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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김부식의 막말 퍼레이드/낙안읍성 장승 5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김부식의 막말 퍼레이드

경향신문/오피니언/이기환 문화체육 에디터 

 

“여치(여태후)와 무조(무측천)는 유약한 임금을 만나 천자처럼 행하였다.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하다. 어찌 늙은 할멈이 정사를 처리하는가.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선덕여왕’ 편을 쓴 뒤 요즘 같으면 탄핵받을 ‘막말’을 해댄다. 그것도 역사서에…. 김부식의 말처럼 여치와 무조는 얼핏 보면 질투심에 사로잡힌 ‘극악무도한 여인네’일 뿐이다. 여치는 남편(한고조 유방)의 애첩(척부인)을 ‘사람돼지(人체)’로 만드는 패악을 부렸다.(기원전 195년) 척부인의 눈과 귀를 파고 팔다리와 혀를 자른 뒤 돼지우리에 처넣은 것이다. 남편 사후에는 여씨(인척)를 대거 기용하고 황제를 수시로 갈아 치웠다. 무조는 더했다. 핏덩이 친딸을 죽인 뒤 왕 황후에게 뒤집어씌웠다. 천신만고 끝에 황후에 오른 뒤 여치의 길을 걷는다. 전 황후 왕씨 등을 곤장 100대씩으로 다스린 뒤 손발을 자른다. 그런 뒤 술독에 ‘뼈가 취(醉)하도록’ 담근 뒤 시신을 참(斬)한다. 아들들을 잇달아 퇴위시킨 뒤 690년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 무조는 ‘남자’ 없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신하는 “내 성기가 크니 폐하(무조)를 받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니…. 하지만 여태후(여치)와 무측천(무조)의 시대는 ‘태평성대’였다. 사마천은 여태후를 ‘황제대우’로 높이면서 호평했다.

 


“천하는 태평했다. 형벌을 가하는 일도 드물었다. 백성들의 의식은 나날이 풍족해졌다.”(<사기> ‘여태후 본기’)

무측천(그림·책과함께 제공)도 ‘백성들을 귀히 여기며 천하를 근심했던’ 황제로 평가됐다. 과거를 개혁하여 참신한 인물을 발굴하고, 만백성의 상소를 받아 언로를 뚫었다. 3000여가지의 형벌을 없애기도 했다. 국고가 가득 찼다. 1966년 말, 류사오치(劉少奇)의 아내 왕광메이(王光美)가 홍위병 앞에 끌려 나온다. 탁구공으로 만든 목걸이를 두른 채 악명 높은 ‘제트비행기’ 고문을 받는다. ‘미국의 스파이’라는 엄청난 죄목을 뒤집어쓴 채…. 마오쩌둥(毛澤東)이 “살려두라”는 명을 내리지 않았던들 척부인이나 왕 황후·소숙비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제2의 여태후, 제2의 무측천을 꿈꿨던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이 꾸민 일이었다. 권력을 향한 야망은 두 사람과 같았다. 하지만 장칭은 두 사람의 덕목인 ‘민심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4인방 재판을 받으며 민심을 얻지 못한 스스로를 책하기보다 남편에게 책임을 돌렸다. “난 마오쩌둥의 개였다. 그가 물라면 물었다”고….

  여치는 남편(한고조 유방)의 애첩(척부인)을 ‘사람돼지(人체)’로 만드는 패악을 부렸다.(기원전 195년) 척부인의 눈과 귀를 파고 팔다리와 혀를 자른 뒤 돼지우리에 처넣은 것이다. 남편 사후에는 여씨(인척)를 대거 기용하고 황제를 수시로 갈아 치웠다.

 

무조는 더했다. 핏덩이 친딸을 죽인 뒤 왕 황후에게 뒤집어씌웠다. 천신만고 끝에 황후에 오른 뒤 여치의 길을 걷는다. 전 황후 왕씨 등을 곤장 100대씩으로 다스린 뒤 손발을 자른다. 그런 뒤 술독에 ‘뼈가 취(醉)하도록’ 담근 뒤 시신을 참(斬)한다. 아들들을 잇달아 퇴위시킨 뒤 690년 스스로 황위에 오른다. 무조는 ‘남자’ 없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신하는 “내 성기가 크니 폐하(무조)를 받들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니….

 

하지만 여태후(여치)와 무측천(무조)의 시대는 ‘태평성대’였다. 사마천은 여태후를 ‘황제대우’로 높이면서 호평했다.

 


- 2013년 5월13일 월요일...수산나 -

 

 

낙안읍성 장승 1

 

낙안읍성 장승 2

 

낙안읍성 장승 3

 

낙안읍성 장승 4

 

낙안읍성 장승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