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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오피니언

25일 작가 최인호(68·세례명 베드로)의 선종-10개 칼럼(2013.9.26.목)

 

2013-09-25 오후 9:28:37조회수  71추천수  

작가 최인호 선종, 천주교 일제히 애도



【서울=뉴시스】김정환 기자 =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70) 대주교가 25일 작가 최인호(68·세례명 베드로)의 선종을 애도했다.

염 대주교는 “최인호 베드로 작가님은 자신의 아픔까지도 주님께 내어드리고 글로써 이를 고백했던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셨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작가이자 모범적인 가톨릭 신자였던 작가님의 선종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빈소에 조화를 보내 유족을 위로했다.

고인과 친분이 깊은 전임 서울대교구장 정진석(82) 추기경도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최인호(베드로) 작가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거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을 건네시던 선생님을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친 최 작가님께서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소 늘 바라고 기도하신대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정 추기경은 지난 23일 병실을 찾아가 병자성사, 즉 병자나 죽을 위험에 있는 환자가 고통을 덜고 구원을 얻도록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ace@newsis.com

 

[오늘의 세상] '별들의 고향' 찾으러 간 예순여덟 靑年작가

조선일보/문화/어수웅기자 입력 : 2013.09.26 02:55 | 수정 : 2013.09.26 10:18

 

[겨울나그네·고래사냥·商道… 소설가 최인호의 발자취]

-"작가로 죽겠다"던 다짐처럼…
침샘癌 5년 투병… 지인 "며칠 전까지도 새 책 머리말 고민했는데"
-70년대 첫 100만부 作家
'별들의 고향' 조선일보 연재 선풍적 인기… 영화도 나와

"내가 말했잖아. 환자론 안 죽어. 작가로 죽겠다고 했잖아."

1년 전 기자를 만났을 때, 수술과 함암 치료로 투병 중이던 작가 최인호씨는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그렇게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다짐은 지켜졌다. 투병 중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전작 장편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완성했던 작가는, 죽기 전까지도 천주교 서울대 교구 주보에 연재했던 '말씀의 이삭' 코너를 책으로 묶기 위해 정리 중이었다고 했다. 작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도서출판 여백의 김성봉 대표는 "추석 이틀 전까지도 괜찮으셨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입원했다"면서 "마지막까지도 새 책에 쓸 머리말을 준비 중이었다"고 전했다.

암 투병 중이던 2010년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에서 장편소설을 집필할 당시의 최인호. 그는“문학은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받아쓰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사진작가 백종하
임종은 부인 황정숙(68)씨와 큰딸 다혜(44)씨가 했다. 마지막 유언을 묻자,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건강했을 때 그의 트레이드 마크 중 하나는 "아이 러브 유(I love You)"라는 활기찬 인사. 마지막 순간 아내와 딸이 "아이 러브 유"라고 인사를 건네자, 작가는 "미 투(Me too·나도 사랑해)"라고 받았다고 한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그는 영원한 청년 작가였다. 특히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에 섰다. 세련된 문체로 '도시 문학'의 지평을 넓혔고, 그 세대를 자신의 연대로 평정했다. 1967년 22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뒤 28세 때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했다. 말 그대로 선풍적 인기였고, 소설 100만부 시대를 연 것도 최인호였다. 단지 소설뿐만 아니라 영화, 대중음악 작사, 방송 다큐멘터리 등 작가의 활동은 전방위로 뻗어갔다. 당시 그의 소설은 물론 원작이나 시나리오를 통해 그가 관여한 영화는 '무조건' 흥행에 성공한다는 신화를 낳았다.

1980년대에도 작가는 '불새' '지구인' '적도의 꽃' '길 없는 길' 등을 발표했다. 이 시기 최인호 문학은 일대 전기를 맞는다. 1970년대 도시적 모더니티의 진경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던 최인호 문학은 1987년 가톨릭 세례를 받은 뒤 지고(至高)와 영원(永遠)의 세계로 이주한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생산력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작가는 2008년 침샘암 발병 이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이 병이 고약한 이유는 식사와 발성이 힘들다는 점. 침샘에 문제가 생겨 침이 나오지 않고, 목에 난 혹이 기도와 식도를 막아 몸무게는 47㎏까지 추락했다. 사람 만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다. 그 투병의 와중에 작가는 병석에서 200자 원고지 1200장짜리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완성한다. 단 두 달 만의 집필이었다고 했다. 그는 당시 기자와 만나 "진짜 문학은 남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쓸 때 탄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서 "정말 고통스러웠지만 하루하루가 축제였다"고 잘 나오지 않는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작가 최인호가 남긴 문화적 유산들. 위에서부터 소설‘별들의 고향’, 동명 영화의 한 장면, 영화‘겨울 나그네’, 소설‘상도’. 최인호 연보.
작가 최인호가 남긴 문화적 유산들. 위에서부터 소설‘별들의 고향’, 동명 영화의 한 장면, 영화‘겨울 나그네’, 소설‘상도’. /조선일보 DB
2010년에는 6개월 남았다는 담당 의사의 선고까지 들었지만, 그는 그 최종 선고를 3년 넘게 연장하며 '작가'로 죽겠다는 마지막 다짐을 실현했다.

"솔직히 쓰고 싶었어. 뭔가 보여주고 싶은 게 아니라, 작가로서, 내가 생명이 있음을 스스로 노래하고 싶더라고. 이 소설의 독자는 감히 얘기하는데, 나 하나였어. 그런데 나 혼자만의 독자인 나에게, 이 소설이 맘에 들어. 그래서 기분이 좋아."

투병 중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2011)를 완성했을 때, 작가가 기자에게 털어놓은 고백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작품 중에서 제일 잘 쓴 작품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정직하게 쓴, 가장 자랑스러운 작품이라고 했다.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는, 그렇게 환자가 아니라 작가로 세상을 떠났다.

 

 [오늘의 세상] "문단에 빛나는 재능…" "거친 삶 속에서도 희망 건네던 분이었는데…"

조선일보/문화/유석재 기자, 변희원 기자 /입력 : 2013.09.26 02:55

 

문화계 애도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 알았더라면 실없는 농담 대신 속 깊은 얘기를 더 나눌 걸 그랬다."

이장호 감독은 한숨을 쉬었다. 최인호의 소설 '별들의 고향'을 영화로 만들었고 초·중·고교를 함께 다닌 이장호 감독은 25일 그의 타계 소식에 "내가 부탁했던 시나리오를 여관에서 쓰는데 여관비를 구하지 못해 쩔쩔맸던 생각이 난다"며 "내가 아는 작가 최인호는 어릴 땐 조숙하고 나이 먹어선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었다"고 했다.

소설가 이문열씨는 "작년에 만났을 때는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았는데 의외의 소식"이라며 "투병 중에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기 때문에 좋았던 시절 그의 문체를 계속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가톨릭 입문기 '뒤늦게 만나 사랑하다'(2007)를 고인과 함께 낸 소설가 오정희씨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들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오씨는 "신앙의 생활화라고 할 만큼 신앙인으로서도 훌륭했고, 유쾌하고 행복한 분이었는데 그렇게 가셔서 애석하다"며 "젊은 나이에 쓴 작품으로 (문단에) 상당한 충격을 가져왔고, 빛나는 재능을 보여준 분이었다"고 문학적 업적을 기렸다.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은 "거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을 건네던 선생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감출 수 없다"고 애도했다. 투병 중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연재한 '말씀의 이삭'에 대해선 "당신의 글은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쉼이자 힘이었고 깊은 감동이었다"고 했다. 정 추기경은 앞서 지난 23일 고인이 입원한 서울성모병원 병실을 찾아 병자성사(환자가 고통을 덜고 구원을 얻도록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성사)를 집전했다.

최인호 원작 소설을 뮤지컬로 옮긴 '겨울나그네'(1997)와 '몽유도원도'(2002)를 연출한 윤호진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는 '몽유도원도' 재공연을 준비하다가 고인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생전의 고인으로부터 '호돌이형'으로 불렸던 윤 대표는 "전에 함께 식사를 할 때 입맛이 없었을 텐데도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살겠다는 의지가 남달랐다"며 "나아진 '몽유도원도'를 못 보고 가다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망가져도 괜찮다… 이 땅에 낭만을 뿌렸던 사나이

조선일보/문화/박은주 기자/입력 : 2013.09.26 02:57 | 수정 : 2013.09.26 10:47

[70년대 청년문화 이끈 최인호標 소설과 영화]

청춘의 校歌였던 '고래사냥'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아직도 회자되는 '별들의 고향'… 호스티스·거지 등 '루저'에 초점

지금의 50·60대가 지난 1970년대를 '낭만의 시대'로 기억하고 있다면 그 일부는 최인호 덕분일 것이다. 최인호(1945~2013)는 문학상을 많이 수상하지 못했고, 버젓한 훈·포장을 받은 적도 없지만 당시 청춘들에겐 거의 최고의 인기 작가였다. 그의 소설, 그것을 토대로 한 영화는 한국 '청년 문화'의 상징이었다.


	1971년‘타인의 방’을 쓸 당시의 최인호.
1971년‘타인의 방’을 쓸 당시의 최인호. 액자 위에 외손녀가 쾌유를 빌며 미소를 그려넣은 조약돌이 놓여 있다. 작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자신의 사진 중 하나다. /조선일보 DB
잘살기 위해 모두가 오(伍)와 열(列)을 맞춰야 한다고 믿었던 1970년대. 그 시대를 살았던 팔팔한 청년들에게 이 '잘살자는 압박'은 때로 숨 막히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른 한손에는 '망가질 자유'를 갖고 싶어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은 그런 이들에게 "좀 망가져도 괜찮다"고 해준 거의 최초의 속삭임이었다.

1973년 28세의 청년 작가 최인호가 신문에 연재한 소설 '바보들의 행진'은 2년 뒤 같은 제목의 영화로 개봉하며 한국 '청년 문화'의 아이콘이 됐다. 최인호의 삐딱한 감수성과 네 살 연상 감독 하길종의 사회적 시선이 어우러지며, 영화는 당시 청년들에겐 일종의 복음이 됐다. 영화에 쓰인 송창식의 OST '왜 불러' '고래사냥'은 '청춘의 교가(校歌)'였다. 지적 허영심이 강한 철학과 대학생 병태, 전형적인 불문과 여대생 영자처럼 그저 삶을 즐기려던 청춘마저도 '유신'이라는 '저기압 사회'의 압박에 놓인다는 설정이 남의 얘기 같지 않았던 것이다. 데니스 호퍼 감독의 영화 '이지 라이더'(1969)가 미국 히피 문화의 휘슬을 불었다면, 한국에서 히피 정서를 퍼뜨린 것은 '바보들의 행진'이었다.


	최인호 원작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최인호 원작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영화 '별들의 고향(1974·감독 이장호)'은 개봉 때만 해도 몸 파는 여자(안인숙)와 화가(신성일)의 불행을 다룬 통속 멜로로 보였다. "경아,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같은 대사는 아직도 회자된다. 그러나 최인호의 원작소설은 사회학의 돋보기로 볼 때 더 많은 의미를 갖게 됐다. 도시화가 만든 새로운 직업군인 '호스티스'의 삶과 정서에 초점을 맞추며 도시의 '하부'가 어떻게 꿈틀대는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마이너리티의 삶'을 포착하는 것은 최인호의 특기였다. 원작 최인호―감독 배창호 콤비가 83~85년 한 해 한 편씩 선보인 영화에서 '사회적 루저'를 관찰하는 재주는 더 빛났다. 지식인 백수의 훔쳐 보기 욕망을 그린 '적도의 꽃'(1983), 비렁뱅이와 창녀, 대학생의 여행기 '고래사냥'(1984), 미국 불법이민자의 몸부림을 그린 '깊고 푸른 밤'(1985)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자 '누추한 삶'에 관한 백과사전이었다. 결국 최인호를 잃는다는 건 한국 대중문화에 '영구 결번'이 생겼다는 의미다.

TV조선 화면 캡처

 

 

"저는 엿가락… 엿장수이신 주님 뜻대로 하소서"

조선일보/문화/허윤희 기자/입력 : 2013.09.26 02:57 

천주교 週報에 암투병기 연재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소설가 최인호는 지난해 1월 1일부터 9주간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의 '말씀의 이삭' 코너에 암투병기를 연재했다. 죽음 앞에 선 두려움과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전한 연재 글은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1월 22일자 '엿가락의 기도'라는 글에선 자신을 목판 위에 놓인 엿가락이라 칭하며, 가위로 자르든 엿치기를 하든 엿장수 맘대로 하시라고 기도한다.

서울대교구의 간곡한 요청으로 7월 1일자부터 재개한 연재물에선 투병기를 넘어 삶과 종교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았다.

작가는 연재물의 일부를 올해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펴낸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에 실었고, 나머지 글들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었다.

 

머리말만 남겨놓은 채 … 책 쓰다 떠난 '영원한 문청'

[중앙일보] 입력 2013.09.26 00:25 / 수정 2013.09.26 09:48

고2 시절 신춘문예 가작 입선
4년 뒤 당선 … 응모 때 소감 동봉
70년대 청년 저항문화의 아이콘
"주님을 봤다, 됐다 가자" 마지막 말

암세포도 최인호의 창작열을 막지 못했다. 그가 2010년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 작품을 구상하며 걷고 있는 모습이다. 고인은 “소설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다”며 암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이듬해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했다. [사진 백종하]
25일 타계한 소설가 최인호는 영원한 ‘문청’(문학청년)이었다. 생의 마지막까지도 펜을 놓지 않았다. 가톨릭 서울주보에 연재했던 ‘말씀의 이삭’에 나오는 작가·화가 등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성경 구절과 연결한 책을 집필 중이었다. 머리말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고인은 이날 오후 4시쯤 병석에서 딸 다혜에게 “하느님이 오셨다. 주님을 봤다. 됐다. 가자”라고 했다. 죽음을 마주한 자리에서도 의연했던 그의 평소 모습 그대로였다.

 최씨는 조숙한 천재였고 삐딱한 반항아였다. 지난 50년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소설가로 본격 활동하기 시작한 1970년대 이후 작품 판매량과 작가 개인에 대한 관심에서 다른 문인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였다.

 73년 장편 『별들의 고향』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신드롬을 일으켰다. 평범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첫사랑에 실패한 후 타락해 남자들 품을 전전하다 끝내 자살에 이르는 주인공 경아의 이야기는 당대의 분방한 성 풍조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를 문제 삼았다. 한때 경아는 술집 여급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고인이 처음부터 대중작가로 분류된 건 아니었다. 서울 토박이로 서울중·고를 나온 그는 연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패기만만한 문청이었다. 고교 2학년 때인 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단편 ‘벽구멍으로’가 가작 입선에 그치자 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응모 때는 ‘당선 소감’을 함께 보낼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등단 이후 ‘술꾼’ ‘타인의 방’ 등 문제작을 쏟아내자 60년대 김승옥의 감수성의 혁명을 이어 갈 작가라는 상찬도 받았다. 세련된 문체로 도시문학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았다.

 ‘어느새 그(최인호)는 미니스커트, 송창식의 통기타, 칸막이가 있는 생맥주 집 등과 함께 70년대 저항적인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돼 있었다.’(장석주 『나는 문학이다』 )

 하지만 대중적 사랑과 문단의 지지라는 행복한 결합은 오래가지 않았다. 순수문학 진영이 그를 ‘호스티스 작가’ ‘퇴폐주의 작가’로 낙인찍자 평론가 김현에게 "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라고 한 뒤 평단과의 인연을 끊은 사건은 유명하다.

 2011년 암 투병 중 쓴 장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출간 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나는 체질적으로 어디 소속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반체제가 아니라 ‘비체제’다.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 수상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문단이 작가의 고독을 일시적으로 달래 줄 수는 있지만 작품을 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당시 내 철학이 그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단을 등진 그는 독자를 직접 상대하는 길을 택했다. 『잃어버린 왕국』(1986), 『왕도의 비밀』(1995) 등 역사소설, 한국 근대불교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 선사의 일대기를 파헤친 『길 없는 길』, 조선 순조 때 거상 임상옥의 일대기를 다룬 장편 『상도』 등 시대 감각에 맞는 작품을 잇따라 내놓았다.

 2008년 발병한 침샘암도 그의 창작열을 꺾지는 못했다. 75년부터 월간 ‘샘터’에 연재해 왔던 소설 ‘가족’을 2010년 연재 시작 35년 만에 402회로 끝마쳤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항암치료로 빠진 손톱에 고무골무를 끼고, 빠진 발톱은 테이프로 감고, 구역질이 날 때마다 얼음조각을 씹으며 두 달 만에 완성했다.

 고인은 87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가톨릭에 귀의했다. 하지만 그의 변치 않는 신앙은 문학이었다. 생전에 글 잘 쓰는 후배들을 언급하며 “처음에는 닮은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다가 나중에는 업어 주고 싶다”고 했다.

 고인이 아꼈던 소설가 김연수씨는 “도회적인 단편과 이야기가 풍부한 장편을 모두 아우른 작가였다. 대단한 이야기꾼이 사라져서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별들의 고향’을 연출한 이장호 감독은 “고인은 영화에서도 변화를 일으켰다. 저나 배창호나 고인의 작품을 영화로 만든 사람들의 클럽이다. 한 시대가 갔다”며 안타까워했다. 영화 ‘고래사냥’의 배창호 감독은 25일 밤늦게 주연배우 안성기씨와 함께 장례식장을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28일 고인의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가톨릭 정진석 추기경도 이날 애도 글을 남겼다. 정 추기경은 “삶을 통찰하는 혜안과 인간을 향한 애정이 녹은 글을 써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였다. 이제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도한다”고 밝혔다.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도 조의를 표했다. 유족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부의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

신준봉·하현옥 기자

 

소설 50년 최인호 '별들의 고향'으로

[중앙일보] 입력 2013.09.26 00:41 / 수정 2013.09.26 09:48

침샘암 5년 투병 끝 별세

소설가 최인호(사진)씨가 25일 오후 7시2분 서울성모병원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68세. 지난 5년간 침샘암으로 투병해 왔던 그는 갑작스레 찾아온 호흡곤란으로 추석인 19일 입원한 지 엿새 만에 숨을 거뒀다.

 최씨는 지난 반세기 한국 현대문학과 호흡을 함께했다. 서울고 2학년이던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등단했다. 장편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등은 영화로도 인기를 끌었다. 역사소설 『상도』 『해신』 등은 TV 드라마로 제작됐다.

 월간 ‘샘터’에 연재한 소설 『가족』은 75년부터 2010년 초까지 35년간 최장기 연재 기록도 세웠다. 고인은 2008년 침샘암이 발병해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창작열을 불태웠다. 올봄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과 장편 『할』을 발표했다. 현대문학상·이상문학상·한국가톨릭문학상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황정숙씨와 1남1녀.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 02-2258-5940. 발인은 28일 오전 7시30분. 이날 오전 9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가 열린다. 장지는 성남시 분당메모리얼파크.

하현옥·김효은 기자 

 

故 최인호 "환자 아닌 작가로 죽고 싶었다"

[뉴스1] 입력 2013.09.26 01:36 / 수정 2013.09.26 09:49

교통사고·암 투병에도 천주교 주보 기고 이어가

소설가 최인호(68)씨가 5년간의 침샘암 투병 끝에 별세한 25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빈소가 마련돼있다. 고인은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등단했으며 소설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겨울나그네' 등을 펴내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교통사고와 암 투병에도 종교적 신념이 담긴 글을 계속해서 써내려간 '천생' 작가 고(故) 최인호가 천상의 작가가 됐다.

1970년대 문학의 선두 주자였던 소설가 최인호가 등단 50주년을 맞는 해 작고했다. 최인호는 5년간 침샘암과 투병한 끝에 25일 저녁 7시10분 향년 68세로 별세했다.

세례명 베드로를 가진 가톨릭 신자 최인호는 1993년 1월3일부터 2012년 9월30일까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보에 '말씀의 이삭'을 정기적으로 기고했다.

이 과정에서 연재 중단 기간이 있기도 했다. 최인호는 1993년 1월부터 1995년 12월31일까지 기고를 마치고 작가 고 박완서에게 펜을 넘겼다. 이때 연재된 글로 성서묵상집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등을 출간했다.

최인호는 1996년11월24일 서울주보 1000호 특집에 글을 발표한 뒤 1998년1월4일부터 다시 정기 기고를 시작했다. 이 기고는 1999년 12월26일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중 1999년 3월28일부터의 기고는 '이삭'이라는 꼭지 아래 실렸다. 그로부터 13년 뒤인 2012년 1월1일 주보에는 '말씀의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최인호의 글이 게재됐으며 2월26일 잠시 중단된 뒤 7월1일부터 9월30일까지 계속됐다.

최인호는 1994년 3월21일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와 다리를 다쳤지만 주보 기고를 멈추지 않았다. 최인호는 그해 4월10일 '우리 주님 만세!'라는 글에서 교통 사고 상황을 묘사하며 "지금 나는 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누워 있으면서도 제일 걱정하였던 것은 주보에 실리는 '말씀의 이삭'이었습니다"라고 열의를 드러냈다.

최인호는 지난해 신정 발표된 주보에서 암 투병 소식을 알렸다. 그는 자신의 투병기를 '고통의 축제'라고 부르며 "고통의 피정 기간 동안 느꼈던 기쁨을 여러분에게 전하고 주보의 지붕 위로 올라가 외치려고 합니다"라고 밝혔다.

이 기간 기고문에는 병마와 싸우는 과정이 담겨 있다.

1월29일 글에서는 "지금 이 순간 병상에 누워계신 환자 여러분, 바로 이곳에서 온갖 고통과 어려움으로 신음을 하고 있는 내 다정한 이웃 여러분.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를 죽일 병은 없습니다. 감히 바이러스가, 암세포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합니다"라면서 종교적 신념을 갖고 투병 중임을 알렸다.

이어 최인호는 "우리를 죽이는 것은 육체를 강한 무기로 삼고 있는 악입니다. 절망, 쾌락, 폭력, 중독, 부패, 전쟁, 탐욕, 거짓과 같은 어둠이 우리의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한꺼번에 죽이는 것입니다"라고 썼다.

2월5일 기고문에서 최인호는 "피하고 잊는다고 해서 고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라며 고통을 직시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최인호는 "우리가 겪는 이 들판에서 밤을 새우는 추위는, 이 병은, 이 슬픔과 고통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쁜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듣기 위한 특별한 은총이니, 지금 여기에서 무리를 해서라도 일어섭시다"라고 글을 이었다.

최인호는 그해 2월12일 주보에서 "5년에 걸친 투병생활 중에 제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는 허기였습니다"라며 "항암치료로 지칠 대로 지친 육체와 황폐한 정신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불가능한 희망이었습니다"라고 창작을 그리워했다.

그는 "저는 제가 작가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제일 슬펐습니다. 저는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문학을 향한 꺼지지 않는 열망을 드러냈다.

그 다음주인 2월19일 주보에서는 2011년 동리문학상을 수상한 장편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의 집필 배경을 공개하기도 했다.

최인호는 "2010년 10월 27일, 마침내 저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습니다"라며 "항암치료로 빠진 손톱에는 약방에서 고무 골무를 사다 끼우고, 빠진 발톱에는 테이프를 칭칭 감고 구역질이 날 때마다 얼음 조각을 씹으면서 미친 듯이 하루에 20에서 30매씩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원고를 썼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12월 26일, 정확히 두 달 만에 1200매의 전작 장편소설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라고 투병 중 소설을 완성하게 된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 후 지난해 2월26일 '주님, 제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기도하여 주소서'라는 기고문에서 기도 성사 여부와 관계 없이 하느님을 믿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뒤 연재를 잠시 중단했다. 그는 같은 해 7월1일 다시 글을 썼다.

최인호는 9월30일 마지막 기고문인 '말과 생각과 행위의 삼위일체'라는 제목의 글에서 중세 유럽의 대표적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야기한 삼위일체를 언급했다.

최인호는 이 글에서 "렌즈로 햇볕을 모아 초점을 맞추면 불꽃이 일어나 종이를 태울 수 있듯이 분열된 제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오직 '사랑'의 초점으로 집중되어 불타오르게 하소서"라면서 "저의 말이 곧 저의 생각이며, 저의 생각이 곧 저의 행동이며, 저의 행동이 저의 말임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오직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갈 수 있도록 주님 제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종교적 바람을 밝혔다.

 

김홍신 "많은 이들 마음 속에 최인호는 영원"

[뉴스1] 입력 2013.09.26 01:09 / 수정 2013.09.26 09:50

배우 안성기 "더 좋은 글 남길거라 기대했는데"

소설가 최인호(68)씨가 5년간의 침샘암 투병 끝에 별세한 25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빈소가 마련돼있다. 고인은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등단했으며 소설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겨울나그네' 등을 펴내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는 형은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야."

25일 오후 7시10분 세상을 떠난 소설가 최인호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는 늦은 시간에도 고인을 기리기 위한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고인의 별세 직후 빈소를 찾은 소설가 김홍신씨는 고인을 '형'이라 부르며 붉어진 눈시울로 고인을 회상했다.

김홍신씨는 "1980년대 초반 형이 워낙 유명하기에 소설가들끼리 비판을 많이 했다. 어느날 형과 만나게 된 후 마음에 걸려 '평소 형을 많이 비판해 괴롭다'고 이야기하니 형은 '그러니까 김홍신이지. 우린 이제부터 형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김씨는 그때부터 고인과 형제지간처럼 지내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고 했다. 그는 "서로의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서로 아들 결혼식에 주례를 서주자고 약속했었다"고 전했다.

김씨는 생전 고인과의 특별했던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지난해 여수로 향하던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 김씨는 고인과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김씨는 "비행기문이 열리기 전까지 2~3분 동안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며 "공항 로비로 나오자 형은 내게 '걱정마, 나는 괜찮아'라고 하며 내 볼에 뽀뽀를 하더라. 그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말했다.

김씨는 그길로 이 일화에 대한 수필을 작성했다. 수필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고인은 김씨에게 "사내인 내가 너에게 뽀뽀한 일을 이야기로 쓰면 어쩌냐"며 껄껄 웃었다고 했다.

김씨는 이 같은 일화를 전하며 "'미안하니까 밥 살게'라고 말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고인을 '뭘해도 집중력이 좋은 사람', '섬세한 여성같은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그러나 무언가에 몰두하거나 결단을 내릴 때는 '매서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평소 남한테 자신의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사람이었기에 (암투병 동안) 더욱 힘들었을 거다"며 "전화로 이야기할 때 목소리가 좋지 않음에도 언제나 나를 위로했다. '나 때문에 걱정마'라고 했기에 더욱 (고인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작가로서의 최인호에 대해서 김홍신씨는 "대단히 위대한 작가"라며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작가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생전에 형은 '인간예수'를 쓰고 나는 '인간부다'를 쓰기로 약속했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고인에게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라며 "형은 죽었지만 가족과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는 영원히 살아있는 존재다. 형, 죽은거 아니다"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소설가 최인호(68)씨가 5년간의 침샘암 투병 끝에 별세한 25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빈소가 마련돼있다. 고인은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등단했으며 소설 '별들의 고향', '고래사냥', '겨울나그네' 등을 펴내 올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이날 저녁 빈소를 찾은 배우 안성기씨는 "고인은 1980년대 영화계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며 "더 좋은 글을 남겨주실거라 기대했는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돌아가시던 당시 편안한 모습이었던 것 같아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며 "늘 사랑하던 주님 곁으로 잘 가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유현종 소설가도 "지난해 경주에서 만났을 때 고인이 '내가 오래 못살 것 같다'고 우울한 소리를 하더라"며 "그래서 내가 '너는 최씨고, 곱슬머리고, 게다가 옥니이기에 오래 살 것'이라고 말했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본인 몸이 아픈데도 굉장히 치열하게 대결했다"며 고인을 회상했다.

이외에도 평소 고인을 사랑했던 언론인들과 출판사 관계자들이 빈소를 찾는 등 고인의 빈소가 차려진 첫날임에도 60~70여 명의 조문객이 빈소를 찾았다.

한편 고인의 발인은 28일 오전 7시30분이다. 고인의 영결 미사는 우리나라 카톨릭의 본산인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정진석 추기경이 직접 집전한다.

천주교 관계자에 따르면 고인의 영결 미사는 28일 오전 9시 명동성당에서 거행된다. 천주교 신자인 고인은 세례명이 베드로로 평소 정 추기경과 친분이 깊은 사이로 알려져 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벽구멍으로'로 등단한 고인은 1972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소설 '별들의 고향'을 비롯해 '고래 사냥', '겨울 나그네', '깊고 푸른 밤', '상도'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2008년 침샘암이 발병 해 5년 간 투병해온 고인은 등단 50주년을 맞은 올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2013-09-27 오전 6:42:32조회수  356추천수  6

■ ‘해방둥이 동무’ 최인호 추모 기도편지

1992년 발간한 동시집 ‘엄마와 분꽃’을 들고 있는 이해인 수녀. 최인호 작가는 지난해 발표한 이 시집의 낭송음반에 “아직 어린 날의 눈물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는 내게 들려주는 수녀의 동시는 영혼의 자장가다”라는 추천사를 썼다. 동아일보 DB

김수환 추기경님, 법정 스님, 피천득 선생님, 구상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 이태석 신부님, 장영희 교수, 김점선 화가.

나의 어머니, 그리고 가까웠던 지인들이 한 분씩 세상을 떠날 적마다 추모의 글을 참 많이도 쓰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작가 최인호의 추모 글은 정말로 쓰고 싶질 않았어요.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어젠 부산에서 본원 수녀 몇 명과 전주로 소풍 겸 순례를 가서 유서 깊은 전동성당에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나는 일행과 떨어져 전주교도소의 형제들을 만나기 위해 담당 신부님의 차 안에 있었습니다. 그때 ‘인호 형을 위해 특별 기도를 부탁한다’는 (출판사) 여백의 김 사장님 전화를 받았고, 저녁엔 영영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젠 가슴이 먹먹하여 눈물도 나지 않더니 오늘은 새벽부터 마구 눈물이 쏟아집니다.

“아니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가족들은 다 어떻게 하라고?” “예수님의 생애를 꼭 소설로 쓴다더니 그 숙제는 어떻게 하고?” “서울주보를 최인호의 글 때문에 본다던 그 많은 독자들을 어떻게 하라고?” “우린 아직 보낼 준비도 안됐는데 그렇게 서둘러 가면 다인가? 서울깍쟁이 같으니라고!” 혼잣말을 되뇌며 원망을 해봅니다.

‘언니, 어쩌면 좋아, 최인호 씨가 돌아가셨대. 내가 심장이 뛰고 눈물이 나오네. 추기경님이 종부성사(병자성사) 주실 때 눈을 뜨고 방긋 웃더래.’ 내 여동생이 보낸 문자에서처럼 정말 웃으며 떠난 건가요?

2008년과 2009년 사이 우리는 서울성모병원에서 곧잘 마주쳤습니다. “어떻게 꾸준히 미사를 오느냐”고 물으면 “거 참, 수녀님도, 내가 지금 기댈 데가 저분밖에 더 있수?” 하며 성당 안의 감실을 가리켰지요. “내 병실에 꽃만 보내고 왜 문병은 안 왔느냐”고 물으면 “내가 좀 소심하니 겁이 나서 그랬수다”라고 했지요. “난 수녀님과 달리 음식을 잘 씹을 수가 없어 너무 괴롭다”며 같은 암환자라도 내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난 수녀님이 나랑 사귀다 실망해서 수녀원 간 거라고 뻥치고 다닐 거다. 으하하. 아, 재밌네!” 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믿다 보니 함부로 살 수 없어 꽤 부담이 되네” 하며 가끔은 투정도 부렸지요. 어느 날은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다짜고짜 “마님!” 하기에 “죄송하지만 누구세요?” 하니 “나야 나 최인호, 수녀님 상태는 좀 어떠시우?” 하고 근황을 물어왔습니다. 내가 오래전 선물한 묵주를 분실했다며 구해 달라기에 다시 보내 드리고 위로 편지도 주고받으면서 우린 서로를 진정으로 염려하고 기도해 주는 해방둥이 동무였고 정다운 문우였고 함께 암 투병 중인 동지였으며 완덕(完德)의 길을 지향하는 도반이었습니다.

유난히 하늘의 흰 구름이 아름답던 날. 한국 순교성인들의 피가 진하게 스며 있는 땅 전주에서 왠지 모를 눈물이 안으로 흘러 언젠가는 나도 떠나야 할 죽음 묵상을 많이 한 2013년 9월 25일. 다들 한결같이 한 소설가의 떠남을 슬퍼하네요. 병이 주는 고통을 받아 안고 잘 참아내느라 그동안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수많은 작품을 빚어 많은 이를 기쁘게 했던 끝없는 창작의 노력에도 감사했습니다.

이제 나보다 먼저 하늘길로 떠난 내 친구를 용서해 드려야겠지요? 용서 안하면 삐치실 거지요? 그러나 나는 빈소에도 장례식에도 가지 않고 수도원 골방에서 조용히 기도만 할 거니 서운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영정사진을 바라볼 용기가 나질 않거든요.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또다시 울고 싶지 않거든요.

만날 적마다 즐겁고 유쾌했던 우리의 대화가 더 깊은 침묵 속에, 성인들의 통공(通功) 속에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활짝 웃는 한 권의 소설로 하느님과 성인들을 기쁘게 해 드리세요. 가족과 친지들의 가슴속에서 ‘깊고 푸른 밤’의 ‘베드로 별’이 되어 주세요. ‘더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치라’(루카 5장 4절)고 내 작업실 방명록에 적어준 성서 구절을 읽어봅니다.

‘이해인 수녀와 나는 동갑내기이자 씨동무이자 피를 나눈 육친의 오누이다. 이란성 쌍둥이다. 수녀의 엄마는 내 오마니고 동심의 꽃밭에서 뛰노는 아이는 나다. 아직도 어린 날의 눈물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내게 들려주는 수녀의 동시는 영혼의 자장가이다.’

지난해 만든 동시 음반 ‘엄마와 분꽃’에 좋은 친구로서 얹어 준 추천의 글귀를 다시 읽으며 하얀 손수건에 떨어지는 눈물을 나의 기도로 봉헌합니다. 최인호 선생님, 베드로 형제님, 나의 벗님, 당신이 그리던 지복의 나라에서 편히 쉬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사랑합니다.

‘주 날개 밑 쉬는 내 영혼 영원히 살게 되리라’ 성가를 부르며 향을 피워 올릴게요.

2013년 9월 26일 이해인 수녀(시인)

 

슬퍼2부처

 

2013년 9월25일 수요일 오후 7시10분 작가 최인호님이 침샘암으로 투병 5년만에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고인과 친분이 깊은 전임 서울대교구장 정진석(82) 추기경도 애도의 메시지를 보냈다.

“최인호(베드로) 작가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거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을 건네시던 선생님을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제 지상에서의 삶을 마친 최 작가님께서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평소 늘 바라고 기도하신대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28일 고인의 장례미사를 집전하는 가톨릭 정진석 추기경도 이날 애도 글을 남겼다. 정 추기경은 “삶을 통찰하는 혜안과 인간을 향한 애정이 녹은 글을 써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은 이 시대 최고의 작가였다. 이제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도한다”고 밝혔다.

 

 

마지막 유언을 묻자,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님이 오셨다. 이제 됐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 아내와 딸이 "아이 러브 유"라고 인사를 건네자, 작가는 "미 투(Me too·나도 사랑해)"라고 받았다고 한다.

 

"주님, 이 몸은 목판 속에 놓인 엿가락입니다. 그러하오니 저를 가위로 자르시든 엿치기를 하시든 엿장수이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다만 제가 쓰는 글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의 입속에 들어가 달콤한 일용할 양식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엿장수의 이름으로 바라나이다. 아멘."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의 '말씀의 이삭' 코너에 암투병기를 연재...1월22일자 '엿가락 기도문'-

 

안식하소서...아멘...^-^

 

- 2013년 9월26일 목요일...수산나 -

 

 

 

팔마를 든 예수상

 

팔마를 든 예수상 안내문...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마'를 손에 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