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국왕 주치의, 대장금/제주도 도두항 6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국왕 주치의, 대장금

경향신문 오피니언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남의가 여인의 살을 주무르니(男醫按摩肌膚) 망측합니다.”(<태종·세종실록>)

1406년, 조선이 여의사 제도를 도입한 까닭이다. “남의의 진맥이 부끄러워 병을 숨겨 죽는 부인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조정은 각 도의 관비 가운데 10~15살 사이의 영리한 동녀(童女)를 뽑아 ‘서울 국비 유학’을 시켰다. 이들은 사서(四書)는 물론 어려운 의학서적까지 독파해야 했다. 3년 연속 ‘불통(不通)’을 받으면 다시 관비로 전락했다. 임금(중종)의 주치의 노릇을 했던 대장금(혹은 장금)은 대표적인 의녀였다.

 

“1544년, 의녀 장금이 말했다. ‘어제 저녁 상(중종)은… 소변은 잠시 통했지만 대변이 불통한 지가 3일이 됐습니다.’ ”(<중종실록>·사진)

중종은 이즈음 “내의원 제조와 (남)의원들은 모두 돌아가라”는 명을 내린다. 오로지 대장금만이 24시간 중종의 곁을 지킨 것이다. 남의는 그저 대장금이 알려주는 왕의 증세에 따라 탕약을 올릴 뿐이었다. 내의원 제조 홍언필은 “어찌 천박한 의녀의 진맥에 의존하시느냐”며 항의했다(1544년). 중종의 ‘장금 사랑’은 유명하다. 1515년, 대장금은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가 원자(인종)를 낳은 직후 승하하자 “ ‘산후조리’에 책임이 있다”고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왕후의 원자 출산에 공이 큰 장금에게 상을 내리지 못할 망정 죄를 줄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제주 출신 의녀 장덕(張德)과 그의 제자 귀금(貴今)은 ‘치과 및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장덕은 충치는 물론 코와 눈병 치료에 뛰어난 의술의 보유자였다. 장덕의 계집종인 귀금이 그 의술을 배웠다.”(<성종실록> 1488년)

성종은 장덕이 죽자 귀금에게 제자 2명을 붙였다. 하지만 귀금은 의술을 전수하지 않았다. 성종은 “고문이라도 받아야 정신차리겠느냐”고 엄포를 놓지만, 귀금이 딱 잡아뗀다.

“전 7살부터 의술을 배워 16살이 되어서야 완전히 습득했습니다. 성심성의껏 가르쳐도,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쩝니까.”

선조로부터 “음탕하다”며 내의원에서 쫓겨난 애종(愛鍾)도 의술만큼은 뛰어났다. 광해군 때인 1612년, 이항복은 “애종의 의술이 가장 좋았는데, ‘끼(氣)가 있다’ 해서 쫓아낸 일이 있다”며 안타까워한 바 있다. 임금과 사대부의 술판에 불려 나가는 의녀들도 많았다.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이 늘 그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들이 조선 최고의 전문직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제주 출신 의녀 장덕(張德)과 그의 제자 귀금(貴今)은 ‘치과 및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다. 
“장덕은 충치는 물론 코와 눈병 치료에 뛰어난 의술의 보유자였다. 장덕의 계집종인 귀금이 그 의술을 배웠다.”(<성종실록> 1488년)

 

임금(중종)의 주치의 노릇을 했던 대장금(혹은 장금)은 대표적인 의녀였다.

중종의 ‘장금 사랑’은 유명하다. 1515년, 대장금은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가 원자(인종)를 낳은 직후 승하하자 “ ‘산후조리’에 책임이 있다”고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왕후의 원자 출산에 공이 큰 장금에게 상을 내리지 못할 망정 죄를 줄 수는 없다”고 일축했다.

“1544년, 의녀 장금이 말했다. ‘어제 저녁 상(중종)은… 소변은 잠시 통했지만 대변이 불통한 지가 3일이 됐습니다.’ ”(<중종실록>·사진)
중종은 이즈음 “내의원 제조와 (남)의원들은 모두 돌아가라”는 명을 내린다. 오로지 대장금만이 24시간 중종의 곁을 지킨 것이다. 남의는 그저 대장금이 알려주는 왕의 증세에 따라 탕약을 올릴 뿐이었다. 내의원 제조 홍언필은 “어찌 천박한 의녀의 진맥에 의존하시느냐”며 항의했다(1544년)

 

선조로부터 “음탕하다”며 내의원에서 쫓겨난 애종(愛鍾)도 의술만큼은 뛰어났다. 광해군 때인 1612년, 이항복은 “애종의 의술이 가장 좋았는데, ‘끼(氣)가 있다’ 해서 쫓아낸 일이 있다”며 안타까워한 바 있다. 임금과 사대부의 술판에 불려 나가는 의녀들도 많았다.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이 늘 그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 2013년 5월13일 월요일...수산나 -

 

[닥터 ‘이지’의 발칙한 치아 얘기] 치과 의녀
[닥터 ‘이지’의 발칙한 치아 얘기] 치과 의녀


의녀(醫女)는 조선시대에 주로 부인들의 병을 치료하고 간병하는 여자 의원이었다. 당시는 사회 통념에 따라 여자들이 함부로 속살을 드러내 보이는 걸 극도로 꺼렸다. 당연히 병이 났을 때 남자가 전부였던 의원에게 진단과 치료를 받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었다.
이런 사정으로 궁궐에서는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지는 궁녀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의녀 제도가 처음 생겼다. 그때가 1406년, 즉 조선 태종 6년이었다. 검교한성부 지제생원사 허도(許道)가 건의하여 제생원(濟生院)에 의녀를 배치하였던 것.

한편,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1456년, 즉 세조 2년에 제주의 안무사(按撫使)가 치과의녀를 뽑아서 서울로 올려 보낸 기록이 있다. 당시 지금의 중국 상하이, 일본의 후쿠오카,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주도 사이에 삼각무역이 이뤄졌던 것을 감안하면 제주도에는 이미 치아를 치료하는 기술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충치로 고통받은 임금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성종실록에 보면 “제주도 의녀 장덕(張德)이 치충(齒蟲)을 잘 잡아내고 코와 눈병을 잘 고치니….”라는 말이 전한다.

수년전,‘국민 드라마’였던 ‘대장금’에서도 장금이 관비로 제주도에 내려갔을 때 그곳에서 명의(名醫)로 이름을 떨치던 의녀 장덕과 운명적으로 해후하는 장면이 다뤄졌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성종실록에 치과의녀 장덕에 대한 언급이 있고, 성종이 충치에 시달렸다는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성종이 치과의녀 장덕에게 치료를 받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이런 기록들에서 보듯 치충(齒蟲)을 잡아내는 것, 즉 선조들이 벌레를 잡아낸다고 표현한 것을 현대 치의학적으로 해석하면 바로 신경치료의 한 과정이다.

이는 치아 속 신경을 빼내는 것(발수·拔髓)을 뜻하는데, 치료시의 통증을 감안하면 아마 마취를 하였을 것이며, 마취는 경혈을 이용한 침술을 적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연산군 이후에 의녀는 천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의관(醫官)과 같은 지위에 오를 수 없었으며,1882년 고종 19년에 의료기관이었던 혜민서가 폐지되면서 의녀제도도 함께 사라졌다. 이후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료기술과 제도가 독일, 미국 등지에서 유입되었으며, 또한 서양의학의 발달과 선교의사들에 의한 서구식 진료가 시도되면서 의녀라는 이름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 의녀제도가 존속되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나라의 의녀는 세계적으로 독특한 지위를 인정받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많다. 세계사를 통틀어 국가적 차원에서 여성에게 의학교육을 시켜 활원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치의학 박사·강남이지치과 원장·www.egy.co.kr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1456년, 즉 세조 2년에 제주의 안무사(按撫使)가 치과의녀를 뽑아서 서울로 올려 보낸 기록이 있다. 당시 지금의 중국 상하이, 일본의 후쿠오카,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주도 사이에 삼각무역이 이뤄졌던 것을 감안하면 제주도에는 이미 치아를 치료하는 기술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충치로 고통받은 임금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성종실록에 보면 “제주도 의녀 장덕(張德)이 치충(齒蟲)을 잘 잡아내고 코와 눈병을 잘 고치니….”라는 말이 전한다.

수년전,‘국민 드라마’였던 ‘대장금’에서도 장금이 관비로 제주도에 내려갔을 때 그곳에서 명의(名醫)로 이름을 떨치던 의녀 장덕과 운명적으로 해후하는 장면이 다뤄졌던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성종실록에 치과의녀 장덕에 대한 언급이 있고, 성종이 충치에 시달렸다는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성종이 치과의녀 장덕에게 치료를 받았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 2013년 5월13일 월요일...수산나 -

 

제주도 도두항 1

 

제주도 도두항 2

 

제주도 도두항 3

 

제주도 도두항 4

 

제주도 도두봉 전망대

 

제주도 도두봉 전망대...'도원봉수대터' 안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