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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보감-채근담-사자소학

명심보감[만사종관 기복자후]채근담[閑中 不放過]/덕수궁 선원전터 설명

[명심보감] 47. 모든 일에 너그러움을 쫓으면

 

明心寶鑑 正己篇


萬事從寬이면 其福自厚이니라.
만사종관 기복자후

모든 일에 너그러움을 좇으면 그 복이 스스로 두터워 지느니라.




從 : 좇을 종 / 寬 : 너그러울 관 / 厚 : 두터울 후

萬事從寬 : 모든 일을 너그럽게 처리함.
其福自厚 : 그 복이 저절로 많아짐.

[채근담] 87. 한가할 때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閑中 不放過, 忙處 有受用.
靜中 不落空, 動處 有受用.
暗中 不欺隱, 明處 有受用.

한중 불방과, 망처 유수용.
정중 불락공, 동처 유수용.
암중 불기은, 명처 유수용.

한가할 때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면 바쁠 때에 도움이 되고,
고요할 때 마음을 허공에 떨어뜨리지 않으면 움직일 때에 도움이 되며,
어두움 속에서도 속이고 숨기지 않으면 밝은 곳에서 도움이 된다.

 


 

閑 : 한가할 한 / 放 : 놓을 방 / 過 : 지날 과 / 忙 : 바쁠 망 / 處 : 곳 처 /
靜 : 고요할 정 / 落 : 떨어질 락 / 欺 : 속일 기 / 隱 : 숨을 은

不放過 : 헛되이 보내지 않음.
受用 : 쓸모가 있음.
不落空 : 마음의 활동을 정지시키지 아니함.
不欺隱 : 속이고 숨기지 아니함.

 덕수궁 선원전 터 안내문

 

덕수굴 선원전터 안내도

 

대한제국의 정궁이었던 덕수궁은 원래 성종(9대)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선조 26)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광해3)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다. 그 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한국 근대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전성기 때의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하는 큰 궁궐이었다. 현재의 미국대사관저 건너편 서쪽에는 중명전을 비롯해 황실 생활을 위한 전각들이 있었고, 북쪽에는 역대 임금들을 제사 지내는 선원전이 있었으며, 동쪽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환구단을 설치하여 황제국의 위세를 과시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이후 궐내각사 일부와 환구단이 철거되었고 이 지역은 대한제국의 상징 공간으로서의 위상을 잃게 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뒤 1920년부터 일제가 선원전과 중명전 일대를 매각하여 궁역이 크게 줄어 들었으며, 1933년에는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반에 공개했다. 이처럼 덕수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원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으나, 임진왜란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격변을 겪은 궁궐로 국난 극복의 상징적 공간이자 그 중심이었다.



작성부서 :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02-771-9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