모든 금욕주의적 시도는 하찮은 일이 되고, 우리는 스스로 만든 선한 의도의 그물에 갇혀 버둥거리겠지요.

오, 주님, 자녀들이 당신 현존을 가까이 느끼고, 깊고 따뜻하고 자애로운 당신 사랑에 빠져들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의 비틀거리는 벗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살며 춤추며"-(15)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거룩한 만남을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간절히 찾음"

"거기에서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찾게 될 것이다.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면 만나뵐 것이다."(신명 4,29)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나는 사랑해 주고 나를 찾는 이들을 나는 만나 준다."(잠언 8,17)

 

"더듬거리다 찾아냄"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 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 17, 27)

 

-우리가 그분을 찾는 이유-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우리는 죽거나 살거나 주님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과 함께 평화를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죄와 함께 자비를. . . . .
작성자 유웅열 쪽지 번 호 74000
작성일 2012-06-27 오전 5:50:45 조회수 13 추천수 0

죄와 함께 자비를. . . . .

오, 주님,
큰 스승 니느웨의 이사악이 말했습니다.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이 죽은 이를 일으키는 사람보다 훨씬 크다.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한 시간 울 수있는사람이 온 세상을 가르치는 사람보다 크다.

자신의 나약함을 아는 사람이 천사와 대면하는 사람보다 크다"

 

오, 주님,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저지른 범죄행위에 갇혀 있는 것이 죄악으로 가득 찬 제 진면목을 외면하는 수단이요,

죄악으로 가득 찬 제 진면목을 외면하는 것은 당신 자비와 만남을 회피하는 수단임을 압니다.

당신 자비를 경험하지 못하면 저는 여전히 저의 죄에서 달아나는 것입니다.

오소서, 주님,

오시어, 제 안의 불안과 근심, 두려움과 죄의식의 두꺼운 껍질을 부수어 저의 죄와 더불어 당신 자비를 보게 하소서!

 

"살며 춤추며"- (16)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우리는 죄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나의 죄를 회개하고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

"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나 배 속으로 갔다가 뒷간으로 나간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그런데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살인, 간음, 불륜, 도둑질, 거짓 증언, 중상이 나온다."(마태 15,16-20)

 

남이 한 말에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것이며 때로는 크게 화를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남의 행동이나 말에 토달지 말고 그냥 그대로 받아 들이고 넘어가야지 절대로 잔소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성일 2012-06-28 오전 6:12:42 조회수 20 추천수 1

집 옮기기 :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우러러 어떻게 하면, 두려움과 증오와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 한 복판에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가?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드리실 때 바로 이 물음에 답을 주셨다.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5-16)

 

세상에 속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영성생활의 본질이다.

영성생활은 계속해 우리가 살 진짜 집은 증오와 폭력이 다스리는 두려움에 가득 찬 집이 아니라 하느님이 머무시는 사랑의 집임을 일깨운다.

불안과 두려움, 염려와 억지를 안팎으로 겪지 안고서는 단 하루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세상이다.

어둠의 세력이 세상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우리는 도저히 그것을 피해 달아날 수 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 세력에 굴복하거나 머물지 않고 사랑의 집을 거처로 택할 수 있다.

이 선택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늘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 숨결로 숨 쉬고 살면서 수시로 해야 한다.

영성생활을 해나가면서 우리는 두려움의 집에서 사랑의 집으로 차츰 옮겨 간다.

 

"살며 춤추며"- (17)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영성생활은 영적오감으로 살아야. . .

 

영적 청각 :

"그들은 그 책, 곧 하느님의 율법을 번역하고 설명하면서 읽어 주었다. 그래서 백성들은읽어 준 것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느혜8,8)

 

영적 미각 :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 34,9)

 

영적 후각 :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죽음으로 이끄는 죽음의 향내고,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는 생명으로 이끄는 생명의 향내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일을 할 자격이 있겠습니까?"(2코린 2,15-16)

 

영적 시각 :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되기를 비는 것입니다."에페1,17-18)

 

영적 촉각 :

"이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 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17,27)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다운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도 이러한 영적 오감을 곁들여 살기 때문에, 온갖 두려움과 역경를 헤쳐가면서도 그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의 기회로 알면서 생을 환희로 맞는 것입니다.

작성일 2012-07-01 오전 5:12:35 조회수 8 추천수 0

신뢰와 자유

 

신뢰는 삶의 바탕이다.
누구도 신뢰 없이는 살 수 없다.

우리는 곡예사들한테서 신뢰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곡예사들은 상대 곡예사를 믿어야 한다.

그들은 공중에서 한 바퀴, 세 바퀴 또는 네 바퀴를 돌며 아름다운 곡예를 펼친다.

그러나 그 모든 곡예는 정확한 곳에서 기다리다 알맞은 때에 잡아주는 곡예사들이 있기에 가능하다.

우리 삶 또한 대부분 비행(飛行)이다.

새처럼 자유롭게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은 신나고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를 잡아주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으면 그 모든 비행은 아무것도 아니다.

 

위대한 캐처(Catcher : 잡아주는 이)를 신뢰하자.

 

"살며 춤추며"-(18)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우리는 누군가를 믿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

"주 여러분의 하느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굳건해질 것이오. 그분의 예언자들을 믿으시오. 그러면 성공할 것이오."(2역대20,20)

 

"성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1코린10,13)

 

"견고해짐"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시온 산 같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시편 125,1)

 

"행복함"

"말씀에 유의하는 이는 좋은 것을 얻고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행복해진다."(잠언 16,20)

 

"도움을 받음"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집회 2,6)

 

"사람은 의지할 대상이 아님"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예레17,5)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성경말씀, 곧 하느님의 말씀을 읽고 실천해 간다면 많은 위로와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한 소절 읽고 마음에 울리는 말씀을 가슴에 담고 묵상하면서 실천에 옮겨 봅시다.

작성일 2012-06-30 오후 4:20:36 조회수 94 추천수 0

손바닥 : 거짓, 가면, 위선의 열린 손.

 

겉모습을 아름답게 가꾸고 더럽거나 때뭍은 것은 어떻게든 감추고, 조금이라도 단정하게 보이는 길을 마련하여 그 길로 사랑하는 하느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자신을 자주 본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로 꾸민,두려움으로 가득 찬 응대 방식이다.

하느님을 그렇게 모시다가는 금방 지쳐 기도하는 것초차 귀찮이질 것이다.

그런 두려움을 놓아버릴 때마다 팔을 뻗어 손을 펼치게 된다.

두 손을 활짝 펼쳐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취사선택하지 않고 모두 받을 때까지 참고 견뎌야 한다.

 

"살며 춤추며-(19)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거짓, 가면, 위선의 열린 손.

 

"거짓에 대한 교훈"

"사람에게 바랄 것은 신의(信義)다. 거짓말쟁이보다는 빈곤한 이가 낫다"(잠언19,22)

"거짓말은 인간에게 오점을 남긴다. 무식한 자들이 그것을 끝없이 지껄인다."(집회,20,28)

"마음이 빗나간 자는 행복을 얻을 수 없고 혀가 비틀린 자는 불행 속에 빠진다."(잠언 17,20)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고 험담을 내뱉는 자는 우둔한 자다."(잠언 10,18)

 

"위선에 대한 성경말씀"

"사실 누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무엇이나 되는 듯이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갈라6,3)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23,28)

 

우리는 참으로 말이나 행동을 할 때에는
신중에 신중을 거치면서 한 마디 말을 신중히 해야하고
소신이 설 때 신중한 행동을 하여야 하겠습니다

2012-07-04 오전 5:41:16 조회수 106 추천수 0

"하느님한테서 멀어질 때"

진정으로 돌아서고자 하는가?
기꺼이 변화할 마음이 있는가?

아니면 낡은 생활방식을 고집하면서 나 좀 바뀌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가?

전향(conversion)은 스스로 해낼 수 있는게 아니다.

또한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 길을 가리키는 내면의 소리를 신뢰해야 한다.

너는 그 소리를 안다.
가끔 그 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분명하게 들었으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반대 의견을 내며 사람들 생각을 알아보느라 바쁘다.

그렇게 하여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느낌과 판단에 뒤얽혀 결국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한테서 멀어진다.

너를 둘러싼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네 인생을 맡기는 것이다.

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너는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새 삶으로 돌아설 수 있다.

 

살며 춤추며- (20)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비천한 몸을 영광스러운 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필리3,21)

 

"거룩하신 하느님"

"그분께서는 거룩하신 하느님이시며 질투하시는 하느님으로서, 너희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하지 않으신다."(여호24,19)

 

"하느님을 찾는 이를 보살펴 주심"

"우리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은 그분을 찾는 모든 이를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저버리는 모든 이에게 그분께서 호된 분노를 내리십니다."(에즈8,22)

 

"질투하시는 하느님"

"너희는 다른 신에게 경배해서는 안된다. 주님의 이름은 '질투하는 이', 그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34,14)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여졌습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3,16)

 

"성경을 날마다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자기 곁에 두고 평생토록 날마다 읽으면서, 주 자기 하느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이 규정을 명심하여 실천해야 한다."(신명17,18-19)

 

오늘 우리는 살아 숨을 쉬며 움직일 수 있고 뭔가를 우리가 마음 먹고 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이웃을, 아내를 그리고 가족을 사랑하여 주님의 축복을 받는 오늘이 되게 하소서!

2012-07-03 오전 6:35:24 조회수 240 추천수 3

"우리 가슴의 정원"

 

"홀로 있기"는
사랑을 갈망하는 우리 마음의 정원이며 외로움이 열매 맺는 곳이다.

끝없는 일로 지친 몸과 근심걱정으로 가득한 마음을 위한 쉼터다.

홀로 있을 물리적 공간이 있든 없든 "홀로 있기"는 영성생활에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곳에 머물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너무도 두렵고 불안해서 곧바로 자신을 흡족하게 하는 무엇이 나타나면
쉽게 흔들리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홀로 있기"는 즉각적 만족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홀로 있으면서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악마를 만나고 탐욕과 분노를 느끼며,

인정이나 칭찬을 받고 싶은 강한 욕구와 대면한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고 버티면 "겁내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너를 이끌어 어둠의 골짜기를 지나가리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이다.

"홀로 있기"로 돌아가고 돌아가라!

 

살며 춤추며-(21)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예수님깨서도 기도하실 때 홀로 계셨습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마태14,23)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하시고,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0-42)

 

우리는 어떤 사건이 우리에게 닥쳤을 때 허둥거리지 말고 냉정하고도 엄격한 자기 반성의 시간을 갖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2012-07-05 오전 5:36:22 조회수 172 추천수 4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

 

너는 환영받지 못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이승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데 대한 두려움과 죽은 뒤 저승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결부되어 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여길 만큼 네 안에 두려움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 너는 영적투쟁의 핵심과 직면한다.

이승에서 환영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어둠의 세력에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너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두려움에서 해방시키려고 세상에 오신 그분의
음성을 믿을 것인가?

 

너는 생명도 선택해야 한다.
순간마다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네 어머니 배 속에 빚어주었다"(시편139,13조 참조)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을 믿고 의지하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모든 말씀은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네가 환영받은 줄 알아라!"

예수님은 아버지와 긴밀하게 연결된 당신 생명을 너에게 주신다.

당신이 하시는 모든 일을 너도하기를 바라신다.

네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은 하느님한테서 온 것도 진실도 아님을 자신에게 끊임없이 일러주어라.

어둠의 악마는, 네 인생이 실수로 던져진 것이요
네가 머물 집이 아무데도 없다고 속삭이며 그 말에 속아 넘어 가기를 바란다.

그 말에 솔깃하여 귀 기울일 때마다 너는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니 언제 어디서나 그 거짓의 탈을 벗고, 네가 환영받는다는 진실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살며 춤추며"- (22)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6)

 

"친부모보다도 사랑하심"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버릴지라도 주님께서는 나를 받아 주시리라"(시편 27,10)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심"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16)

 

"생명과 숨을 주심"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사도 17,25)

 

"영광의 기쁨으로 즐거워함."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지만 그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기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1배두 1,8)

 

오늘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면서 아내에게 힘을 주어
가정에 평화를 이루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2-07-06 오전 6:36:47 조회수 115 추천수 0

"적대에서 환대로"

 

적대(hostility)에서 환대(hospitality)로 가는 움직임은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를 결정짓는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적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몇 날 또는 몇 주간을 적개심에 사로잡혀, 기껏할 수 있는 일이 상대방과 거리를 두거나 말을 하지 않거나 부딪치지 않으려고 미리 예상하는 정도로 그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예로는 어떤 일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의심하며 심지어 앙갚음하려는 마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도 있다.

그것이 치유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비록 우리가 관대함으로 옮겨가고 싶어도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어서 쉽게 일방통행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이웃이 우리에게 베푸는 너그러운 환대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공간을
만들 수 있음에 감사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좀 더 민감하게 느끼며 좀 더 열린 자세로 이웃에게 다가갈 수 있다.

 

"살며 춤추며"- (23)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적대에서 환대로'에는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다.

 

"우정에는 존중과 성실이 필수 요건이다."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저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 성실한 친구는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저울로도 그의 가치를 달 수 없다. 성실한 친구는 생명을 살리는 명약이니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그런 친구를 얻으리라"(집회6,14-16)

 

"우정에 대한 교훈"

"친구가 되어야지 원수가 되어서는 안된다. 고약한 평판은 치욕과 비난을 불러들인다. 두 혀를 지닌 죄인의 짓이 그러하다."(집회 6,1)

"친구를 얻으려거든 시험해 보고 얻되 서둘러 그를 신뢰하지 마라. 제 좋을 때에만 친구가 되는 이가 있는데 식탁의 친교나 즐기는 친구도 있으니 그는 네 고난의 날에 함께 있어 주지 않으리라."(집회6,7-10)

"친구를 모욕하는 자는 우정을 깨뜨린다."(집회22,20)

 

"회개하면 몇 번이라도 용서함"

용서와 화해에는 반듯이 후회와 반성 그리고 회개가 있어야 한다.

어떤 일방적인 화해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회개에는 반드시 신뢰가 있어야함.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3-4)

 

사랑하는 여러분, 형제님들이여!

나는 오늘 내 친구 또는 존경하는 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오늘 우리는 힘과 용기를 갖고 새로이 출발합니다.

 

2012-07-07 오전 6:09:02 조회수 51 추천수 0

<친근한 공간>

독일어로 환대는 Gastfreundschaft인데 "손님을 위한 우정이란 뜻이다."

네델란드어는 "손님의 자유"를 뜻한다.

네델란드사람들이 우정보다 자유를 더 중시하는 느낌을 주지만, '환대'라는 말 속에 손님을 구속하지 않으면서 우정을 표시하고, 혼자 있게하지 않으면서도 자유를 준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환대란 낯선 사람이 맘 놓고 들어와 적이 아닌 친구가 되는 자유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환대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우리쪽으로 넘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없애고 방해 받지 않는 자유를 주는 것이다.

환대란 이웃을 대안 없이 구석으로 몰기보다 선택의 자유가 보장된 넓은 공간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적대에서 환대로 돌아서려면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을 새로운 인간관계로 초대할 친근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나무를 심어놓고 억지로 자라게 할 수는 없지만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돌이나 잡초는 제거할 수 있듯이, 어떤 사람의 생각과 느낌을 강제로 바꿀 수는 없지만 그에게 변화가 일어날 공간을 제공할 수는 있다.

 

"살며 춤추며"- (24)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위로와 평화가 있는 곳

 

"칭송받는 것은 모두 마음에 간직할 것"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필리4,8)

 

"자주 모임"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히브10,24-25)

 

"진리를 깨달음"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수많은 걱정에 싸여 있을 때 위로해 주심"

"내 다리가 휘청거린다." 생각하였을 제 주님, 당신의 자애가 저를 받쳐 주었습니다. 제 속에 수많은 걱정들이 쌓여 갈 제 당신의 위로가 제 영혼을 기쁘게 하였습니다."(시편 94,18-19)

 

"고통 가운데 위로해 주심"

"당신 말씀이 저를 살리신다는 것 이것이 고통 가운데 제 위로입니다."(시편119,50)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같지 않은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스며드는 고통도 이와 같이 똑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각기 다른 어려움에 허덕일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믿고 의지하면서 삶의 변화를 일으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찾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은총을 찾고 참 기쁨을 누려 봅시다.

2012-07-08 오전 4:51:38 조회수 26 추천수 0

안전한 곳을 찾아

 

'내가 이 세상에서 낯선 사람과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가 아니라, '이 사랑이 정말 가능한 것인가?'하고 물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는 서로에게 어쩔 수 없이 나그네가 아닌가라고 자문한다.

친밀한 사람에게 오해의 불씨가, 하나가 되려는 노력에 분열의 아푼 경험이, 상대를 받아들이는 몸짓에 저항의 두려움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운명적 미움의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문득 이처럼 경쟁적이고 살벌한 세상에서 맘놓고 쉴 수 있는 곳, 사람들에게 나를 몽땅 보여줄 수 있는 곳, 조건 없이 나를 내줄 수 있는 곳이 한곳이라도 있는지 두리번 거린다.

 

이런 신뢰와 개방은 인간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곳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조심스레 살펴보도록 초대받는다.

 

"살며 춤추며"-(25)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안전하게 사는 길

 

"신중하고 현명하게 살아감"

"내 아들아, 신중하고 현명함이 네 눈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네 영혼에 생명이 되고 네 목에 아리따움이 되리라. 그러면 너는 안심하고 길을 걸으며 네 발은 어디에도 부딪치지 않으리라."(잠언3,21-23)

 

"성실한 친구을 사귐"

"성실한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로서 그를 얻으면 보물을 얻은 셈이다."(집회 6,14)

 

* 우리들의 성실한 친구는 과연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형제로,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제자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서로 격려하고 도와줌"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1테살5,11)

 

"우둔한 자 앞을 떠날 것"

"우둔한 사람 앞에서 떠나가라. 거기에서는 지식의 말을 배우지 못한다."(잠언 14,7)

우리가 성경을 친구처럼 끼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성경 말씀이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2012-07-11 오전 6:24:55 조회수 203 추천수 1

창조적 나약함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나는 이 말씀이 그리스도교 선교의 모든 것을 요약한다고 생각한다.

 

오랜 훈련으로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에, 상당한 경지까지 오른 사람이 많지만,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 자신의 나약함을, 창조의 바탕으로 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설교란 선교하는 사람이 고통과 기쁨, 절망과 희망의 모든 순간에,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음으로써 같은 목적을 가졌지만,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즉 선교는 특별하게 하는 사업이 아니다.

선교는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이다.

선교사가 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살며 춤추며"-(26)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선교는 순교의 전초임을 기억하자!

 

"전교의 사명"

"듣든 말든 너는 그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여라."
(에제2,7)

 

"전교를 해야 하는 까닭"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모든 사람이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 집니다.(로마 10,15-18)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에"

"사실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9,16)

 

"믿음의 모범을 보임"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생명을 얻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치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6-19)

 

우리는 자기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것을 입으로 말할 뿐입니다.

어떤 의도를 품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의 희망을 이웃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지향의 순수성은 오로지 착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려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2012-07-15 오전 5:53:50 조회수 9 추천수 0

"홀로있기"

부드러움과 온순함과 평화로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내적자유, 이런 것들은 홀로 있는 데서 시작된다고 확신한다.

 

"홀로있기"를 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매달리고,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서로를 의심하고 짜증을 부리고, 간혹 자기도 모르게 피곤한 과민증으로 서로를 감시하게 된다.

 

"홀로있기"를 하지 않으면 사소한 갈등이 깊어지고 마침내 상처를 남긴다.

그러면 '터놓고 말하는'시간이 부담스러운 의무로 바뀌고, 하루하루의 삶에 긴장하여 오랜 세월 함께 살기가 힘들어진다.

 

그러나 "홀로있기"를 잘하면 하느님 사랑으로 한곳에 부름 받아 살고, 그분 안에서 쉬며, 저마다 자기를 표현하는 데 서툴고 한계가 있어도, 그분 안에서 서로 신뢰하고
즐겁게 살면서 하느님께 의존하는 법을 깨닫는다.

 

홀로있음으로써 우리는 상호불신이라는 해로운 영향에서 벗어나 우리 언행이, 상대방에게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하는 대신 이미 존재하는 신뢰의 자유롭고 즐거운 표현이 될 수 있다.

 

홀로있을 때 우리는 그 홀로있음이 우리를 뛰어넘는 사랑의 다른 표현임을 체험한다.

 

"살며 춤추며"-(27)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홀로있음'은 외로움과 다르다.

 

'홀로있음'은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온전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임으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바라보며 자신과 자신 안에 계신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마태14,23)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하시고, 다시 두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마태26,40-42)

 

우리는 간절한 소망을 주님께 기도하면서 온갖 노력을 기우리면서 소망이 이루어 지도록 있는 힘을 다 기우려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이 우리의 소망에 함께 하셔야 하기 때문에,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이 저의 소망을 이루는데 함께 하소서!"
그러나 주님의 뜻에 제가 따르게 하소서!"하고 기도드려야 합니다.

2012-07-16 오전 9:36:14 조회수 209 추천수 2

이웃이 필요하다.

 

사제는 자주 혼자 머무는 사생활이 없다.

사제 한테는 문지기가 있는 인간관계의 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지만 정작 자기 친구는 없다.

 

언제나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에 응하고 조언을 하면서도 자신의 아픔을 호소하거나
자기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 찾아갈 사람이 없다.

자기가 일하는 교회나 수도회에서 마음 놓고 쉴 방도 없고 본당을 둘러봐도 진정한 소속감을 줄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본당 신자들에게 사제가 필요하듯,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사제한테는 믿고 마음을
나눌 사람들이 필요하다.

받아줄 사람을 찾다가 상담하러 온 사람들에게 집착하고 의존하게 된다.

거기에서 행복을 느낄만한 개인적 친밀감을 얻지 못하면 신자들은 그의 욕구를 채우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신자들과 오랜시간을 보내고, 그들의 욕구가 자신의 욕구를 더 채우려 한다.

이런 식으로 문지기가 있는 인간관계의 틀을 상실하여, 한 번도 안도감을 느끼지 못한 채 계속 두리번 거리다 마침내 오해가 깊어져 외로운 자신을 발견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사실은 친구 하나 없는 자신을 보게 되고, 가슴(마음)기도로 훈련해 온 사람이 자기 안에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이다.

모든 이에게 자기를 열어놓으면 안에 있는 분을 위한 에너지가 없어진다.

개인생활의 은밀한 울타리가 무너지면서 자신과 함께 있을 곳이 없어지는 것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내주는 사제는 자신이 완전한 인간임을 느끼기 위해 다른 이들과
함께 있으려는 기회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야한다.

 

"살며 춤추며"-(28)
헨리 나웬 신부 지음

 

오늘의 묵상 : 사제는 분명히 사람이다.

 

"인간의 한계"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욥 7,1)

 

"죄를 지으면서 살아감"

"죄를 짓지 않고 선만을 행하는 의로운인간이란 이 세상에 없다"(코헬 7,20)

 

"뜻대로 행동을 제어하지 못함"

"선을 알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7,19-20)

 

사제는 인간이면서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려고 온갖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자기를 온전히 내어 주면서 살려고 하는 분들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힘과 용기를 드려야 그분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당신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손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들도 힘을 뫃아 그리고 사랑으로 그분들의 전교사업에 동참하여 사제를 도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 마음에 드은 영적제물을 사제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교우들이 되십시오"(1베드 2,5참조)

 

본당 신부님께서 하시는 일에 건건히 트집 잡으려 하지 말고 인간적인 차원에서 우리들이 하지 못하는 것에 찬사와 찬양 그리고 힘과 용기를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본당 신부님에게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