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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강론

최인호 베드로 작가 의 글- 6개

2012-07-15 오전 9:06:35 조회수 192 추천수 4

겨자씨의 비밀 1

 


불교의 경전인 ‘유마경’에는 수수께끼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겨자(芥)씨 속에 수미산이 들어있다.” 수미산(須彌山)은 불교의 우주관에서 나오는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산으로 해와 달은 수미산의 허리를 돈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성산입니다.

 

 

겨자씨는 티끌이나 먼지와 같은 극히 작은 물질을 상징하는 씨앗인데 그 속에 해와 달이 산허리를 돌만큼의 거대한 수미산이 깃들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모순입니다.

 

 

이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던 당나라의 학자 이발(李勃)은 지상(智常)스님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스님, 유마경에 이르기를 ‘수미산이 겨자씨 속에 들어있다.’ 하였는데 어찌 그런 큰 산이 작디작은 겨자씨 속에 들 수 있습니까.”

 

 

이발은 평소 독서를 즐겨 독파한 책이 만권이 넘어서자 사람들이 ‘이만 권’이라 칭하였던 당대의 대학자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지상스님은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이발아, 사람들은 너를 ‘이만 권’이라고 부르지 않더냐. 그러하면 너는 만권의 책 내용을 어떻게 겨자씨와 다름없는 작은 머릿속에 넣을 수가 있었느냐.”

 

지상스님의 선답은 알듯 말듯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더욱 알쏭달쏭합니다. 주님도 같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수수께끼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 17,20)

 

겨자씨는 주님께서 말씀하셨듯 ‘모든 씨앗 중에서 가장 작은 것’(마태 13,32) 이지만 이 작은 믿음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가 산을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서 바다에 심어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루카 17,6) 라고 못 박고 계신 것입니다.

 

 

제가 가톨릭에 귀의한 것이 올해로 25년. 그동안 이 구절은 당대의 학자 이발처럼 항상 저에게도 풀리지 않는의문이었습니다.

 

우선 주님의 이 말씀을 떠올리면 저는 기가 죽습니다. 저는 믿음이 부족한 열등한 신자임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한 신부님이 열성적인 신자와 내기를 했습니다. 만약 그 신자가 ‘주의 기도’를 처음부터 끝까지 잡념 없이 그 뜻을 새기며 외울 수만 있다면 만 원을 주겠다고 말입니다. 신자는 자신 있다고 대답하고 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한참을 기도하다가 갑자기 눈을 뜨고 물었습니다.

 

“신부님, 성공하면 얼마라고 하셨죠. 만 원이었던가요. 오천 원이었던가요.”

 

 

이 우스개 속의 주인공이 바로 저입니다. ‘주의 기도’의 짧은 기도문도 저는 1%의 잡념 없이 끝까지 완벽하게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주님을 향한 제 믿음이 겨자씨 하나만큼 작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말씀인가요. 물론 저는 이 산을 저쪽으로 옮기거나 바다 속에 뽕나무를 심을 만큼의 큰 소망을 바라지는 않지만, 주님을 향한 믿음이 겨자씨 한 개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주일마다 빠지지 않고 미사에 참여하고, 묵주기도를 하고, 식사할 때마다 성호를 긋고, 가끔 주님이 주시는 위로에 눈물 흘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용솟음쳐도 주님을 향한 제 짝사랑이 겨자씨보다도 작다면 제가 주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와 무에 다를 게있겠습니까.

 

 

가톨릭에 귀의하고 25년 동안 줄곧 마음속에 품어왔던 겨자씨의 비밀이 제 마음속에서 밝혀진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겨자씨의 비밀이야말로 ‘싹이 트고 자라나면 어느 푸성귀보다도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날아 와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마태 13,32)로 자라는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계속)

 

 

-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

 

◎ 2012.7.15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 중에서 /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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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의 비밀 2


겨자씨의 비밀을 발견한 것은 최근에 우연히 「성녀 소화 데레사 자서전」을 다시 
읽은 후였습니다.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는 책은 읽을 때마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지 
지금껏 수차례 읽었음에도 새로운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널리 알려진 
데로 15살에 가르멜수도회에 들어가 24살에 선종함으로써 10년도 못 되는 짧은 수도원
생활을 한 새내기 성녀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대부분 그러하였듯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거나 새로운 수도회를 창립하거나 순교를 하거나 성덕을 이루기 위해서 초인적인 
신앙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봉쇄수도원에서 기도를 하고, 마룻바닥을 닦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과 같은 평범한 일상생활에 전념하였던 수도자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성녀가 
되기를 꿈꾸었던 데레사는 ‘구름을 찌르는 높은 산’과 같은 성인들에게 비하면 사람들의 
발아래 짓밟히는 ‘작은 모래알’과 같은 자신의 무능함에 절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데레사
는 ‘하느님께서는 이루지 못할 원을 내게 일으키게 하진 못하실 것이다.’라고 마음을 굳게 
먹고 그 길을 가리켜달라고 기도하고 성서를 찾아보았을 때 이 구절이 눈에 띄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서에는 ‘누가 만일 아주 작은 자이거든 내게로 오라’(잠언 9,4)고 
하시는 ‘영원한 지혜’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있었습니다.” 성녀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아주 작은 행동이 하느님의 눈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이며, 다른 
사업을 모두 한데 모은 것보다도 교회에 유익하다.” (영혼의 노래)라는 말에 용기를 얻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작은 일’이야말로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아주 소소하고 그러니까 마룻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늘 하나를 주을 
때에도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주우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영혼 하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는데 조그만 희생하나 눈길 한 가닥, 말 한마디도 놓치
지 않고 아주 작은 것도 이용하고 그것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성인의 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녀 소화 데레사가 발견한 ‘겨자씨’의 비밀이었습니다. 
우리들의 믿음은 베드로의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자기도 모르고 한 말’(루카 9,33)처럼 
‘스스로 나팔 부는 위선’(마태 6,2 참조)이거나 ‘되풀이 되는 빈말’(마태 6,7참조)일 때가 
많습니다. 이런 애매한 믿음이야말로 주님께서 꾸짖는 ‘약한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신 것은 46년이나 걸린 솔로몬의 거대한 성전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성전)
을 아끼는 사랑의 열정’(요한 2,17 참조)입니다. 주님은 심지어 돈과 권력과 궤변으로 
얼룩진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다시 세우겠다.’라고 질타하지 않습니까.주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은 우리들의 수도원인 가정 속에서부터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들의 가정은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기 위해 겨자씨와 같은 작은 희생과 헌신과 양보와 
인내들이 불꽃처럼 부딪치는 올코트 프레싱의 격전장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이 ‘작은 길’
을 끝까지 달려가 작은 모래알이 되어 자신이 원했던 데로 ‘목숨이 다하는 날 빈손으로 
주님께 나아감’으로서 우리들에게 ‘장미의 꽃비’를 뿌리는 가톨릭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소화 데레사는 말했습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이 층에 
간 어머니를 찾아 우는 아기처럼 하면 된다.’우는 아기 데레사가 성녀가 되었다면 감히 
우리도 성덕을 향한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음식을 만들 
때도데레사처럼 사랑으로 하고, 자식들을 아기 예수처럼 대하고, 아내를 성모님처럼 
공경하고, 남편을 주님을 대하듯 사랑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가정은 성가정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만권을 읽은 책의 내용이 겨자씨와 같은 이발(李勃)의 머릿속에 깃들 
수 있듯이 이러한 겨자씨의 믿음이야말로 수미산을 움직이고, 새들이 날아와 둥지를 틀 
수 있는 거대한 숲을 이루는 하늘나라의 열쇠인 것입니다.

-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
출처: 서울주보 2012년 7월 22일 (말씀의 이삭)
최인호 베드로┃작가 





내님의 사랑은<故이태석신부님 노래>
2012-08-20 오전 7:29:49 조회수 122 추천수 3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최인호 -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해 먹이는 매끼의 밥이야말로 주님의 살이요, 피요, 그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원하신 어머니여

어머니. 당신을 무어라고 다른 말로 부를 수 없어 그냥 어머 니라고 부릅니다. 나를 낳아서 기르신 그 인연으로 인하여 당신은 어머니가 되시고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 되었나이다.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이제 두 달이 지나 석 달이 되어 갑니다. 작년 10월 31일이었던가요. KBS팀과 「잃어버린 왕국」 다큐멘터 리 취재차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11월 2일 저녁, 호텔에서 나를 찾 는 아내의 전화가 있다고 호텔 보이가 말하였을 때 나는 직감적으 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오후 2시쯤 돌아가셨어요. 놀라지 마세요." 아내는 나를 위로하려 하였지만 어머니, 나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딘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멍한 느낌이었습니다. 홀로 방으로 돌아와 문을 잠그고 침대 위에 꿇어앉으니 어머니, 비로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슬프기도 하였지만 너무나 고맙기도 하여 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였습니다. 어머니, 이제 편안하시죠. 파출부가 무얼 훔쳐 간다고 의심의심하시더니 이제 그게 다 부질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셨죠. 죽는 것이 무섭구나, 얘야. 그 캄 캄한 흙 속에 누워 묻혀 있다니. 그게 무섭구나, 얘야. 어머니는 늘 그것이 걱정이셨지만 이제 보니 육신 떠난 기쁨이 얼마나 크고, 좋 은 세상이 어머님 앞에 있음에 뒤늦게 놀라우시지요, 어머니. 일본으로 떠나기 이틀 전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머니가 내 곁에서 요즈음 늘 함게 주무신다." 나는 그때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 제는 그 뜻을 압니다. 그리고 외로운 어머니와 말동무해 주시면서 함께 주무셔 주었던 그분이 누군지 잘 압니다. 그러나 그분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겠어요. 어머니, 그것은 어머 니와 나 둘만의 비밀입니다, 어머니. 그날 어머니는 내가 함께 '묵주기도' 를 하자고 하자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함께 기도를 즐겁게 드리셨는데, 기도를 드 리는 그 모습이 맛있는 반찬을 함께 먹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저는 아주 즐거웠습니다. 어머니, 저는 어머니가 기도를 드리기 전에 성 호를 긋는 모습이 언제나 좋았었어요. 함께 기도드릴 때마다 저는 언제나 그 모습을 가만히 훔쳐보곤 하였지요. 눈이 무겁게 감기셔서 앞을 제대로 못 보는 어머니가 묵주를 들고 그곳에 입을 맞추고 아 주 경건한 자세로 두 손을 모으고, 작으면서도 그렇게 힘찬 성호를 긋는 모습은 언제나 제겐 놀라움이었습니다. 어머니, 십자가를 긋 는 그 모습은 하루아침에 이룩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온 생애를 다하여 거룩한 마음으로 성호를 그었던 사람만이 이를 수 있었던 십자가를 어머니는 이마에, 가슴에, 두 손에 그을 수 있었던 것입니 다. 돌아가신 그날까지 기도를 드리셨으니 어머니, 어머니야말로 생 애의 마지막까지 기도를 드리신 성도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머니. 즉시 배행기를 타고 돌아오니 고맙게도 어머니의 시신이 청담동 성당 영안실에 누워 계셨습니다. 어머니의 영전 앞에 이렇게 글씨 가 쓰여 있었습니다. '성도 손 안나.' 그렇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라 성도 손 안나였습니다. '복녀' 라는 통속적인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손 안나 라는 이름으로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이름 앞 에 쓰인 성도聖徒란 그 명칭이 너무나 좋아서, 나는 슬프면서도 초 등학교도 못 나온 내 어머니가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서 눈물도 나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80평생에 '성도' 란 그 대명사가, 그 대명사에 합당한 삶이 어느 재벌이나 대통령이 나 지상의 그 어떤 영광보다도 값진 것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고 가신 어머니가 너무도 자랑스러워서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 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 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비록 배운 것이 없어 똑똑하진 못 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지만, 돌아가실 때 '성도' 의 이름을 얻으셨으 니 어머니의 생이야 말로 축복받은 삶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 어머니의 시신을 볼 때도 나는 무섭지 않았나이 다. 슬프지도 않았나이다. 관 속에 누울 때 어머니의 벌거벗은 모습 을 보았나이다. 내가 언제나 좋아하던, 어머니의 작은 키에 어울리 지도 않는 두툼한 손을 보았나이다. 제가 어머니의 손을 얼마나 좋 아했는지 아시지요. 키 150센티미터도 못 되는 어머니의 손은 여자 의 손이 아니라 거인의 손이었습니다. 두툼한 빵과 같았나이다. 평 생을 자식을 위해서 노동하시던 노동자의 손이셨나이다. 자신을 위 해서는 그 흔한 금반지도 하나 끼우지 않으셨던 희생의 손이셨나이 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 손톱에 봉숭아물조차 들이지 아니하던 순교 의 손이셨나이다. 나는 기억합니다. 어린 시절 마당에 나가 자식들 먹는 밥에 행여 돌이 섞일세라 수백 번 돌을 골라내시던 새벽마다의 거룩한 일상을 늘 기억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거룩한 새벽 미사의 영 성체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해 먹이는 매끼 의 밥이야 말로 주님의 살이요, 피요, 그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 니까. 간혹 내가 피로해질 때 어머니는 내 등을 주물러 주셨지요. "피로하겠구나, 얘야." 어머니의 손은 얼마나 힘이 강했는지 무엇을 먹고 그리도 힘이 강 했는지 언제나 놀라곤 하였지요. 벌거벗은 어머니의 육체. 팔십 먹은 어머니의 육체, 걷지 못하던 그 다리, 흰 천 사이로 삐 죽이 나타나던 두 발-----. 그 모습은 평생을 두고 해진 곳을 기우 고, 떨어진 곳을 메워 쓰고 쓰던 낡은 행주와 같은 육신이셨나이다.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란 소설 첫 부분에 나오는 평생 고 기를 낚는 어부로 살아왔던 노인의 배에 내걸린 찢어진 돛과 같이, 낡고 기우고 해지고 얼룩진 돛대와도 같아 보였나이다. 때로는 풍랑 도 만나셨겠지요, 어머니. 때로는 좌초도 하셨겠지요, 어머니. 그러 나 어머니. 참으로 무사히 어머니의 배는 항구에 닿았으며 어머니의 영혼은 태어난 곳으로 가셨나이다. 어머니의 시신은 항구에 정박한, 지친 그러나 거룩한 생애를 보낸 낡은 배의 돛과 같았나이다. 어머니. 어머니는 칭찬 많이 받으셨겠지요. 어머니가 관에 들어가실 때 어머니 손에 우리 대부 스테파노가 준 묵주를 대신 감아 드리고 어머니의 묵주는 제가 대신 가졌나이다. 어머니가 주신 묵주를 들여다보면 마리아상이 얼마나 많이 닳아 있는지. 그래서 어머니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셨는지 나는 정말 놀라곤 합니다. 어머니야말로 골방에서 언제나 홀로 기도하셨으니 어머니의 기도는 천상에 매달린 종을 언제나 딸랑딸랑 울리게 하셨 을 것입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묵주를 제가 가졌어요. 어머니의 머리맡을 지키던 마리아상도 십자고상도 제가 가졌어 요. 어머니가 주신 묵주와 십자고상이 있으니 제가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머니가 이제 돌아가셨으니 언젠가 제가 원할 때 저와 함께 계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함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어머 니는 늘 이렇게 제게 말씀하셨지요. "고맙구나, 애 아빠야." 어머니. 이제 제가 말씀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어머니. 이 세상에 하찮은 제게 어머니로 오셨다가 그 고생 다하시고 낡고 낡아 더 이상 포도 주를 채울 수 없는 낡은 부대가 되어 새 술을 담으로 가신 어머니. 꿈에 나타난 부활하신 어머니의 모습 그대로,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어 편안함을 누리옵소서. 성도 손 안나. 이제 당신은 내 어머니가 아닙니다. 귀양살이하는 이 생애만큼만 내 어머니가 되셨다가 거룩한 여인이 되어 떠나가신 손 안나님, 당 신은 참으로 위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부르던 그 정다운 이름으로, 당신 품에 안겨 젖 을 빨던 어린아이의 어리광으로 부르오니 '엄마, 안녕히 가세요. 언 젠가는 또다시 만나겠지요.' 아들 베드로 올림 <88.2>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2012-08-20 오전 7:28:47 조회수 118 추천수 3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최인호 -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해 먹이는 매끼의 밥이야말로 주님의 살이요, 피요, 그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벗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이 편지를 받는 그대가 누구인지 아직 저는 모릅니다. 그대는 이미 제가 만났었던 사람인지, 친하였던 동무였 는지, 아니면 오가는 길가에서 스쳤던 사람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만, 어쨌든 내 사랑하는 벗이 되어 생전 처음 그대에게 쓰는 이 편지 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는 그대가 아직 만나지 못하였던 사람인지, 앞으로 제가 만나야 할 미지의 사람인지, 아니면 영영 제가 이 세상에 머물 때까지 만나지 못할, 그럴 사람인지 알 수 없어 그대 이름 부르지 못 하고 그냥 '사랑하는 벗이여.'라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것이니 내 사 랑하는 친구가 되어서 이 편지를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저는 오늘 그대에게 최근에 있었던 제 일상생활에 관한 일들을 고 백하려 합니다. 저는 두고두고 이 사실을 가슴속에 묻고 있다가 때 가 되면 입을 열어 그대에게 편지를 쓰려 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사실을 가슴에 묻고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제 가슴은 부풀 어 오르는 기쁨과 자랑하고 싶은 설렘으로, 수줍은 새색시같이 눈 을 내리깔고 시치미를 뗄 수만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그대에게 편지를 써서 이 사실을 고백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저는 지난 6월 7일 서울 서초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 본명 (세례명)은 '베드로'. 언제부터인가 세례를 받을 때면 제 본명 으로 사용하리라 미리 예비하고 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것은 특 별히 '베드로' 라는 분이 좋아서 혹은 남달리 그분에 관해 각별한 애 정을 갖고 있어서라기보다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 에 대세代洗를 받으실 때 본명으로 삼으신 이름이기 때문이었습니 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아버님이 베드로 1세였다면 저는 아버님의 뒤 를 이어 베드로 2세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저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 많은 기도의 말, 아직 모두 외우지는 못하였으나 대부분의 말들은 따라 할 수 있 게 되었고, 얼른 보면 복잡하기 그지없어 아주 엄격하고 어렵기만 하던 주일 미사에도 참석하여 어색하기 짝이 없게 성호를 긋기도 하고 '주님의 기도' 를 남보다 큰 소리로 드리는 신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간혹 잊어버리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꼬박꼬박 식사를 할 때마다 성호를 긋고 기도도 빼놓지 않는 그러한 신자가 되고 말 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랑하는 벗에게 우선 고백해야 한다고 생각 하였기 때문에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우선 그대는 제 이 고백을 들으시고 무척이나 놀라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아아, 그가 마침내 인간으로서 약해졌구나. 아아, 그가 마침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구나. 아아, 그가 마침내 나이 마흔을 넘기 더니 어쩔 수 없어 하느님을 찾아갔구나.' 그리하여 한때 대마초를 피우다 죄를 뉘우치고 자선 공연을 하는 가수들을 볼 때 느끼던 감정을 제게서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무슨 고아원이나 양로원 같은 곳에 라면 박스를 보내는 회개 한 신자들을 바라볼 때 느끼던 감정으로 저를 재미있고 흥미롭게 바라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술이 센가를 가리기 위해서 술집에서 밤을 새우면서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 술이 약한 친구가 변소에 가는 척 도망쳐 버렸을 때, 이긴 사람이 느끼는 감정으로 저를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 니다. '아아, 마침내 지고 말았군!'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 그대는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술 이 약해 그만 버티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쳐 버린 공처가로 비유하 여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아직 즐길 술이 많이 있고 시간도 많이 남아 있는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아직 제가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대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대와 똑같이 술에 약해 도망치는 사 람들에게 이렇게 놀리곤 하였으니까요. "자아식, 술에 약한 공처가, 조무래기, 겁쟁이 같은 녀석." 저 역시 주위에서 신앙을 갖기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 니다. 통회하면서 울부짖는 신자들을 보았고, 하루아침에 예수님을 만났다는 친구들도 만났었습니다. 그러할 때 저 역시 이렇게 말하 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이식, 미쳤군." 그러므로 그대가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떻게 이야기할지 저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가 이 편지를 띄우는 것은 우선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되어 하느님과 그의 아드님이신 예 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었음을 그대에게 고백하고 이를 통고하기 위 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이제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대가 여전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천주교 신자가 되어 아침저녁 으로 기도하고, 밥 먹을 때 성호를 긋고, 말할 때마다 걸핏하면 하 느님과 예수님과 회개와 부활 같은, 성경의 용어들을 즐겨 말하는 그런 신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제 자랑스럽게 그대에게 말합니다. 이는 자랑이 아닙니다. 참으로 슬픈 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제 말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대가 저보다 더 많은 쾌락을 누렸을 리는 없습니다. 이 역시 자랑이 아닙니다. 하느 님을 알게 됨으로써 죽어 버린 제 육체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그대가 아무리 유명해도 저보다 많이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릴 리 가 없고, 그대가 아무리 건강해도 저만큼 강하지는 못하였다고 자 부합니다. 그러므로 그대와 같이 수많은 죄와 쾌락과 욕망에 불타 고 있었던 제 말을 일단 믿으셔도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압니다. 사랑하는 벗, 그대가 얼마나 고독하고 슬 프고 고통스럽고 쓸쓸하지 제가 그대의 그 고독을 압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저는 이제 그대가 말하는 이른바 '예수쟁이' 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우선 그대에게 전해 드리고 싶어서 이 편지를 그대에게 씁 니다. 제 육신은 마흔 세 살의 나이로 죽었으며, 이제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고 싶은 말, 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이 하루하루 샘솟아 오릅니다. 그 한 달 동안 내 영혼 속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과 기적들을 그대에게 모두 털어놓아, 얼마만큼 제가 주님에게 사랑받았음을 뻐기고 자랑 하고 싶지만 그러나 아직 그때가 되지 않았음을 저는 압니다. 이제 겨우 갓 태어난 제가, '아빠 엄마'만을 겨우 말할 수 있는 제 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무슨 말로 이 마음 속에 일어 난 기적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생각하여서, 생각하고 생각하여서 그대에게 아주 오랜 뒤에 가장 짧은 말로 말할 수 있을 때가 되었을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은 저를 도와주 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선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제 집의 작은 공 간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고상苦像과, 보면 볼수록 아름답 고 품에 안기고 싶은 마리아상을 모셨으며, 이따금 그 앞에 두 손 모으고 무릎 꿇고 '묵주기도' 를 바치는 신자가 되었음을 전해 드리 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먼 후일 저는 그대를 위해 아주 긴 편지를 쓰겠습니다. 그때는 이 편지처럼 문안 인사의 편지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랑하는 벗이여. 안녕히 계십시오. 제 편지를 받으신 그대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시기를 간구합니다. 최 베드로 올림 <87. 8>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2012-08-21 오전 6:59:28 조회수 312 추천수 3
찬미예수님!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 이야기

최인호 -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들을 위해 먹이는 매끼의 밥이야말로 주님의 살이요, 피요, 그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을 믿으세요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던 둘째 누이가 우리나라에 돌아와 함께 살고 있는 지가 벌써 일 년이 넘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 렵, 여의도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유학 갔던 둘째 누이는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식들을 세 명씩이나 낳고 완전히 미국 시민이 다 되었다가 우연찮게 매형이 우리나라에 직장을 얻음으로 써 재재이민하여 같은 서울에서 벌써 일 년 이상 함께 지내고 있다. 그 누이가 언젠가 나를 만나서 함께 커피를 마시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요즈음 들어 가끔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들딸 셋을 키우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도대체 어머니가 어떤 가정교육의 방법 으로 우리들 여섯을, 남편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별로 비뚤어진 아 이들 없이 무사히 다 키우셨는지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간혹 생각해 보곤 한다." 요즈음 나도 누이처럼 어머니를 떠올리 때가 많이 있다. 벌써 돌 아가신 지 이 년이 되어 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기도 하지만 누 이의 말처럼 도대체 어머니가 무슨 방법으로 우리들 여섯을, 훌륭 하게는 아니지만 별로 모난 데 없이 비뚜로 키우지 않았던 그 비법 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한다. 큰딸아이는 벌써 고등학교 3학년, 아들 녀석은 올해로 고등학교 1학년이다. 두 아이를 키우는 것만으로도 우리 부부는 쩔쩔맨다. 고 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를 뒷바라지하느라고 아내는 벌써 반년 이상 딸아이의 침대에서 함께 자고 함께 밤을 새우는 유목민 생활을 계속 하고 있다. 평소에는 말로만 듣던 '고삼병' 의 증후군을, 요즈음 나 는 철저히 통감하고 있다. 도대체 장관 나리들의 아이들은 다 공부 를 잘해서 척척 대학에 들어가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이 엄청난 비극에 대해서 나는 정말 가슴이 아프고 견딜 수가 없다. 데모하는 대학생들과 임금을 올려 달라는 노동자들만 무서워하는 이 정부는 우리들의 어린 아들딸들이 시들어 가고 병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왜 모른 체들 하는가. 그 아이들이 아직 미성년자들이어 서 자신들의 고통을 집단 시위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지 않아서 모 른 체하는가. 미래를 짊어질 우리 아이들이 그 엉터리 같은 대학 입 시 때문에 육신이 병들고, 영혼이 병들고, 가엾게도 빛나는 청춘의 시기에 시들어 가는 모습을 모른 체만 할 것인가. 자살을 하는 우리 아들딸들이 늘어나도, 급한 일들이 많으니 다른 것에만 급급한 위 정자들은 우리 아들딸들이 죽어 가고 병들어 가고 있는데, 그 이상 더 무엇이 급하고 더 무엇이 소중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지옥과 같은 입시제도는 우리들의 착한 아들딸들을 모두 신경질적이고 짜증을 잘 내고 늘 어두운 표정을 짓고 다니며 푹푹 한숨을 쉬고, 언제나 폭발해버릴 것같이 자살 충동을 느끼며 잠이 모자라 꿈속을 걸어다니는 몽유병 환자들로 만들고 있다. 가엾은 내 딸아이, 가엾은 내 아들 녀석을 보면서 나는 요즈음 매 일같이 가슴이 아프다. 남의 자식을 보아도 가슴이 아프고, 자살했 다는 고등학생 기사를 보면 눈물이 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 들이 죽어야만 우리들이 정신을 차릴 것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병들어야 어른들인 우리들이 정신을 차리겠는가. 그럴 때면 나는 벽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둘째 누이의 말처럼 어머니는 어떻게 우리 여섯을 키우셨는가. 초 등학교밖에 못 나온 무식한 어머니는 요즈음 어머니들처럼 가훈이 나 가정교육의 철학도 가지지 못한 그저 그런 어머니였었다. 그런데 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우리들 여섯 형제를 그렇게 훌 륭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몹쓸 만큼 키우지도 않으셨다. 돈이 없으면 하숙을 쳐서라도 어머니는 우리 여섯을 모두 대학교에 진학 시켰다. 먹고살기가 바빠서 어머니는 그저 되는 대로 우리들을 본의 아니 게 자율적으로 키우셨음일까. 며칠 전 아들 녀석이 형편없이 시험을 못 보고 등수가 훨씬 떨어 진 성적표를 보여 주자 나는 화가 나서 아들 녀석을 심하게 꾸짖었 었다. 내 입에서 나온 꾸중은 누구나의 집에서나 꼭 하마디씩 나오 는 그런 통속적인 꾸중이었을 것이다. '이 자식아, 이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못 간다고. 이 자 식아. 너 이다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도 못 가고 저 멀리 지방 대학 으로 유학을 갈 셈이냐.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여보게, 정신 차려, 이 친구야." 한바탕 아들 녀석에게 꾸중을 하고 나서 그다음 날 오랜만에 충청 도에 있는 수덕사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그 영행길에서 나는 차를 몰아가면서 곰곰이 어머니에 관한 옛 기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나는 지금껏 어머니에게서 공부를 하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형도, 동생도, 누이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께 서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적표를 보자고 명령하신 적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 모두가 공부를 썩 잘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 다. 우리는 언제나 책상 속에 들어 있는 어머니의 도장을 우리가 마 음대로 성적표에 찍을 수가 있었다. 몸이 아프면 어머니는 우리에 게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였고 우리는 결석계를 우리가 써서 어머니 의 도장을 마음대로 찍어서 담임 선생님에게 제출하곤 하였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형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기하인가 하 는 수학 과목에 20점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교무실에 불 려 다녀와서도 형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 한다. "쉬엄쉬엄 하거라. 너무 애쓰지는 마라." 어머니는 그저 중학교 입시를 앞둔 내게 점심마다 더운밥을 해 오 실뿐, 아무런 강요도 채근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형님은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 데 나는 매일같이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학교에 형님 의 더운 도시락을 날라도 주곤 하였었다. 어머니의 뜨거운 도시락은 유명해서 중학교 1학년 땅꼬마인 내가 도시락을 들고 가면 고3 형 님들이 도시락을 받아 형님에게 건네주면서 이렇게 놀리곤 하던 소 리를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도시락 배달왔습니다. 뜨끈뜨끈한 도시락 배달이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낙제를 하였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성적표 를 받아 들고 학점이 평균 미달이었으므로 학적과에 찾아갔더니 사 무처 직원이 내게 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학생은 학점이 미달이어서 1학년을 다시 한 번 더 다녀야 합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수업 시간보다 더 많이 영화관을 다니고 있 었지만 설마 대학교에서까지 낙제가 있는 줄은 전혀 몰랐었다. 대학 교 1학년을 다시 한 번 다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괴 로웠던 것은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시 한 번 1학년을 다니는 것 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라고 느꼈던 점이었다. 당시 누이와 형님, 나 셋이 한꺼번에 대학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매학기 등록철이면 어머니는 별수 없이 방이란 방은 모두 세를 줄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다. 이미 대학교 1학년 때 방이란 방은 모두 전세를 주었고 그 셋돈은 모두 우리 삼 형제의 등록금으로 들어갔 기 때문에 내가 한 번 더 대학교 1학년을 다녀야 한다는 직원의 말 을 들었을 때 가장 미안하였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염치없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 집으로 맥없이 돌아와 어머니에게 "엄마, 나 낙제헸어. 대학교 1학년을 한 번 더 다녀야 한대. 미안 해." 하고 이실직고하자 어머니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표정 이 담담하셨다. 담담했을 뿐 아니라 소리 내어 웃으셨던 것을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낙제해서 대학교 1학년을 다시 다니게 되자 어머니는 만나 는 친척에게마다 이렇게 말하며 재미있어하셨다. "글쎄, 저 애가 대학교 1학년 때 낙제를 했다우. 그래서 1학년을 두 번씩이나 다니고 있다우. 집안 족보에도 없는 자식이 하나 생겼 다우. 내 참, 호호호호." 수덕사로 몰아가는 차 속에서 나는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나는 둘째 누이가 궁금해하였던,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어머니의 비범한 교육 철학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자식에 대 한 '믿음' 이었다. 어머니는 신식 교육을 받지 못하셨으므로 유식하 거나, 교육 방법이 투철한, 그러한 신식 어머니는 아니셨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있어서 우리들 자식은 하나의 신앙이셨다. 어머니는 우 리를 그냥 맹목적으로 믿으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 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어머니는 그냥 우리들을 믿으셨다. 형이 기하에서 20점을 맞아도 우리를 믿으셨고, 내가 대학교에서 낙제를 하여도 어머니는 우리를 믿으셨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에 결혼을 하겠다고,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선포를 하여도 어머니는 그저 우리를 믿으셨다. 종교에 있어서도 바위와 같은 믿음이 있을 때 순교는 탄생되며 신앙은 열매 맺는다. 어머니는 비록 무식하셨 지만 우리들 여섯 형제들을 굳게 믿었으므로 우리들 여섯 형제는 별 탈없이 크고,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두 아이에 대한 내 믿음은 어머니의 믿음을 당해 내지 못한다. 자 식들에 대한 아내와 나의 불신不信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상 처입히고 있다. 바라옵건대 어머니. 마흔의 중반 나이에도 철부지인 이 아들에게 '믿음' 을 가르쳐 주 십시오. 두 아이를 믿음 속에서 사랑하고 믿음 속에서 이해하고 믿 음 속에서 위로할 수 있도록 어머니, 내 곁에 항상 머물면서 다정히 속삭여 주세요. 그리운 어머니. <90. 7>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2012-09-23 오전 6:37:54 조회수 217 추천수 6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루치아와 사촌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가 양들에게 풀을 주기 위해 목초지로 가다가 성모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20세기초에 나타난 성모님의 발현으로 흔히 이를 ‘파티마의 성모’라고 부릅니다.

 

 

성모님은 어린 목동들에게 속죄와 회개, 묵주기도를 자주 바칠 것과 성직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당부하시고 ‘구원의 기도’를 직접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루치아 수녀의 회고록을 보면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뜻밖에도 가족들의 멸시와 박해였습니다.

 

 

언니들은 루치아가 성모님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자 캄캄한 방에 가뒀으며, 심지어 엄마는 빗자루나 장작개비로 루치아를 때리면서 거짓말을 고백하라고 다그치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성모님 공경을 열심히 하였던 가족들이 실제로 자신의 딸 앞에 성모님이 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합심해서 구박하는 ‘박해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사렛에서 가르침을 펴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그는 목수의 아들이요, 어머니와 형제들은 우리동네 사람들이 아닌가?’(마태 13,56 참조) 라고 ‘지혜와 능력’을 의심하고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들고 일어나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려’(루카 4,29) 죽이려까지 하였으며, 친척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들러 나서기도’(마르 3,21 참조) 했습니다. 주님께서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마태 13,57)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불교에도 이와 비슷한 예화가 있습니다. 마조(馬祖) 선사는 709년 사천성에서 태어난 뛰어난 선걸입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곡식 중에 섞여 있는 겨를 골라내는 키장이였는데, 성불한 다음 고향을 찾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금의환향한 마조를 성대하게 맞아주었습니다. 이때 개울가에 서 있던 노파가 마조를 보더니 깔깔 웃으며 말했습니다. “대단하신 스님이 오시는가 했더니 겨우 키장이 마씨네 꼬마 녀석 아닌가.”

 

 

이에 마조는 다음과 같은 노래를 남깁니다.

 

“권하건대 그대여 고향에 가지 마오 / 고향에서는 도를 이룰 수 없네 / 개울가의 늙은 저 할머니는 / 아직도 내 옛 이름을 부르는구나.”(勸君莫還鄕 還鄕道不成 溪邊老婆子 喚我舊時名)

 

 

루치아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때린 어머니가 공경하는 성모님은 현존이 아닌 환상 속의 우상이며, 마조 선사를 비웃은 노파 역시 부처를 깊은 산 법당 속에서만 찾았습니다.

 

 

예수를 미쳤다고 붙들러 다닌 친척들과 고향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마태 27,25) 하고 맹세한 유대인들은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수가 아닌 제2의 그리스도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불교에는 ‘불재가중(佛在家中)’이란 말이 전해져옵니다. 당나라 때 양보(楊補)라는 사람이 사천에 유명한 무제(無際)보살이 있다 해서 먼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가던 양보는 ‘어디를 가오’ 하고 묻는 노인에게 ‘무제보살을 스승삼고자 길을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노인은 ‘보살을 찾아가느니 부처를 찾으러 가지그래’ 하고 말했습니다. ‘부처가 어디에 있는데요’ 하고 양보가 묻자노인은 대답했습니다.

 

 

“집에 가면 이불을 두르고 신발도 거꾸로 신은 채 나와서 맞아주는 분을 만나게 될 텐데, 그분이 바로 부처시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자 이불을 두른 채 신발을 거꾸로 신고 뛰어나오는 어머니 모습에서 비로소 양보는 ‘집안에 있는 부처’를 견성(見性)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 눈이 멀어 있는 저’를 볼수 있도록 제 눈에 흙을 개어 발라주소서.’(요한 9,6 참조) 그리하여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허락해주소서.

 

 

아이들 속에서 아기 예수를 발견케 하시고, 아내의 눈빛에서 성모님을 느끼게 하시며, ‘가장 보잘것없는 이웃의 형제 하나’(마태 25,40 참조)에게서 주님의 고통을 직시하는 은총을 내려주소서.

 

 

- 성경 인용은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 2012.9.23 서울주보 / 말씀의 이삭 / 최인호 베드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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