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 오피니언

[만물상] 만해대상/한용운-님의침묵/현충사 연못 1장

[만물상] 만해대상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 입력 : 2012.08.13 22:30  

 

 

올해 16회째인 만해대상과 100년 넘은 노벨상은 수상자가 다섯이나 겹친다. 상(賞)의 역사를 저울에 달면 한쪽이 많이 기울지만 노벨상 수상자도 만해대상을 반긴다. 만해대상 수상자 가운데 네 사람은 노벨평화상을, 한 사람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뒤 이 상을 안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는 2004년 만해대상 수상 때 한국에 오려고 애썼다. 건강이 나빠 어려워지자 대신 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다. 달라이 라마도 2005년 만해대상을 기꺼이 수락했다. 그의 서울 방문은 외교적으로 워낙 민감해 이뤄지지 못했다.

이란 여성 변호사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린 에바디가 2009년 만해대상을 받게 됐을 때도 화제였다. 에바디는 여성과 어린이 인권을 얕보는 이슬람법을 고치려 앞장서 왔다. 그녀는 반정부 인사들이 폭행당하는 장면을 비디오테이프에 담아 해외로 퍼뜨렸다. 테헤란에 있는 그녀의 인권 사무실을 비밀경찰이 덮쳐 아수라장이 되기도 했다. 외국을 떠돌고 있는 에바디는 상을 받으러 방한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다. 싸움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그해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여사도 나란히 상을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2003년 만해대상을 받은 것도 상의 국제적 권위를 높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나이지리아 시인 월레 소잉카는 2005년 만해대상을 받았다. 그를 인터뷰하러 런던으로 가던 날 영불(英佛) 해저터널 열차 사고로 다섯 시간이나 늦었다. 그는 오히려 약속에 늦게 온 사람을 위로하며 넉넉한 웃음으로 손을 잡아줬다. 한국에 온 소잉카는 금강산을 다녀와 "만해축전에 북한 시인들이 오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만해대상 수상자는 폭이 넓다. 만해 한용운의 평화 정신과 종교적 신념을 실천에 옮기거나 문학적으로 꽃피운 사람이라면 좌우와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다. 서양인으로 인도에서 빈민 구제 운동을 벌인 2008년 수상자 로카미트라처럼 그냥 흘려 보기 쉬운 사람을 잘 발굴하는 안목이 있다. 그제 올해 만해대상을 받은 아키 라는 캄보디아 정글에 지뢰를 심던 소년병이었다. 서른아홉 살 그는 지금 유명한 지뢰 제거 운동가가 돼 있다.

▶상이 출범했던 때에 비하면 외국인 수상자가 월등 많아졌다. 만해정신이 인류 보편적으로 구현되는 것 같아 반갑다. 상금도 크게 올랐다. 1997년 1000만원이던 한 사람 상금이 1억원이 됐다. 만해대상 수상 후보들은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이 여러 전문가에게 부탁해 1년 내내 고르고 또 고른다. 신문 1단짜리 사람들 기사까지도 챙겨 예비 후보군(群)을 만들고 몇 차례 거르는 일을 반복한다. '위대한 정신'을 이어가는 일도 쉼 없는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축하해 올해 만해대상을 받은 아키 라는 캄보디아 정글에 지뢰를 심던 소년병이었다. 서른아홉 살 그는 지금 유명한 지뢰 제거 운동가가 돼 있다...상금이 1억원이 됐다....만해대상 수상 후보들은 신흥사 조실(祖室) 오현 스님이 1년 내내 고르고 또 고른다... '위대한 정신'을 이어가는 일도 쉼 없는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악한 사람도 있지만...좋은 일 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그 정신이 일파만파 거침없이 뻗어 나가리...ㅎㅎ...^-^

 

 

- 2012년 8월14일 21일째 이어지던 폭염 기세도 꺽이고...17일간의 런던올림픽도 끝나고..."이 또한 지나가리라"... 오전 3시...수산나 - 

 

* 한용운 [, 1879.8.29~1944.6.29]

 

독립운동가 겸 승려, 시인. 일제시대 때 시집《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였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불교유신론》 등이 있다.
본관 청주
만해
별칭 속명 유천, 자 정옥, 계명 봉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충남 홍성
주요수상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주요저서 《조선불교유신론》《님의 침묵》

본관 청주(), 호 만해(·), 속명 유천(), 자 정옥(), 계명 봉완()이다.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에 가서 연곡()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종무원()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불교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님의 침묵은 한용운의 시집으로서 대표시 <님의침묵>을 비롯하여 <최초의 임>, <잠 없는 꿈>,<당신을 보았습니다> 등 90여편의 시가 실려있다. 대부분 불교적 비유와 고도의 상징적 수법으로 쓴 서정시로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과 애족의 정신이 짙게 나타나있다. 1926년에 간행됨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갓슴니다 아아 사랑하는나의님은 갓슴니다
푸른산빗을깨치고 단풍나무숩을향하야난 적은길을 거러서 참어떨치고 갓슴니다
黃金의꽃가티 굿고빗나든 옛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키쓰>의追憶은 나의運命의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의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의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염녀하고경계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리별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리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을깨치는것인줄 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希望 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과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을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의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떼에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 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되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 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아산 현충사 연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