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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응답하라, 1937/EBS 영상자료 6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응답하라, 1937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소정방은 백제 백성 1만2807명을 끌고 갔다.”(<삼국사기>)

“당은 고구려인 3만8200호를 대륙 곳곳으로 이주시켰다.”(<구당서>)

 

 

백제·고구려의 멸망 이후 엄청난 수의 백성들이 강제이주됐다는 기록이다. 발해는 더했다. 요(거란)는 발해 멸망(926년) 후 ‘9만4000여호를 랴오량(遼陽)으로 강제이주시킨 뒤 옛 마을을 폐쇄’시킨다(<요사>). 1호당 5명이라면 47만~50만명이 강제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꼭 1011년이 훌쩍 지난 1937년 9월9일 밤, 연해주 고려인을 가득 실은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한다. 고려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규정한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사진) 국권을 잃고, ‘조선백성’이 아닌 ‘일본신민’으로 취급받았으니 이렇게 힘없이 휘둘린 것이다. 소련은 이미 2500여명의 고려인 지도층을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총살시켰다. 그 해 12월까지 이주열차를 탄 고려인의 수는 18만명에 이르렀다. 3개월 만에 바이칼호 동쪽의 고려인 씨가 마른 것이다. 이주열차는 그야말로 지옥열차였다. 화물차 1량을 4칸으로 나누고 칸마다 4가족을 밀어넣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원래 유리창 하나 없는 차창은 널빤지로 가렸다. 저녁이 되면 기차 안은 꽁꽁 얼어붙었다. 출산소동이 벌어지고 겁탈과 식량 약탈이 자행됐다. 동승한 비밀경찰이 체포한 10여명은 끝내 행방불명됐다. 전염병이 돌면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연고가 없는 시신은 열차 밖으로 던져졌다. 가족이 있는 경우 철길 근처에 시신을 서둘러 묻었다.

6000㎞를 달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내동댕이쳐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연명해야 했다. 독거미와 독사, 모기떼에 시달렸다. 늪의 물을 먹고 쓰러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1935~38년에 태어난 고려인이 거의 없다는 통계가 비극을 웅변해주고 있다. 원로 언론인 김호준씨의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주류성)을 읽으면서 과거의 역사를 더듬어본다. 역사서에는 수만~수십만명씩 피눈물을 흘리면서 고향을 떠났을 백제·고구려·발해 백성들의 사연은 담겨 있지 않다.

“~북두는 말없이 지평선에 떨어지며/ ~아! 아직도 동녘은 껌껌나라/ 어서 동이 트고 날이 밝아야~”

1938년 강태수가 발표한 시(밭 갈던 아씨에게)란다. ‘연해주의 향수를 자극했다’는 죄로 21년이나 유배됐다니…. 필시 옛 망국의 백성들도 ‘지평선 너머 떨어지는 북두와 컴컴한 동녘을 보면서’ 고향땅을 떠났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1000년을 돌아왔다.

 


 1937년 9월9일 밤, 연해주 고려인을 가득 실은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한다. 고려인들을 ‘일본의 앞잡이’로 규정한 스탈린의 강제이주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사진)

 

소련은 이미 2500여명의 고려인 지도층을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총살시켰다. 그 해 12월까지 이주열차를 탄 고려인의 수는 18만명에 이르렀다. 3개월 만에 바이칼호 동쪽의 고려인 씨가 마른 것이다.

 

6000㎞를 달려 중앙아시아 초원지대로 내동댕이쳐진 고려인들은 토굴을 파고 연명해야 했다. 독거미와 독사, 모기떼에 시달렸다. 늪의 물을 먹고 쓰러지는 아이들이 부지기수였다. 1935~38년에 태어난 고려인이 거의 없다는 통계가 비극을 웅변해주고 있다.

- 2013년 5월13일 월요일...수산나 -

 

 

EBS 영상자료 1...17만명...연해주로 이주한 한인 숫자...^-^

 

EBS 영상자료 2...연해주에 사는 한인들이 일본의 첩자...^-^

 

EBS 영상자료 3...

 

EBS 영상자료 4

 

EBS 영상자료 5

 

EBS 영상자료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