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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영월 지역 답사가는 버스 안에서 들은 이야기 정리(2014.8.15.금)

 

[영월지역 답사가는 버스 안에서 들은 이야기 정리]

 

 

1. 강월도 영월군 한반도면...한반도면(韓半島面)은 대한민국 강원도 영월군이다. 넓이는 69.87㎢이고, 인구는 2008년 기준으로 3,425명이다. 이전의 이름은 서면(西面)이었으나, 2009년 10월 20일에 현재와 같은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명칭은 옹정리 선암마을 인근의 평창강 지형이 마치 한반도를 닮은 형태를 보이는 것에서 유래하였다.

 

한반도지형을 보려면 예전에는 차가 안 다녔음...지금은 주차장에서 10~15분 걸으면 볼 수 있음...^-^

한반도지형 앞에 현대시멘트 공장 있고...그 옆에 석회암 광산 있음...

 

2. 중국의 단동...중국 (遼) 남동부, 압록강 하구 부근 있는 도시. 평안북도 신의주 마주하고 있다. 교통, 사업 요지이며, 방적, 제지, 제재 공업 성하다. 중국어Dandong[]’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이름이다.

한반도 건너편 중국의 '단동'에 요즘 가보면 최근 3~4년 사이에 초고층아파트 숲으로 변모...북한은 고즈넉한 분위기...^-^

 

3. '대관령면' 이라는 이름도 생겼음...^-^

 

4.  영월군 주천면...주천이란 술 나오는 샘이 있는데...양반에게는 맑은 술, 상민에게는 탁주가 나온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ㅎㅎ...^-^

 

5. 영월호장 엄흥도가 단종 시신 수습하여 묘를 씀...현재의 '장릉'...단종은 12살 즉위~17살에 사약 받음...^-^

사약설 혹은 자살설이 있는데...개고기 먹고 싶다고 하여 그 줄로 자살했다는 설이 있음...태백산 산신령화 되었다고 함...^-^

영월에는 엄씨가 많이 살음...국회의원 중 '엄**' ...사람을 기억하는 능력이 특출...만명의 사람을 언제 만났는지 기억한다는 믿거나 말거나 이야기...^-^ 

 

6. 김삿갓...전라도 화순에서 사망...시신이 영월에 묻힘...^-^

 

7. 영월...평안한 '영'...넘을 '월'...예전에는 담배농사가 주업...현금이 잘~ 돌던 지역...나를 낳으면 영월로 시집 보내지말라고 처녀들이 이야기 했다고 함...

잎 쪄서 말리는 과정에서 니코틴 중독으로 편두통에 시달렸다고 함...ㅠㅠ...강냉이(=옥수수, 옥싱이) 농사 등....요즘 영월은 관광사업...폐교 활용한 박물관 수입은 많다고 함...영월에는 박물관이 수십개 있음...시간이 되면 '민화박물관' 들를 예정...들르지 못했음...ㅎㅎ...^-^

 

8. 세조...수양대군을 부추긴 사람이 양녕대군...김종서 장군이 전권을 휘두른...살려두면 안된다고 주장했다고 함...

 

9. 귀양살이법은 명나라법을 그대로 따른 대명률을 적용했는데...삼천리 귀양길을 지그재그로 채움...귀양경비는 자비부담인데, 관리들 비용도 대주어야 함...폐서인만 안되면 양반지위를 유지 했음...^-^

 

10. 제주 이재수의 난- 김윤식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는데...유배 중인 신분인데도 제주목사와 협의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헌 했다고 함...^-^

광무 5년(1901년) 1월 한성에서 봉세관으로 내려온 강봉헌(姜鳳憲)은 과도한 징세로 제주 민중의 원성을 샀고 징세 실무를 맡은 최형순(崔亨淳)은 천주교도였다. 제주도 출신으로서 당시 대정군수였던 채구석(蔡龜錫)은 토착 세력을 규합해 상무사를 조직해 부패한 봉세관과 횡포를 자행한 천주교도를 공격했고 이것은 제주성 내 천주교도 300여 명이 처단되는 등 많은 사상자를 내는 봉기로서 마침내 치닫았다.[2]

이에 프랑스 외교관들의 항의와 천주교 선교사 보호를 명분으로 한 프랑스 함대의 제주도 주둔으로 외교 문제가 되자, 조선은 봉기를 지도한 이재수, 오대현, 강우백 세 사람을 처형하고 제주의 지방관을 교체하며, 제주에 유배되었던 자들을 육지로 이주하게 해 민심을 수습하는 일변, 봉기 와중에서 처단되거나 부상한 천주교도에게 보상해 사태를 진정하게 했다.[2]

7월에 작성된 《삼군평민교민물고성책》(三郡平民敎民物故成冊)을 보면, 물고자(物故者, 사망자) 수는 총 317명으로서 천주고도가 309명, 평민이 8명, 성별로는 남자 305명, 여자 12명이며, 3개 군의 물고자는 현황으로 볼 때 제주군(36개 리) 93명, 대정군(26개 리) 81명, 정의군(8개 리) 142명이다.

 

《속음청사》(續陰晴史) - 김윤식(金允植)의 일기. 김윤식은 1897년 12월 21일에서 1901년 7월 16일까지 4년 반에 걸쳐 제주도에 유배됐으며, 권8, 권9와 권10의 상 부분에 난 당시 제주도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이재수실기》(李在守實記) - 장두 이재수의 여동생 순옥(順玉)이 오빠 이재수의 거사를 세상에 알리고자 노력한 결과 1932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조무빈(趙武彬)이 출판한 국한문 서적. 기자의 증언과 이재수의 출생과 이재수의 기세, 구한말의 정치와 천주교도의 횡포, 이재수의 의거와 천주교회의 섬멸, 영주십경(瀛洲十景), 프랑스 함대의 내침과 관군의 진압, 이재수를 위시한 의사(義士) 3인의 상경담판사실(上京談判事實), 이순옥의 탄원서 · 경력 등이 실려 있다.

 

11. 굴 뚫는 솜씨가 최첨단...광해군의 아들 '이지'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는데...가위와 인두로 70m 굴을 파서 도망가기 직전에 발각...며느리는 사흘 후 자결...'이지'는 스스로 목매어 죽으라고 인조가 명령...광해군의 부인은 화병으로 죽었으나...광해군은 67세에 제주도에 유배 중 사망...경기도 양주군 사능에 광해군의 묘가 있음...ㅠㅠ...

 

26세인 1623년(인조 1) 3월 14일 인조반정으로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왕을 폐하여 광해군으로 삼고,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綾陽君)에게 왕위를 계승케 하여 인조가 등극하였다. 이질은 인조반정으로 폐세자로 강등되었고, 이 해 3월 23일 아버지 광해군 및 가족들과 강화(江華)에 위리안치되었다. 같은 해 5월 22일 위리안치된 상황에서 땅굴을 파고 도망치다 붙잡혔고, 사흘 후 폐세자빈 박씨는 자결하였다. 이 해 5월 26일 합사하여 폐세자의 처형을 청하여 자결을 명받아 이 해 7월 22일(음력 6월 25일) 목을 매어 죽었다. 인조의 배려로 옷, 이불, 관곽, 예장 등의 일을 폐빈의 예에 따라 거행하게 하였다. 2013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문의 결과, 경기도 고양시에 안장되었던 폐세자 이지의 유골은 후손이 없는 관계로 화장처리 되었음을 확인하였다.[출처]위키백과

 

12. 홍경래의 난

1811년 홍경래는 조선 정부에 대항하는 농민군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매우 잘 방어되는 정주를 비롯하여 서북 지방 상당수를 지배했다. 이를 홍경래의 난이라고 한다. 세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때는 청천강 이북을 거의 지배했다.

1812년 5월 29일(음력 4월 19일) 관군에게 정주성이 함락될 때 관군의 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또한 그의 심복들인 우군칙(禹君則, 1776년1812년)과 홍총각(洪總角, 1785년? ~ 1812년)은 관군에 체포되어 주살되고 말았다.

 

13. 김익순처형사건 [金益淳處刑事件]

1812년(순조 12) 김삿갓의 할아버지인 전 선천부사(宣川府使) 김익순(?~1812)이 모반대역죄로 처형된 사건.

1811년(순조 11) 평안도지방에서 홍경래가 중심이 된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선천부사였던 김익순은 곧장 검산성(劍山城)으로 도망하였다(→ 홍경래의 난). 농민군이 관서지방을 장악하자 그는 농민군에 항복을 하고 홍경래의 사령장을 받아 농민군에 가담하였다. 정부군의 반격으로 홍경래가 붙잡히고 농민전쟁이 평정되자 그도 의금부에 갇혔다. 김익순은 그동안 농민군에 가담한 죄에서 벗어나려고 농민 조문형(趙文亨)에게 돈 1,000냥을 주기로 약속하고, 그에게 농민군의 참모 김창시(金昌始)의 목을 베어서 자신이 죽인 것처럼 꾸며 조정에 바치도록 하였다. 약속대로 조문형이 김창시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쳤으나, 김익순은 약속을 어기고 돈을 지불하지 않았다. 이에 조문형이 정부에 고발함으로써 모든 사실이 밝혀지고, 김익순은 모반대역죄로 참수당하였다.

 

14. 조선을 놀래킨 코끼리 유배사건...첨부자료 참조...ㅎㅎ...^-^

 

15. 영월 장릉 앞 보덕사의 화장실...118년 된 화장실...문화재지정-(강원도문화재자료 제132호)...책꽂이형 화장실...첨부자료 참조...ㅎㅎ...

 

16. 숙종 때 선현추모사업...단종능 복원...엄흥도 충신 인정 함......숙종의 누나가 우리 성남시 '봉국사'에 모셔진 명선, 명혜공주...ㅎㅎ...^-^

 

17. 사능...단종의 비 정순왕후능이 있음...또한 주변에 광해군묘, 성묘(광해군의 생모-인조의 후궁, 공빈김씨 묘), 인빈묘(효종의 후궁 안빈이씨 묘-효종이 봉림대군 시정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을 때 같이 갔음) 등이 있다고 한다...

 

 

조선을 놀래킨 코끼리'유배'사건의 내막

이기환 선임기자 lkh@khan.co.kr

 

“(코끼리가) 사람을 해쳤습니다. 사람이라면 사형죄에 해당됩니다. 전라도의 해도(海島)로 보내야 합니다.”

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다. 병조판서 유정현의 진언에 따라 ‘코끼리’가 유배를 떠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진다. 일본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인 원의지(源義智·아시카가 요시모치)가 ‘동물외교’의 일환으로 바친 코끼리였다. 문제의 코끼리가 그만 공조판서를 지낸 이우(李玗)를 밟아죽인 것이다. 이우가 “뭐 저런 추한 몰골이 있냐”며 비웃고 침을 뱉자, 화가 난 코끼리가 사고를 친 것이다.

가뜩이나 1년에 콩 수백석을 먹어대서 단단히 미운털이 박혔는데,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코끼리의 유배지는 전라도 장도(獐島)였다. 6개월 후 전라 관찰사가 눈물겨운 상소문을 올린다.

“(코끼리가) 좀체 먹지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태종 임금조차 ‘울컥’하게 만든 상소로 줄쌍한 코끼리는 유배지에서 풀려 육지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 코끼리의 운명은 기구했다.

코끼리가 유배됐던 전라도 장도. 노루섬으로 일컬어진 장도에는 조선시대부터 동물들의 방복장으로 활용됐다. 지금은 율촌산업단지 개발로 육지와 연결돼있다.

 

■‘제발 죽이지 마라.’6년 뒤인 1420년(세종 2년) 전라도 관찰사는 코끼리 사육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다.

“귀양에서 풀린 코끼리를 도내 4곳의 변방 지방관들이 교대로 사육했사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먹이를 축내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습니다. 제발 충청도와 경상도 지방에서도 돌아가며 키우게 해주소서.”

전라·충청·전라도 등 3도가 코끼리 한마리 사육을 맡는, 이른바 ‘순번사육’을 제안한 것이다. 상왕(태종)은 전라도 관찰사의 상소를 가납했다.

이로써 코끼리는 전라도~충청도~경상도를 떠돌며 사육 당하는 처지가 됐다. ‘떠돌이’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문제의 코끼리가 또 사고를 친다. 1421년(세종 3년), 충청도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던 사육사가 그만 코끼리에 채여 사망하는 사건이 또 벌어진 것이다. 이번에는 충청도 관찰사가 폭발했다.

“코끼리는 나라에 유익한 동물이 아닙니다.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은 됩니다.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 먹는데, 1년으로 치면 쌀 48섬, 콩 24섬입니다. 게다가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 도리어 해만 끼칠 뿐입니다. 다시 바다 섬 가운데 목장으로 보내소서.”

상소를 들은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으로 코끼리를 두라”고 명한 뒤 신신당부한다.

“제발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공작새가 귀양한 사연

어디 코끼리 뿐이랴. 코끼리 귀양사건은 그래도 잘 알려졌지만, 공작새가 유배를 떠나야 했던 사연을 아는 이는 드물다.

1589년(선조 22년)의 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이다. 일본의 사신인 종의지(宗義智·소 요시토시)가 공작 1쌍과 조총, 그리고 창과 칼 몇 점을 바쳤다.

<세종실록> ‘오례 제기도설’에 그려진 술통(象樽), 즉 코끼리 문양의 술통. 조선왕조가 가을과 겨울제사를 드릴 때 썼다. 꼬끼리는 용, 기린, 봉황 등과 함께 상서로운 동물로 꼽혔다..

당시 종의지는 “조선을 복속시키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밀명에 따라 조선을 방문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일단 생전 처음보는 조총을 군기시(軍器寺)에 신주처럼 간직하도록 명했다. 하지만 공작새는 ‘노 생큐’였다. 조정은 공작의 처리를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허성 같은 신하는 ‘공작은 돌려보냄이 옳다’면서 나름의 묘책을 냈다.

“일본 사신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 어떻습니까. ‘(일본의 성의는 가상하지만) 내(선조)가 원래 진금(珍禽)·기수(奇獸)를 좋아하지도 않고 조선의 풍토에도 맞지 않으니 되돌려 보낸다’고…. 그러면 외교적인 결례는 범하지 않을 것인데….”

선조는 “그 말이 맞지만, 저들이 공연한 의심을 하면 안될 것”이라고 고개를 내젓고 고심을 거듭한 끝에 궁여지책을 내놓었다.

“할 수 없지. 이렇게 하자. 일본 사신(종의지) 일행이 떠난 뒤를 기다렸다가 공작을 제주도로 보내라.”

그러나 예조는 “공작을 제주까지 수송하기는 어렵다”는 간했다. 그러자 선조는 “그렇다면 공작을 ‘수목이 울창한 남양(고흥)의 외딴 섬’으로 옮기라”는 명을 내렸다. 이것이 ‘공작새 유배사건’이다.

■주나라 무왕의 고사

사실 조선으로서는 외국에서 보내는 ‘동물사절’을 100% 환영할 수는 없었다.

임금이 토종도 아닌 해외의 진귀한 짐승에 빠지면 뜻을 상하게 되고 나라마저 위태롭게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는 중국 주나라 무왕의 고사에서 비롯된 관념이다. 즉 주 무왕이 상나라를 멸하고(기원전 1046년 무렵) 주나라를 건국하자 각지에서 외교사절을 보내 갖가지 선물을 바쳤다. 그 가운데 서려(西旅)라는 서방의 소국이 오(獒)라는 명견(名犬)을 바쳤다. 크기가 4척이나 되는 사냥개였다. 당시 80살이 넘은 무왕에게는 말년의 소일거리로 더없는 선물이었다.

하지만 태보인 소공 석은 “절대 받아서는 안된다”는 글을 지어 바친다.

“개와 말은 토종이 아니면 기르지 말고, 진귀한 새와 짐승은 나라에서 기르지 마소서. 잘못하면 큰 덕에 누를 끼칩니다.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서 공(功)이 이지러집니다.”(<서경>

‘여오(旅獒)’)

진기한 동물, 특히 토종이 아닌 외국산에 빠져 백성을 돌보는 데 소홀히 하면 창업의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진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간언에 따라 무왕도 일절 진상동물을 받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역대 임금들은 외국에서 보내온 진금기수(珍禽奇獸)를 100% 환영할 수 없었다. 국가간 선물이나 당연히 받아야 하지만, 주 무왕의 고사 또한 늘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연산군의 반전매력

예코대 성종 임금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은 것을 후회하면서 “내가 바로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고 전했다.(147

최근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인 뒤 조사내용을 토대로 그린 만부교의 상상도. 발굴과정에서 낙타의 어금니가 출토됐다고 한다.

8년·성종 9년) 흥미로운 것은 희대의 폭군이라는 연산군의 일화이다. 1502년(연산군 8년) 일본이 암원숭이를 바쳤다. 그 때 연산군은 예의 그 ‘주 무왕의 일화’를 자세히 인용하면서 “받지말라”는 명을 내린다.

“일본이 예전에(세조 때의 뜻함) 앵무새를 바쳤는데 이 앵무새는 값만 비싸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한다. 지금 또 암원숭이를 바치고자 하는데 도로 돌려주고 받지 않겠다는 뜻으로 점잖게 타이르라.”

세조 때 일본이 바친 앵무새는 무려 명주 1000필의 값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받은 앵무새의 가격이 비싼만큼 조선도 일본에 그만큼의 하사품을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그걸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산군은 “대마도주가 조선에 말(馬)을 바치는 관례 또한 폐지하라”고 한발짝 더 나간다.

그러나 대신들은 “외교적인 결례이며 자칫하면 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하면서 “암원숭이를 받아야 한다”고 간한다.

“진상품을 받지 않으면 대국(조선)으로서 먼나라(일본) 사람들을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성준) “요즘 대마도 왜인들의 원망이 많은데 만약 원한을 품고 돌아간다면….”(이극균)

백성들의 삶에 되레 해를 끼칠 뿐이라는 임금과, 외교적인 결례로 자칫 분쟁의 위험이 있을 수 있다고 간언하는 신하들…. 과연 폭군이라는 연산군 시대, 그것도 말년의 일화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만부교 사건의 교훈

충선왕이 만부교 사건을 둘러싼 수수께끼를 이제현에게 묻고 있는 대목을 기록한 <동국통감>

‘동물외교’가 파국을 불러 단교를 낳고 결국은 전란으로 이어진 생생한 예가 있다. 바로 고려 태조 때 일어난 ‘만부교 사건’이다. 942년 10월, 북방의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거란이 3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파견, 태조 왕건에게 귀한 선물을 보낸다. 낙타 50필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린다. 거란의 사절단 30명을 모두 절도에 귀양보내는 한편, 낙타 50필을 만부교 밑에 매어놓아 굶어죽게 만든 것이다. 이후 송도 보정문 아래에 있는 만부교는 낙타교라는 별칭을 얻었다. 태조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고려사절요> 를 보자.

“거란은 예전부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 갑자기 옛 맹약을 돌보지 않고 하루 아침에 멸망시켰다. (거란의) 무도함이 심하다. 그러니 화친을 맺어 이웃으로 삼으면 안된다.”

이 사건으로 거란과 고려는 단교했으며, 3번에 걸친 거란의 침략을 받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이 만부교 사건은 당대인 고려시대 때는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설왕설래가 많은 ‘의아한’ 외교분쟁이다. 만부교 사건이 일어나고 360여 년이 지난 뒤 충선왕(재위 1308~1313)은 이제현(1287~1367)에게 궁금해 죽겠다는 듯 물었다.

“아니 임금이 수십마리 낙타를 기른다고 그 피해가 백성들에게 이르지는 않을 것 아닌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낙타를 돌려보내면 될 일을 태조께서는 왜 굶어죽이셨는지 모르겠구나.”

누구나 당연히 생기는 궁금증이었으라. 외교를 생각한다면 태조의 결정은 전화(戰禍)의 싹이었으니까…. 이제현도 충선왕의 송곳질문을 듣고 대답이 매우 궁했던 것 같다.

“창업군주(태조)의 소견은 원대하고 속이 깊어 후세 사람들이 깨닫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태조께서 오랑캐(거란)의 간계를 꺾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훗날의 사치한 마음을 경계하고자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숨은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이것은 전하(충선왕)께서 스스로 알아내셔야 할 것이며, 신(이제현)이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다”고 임금에게 공을 넘겼다. 한마디로 “내가 알게 뭐냐”며 나자빠진 것이다.

태조 왕건의 심모원려가 무엇인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외교사절 자격으로 온 낙타 50마리를 굶어죽임으로써 나라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극단의 외교가 낳은 대가치고는 너무도 엄청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해우소에서 조상들의 지혜 배우는 '보덕사'

09.11.12 08:25l최종 업데이트 09.11.12 08:25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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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사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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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릉에서 가까운 곳에 신라시대인 686년 의상조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보덕사가 있다. 이 사찰은 발본산 지덕사로 시작하여 노산군으로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죽은 후 노릉사가 되었다가 태백산 보덕사로 다시 장릉 보덕사로 이름을 고쳤다. 특히 단종 왕릉인 장릉의 수호사찰이었기에 돌아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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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사 입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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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사 천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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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 자락의 평지사찰 보덕사는 역사에 비해 규모가 작고 시내에서 가깝지만 조용해서 좋다. 입구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극락보전, 산신각, 사성전, 칠성각 등 사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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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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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사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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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강원도문화재자료 제23호)은 1161년에 증축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안내판에 의하면 조선 후기의 건물양식이다. 주불로 모시고 있는 삼존불은 목조불이다. 보기 드물게 극락보전 오른편에 부도가 홀로 있다. 칠성각에 태백산 산신령이 된 단종의 혼령을 추모하는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보덕사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 근심을 해결하는 해우소(강원도문화재자료 제132호)다. 1882년에 건립되어 사찰 화장실의 전통 형식을 지닌 보덕사 해우소(解憂所)는 2층 누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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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덕사 해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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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우소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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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소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6칸씩 앞뒤 2열로 나뉘어져 한 번에 12명이 이용할 수 있고, 각 열의 입구는 출입문을 매달아 남녀 사용자를 구분하였으며, 좁은 공간을 활용하느라 앞문이 없이 삼면만 막았지만 옆 사람이 보이지 않고, 군데군데 작은 구멍을 뚫거나 개방식 천장을 만들어 통풍이 잘되게 하는 등 옛 화장실에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있다.

보덕사의 해우소에서 예전 사람들은 옆 사람의 숨소리마저 들려올 이 좁은 공간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하며 근심을 풀었을까를 생각했다.

 

 

영월 단종역사관...정순왕후 사릉 안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