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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명필 한석봉 알아본 선조 '최고의 후원자 되다'/선조어서사송언시밀찰첩(보물 제941호) 2장

 

[명필 한석봉 알아본 선조 '최고의 후원자 되다']

 

2014년 8월14일 목요일 오전 10시~12시...'서현문화의 집'에서 성남학아카데미 강의를 들었다.

주제는 '한국서예문화의 역사' 이고...강사는 '손환일' 경기대 연구교수 이다.

서예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으므로 강의를 들으면서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ㅠㅠ...^-^  

 

옛날에는 '초서'로 천자문을 배웠는데...선조 때 한석봉의 천자문으로 인해 '초서'로 배우지 않게 되었다는 강의를 들었는데...

솔직히 말해..."초서/해서/행서/예서/전서" 등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ㅠㅠ...^-^ 

 

이에 인터넷 검색으로 글씨체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명필 '한석봉'에 대한 이야기가 재미있어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ㅎㅎ...^-^

 

- 2014년 8월15일 금요일...수산나 -    

 

 

 

名筆 한석봉 알아본 선조
최고의 후원자 되다


 



 

 

“군수 직무 태만·몸가짐 제멋대로”
사헌부의 잇단 파직 건의에도 한 번도 처벌하지 않아
명나라에서 석봉체 최고 인기…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고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 호평

 

떡장수 홀어머니와의 일화로 유명한 조선시대 4대 명필(名筆) 중 한 명인 석봉(石峯) 한호(韓濩·1543년 중종38년~1605년 선조38년)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선조16년 윤2월 1일자에서다. 관리의 기강을 감찰하는 책임을 맡고 있던 사헌부에서 “와서별제(瓦署別提) 한호는 용심(用心)이 거칠고 비루한 데다 몸가짐이나 일 처리하는 것이 이서(吏胥·이방)와 같아, 의관(衣冠)을 갖춘 사람이 그와 동렬(同列)이 되기를 부끄러워하니 체직하소서”라며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 대해서는 약간의 설명을 요한다. 먼저 ‘와서’라는 기관은 공조 소속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기와를 굽던 곳이었다. 별제는 종6품으로 실무자 중에서는 최고위직이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제로 사헌부가 상소한 대로 한호라는 사람의 됨됨이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다. 또 하나는 명종22년(1567년) 진사시에 급제한 것이 전부인 한호가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선조가 ‘발탁’하자 중앙관리들이 격(格)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감을 표시했을 가능성이다. 특별한 잘못보다는 용심, 비루, 몸가짐 등을 언급한 데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은 둘 다였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하게 사헌부의 상소를 물리쳤다. 그 자신이 명필의 수준에 이르렀던 선조는 누구보다 한호의 글씨를 아꼈기 때문이다.

 

진사시에 급제한 후 한호는 사자원(寫字員), 즉 글씨를 쓰는 요원으로 일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여말선초에는 선비들이 주로 조맹부의 송설체를 즐겨 썼다. 한호, 윤순, 김정희와 함께 흔히 조선 4대 명필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안평대군이 잘 썼던 글씨가 바로 조맹부의 송설체였다. 반면 한호는 조맹부체보다는 왕희지체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꿈에 왕희지가 글씨를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색깔을 가미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것이 바로 석봉체다.

 

선조 이상으로 한호의 글씨를 좋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임진왜란 때 조선을 찾은 명나라 장수와 사신이었다. 특히 명 조정 내의 고위직 인사들이 한호의 글씨를 좋아했기 때문에 조선에 온 장수나 사신은 상납을 위해 한호의 글씨를 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한호는 명나라에 가는 사신단에 필사요원, 즉 사자관으로 수행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도 글을 많이 남겼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한호가 북경(北京·베이징)에 갈 때 어느 중국 사람 집에서 이백의 시 하나를 흰 벽에 써 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24년이 지나고 나서 마침 그 집에 들렀는데 먹 기운이 새것과 같았다. 이는 중국 사람이 한호의 글씨를 매우 소중히 여겨 아끼고 보호했던 까닭이다”라고 적고 있다.

 

특히 당시 명나라 최고의 문학가였던 왕세정 같은 인물은 한호의 글씨를 보고서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라고 평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영의정 이항복으로부터 왕세정의 이 같은 극찬을 전해들은 선조의 반응이다.

 

“모든 일은 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왕세정의 병통은 진실하지 못한 데가 있다. 한호는 액자(額字·현판에 쓰는 큰 글씨)는 잘 쓰지만 초서와 예서는 그의 특장이 아니다. 아마 왕세정이 그렇게 말했다면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게다.”

 

실제로 한호는 초서나 예서보다는 실용서체인 해서나 행서 등에 능했다. 한호의 장단점을 선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대 첫손 꼽히는 명나라 문인이 극찬을 했다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보내는 외교문서를 석봉체로 써 달라고 요구할 만큼 한호의 글씨를 아끼는 사람이 많았다.

 

전쟁이 끝나자 선조는 한호를 가평군수로 임명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맘껏 글씨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였다. 대신 한호는 관리로서 재능은 없었던 듯하다. 사헌부에서는 연일 한호가 수령으로서 직무를 태만히 하는 바람에 백성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며 그를 파직할 것을 건의했다. 선조는 조사해볼 것을 명하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았다. 선조의 한호에 대한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선조37년(1604년) 3월 대마도 도주가 편액을 요청하자 예조에서는 당시 흡곡현령으로 있던 한호에게 쓰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선조에게 물었다. 이에 대한 선조의 답이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수 있겠는가? 서울에 있는 아무나 보고 쓰도록 해서 보내주어라. 대명외교문서에만 한호의 글씨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선조로서는 아직 강화(講和)도 맺지 않은 대마도 도주에게 글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 선조는 임진왜란 때 자신을 의주까지 호종했던 호종공신과 왜적을 맞아 전공(戰功)을 세웠던 선무공신을 책봉했다. 공신도감에서는 공신의 등급을 정하고 이들에게 일종의 인증서인 교서(敎書)를 내렸다. 당연히 한호는 교서를 쓰는 일에 동원되었다. 그런데 한호는 빼어난 글씨와 달리 행실에는 실제로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이때도 사헌부에서 한호를 파직해야 한다는 상소가 올라왔는데 교서를 쓰기 싫어하는 내색을 보이는가 하면 일부러 글씨를 잘못 쓰는 등 일종의 태업을 벌였다는 것이다. 역시 선조의 답변은 단호했다. 한호가 글씨를 쓰기 싫어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고의로 오서까지 했다는 것은 더욱 이해가 안 간다. 이번에 교서를 한호 혼자 쓰게 했어도 한 번에 쓸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아마도 잘못 전해진 것일 듯싶다. 이후 일종의 공신증이라고 할 수 있는 녹권을 쓰는 일에도 한호는 동원되었는데 이 때도 한호는 천재로서 자존심 때문이었는지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가 다시 사헌부의 탄핵을 받는다. 결국 한호는 흡곡현령에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조는 공신 녹권을 쓰느라 고생한 인물들에게 어린 말 한 필씩을 포상으로 내리는데 거기에 한호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한호는 이런 논란이 있은 다음해 1605년(선조38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1606년 8월 6일 선조는 명나라 사신을 한양에서 의주까지 접대하는 원접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대제학 유근을 위로차 불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한호에 대해 언급한다. 당시 대제학이 원접사를 맡은 이유는 조선을 찾는 사신 중에는 시를 좋아하는 인물이 많아 이 쪽에서도 시문에 능한 사람을 뽑아서 보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조가 묻는다. 사신이 한양에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유람할 때 우리 재상이 지은 시는 모두 직접 지은 것인가? 이에 유근은 직접 지은 것도 있고 자신이 대신 지어준 것도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은 글씨 획이 매우 약하고 중국은 필력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글씨에 능통한 사람으로는 한호만한 사람이 없었으나 그도 미진한 점이 많았다.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은 작은 부채에 난정기(蘭亭記)를 썼는데 작은 글씨가 매우 정묘하였다. 우리나라의 글씨에 능통한 자라도 어찌 그에 미치겠는가?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요약) 선조가 한호의 글씨를 아꼈다는 내용

1. 명종22년(1567년) 진사시에 급제한 것이 전부인 한호가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만으로 선조가 ‘발탁’하자 중앙관리들이 격(格)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거부감을 표시했을 가능성이다. 특별한 잘못보다는 용심, 비루, 몸가짐 등을 언급한 데서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실은 둘 다였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하게 사헌부의 상소를 물리쳤다. 그 자신이 명필의 수준에 이르렀던 선조는 누구보다 한호의 글씨를 아꼈기 때문이다.

 

2. 전쟁(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한호를 가평군수로 임명했다. 경치 좋은 곳에서 맘껏 글씨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해서였다. 대신 한호는 관리로서 재능은 없었던 듯하다. 사헌부에서는 연일 한호가 수령으로서 직무를 태만히 하는 바람에 백성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며 그를 파직할 것을 건의했다. 선조는 조사해볼 것을 명하면서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았다.

 

3. 선조의 한호에 대한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선조37년(1604년) 3월 대마도 도주가 편액을 요청하자 예조에서는 당시 흡곡현령으로 있던 한호에게 쓰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선조에게 물었다. 이에 대한 선조의 답이다. 닭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쓸 수 있겠는가? 서울에 있는 아무나 보고 쓰도록 해서 보내주어라. 대명외교문서에만 한호의 글씨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선조로서는 아직 강화(講和)도 맺지 않은 대마도 도주에게 글을 보낸다는 것 자체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4. 선조가 묻는다. 사신이 한양에 머물면서 이곳저곳을 유람할 때 우리 재상이 지은 시는 모두 직접 지은 것인가? 이에 유근은 직접 지은 것도 있고 자신이 대신 지어준 것도 있다고 답한다. 그러면서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은 글씨 획이 매우 약하고 중국은 필력이 강하다. 우리나라에서 글씨에 능통한 사람으로는 한호만한 사람이 없었으나 그도 미진한 점이 많았다.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주지번은 작은 부채에 난정기(蘭亭記)를 썼는데 작은 글씨가 매우 정묘하였다. 우리나라의 글씨에 능통한 자라도 어찌 그에 미치겠는가?

 

(요약)

1. 진사시에 급제한 후 한호는 사자원(寫字員), 즉 글씨를 쓰는 요원으로 일하면서 명성을 날렸다. 여말선초에는 선비들이 주로 조맹부의 송설체를 즐겨 썼다. 한호, 윤순, 김정희와 함께 흔히 조선 4대 명필의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안평대군이 잘 썼던 글씨가 바로 조맹부의 송설체였다. 반면 한호는 조맹부체보다는 왕희지체를 좋아했다. 어린 시절 꿈에 왕희지가 글씨를 주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왕희지체를 기본으로 하여 자신의 색깔을 가미했다는 평을 듣는다. 그것이 바로 석봉체다.

 

2. 특히 당시 명나라 최고의 문학가였던 왕세정 같은 인물은 한호의 글씨를 보고서 “목마른 말이 냇가로 달려가고 성난 사자가 돌을 내려치는 형세”라고 평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영의정 이항복으로부터 왕세정의 이 같은 극찬을 전해들은 선조의 반응이다.

 

“모든 일은 다 마음에서 이루어지는데 왕세정의 병통은 진실하지 못한 데가 있다. 한호는 액자(額字·현판에 쓰는 큰 글씨)는 잘 쓰지만 초서와 예서는 그의 특장이 아니다. 아마 왕세정이 그렇게 말했다면 다른 뜻이 있어서일 게다.”

 

실제로 한호는 초서나 예서보다는 실용서체인 해서나 행서 등에 능했다. 한호의 장단점을 선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당대 첫손 꼽히는 명나라 문인이 극찬을 했다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보내는 외교문서를 석봉체로 써 달라고 요구할 만큼 한호의 글씨를 아끼는 사람이 많았다. 

 

 

 

 

[고미술이야기] (29) 한석봉의 '석봉서' 3첩
김영복 KBS 진품명품 감정위원


조선시대 3대 서예가 하면 보통 안평대군 이용(1418~1453), 석봉 한호(1543~1605), 추사 김정희(1786~1856)를 말한다.

누가 처음 이 말을 했는지는 모르나 조선시대에서 초기, 중기, 후기에 한 사람씩 제대로 평가한 것 같다. 또 시대마다 그 당대에 알맞은 글씨가 나오게 마련인데 이 세 사람은 그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글씨를 썼다. 안평은 조선 초기 왕권의 틀을 잡는 시기에 남들이 함부로 범접하기 어려운 송설체를 써서 힘이 넘치고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위엄을 보여줬다면, 한석봉은 조선의 기틀을 완성하고 내외적으로 복잡다난한 시기에 사자관(寫字官)으로서 외교문서를 비롯해 행정적인 글씨에 적합한 왕희지 계통의 둥글둥글하면서도 반듯한 요즈음의 인쇄체와 비슷한 글씨를 잘 써서 당시 국왕인 선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다. 또 추사는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학술뿐만 아니라 글씨의 다양성과 변화의 무궁함으로 서예계의 삼차원을 만든 사람이다.



그런데 안평대군은 물론이고 석봉과 추사가 조선 3대 서예가로 불리게 된 이유는 타고난 재질에도 있겠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공부와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석봉은 안평 같은 왕자나 추사 같이 대단한 양반가 출신도 아닌 중인집안의 평범한 사람으로 피나는 노력을 통해 글씨 하나로 집안을 일으킨 그야말로 입지전적 인물이다. 일개 중인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이나 인품이 당시 제일인 인물들과 교유할 수 있었으니 유사 이래로 글씨 하나로 이렇게 대우를 받은 사람은 석봉을 제외하고 다시는 없을 것이다.

석봉은 출신이 낮기 때문에 그의 글씨 품격도 높지 못하다는 평을 하기도 하나 글씨란 출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그의 직업이 사자관이었으므로 그의 과업이 정서(正書)와 소자(小字)를 일상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글씨도 사무적이며 규격화된 글씨를 주로 생산해낼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감상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도 그의 직업적 영향이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소해(小楷)는 워낙 많이 썼기 때문에 그야말로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중국의 학자 주지번(朱之蕃: 1546-1624)이 “석봉의 글씨는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과 서로 갑을을 다툴 것이다.”고 한 것은 결코 예의적인 칭찬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석봉의 서예사상(書藝史上) 위치는 실로 한 시기를 대표하는 우뚝한 존재이며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석봉의 글씨에 대하여는 글씨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아는 사람이 적다. 그것은 현재까지 석봉의 글씨가 천자문이나 몇몇 탁본첩 외에는 별로 간행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석봉이 시도 잘하고 전하는 서간(書簡)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장도 매우 훌륭하였으나 그러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의 사후에 문집(文集)이 간행되지 않은 것에도 연관성이 있다.

여기에 나온 ‘석봉서’천지인(天地人) 3첩(사진)은 지금까지 발견된 석봉의 여러 글씨 첩 중에서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석봉의 글씨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총 24종 106장으로 되어있으며 아주 작은 해서부터 주먹만 한 크기의 초서에 이르기까지 해서, 행서, 행초서, 초서 등 각체가 각기 다른 크기로 써 있다. 이 세 첩의 글씨를 보면 그동안 우리가 잘알지 못했던 석봉의 진면목을 재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자료가 진즉에 나왔더라면 석봉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으리라 여겨진다. 또 이 첩에는 당대 최고의 시인 소리를 듣던 오산 차천로(五山 車天輅)가 석봉에게 준 장편의 글(贈石峯, 七言排律四十韻)이 들어있는데 이 글만 봐도 당시 석봉의 위치가 어떠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족) 높은 예술적,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7억원'이라는 높은 감정가가 매겨진 이 서첩은 서울에 거주하는 의뢰인 임모씨의 시댁에서 대대로 보관하고 있다. ...'TV쇼 진품명품' 한석봉 서첩-감정가 7억원

☞(요점)

여기에 나온 ‘석봉서’천지인(天地人) 3첩(사진)은 지금까지 발견된 석봉의 여러 글씨 첩 중에서 가장 뛰어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석봉의 글씨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총 24종 106장으로 되어있으며 아주 작은 해서부터 주먹만 한 크기의 초서에 이르기까지 해서, 행서, 행초서, 초서 등 각체가 각기 다른 크기로 써 있다. 이 세 첩의 글씨를 보면 그동안 우리가 잘알지 못했던 석봉의 진면목을 재발견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천하의 한석봉 붓이 삐끗했다… 도산서원 현판에 '도(陶)'字 쓰면서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예술의전당 '목판 특별전'

1575년 선조(1567~1608)가 당대 최고 명필 한석봉(1543~1605)을 불렀다. 사액(賜額·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 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르는 대로 받아만 쓰라고 했다. '원'-'서'-'산' 한석봉은 열심히 받아 썼다. 마지막 글자는 '도'. 그제야 자신이 쓰는 것이 '도산서원', 퇴계 이황(1501~1570)을 기린 서원의 현판<사진>임을 알았다. 선조는 '천하의 한석봉도 도산서원 현판이란 사실을 알면 붓이 떨려 현판을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단어를 거꾸로 부른 것이었다.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자가 오른쪽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듯 보이는 유래다. 지금 도산서원에 걸려 있는 현판은 모사본이다.


	천하의 한석봉 붓이 삐끗했다… 도산서원 현판에 '도(陶)'字 쓰면서

이 현판 원본이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한다. '목판, 선비의 숨결을 새기다' 특별전. 27일부터 내달 22일까지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과 예술의전당이 공동으로 연다. 무료이며 오전 11시~오후 8시까지 2시간 간격으로 전문 연구원이 해설도 곁들인다.

전시품들은 안동 국학진흥원의 장판각이 2001년 문을 연 뒤부터 모은 목판 6만4000여점 중에서 엄선한 것들이다. 붓글씨로 이름났던 선조의 초서 어필, 추사 김정희의 '화수당(花樹堂)' 현판을 비롯해 유명 서원과 집, 정자에 걸었던 당대 명필들의 친필 현판, 17~20세기 영남지역에서 활동한 유학자들의 문집과 족보·유교 경전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책판, 시나 경구를 새긴 서판 등 총 120여점이다.

양녕대군의 초서 '후적벽부(後赤壁賦)'는 2008년 남대문 화재 때 훼손됐다 복구된 현판 '숭례문' 이외에는 유일하게 전해 오는 것이다. 안동 풍산의 체화정(棣華亭)에 걸려있던 단원 김홍도의 '담락재(湛樂齋)' 현판은 김홍도의 글씨가 별로 전해오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02)580-1662

 

(요점)

1575년 선조(1567~1608)가 당대 최고 명필 한석봉(1543~1605)을 불렀다. 사액(賜額·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 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르는 대로 받아만 쓰라고 했다. '원'-'서'-'산' 한석봉은 열심히 받아 썼다. 마지막 글자는 '도'. 그제야 자신이 쓰는 것이 '도산서원', 퇴계 이황(1501~1570)을 기린 서원의 현판<사진>임을 알았다. 선조는 '천하의 한석봉도 도산서원 현판이란 사실을 알면 붓이 떨려 현판을 망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단어를 거꾸로 부른 것이었다.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자가 오른쪽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간 듯 보이는 유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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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필 한석봉의 글씨.

조선의 주자학을 확립한 퇴계 이황(1502~1571)은 "글씨의 법은 마음의 법을 따라 나오는 것이니 글씨를 쓸 때 유명한 글씨만을 따라해서는 안 된다"고 해 중국 글자체를 배끼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중국 서체를 모방하는 데 급급했지만 16세기에 접어들면 형태보다는 글씨에 담긴 정신에 더 큰 의미를 두는 서풍(書風)이 유행하면서 서체의 조선화가 이뤄지고 수많은 명필도 배출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오는 8월 24일까지 서화관 서예실에서 조선화된 서풍이 완성된 조선 중기(16~18세기)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선비와 왕들의 글씨 작품 30점을 전시한다.

이 시기, 부드럽고 가는 필체의 중국 조맹부(13세기 북송대 서예가) 송설체가 재해석되고 단정한 느낌의 왕희지체(4세기 동진의 왕희지 글씨) 등의 옛 글씨가 다시 부상하면서 한호의 석봉체가 등장하는 등 글씨체가 중국에서 벗어나 조선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흘려 쓰는 초서에서는 황기로(1521~1567), 양사언(1517~1584)이 두각을 드러냈고 기하학적 느낌을 주는 전서에서는 허목(1595~1682)이 중국과 다른 특유의 미수체를 선보인다. 이들은 형식에 치우치기보다 성리학적인 의리와 명분 등 그들이 추구했던 정신세계를 글씨에 표현하고자 했다.
 



전시에는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서예가로 석봉체를 따라 단아한 모양의 해서를 잘 쓴 오준(1587~1666)의 `오준의 당나라 유장경 시`, 왕희지와 회소의 필법을 바탕으로 독자적 글씨체를 확립한 윤순거(1596~1668)의 `윤순거 송나라 소옹 시`가 소개된다.

왕의 글씨로는 성종과 선조가 쓴 작품을 볼 수 있는데 성종은 부채면에 단아하게 명심보감, 중용 등에서 교훈이 될 만한 글귀를 뽑아 적어 왕도정치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던 성종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남인의 거두이자 전서의 대가였던 허목의 인장(도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다.

[배한철 기자] 성종·양사언…조선 명필을 본다...기사입력 2014.03.09 17:28:48 |

 

 

 (요점)

부드럽고 가는 필체의 중국 조맹부(13세기 북송대 서예가) 송설체가 재해석되고 단정한 느낌의 왕희지체(4세기 동진의 왕희지 글씨) 등의 옛 글씨가 다시 부상하면서 한호의 석봉체가 등장하는 등 글씨체가 중국에서 벗어나 조선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흘려 쓰는 초서에서는 황기로(1521~1567), 양사언(1517~1584)이 두각을 드러냈고 기하학적 느낌을 주는 전서에서는 허목(1595~1682)이 중국과 다른 특유의 미수체를 선보인다. 이들은 형식에 치우치기보다 성리학적인 의리와 명분 등 그들이 추구했던 정신세계를 글씨에 표현하고자 했다.

 

 

 

[한국서예 ‘筆神’들이 한자리에]....기사입력 2011-12-27 00:10

 

어머니는 떡을 썰고, 아들은 글씨를 썼다는 석봉 한호(韓濩,1543 ~1605)의 일화는 유치원생도 알고 있을만큼 유명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석봉체’를 제대로 볼 기회가 드물다. 한국서예의 미학 기준을 제시한 통일신라 김생(金生, 711 - 790이후)은 ‘해동서성(海東書聖)’, ‘필신(筆神)’으로 추앙받지만, 여전히 한국서예는 왕희지로 대표되는 중국서예의 아류격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에, 김생 탄생 1300주년을 맞아 예술의전당은 경상북도와 함께 김생을 시작으로 고려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ㆍ한석봉ㆍ김추사까지를 큰 줄기로 해, 선조ㆍ 영조ㆍ정조 등 어필(御筆), 이황ㆍ송시열 등 도학자(道學者) 등 우리 서예역사 필신(筆神)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특별전을 마련했다.

선조의 어명으로 한석봉이 직접 쓴 도산서원 현판 원본과, 한국서예 ‘종결자’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칠언시 행서8곡병(七言詩 行書八曲屛)’ 등을 감상 할 수 있는 ‘김생 탄생 1300주년 한국서예사 특별전30’ 은 내년 2월 12일까지 ‘필신(筆神)-김생에서 추사까지’ 를, 2월 12일부터 3월 4일까지 ‘도를 듣다(聞道) - 김생과 권창륜·박대성, 1300년의 대화’ 로 1,2부로 나뉘어 진행된다.

전시 기획담당자인 예술의전당 전시사업부의 이동국 차장은 “한국서예의 전형 김생부터 조선말기 추사까지 거장들의 필적을 통해 한국서예가 중국서예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를 보는 것이 목적” 이라고 전했다.

한국 서예의 ‘필신’들이 총출동된 이번 특별전에는 현재 도난상태인 국보238호인 안평대군의 ‘소원화개첩’과 같은 작품이 담긴 ‘대동휘적첩(大東徽蹟帖)’과 국가지정 보물 13여점을 포함한 한국서예걸작 30점, 조선시대 김생 계승관련 유물 20여점 등 총 50여점이 전시된다.



헤럴드 팟 캐스트<박동미 기자@Michan0821>/pdm@heraldcorp.com  



 

김정희<행초팔곡병行草八曲屛> 부분 지본묵서紙本墨書, 56.5 X 36.5cm(8), 신일석 소장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요점)

한국서예의 미학 기준을 제시한 통일신라 김생(金生, 711 - 790이후)은 ‘해동서성(海東書聖)’, ‘필신(筆神)’으로 추앙받지만, 여전히 한국서예는 왕희지로 대표되는 중국서예의 아류격으로 치부되곤 한다.

이에, 김생 탄생 1300주년을 맞아 예술의전당은 경상북도와 함께 김생을 시작으로 고려 탄연, 조선의 안평대군ㆍ한석봉ㆍ김추사까지를 큰 줄기로 해, 선조ㆍ 영조ㆍ정조 등 어필(御筆), 이황ㆍ송시열 등 도학자(道學者) 등 우리 서예역사 필신(筆神)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특별전을 마련했다.

 

 

 

`명필` 한석봉 천자문 보물됐다 ]...기사입력 2010.08.24 16:25:58

송광사 관음보살좌상 등 5점 지정

 

조선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 셋째아들 경안군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불상과 복식이 새롭게 보물로 지정됐다. 또 명필 한석봉이 남긴 유일 초간본인 `천자문` 등 총 문화재 5건이 이번에 보물로 확정됐다. 두 달 전 보물 지정이 예고됐던 것들이다.

문화재청은 24일 송광사 관음전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과 복장유물 35점`은 당시 왕조의 불사답게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혜희(慧熙)와 금문(金文) 작품이라며 보물 지정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불상 안에 밀봉돼 보관됐던 섬유류 복식은 경안군이 입었던 옷으로 쪽빛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 당시 직물과 염색, 민속을 연구하는 데 중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 유물들은 24~26일 사흘간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특별 전시된다.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된 한석봉(1543~1605ㆍ석봉한호) `천자문(千字文)`은 개인 소장품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초간본(初刊本)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지금까지 한국에는 중판본은 있었지만 한석봉 필체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았다.

천자문은 선조 16년(1583)에 처음 간행된 이후 왕실과 관아 사찰 개인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조선시대 천자문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전파돼 초학자가 한자와 글씨를 학습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세조가 직접 구결(口訣)을 달아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묘법연화경(언해) 권 1ㆍ4`는 보물 1010-2호로 지정됐다.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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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봉 천자문" 초간본

 

한석봉의 천자문(千字文)

 

 

(요점)

명필 한석봉이 남긴 유일 초간본인 `천자문` 등 총 문화재 5건이 이번에 보물로 확정됐다.

보물 제1659호로 지정된 한석봉(1543~1605ㆍ석봉한호) `천자문(千字文)`은 개인 소장품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초간본(初刊本)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지금까지 한국에는 중판본은 있었지만 한석봉 필체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초간본은 전해지지 않았다.

천자문은 선조 16년(1583)에 처음 간행된 이후 왕실과 관아 사찰 개인에 의해 여러 차례 간행되면서 조선시대 천자문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전파돼 초학자가 한자와 글씨를 학습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선조어서사송언시밀찰첩(보물 제941호) 1...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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