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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문인

유채꽃을 바라보며 '우장춘'박사의 이야기를 듣다(2014.4.27.일)/유채꽃 2장

 

 

 

 

 

유명한 과학자일수록 정작 우리는 그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린 시절 위인전을 읽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퀴리 부인이나 아인슈타인은 물론 석주명石宙明(1908~1950)[각주:1]이나 우장춘禹長春(1898~1959) 같은 분들도 그런 예일 것이다. 성인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들의 본격 전기를 읽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최근 우장춘 박사에 대해 좀 자세히 알아볼 일이 생겨서 인터넷 서점에서 전기를 검색해봤는데 19권 가운데 한 권을 빼고는 모두 어린이용이었다. 물론 어린이 책이라고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우장춘의 위대함뿐 아니라 안 좋은 면까지, 즉 실체를 파악하기에‘위인전’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 40대의 (왼쪽)우장춘 박사. 일본 다키이 종묘회사 초대 농장장으로 근무하던 때다. (오른쪽) 석주명 박사.

 

 

그런데 목록 거의 맨 밑에 쓰노다 후사코라는 일본인이 쓴『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1992년 번역 출간된 책이라(원서의 제목은『나의 조국』으로 1990년 출간) 품절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한 대학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다행히 소장돼 있었다. 책을 빌려 와 읽었는데 역시 성인용답게 충격적인 내용도 있었다.

 

 

 

명성황후를 암살할 때 가담한 우범선의 아들

 

 

1914년 동경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유학한 쓰노다 후사코는 40대 중반부터 집필을 시작, 주로 전기를 썼는데 1980년대 들어 한일 역사로 관심을 돌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민비암살』을 집필, 1988년 출간해 화제가 됐다. 한국에서 취재 중 명성황후를 암살할 때 가담한 우범선禹範善(조선 훈련대 제2대대장)[각주:2]이 ‘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던 쓰노다 여사는 일본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우장춘이라는 인물에 관심을 갖는다.


그 뒤 쓰노다 여사는 일본에서는 우 박사의 자녀들[각주:3]과 옛 동료들을 만났고 한국을 수차례 오가며 우장춘 박사를 아는 사람들을 만나며 치밀한 취재를 했다. 그리고 1990년 76세의 나이에 이 책을 출간했다. 쓰노다 여사가 우장춘에 관심을 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에서 태어나 50년을 넘게 산 한일 혼혈아가 어떻게 가족을 남겨두고 말도 통하지 않는 한국에 혼자 갈 생각을 했느냐는 점이다.[각주:4]

 

 

| 1990년 76세의 나이에 우장춘 박사의 전기『조국은 나를 인정했다』를 출간한 일본의 작가 쓰노다 후사코 여사.

 

 

아버지의 행위에 대한 속죄였을까, 아니면 일본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서였을까[각주:5], 아니면 우리가 위인전에서 읽었듯이 피폐해진 조국(한국)을 도우려는 애국심의 발로였을까. 저자는 책 끝부분에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추측을 하고 취재를 통해 하나하나 확인하는 집념은 정말 대단했다. 자신이 여성이어서인지 쓰노다 여사는 우 박사의 아내인 고하루 여사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신부 부모가 끝까지 반대해(혼혈아와 하는 결혼이라서) 고하루 여사는 결국 부모와 의절까지 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두고 우장춘은 장차 태어날 자녀들의 성 문제에 대한 조언을 받아들여 부모와 의절한 고하루 여사가 지인인 스나가 호헤이 씨의 양녀로 입양된 뒤 데릴사위가 되는 형식으로 성을 스나가로 바꾼다. 우장춘의 자녀들의 성이 스나가인 이유다. 그런데도 우 박사 자신은 원래 성을 계속 썼다. 그는 논문에 영문으로 자신의 이름을‘Nagaharu U’라고 썼는데 나가하루는 長春(장춘)을 뜻하는 일본말이고 U는 禹(우)의 한국어 음이다. 자신의 정체성과 자녀들의 정체성에 선을 그은 것일까.

 

1950년 한국에 온 우 박사는 한국전쟁 발발 등 열악한 환경에서도 혼신의 노력을 다해 한국의 농업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일본에 전량 의존했던 배추와 무의 종자를 대량생산하는데 성공했고 벼와 감자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제주도에 귤을 대량 재배하자는 것도 우 박사의 아이디어다. 우 박사는 1959년 위와 십이지장궤양 수술 후유증으로 타계했는데 거슬러 올라가면 과로가 주요 원인일 것이다.


한편 고하루 여사는 1950년 우 박사가 혼자 한국으로 간 뒤 어렵게 자녀들을 키우면서 자녀들이 장성한 뒤 한국으로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우 박사는 한국에 간 지 수년 뒤 현지처를 두고 두 집 살림을 했다고 한다. 고하루 여사는 이 사실을 알고도 아픔을 삭이고 자녀들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했고 1959년 우 박사가 위독하자 서울에 와서 임종을 지켰다.

 

 

 

뉴질랜드 학자를 한국으로 이끈 우장춘의 <종의 합성>

 

 

사실 위대한 과학자가 다른 모든 면에서도 모범이 된다는 건 어린이용 위인전에나 나오는 얘기다.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학문과 일의 측면에서는 우장춘 박사는 진정 위대했다는 것이 쓰노다 여사의 책에서도 줄곧 강조되고 있다.

 

책에는 워낙 많은 에피소드가 나오지만 그 가운데 인상적인 장면 하나만 소개한다. 우 박사는 말년에 감자에 관심을 가져 대관령에 씨감자 시험지를 두고 막 시험 재배를 시작하던 중 사망했다. 훗날 이곳의 책임자가 된 최정일 박사는 1968년 뉴질랜드 링컨대학 육종학연구실 팔머 교수를 방문했다. 팔머 교수는“한국의 우 박사를 아느냐?”고 묻고는“영국 옥스퍼드대학 육종학 교실에서 선정한 우수 논문 10편 가운데 가장 관심 있게 읽은 게 우 박사의 1935년 <종의 합성> 논문이었다”고 말했다. 최 박사가 자신이 우 박사의 제자라고 밝히자 팔머 교수는 깜짝 놀라며 그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 우장춘의 삼각형(Triangle of U). 우장춘 박사는 십자화과 배추속에 속하는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얻은 식물체가 유채와 같음을 증명하고 이 현상을‘종의 합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뒤 배추속 식물 6종의 연관성이 밝혀졌는데 이를 도식화한 것이 우장춘의 삼각형이다. 원 안은 염색체로 녹색은 배추, 파란색은 양배추, 빨간색은 흑겨자의 염색체다. n은 염색체의 수.

 

 

 

종의 합성이란 십자화과 배추속Brassica 식물인 유채가 사실은 배추와 양배추의 잡종임을 밝힌 논문에서 우 박사가 사용한 용어다. 서로 다른 종이 교배해 새로운 종이 나온다는 이 현상의 발견은 육종학 분야에서 큰 사건이었다. 그해 9월 일본 동경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팔머 교수는 최 박사에게 연락해 한국에 와 우 박사의 묘지를 참배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우장춘 박사에 대한 자료나 증언이 얼마나 잘 보존돼 있는지는 모르겠지만‘한국 근대 농업의 아버지’에 대한 본격 전기가 일본인이 쓴 것밖에 없다는 사실에 씁쓸했다.[각주:6] 우리 저술가 가운데 우 박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사라지기 전에 그의 삶을 복원하려고 노력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인가. 1980년대 후반 수 년에 걸친 한 일본 작가의 노력 덕분에 그나마 우 박사에 대해 많은 사실이 기록된 것이 다행이다. 쓰노다 여사는 2010년 9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매일 우물 청소하며 어머니 기려

 

 

1953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우 박사는 출국 허가를 신청했지만 정부는 (우박사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 끝까지 외면해 결국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이때 우 박사는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을 위해서 봉사해온 나에 대한 대우란 말인가! ”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 박사는 우물을 파고‘자유천慈乳泉’이라고 명명했다. ‘자애스러운 어머니의 젖’이라는 뜻이다. 그 뒤 그는 아침마다 우물 주변을 청소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1959년 우 박사가 위독해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키로 하고 농림부장관 이근식이 병원을 찾아 수여식을 거행했다. 우 박사는“고맙다…… 조국은…… 나를 인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3일 뒤인 8월 10일 오전 3시 10분 아내 고하루가 지켜보는 가운데 우장춘은 숨을 거뒀다. 해방 전후 극도의 혼란 속에서 굶주리고 있던 한민족에게 작물의 씨앗과 희망의 씨앗을 동시에 안겨준 우장춘 박사는 진정 위대한 한국인이 아닐까.

 

 

 

 

 


과학 한잔 하실래요?

저자
강석기 지음
출판사
MID엠아이디 | 2012-03-22 출간
카테고리
과학
책소개
간행물윤리위원회 선정 '2012년 5월의 읽을 만한 책', [강...
가격비교

 

본 내용은 <과학 한 잔 하실래요>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Copyright (c) 강석기 & MiD 지식채널

 

 

 

 

 

글·그림 강석기 / (前)동아사이언스 기자,과학컬럼니스트

 

저자 강석기는 영화, 바둑, 화장, 은행잎, 달리기, 바나나, 와인을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물리학 방정식과 화학 분자구조가 나온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과학이 강석기가 이야기하면 따뜻한 감성을 덧입는다. 최고급 요리사는 재료를 가리지 않듯이 그의 과학 이야기는 분야와 주제를 가리지 않는다. 잡다하고 소소한 일상의 모든 것이 커피 한잔에 녹듯이 과학으로 버무려진다. 그래서 그가 차린 과학카페는 따뜻하고 편안하다. 前<동아사이언스>의 전문기자로 서울대에서 화학을, 동 대학원에서 분자생물학을 공부했다  

 

 


 

 

 

 

 

 

  1. 석주명 : 한국의 나비 연구가이자 언어학자이다. 개성 송도중학교 교사로 지내며 나비 연구를 진행해 수많은 견본을 채집하고 논문 100여 편을 냈다. [본문으로]
  2. 우범선 : 시해 사건 뒤 우범선은 처자식을 남겨두고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인과 재혼한 다음 1898년 우장춘을 낳았다. 1903년 우범선은 조선의 자객 고영근에게 암살된다. [본문으로]
  3. 우 박사의 자녀들 : 일본인 아내와 사이에 2남 4녀를 둠. [본문으로]
  4. 우장춘은 죽을 때까지 우리말을 못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우 박사는 1945년 다키이 종묘회사를 그만두고 수년간 쉬고 있었다. [본문으로]
  6. 도서관엔 그의 제자 김태욱이 쓴『인간 우장춘』(1985년)이 있다. [본문으로]

 

 

'열등한' 조선인 우장춘, 種의 화합으로 우생학을 부수다
조선일보/문화/허윤희 기자
 

입력 : 2013.05.11 03:05

'한국 농업 선구자' 우장춘의 아버지는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를 도운 우범선
배추와 양배추 교배해 만든 유채로 적자생존 일변의 유전학 궤도 바꿔
이데올로기보다 연구에만 매달린 인물


	우장춘 사진과 우장춘의 마코토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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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의 마코토

이영래 지음|HNCOM|318쪽|1만4000원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8월 20일 새벽. 경복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浪人)들에게 길을 열어준 조선인이 있었다.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1857~1903). 을미사변 직후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인 여자와 결혼한 그는 1903년 한국인 고영근에게 암살당한다. 당시 여섯 살이었던 우범선의 장남이 바로 우장춘(禹長春·1898~1959·사진 왼쪽)이다.

'한국 농업의 선구자'이자 세계 유전학의 기류를 바꾼 농학자인 우장춘. 저자가 우장춘을 그저 '씨 없는 수박'을 (개발이 아닌) 우리나라에 보급한 과학자로 조명했다면, 이 책은 별다른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저자는 우장춘에 관한 기존의 이미지는 상당 부분 틀렸거나 곡해됐다고 주장한다. 출생부터 기구한 그의 삶은 "한·일사의 불편한 부분과 맞닿아 있어서" 잘못 알려진 게 많다는 것이다. 저자는 발품을 팔아 각종 기록과 비화를 발굴하고, 기존에 알려진 사료를 새롭게 해석한다.

종의 합성으로 적자생존론을 깨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우장춘은 '장학금을 받기 위해' 농학을 선택했다. 1919년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를 졸업했고 일본 농림성의 농사시험장에 취직했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 조선의 혈통을 가진 그가 종묘학자가 됐다는 건 불편한 일. 당시 일본에서 농학, 특히 종묘학은 우생학이 시대의 대세였다. 제국주의자들이 신봉한 우생학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이데올로기와 직결돼 있었다. 종자를 개량해 우등한 종자를 만들어내는 것은 제국주의 과학자들의 과제였다.


	유채꽃 사진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유채를 만들어냈다. 새로운 종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김상훈 객원기자
우장춘은 엘리트 우생학자였던 일본인 상사 데라오 히로시와 끊임없는 갈등을 겪었다. 저자는 각종 자료를 통해 데라오가 우장춘 필생의 연구 결과까지 빼앗았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한다. 1930년 농사시험장 본관에 화재가 일어난다. 우장춘이 연구하고 있던 피튜니아 종자 연구도 불에 타 버렸다. "수년간 노력 끝에 완성한 논문과 자료들이 원인 모를 화재로 모두 불탔고, 이후 사카타 상회는 새로운 피튜니아 종자 개발에 성공했다. 사카타 상회로 하여금 이 피튜니아 종묘를 재배하게 한 것이 데라오 히로시였고, 훗날 그는 사카타 종묘회사 사장이 된다."(166쪽)

'열등한' 조선 혈통의 과학자는 우생학에 '일격'을 가하는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세계 유전학의 궤도를 바꿔놓은 박사 학위 논문 '종의 합성'이 그것. 저자는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해 유채를 만들어냄으로써 적자생존이 아닌 '상호공존'의 원리를 보여줬다"며 "서로 다른 개체가 있음으로 해서 다른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은 생태계의 모든 것에 각자의 가치가 있음을 증명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마코토'의 삶

우장춘은 1950년 어머니와 처자식을 모두 일본에 남겨둔 채 한국에 온다. 해방이 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가 농업 발전을 위해 그의 귀국을 추진하면서 '우장춘 박사 귀국추진위원회'가 만들어진 것.


	기자가 읽어보니... 평가 이미지
1950년대 한국에서의 삶은 지지와 반목으로 구성됐다. 한국인에게 그는 자랑스러운 농학자이며, '역적의 아들'이었다. "우장춘이 아버지 우범선을 자랑스러워했다", 대한민국을 조국이라 부르지 않고 '아버지의 나라'라고 불렀다는 증언도 있다. 한국어를 쓰지도 배우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한국행을 택했을까.

저자는 "'마코토(誠)'로 일생을 살아가고 싶다"던 그의 육성에서 답을 찾는다. 마코토는 퇴계 이황의 사상에서 출발해 일본으로 전파된 사상으로, '선악이나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뜻한다. 농림부 장관직 제의도 거절하면서 오로지 채소 종자 개발에 매달린 것이 이의 증거라는 것이다. 우장춘은 죽기 직전 병상에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은 후에야 그저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오열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먹는 무·배추의 종자를 생산해 자급자족을 가능케 했고, 병 없는 씨감자와 체계적 감귤 재배 기술도 그의 발명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이 아침의 인물]   '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장춘 박사

한국경제신문/문화/

 
입력 2013-08-10 00:29:07


대한민국 정부 수립 3년째였던 1950년 벽두부터 정부 산하 ‘우장춘 박사 환국촉진위원회’가 바빠졌다. 부랴부랴 호적을 만들어 보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3월 우 박사의 귀국이 이뤄졌다. 그가 도착한 부산항은 손 태극기를 흔드는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쓰시마섬을 내준다고 해도 우장춘은 내줄 수 없다.” 당시 대한민국에 우 박사는 그런 존재였다.

‘한국 농업의 아버지’ 우 박사는 1898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을미사변에 연루돼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이 아버지, 어머니는 일본인 사카이 나카다. 아버지가 피살돼 절에서 자란 소년 우장춘이 농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들어간 도쿄제국대 농학실과(전문대학)를 1919년 졸업하고 농림성 산하 농사시험장에 취직해 1937년 퇴직 때까지 18년간 육종 연구에 몰두했다. ‘조선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을 극복하고 1936년에 완성한 박사논문 ‘종(種)의 합성’은 일본은 물론 전 세계 농학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서로 다른 종이 있음으로써 또 다른 종이 탄생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이론적으로 보강한 논문이었다.

 

우리 정부의 끈질긴 설득과 본인의 결심으로 영구 귀국한 그는 초대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씨앗 독립’을 위한 숱한 업적을 남겼다. 강원도에 무균 씨감자를 보급해 전후 식량난을 덜었고, 제주에는 감귤 대량재배의 길을 열었다. 전국 도로변을 코스모스로 수놓은 것도 우 박사다. ‘씨 없는 수박’도 국내에 처음 소개했다.

우 박사는 일본에 두고 온 처자식을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다. 모친상에도 출국허가를 받지 못해 한이 더 커졌던 탓일까. 악화된 위·십이지장궤양을 안고 떠난 출장길에 복통을 호소하며 입원해 세 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61세, 54년 전 오늘이다. 

 

 

 

 

1. 우장춘 박사에 대하여

    - 우장춘 박사(1898년 4월 9일 출생 - 1959년 8월 10일 사망)은 한국의 농학자로서, 겹꽃 피튜니 꽃의 육종 합성에 성공하여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 하였고, 종의 합성설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육종학 연구에 전렴하여 육종 합성에 성공하고 씨없는 수박과 벼의 수도 이기작,등을 연구 하였으며

 

    -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부문상,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습니다

 

    - 1958년 농사원 원예 시험장장을 지냈으며, 연구소에서는 고무신 차림 이었기에 "고무신" 박사라고도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육공 사업과 우진 양성에 전념하다가, 대한민국 문화 포창을 받은후 1959년 8월 10일 지병(위 십이지장 궤양)으로 사망 하였습니다

 

 1) 내용

     -1898년 4월 9일 일본 도쿄에서, 아버지 "우범선"과 일본인 어머니 "사카이 나카" 사이에서 2남중, 장남으로 출생, 1916년 일본인 들이  명문 대학으로 동경 하던  일본 도쿄 재국대학 농학과에 입학, 대학 졸업후, 일본 농림성 농사 시험장 직원 취직, 1936년 5월 일본 도쿄 제국대학으로 부터 "종의 합성" 이란 논문으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결혼을 위해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면서 "스나가  나가하루"  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지만, 논문 작성시 그 이름의 성은 "우"를 사용 하였습니다

 

   - 1950년 3월 8일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 농업 연구소장, 농사원 원예시험장, 중앙 원예 기술원장, 학술원 화원 등을 지냈으며, 과학자로서 육종 사업과 후진 양성에 전념 하였습니다

 

 2) 저서

    <<십자화과의 게놈분석과 유체의 합성>>

 

 3) 연구 업적

    -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 강원도 감자 개발

 

    -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 한국 환경에 맞는 배추 개발

 

    - 폐튜니아를 화초로 가꿀수 있도록 겹꽃 개량종 개발

 

 4) 참고 사항

     특히, 우장춘 박사 하면 "씨없는 수박"을 만든 농학자로 유명 하지만,  씨없는 수박을 처음 개발한 사람은 일본 교토 대학교의 "기하라 히토시" 박사(1943년 개발) 입니다, 우장춘 박사는 그 당시 열악한 농업 환경속의 농민과 일반대중 그리고 정치인 등, 기타 사람들에게 육종학과 농업 신기술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하여 "씨없는 수박" 종자를 만들어 재배하여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출처]다음 지식

 

우장춘 박사의 대한 소개

 

우장춘(禹長春)

 

한국의 농학자. 겹꽃 피튜니아꽃의 육종 합성에 성공하여 다윈의 진화론을 수정하였고 종의 합성설로 농학 박
사 학위를 받았다. 육종학 연구에 전심하여 채소 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벼의 수도이기작 등을 연구하였
다. 1898년 4월 9일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을미사변(乙未事變)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禹範
善)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일본 여인 사카이 나카[酒井仲]이다. 아버지 우범선은 개화파로서 한국 훈련대 제2
대대장으로 근무하였고 1903년 살해되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극빈한 가정 형편으로 도쿄의 어느 고아
원에 들어갔다가 경제사정이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廣島]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중학교까지 마치
고 1916년 도쿄제국대학 실과[東京帝國大學實科]의 농학과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1919년에 졸업하였다. 1923
년 일본인 와타나베 고하루[渡邊小春]와 결혼하였는데 당시 고하루의 집안에서는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였고
고하루는 그녀의 집안과 의절하며 지냈다. 1926년 일본인의 양자가 되어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이라는 일
본이름을 얻었고 그의 자녀도 스나가 성을 따랐다. 하지만 우장춘은 우씨 성을 사용하였다.

 

1919년 일본 농림성 농사시험장에 취업하여 1년 후 기수(技手)가 되고 육종학(育種學) 연구에 착수, 1930년
겹꽃 페튜니아(Petunia) 꽃의 육종합성에 성공 등으로 인정받는 연구자가 되었다. 유채와 배추과 작물의 게놈
(Genome)을 분석하였고 세계 최초로 자연종을 합성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종(種)의 합성설(合成說)로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장춘은 박사 논문으로 일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
전 육종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고등관 기사가 되지 못했고 1937년 농사시험장을 사직하자 기사(技
師)의 임명장만 받았다. 교토[京都] 다키이[瀧井]에 위치한  종묘회사 연구농장장[瀧井硏究農場長]으로 근무
처를 옮겼으며 이때부터 한국인들과 교류가 있기도 하였다. 일본이 패망하고 8·15광복이 되자 다키이 농장을
그만두었다. 이후에는 교토 근처의 장법사(長法寺)에서 농장을 경영하려고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947년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일어났고 지인들이 그를 설득하여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 결과 1백
만엔을 모금하여 우장춘에게 전달하였다. 1950년 3월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고 귀국하여 한국 농업 연구 소
장에 취임하였다. 한국 정부에서는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그는 과학자로서 육종 사업과
후진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우장춘은 강연시에 한국어를 잘 몰라서 일본어로만 소통하였고 이로 인해 친일파
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1952년 농업 재건 임시 위원회 위원, 이듬해 임시 농업 지도 요원 양성소 부소
장, 같은 해 중앙 원예 기술원 원장을 역임하고 다음 해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채소 종자의 육종합성에 성공하고 벼의 수도이기작(水稻二期作)을 연구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씨 없는 수박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는 농업 과학 협회에서 개발된 여러 작물 종자들을 보급하기 위해 홍보용으로 만든 것이었
다. 씨 없는 수박을 처음 만든 사람은 일본인이며 기하라 히토시가 1943년에 만들었다. 우장춘 박사는 이것을
한국에서 만들어 시연하였기에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사람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1957년 부산시 제1회 문화상 과학부문상을 받았다. 1958년 농사원 원예시험장장이 되고, 1959년 두 번째로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의 연구소는 학생들의 수학여행 견학코스가 되기도 하였고 연구소에서는 늘
고무신 차림이었기에 '고무신 박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국에 온 지 9년이 되던 1959년 8월 10일 지병으
로 사망하였다. 저서에 《십자화과(十字花科)의 게놈(Genom) 분석과 유채(油菜)의 합성》이 있다.


 

연구 성과

 

1. 바이러스 감염에 취약한 강원도 감자를 개량했다.
2. 코스모스 길거리를 아름답게 하는 꽃으로 권했다.
3. 일본 재래 배추와 양배추를 교배, 한국 환경에 맞는 배추를 개발했다.
3. 제주도 환경에 적합한 감귤 재배를 권했다.
4.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 수 있도록 겹꽃 개량종을 개발했다.
5. 종의 합성이론을 제창하여 진화론의 새 지평을 이루었으며, 이 내용은 현대 유전학 교과서에서도 중요한
내용으로 소개되고 있다.
6. 유채를 일본으로부터 도입하여 제주도에서 재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 인터넷 검색 및 편집

 

 

 ...일본 세라믹칼로 유명한 '교세라'의 창업자 이나모리 가즈오는 우장춘의 사위로 4녀 아사코와 결혼했다.

 

 

유채꽃 1

 

유채꽃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