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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허동현의 모던타임스]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30] 김장철 무·배추 실은 트럭은 通禁도 '열외'였다/배추와 콩 2장

[허동현의 모던 타임스] [30] 김장철 무·배추 실은 트럭은 通禁도 '열외'였다

조선일보/오피니언/허동현 경희대교수 역사학 

입력 : 2012.11.01 22:52

'김장의 전성시대'… 1960년대 김장 시장 모습. 1970년대만 해도 채소 재배 면적에서 30%를 점하던 배추는 2000년대 들어 10% 이하로 줄어들었다.
문화전통에도 시대성이 있다. 우리 식(食)문화를 대표하는 매콤한 김치도 아무리 올려잡아야 300년이 채 못 된 그리 오래지 않은 먹거리다. 17세기에 전래된 고추를 넣어 담근 최초의 김치는 배추김치가 아니라 네모지게 썬 무에 고춧가루 국물을 부어 익힌 나박김치였다. 세로로 쭉쭉 찢어 밥 위에 얹어 먹는 배추김치가 밥상머리에 오른 것은 겹겹의 고갱이가 빼곡히 들어찬 결구(結球)배추가 나온 18세기 이후였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 / 양지에 가가(假家) 짓고 볏짚에 싸 깊이 묻소." 조선 헌종(憲宗) 임금 때인 1843년에 실학자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 겨우내 먹을 김치를 한 번에 담는 김장이 우리 풍속으로 굳어진 것은 다시 한 세기가 더 흐른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인간의 어머니인 대지에서 유리(流離)된 부평초 같은 삶을 사는 도시인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시작한 1950년대 이후, '비교적 값싼 김장, 그래도 담근 가정은 4할 미만'이라는 1952년 11월 25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이 대변하듯,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입동(立冬) 즈음이면 도시의 서민들은 겨우살이 준비에 속을 끓였다. 굶길 밥 먹듯 하던 그때 밥상의 마지노선을 지킬 김장 걱정에 월급봉투가 얇은 가장들은 고개를 숙였고 주부들의 이마에는 주름살이 또 하나 늘어났다. 아파트 입주자들이 김칫독을 어디에 묻어야 할지 고민하던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장철이면 무와 배추를 실어나르는 화물차는 서슬 퍼런 통금도 예외였을 만큼 김장은 중요한 한 해 행사였다.

그러나 산업화의 성공과 함께 우리 밥상에 깃들기 시작한 풍요는 쌀 소비만 줄인 것이 아니다. 식생활의 서구화, 김치전용 냉장고의 등장, 엄동설한에도 푸성귀를 흔하디흔하게 만든 재배기술의 발달, 그리고 김치산업의 발달로 접(100포기) 단위로 담그던 김장 배추김치가 10포기 남짓으로 줄어든 오늘이다. 땅속 깊이 묻은 독 안에서 제대로 익은 배추김치와 살얼음이 살짝 언 동치미의 옛 맛이 그립다.

Bye  17세기에 전래된 고추를 넣어 담근 최초의 김치는 배추김치가 아니라 네모지게 썬 무에 고춧가루 국물을 부어 익힌 나박김치였다...^-^

 

세로로 쭉쭉 찢어 밥 위에 얹어 먹는 배추김치가 밥상머리에 오른 것은 겹겹의 고갱이가 빼곡히 들어찬 결구(結球)배추가 나온 18세기 이후였다...^-^

 

조선 헌종(憲宗) 임금 때인 1843년에 실학자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 겨우내 먹을 김치를 한 번에 담는 김장이 우리 풍속으로 굳어진 것은 다시 한 세기가 더 흐른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비교적 값싼 김장, 그래도 담근 가정은 4할 미만'이라는 1952년 11월 25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이 대변하듯,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입동(立冬) 즈음이면 도시의 서민들은 겨우살이 준비에 속을 끓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김장철이면 무와 배추를 실어나르는 화물차는 서슬 퍼런 통금도 예외였을 만큼 김장은 중요한 한 해 행사였다.

 

그리고 김치산업의 발달로 접(100포기) 단위로 담그던 김장 배추김치가 10포기 남짓으로 줄어든 오늘이다....^-^

 


- 2013년4월15일 월요일...수산나 -

 

 

배추와 콩

 

배추와 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