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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

[단/역사]과부와 이혼녀 천국 고려, 왕들도 이혼녀 과부와 결혼(2015.5.9.토) / 능소화 4장

 

 

  • 과부와 이혼녀 천국 고려, 왕들도 이혼녀 과부와 결혼

     

  • 장대성
    전 강릉영동대 총장
    E-mail : dschang28@hanmail.net
    서울서 성장해 경기고와 한국외국어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예탁결..

 

1. 시집살이는 중국 주자가례의 지침으로 조선 개국세력이 받아들여

정도전, 조준, 배극렴, 권근 등 조선 개국세력은 주자학과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중요시한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면 여인은 혼인하면 음이 양을 따르듯이 남자의 집(시집)으로 따라가서 남자 부모를 받들고 자녀를 양육해야 함은 물론 정절을 지키고 시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

조선 개국세력은 고대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혼인관습인 장가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인해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오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중국 주자가례의 친영과 시집살이를 전 백성에게 강요했다. 그러나 백성은 물론 사대부들도 친영과 시집살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야 시집살이는 정착되나 신랑 집에서 혼례식 하는 친영은 조선말까지도 자리를 못 잡았다.

조선 3대 왕 태종도 왕이 되기 전 처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장남 양녕대군이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 와서야 세종의 이복 여동생 숙순옹주(태종의 13녀) 결혼 때 처음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신랑 윤평이 신부 숙순옹주를 시집으로 데려가 결혼하는 친영을 했다.

세종은 사대부들에게도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과 시집살이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사대부들도 잘 수용하지 않았고 임진왜란 후인 17세기가 지나 18세기경에야 일반화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시집살이 역사는 약 300여 년 정도로 추정되고 신사임당도 시집살이를 거의 하지 않았다.
영조와 정순왕후의 친영 혼례 행렬 중 왕후 행렬,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영조와 정순왕후의 친영 혼례 행렬 중 왕후 행렬, 영조 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2. 남자는 “머슴애”, 여자는 “계집애”란 말은 장가가는 것에서 유래하여

우리말에 남자 아이를 머슴애라고 하고 여자 아이를 계집애라 한다. 요즘 여인들은 계집 애라 하면 여자 아이를 비하하는 말로 듣고 화를 내는데 그 본뜻은 그렇지 않았다. 계집애의 원뜻은 제집 애이다. 혼인을 해도 제집에서 산다고 해서 여자를 제집 애라 불렀고 발음이 변화되어 제집이 계집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혼인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하였다. 이는 장인의 집(장가, 丈家)에 가서 산다는 뜻인데 머슴애는 신랑이 처가에서 마치 머슴처럼 일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부를 “가시버시”라 하는데 가시는 각시 즉 처(妻)이고 남편은 버시라고 했다. 버시 발음이 머시로 변화되고 머시에 애가 붙어 머시애 즉 머시(남편)가 될 아이를 머슴애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남자가 장가가서 사는 것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또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 하는데 신랑이 장인 집에 가서 처가 식구가 되고 열심히 일을 했다. 장인 집에 가 혼례식을 치르고 나서 신랑이 신부와 함께 자게 해달라고 애걸하면 신부 측 친척들과 동네 청년들이 신랑을 몽둥이로 때리거나 밧줄로 묶은 다음 발바닥 등을 때렸다.

한창 매를 맞은 후 겨우 신부와 감격스런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눌 수 있었다. 신부와 첫 날밤을 즐기기 위한 대가가 혹독했다. 매 맞지 않는 요즘 신랑들은 정말 행운아들인 것 같다. 남편은 신부와 합방 후 장인 집에서 아이들이 장성할 때까지 살다가 본가로 돌아갔다. 처가살이는 시집살이가 정착된 조선후기부터는 못난 남자들이 처가에 가 푸대접받으며 생활하는 뜻으로 바뀌었다.
신사임당의 친정(제집) 강릉 오죽헌(왼쪽),친정서 그림그리는 신사임당/박연옥 그림.
신사임당의 친정(제집) 강릉 오죽헌(왼쪽),친정서 그림그리는 신사임당/박연옥 그림.
3. 과거 중국에선 여인이 개에게 시집가면 개에게도 복종해야

중국식 혼인인 육례(납채, 문명, 납길, 납징, 청기, 친영)는 신랑 될 남자 측에서 신부 될 여자의 집으로 가서 중매쟁이를 통해 구혼을 시작하는데 주로 사회적 신분과 재산이 비슷한 집안에 혼인을 청한다. 양쪽 집안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면 좋은 날을 정해 혼례식을 한다.

혼인하는 날 신랑이 예물을 갖고 신부 집으로 가서 예물을 신부 집에 주고 신부를 신랑 집에 데려오는데 신랑이 문밖에 먼저 가 있다가 신부를 맞이하여 집안으로 들여 예식인 친영을 한다. 이 친영 절차가 끝나면 혼례식이 완료된다.

중국의 과거 혼인 풍습에선 남녀 연애는 절대 금지이고 처벌의 대상이었다. 혼인 전에 남녀가 얼굴을 본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 못할 일이고 혼인하는 날에야 겨우 두 사람이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시집은 남편 가족들이 사는 집을 뜻하는데 중국 혼인 관습에 따르면 여자는 시집 즉 남편의 집에 가 살면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 남편이 죽어도 재혼은 절대 불가능했다.

과거 중국에선 여자가 개에게 시집을 가면 개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정착된 한국의 시집살이는 중국의 관습과 비슷했으나 친영만은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화되지 않았다. <②편에계속>

 




충혜왕, 아버지 부인 몽골귀족 경화공주 성폭행하고 외숙모까지 능욕…고려말 왕실관계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4.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만들기 위한 중국 여인들의 전족

과거 중국은 여인들에게 잔혹하였다. 시집살이만 시키는 것이 아니고 여인들의 발을 묶는 전족(纏足)을 행해 여인들을 집안에 가두어 놓고 성 노리개로 삼았다. 전족은 북송 시대인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1000년간 행해진 악습이었다.

전족은 3세 정도 여자 아이의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네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접어 헝겊으로 단단히 감은 다음 아주 작은 신발에 신겨 발이 더는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전족을 할 때 어린 여아들의 고통은 말도 못하게 심하였다.

아래 사진과 같이 성숙한 여인이 되어도 발길이가 10~15 cm 정도밖에 안 되었고 당시 중국 남자들은 10cm 정도 길이의 여인 발을 가장 좋아했다. 전족은 귀족이나 부잣집에서 시작해 일반가정에도 번졌는데 가난한 집에서는 여인들이 노동해야 하기 때문에 전족하지 않았다. 차라리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여인들이 더 행복했을 것 같다.

전족을 한 여인들은 발이 너무 작아 뛰는 것이 전혀 불가능했다. 일상적인 보행도 발끝으로 서서 궁둥이가 뒤로 나오게 하여 좌우를 흔들어야 겨우 걸을 수 있었다. 이 궁둥이를 좌우로 실룩거리며 걷는 여인의 모습이 중국 남성들에게 성적 자극을 주었다.

전족을 한 여인들은 발끝으로 서서 뒤뚱뒤뚱 오리처럼 걸어 항문 괄약근과 질의 근육이 강해졌다고 한다. 즉 전족은 여성들의 성적 능력 향상을 위해 필요했다. 또한 전족을 하면 뛸 수가 없고 걸음걸이가 매우 느려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도 힘들어 여인들이 도망 못 가게 하는 목적도 있었다.

조선에서 이 전족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너무나 다행한 것이었으나 조선에서도 전족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여인들이 버선을 작게 만들어 신었고 발이 작은 여인을 귀인이라 했다.
전족을 한 발과 정상적인 발(왼쪽), 전족을 한 발과 신발.
전족을 한 발과 정상적인 발(왼쪽), 전족을 한 발과 신발.
5. 고려 성종 왕비는 딸 있는 과부, 충선왕은 부왕 죽자 부왕 여인과 결혼해

고려 때는 중국과 전혀 달라 남녀 간의 연애는 물론 이혼과 과부의 재혼도 허용되었는데 귀족과 왕족 사회도 그러했다. 재산상속은 남녀 구분없었고 남녀가 벌거벗고 개울에서 함께 목욕했다.

고려 6대 성종은 딸 하나를 출생한 과부 유씨(4대 광종의 딸, 왕건의 3왕후인 친할머니 유씨 성을 따름)를 첫째 왕비로 맞아 결혼했다. 고려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는 첫째 부인 정씨가 죽자 남편이 전투 중 전사한 과부 대씨(상장군 대집성의 딸)가 미인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녀와 즉시 재혼했다.

당시 대씨는 전남편과 사이에 장성한 아들 오승적이 있었다. 고려시대 여인의 결혼에는 과부든 이혼녀 등 크게 상관없었고 미모가 중요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의 제약이 없어 부인이 여러 명 있어도 첩의 개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에는 후궁제도가 없었고 왕의 부인들을 모두 비라 했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남편이 일찍 죽어 젊은 과부가 된 김씨와 1297년 재혼해 숙창원비로 봉했다. 그런데 이 숙창원비 김씨는 남편 충렬왕이 1308년에 죽었는데 제사 지내는 아들 충선왕과 눈이 맞아 성관계를 갖고 곧 재혼해 숙비가 되었다.

미모의 숙비 김씨는 남편 아들인 충선왕에게 온갖 교태와 아양을 떨어 왕을 사로잡은 관능적인 여인이었다. 또한 충선왕의 다른 부인 순비 허씨가 있었는데 그녀는 충선왕과 결혼 시 3남 4녀의 어머니였는데 애교와 방중술에 능란한 숙비 김씨와 경쟁에서 밀렸다.

충선왕의 아들 27대 충숙왕은 남편과 이혼한 권씨를 맞아 1335년 수비로 책봉했다.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의 아들 28대 충혜왕이 아버지의 부인인 몽골귀족 경화 공주와 수비 권씨를 강간했고 외숙모도 능욕했다. 남편 아들한테 강간당한 수비는 다음해인 1340년 죽었다.

어머니격인 경화 공주를 겁탈한 죄로 1343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간 후 경화 공주는 1년 뒤 죽었다. 고려 말 왕들이 대를 이어 개 같이 난잡한 성생활을 했으니 고려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
부왕 부인과 결혼한 충선왕(왼쪽), 부왕 여인들을 강간한 충혜왕.
부왕 부인과 결혼한 충선왕(왼쪽), 부왕 여인들을 강간한 충혜왕.
6. 고려와 조선의 결혼과 가족제도 연구해 한국적 가족시스템 창조해야

고려는 과부와 이혼녀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던 세계 유일의 문명국가였다. 그런데 한국에 아직도 중국관습인 시집살이의 잔재가 남아 일부 여성들이 명절 스트레스 등 고통을 받고 있다. 시집이 갑이 되어 을이 된 며느리를 압박하거나 괴롭히는 것은 한국 사회 선진화의 걸림돌이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어가는 서구식 핵가족 시스템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핵가족의 강조로 노부모들의 부양을 무시하게 되면 증가하는 노인들의 의료와 복지 문제를 국가가 모두 부담하게 되어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한국은 시집살이를 없애고 장단점들이 서로 많이 다른 고려, 조선의 결혼과 가족제도를 함께 연구하여 글로벌 시대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한국적 가족 시스템을 창조해야 한다. 그러면 노인문제와 육아문제, 여성 사회진출 등에 관련된 문제 등을 해결하며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요점)

 

1. 시집살이는 중국 주자가례의 지침으로 조선 개국세력이 받아들여
조선 개국세력은 고대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혼인관습인 장가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인해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오는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고 중국 주자가례의 친영과 시집살이를 전 백성에게 강요했다....

 

조선 3대 왕 태종도 왕이 되기 전 처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장남 양녕대군이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 때 와서야 세종의 이복 여동생 숙순옹주(태종의 13녀) 결혼 때 처음으로 주자가례에 따라 신랑 윤평이 신부 숙순옹주를 시집으로 데려가 결혼하는 친영을 했다.

세종은 사대부들에게도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과 시집살이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사대부들도 잘 수용하지 않았고 임진왜란 후인 17세기가 지나 18세기경에야 일반화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시집살이 역사는 약 300여 년 정도로 추정되고 신사임당도 시집살이를 거의 하지 않았다.

 

2. 남자는 “머슴애”, 여자는 “계집애”란 말은 장가가는 것에서 유래하여
 계집애의 원뜻은 제집 애이다. 혼인을 해도 제집에서 산다고 해서 여자를 제집 애라 불렀고 발음이 변화되어 제집이 계집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혼인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하였다. 이는 장인의 집(장가, 丈家)에 가서 산다는 뜻인데 머슴애는 신랑이 처가에서 마치 머슴처럼 일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부부를 “가시버시”라 하는데 가시는 각시 즉 처(妻)이고 남편은 버시라고 했다. 버시 발음이 머시로 변화되고 머시에 애가 붙어 머시애 즉 머시(남편)가 될 아이를 머슴애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3. 과거 중국에선 여인이 개에게 시집가면 개에게도 복종해야
혼인하는 날 신랑이 예물을 갖고 신부 집으로 가서 예물을 신부 집에 주고 신부를 신랑 집에 데려오는데 신랑이 문밖에 먼저 가 있다가 신부를 맞이하여 집안으로 들여 예식인 친영을 한다. 이 친영 절차가 끝나면 혼례식이 완료된다. 시집은 남편 가족들이 사는 집을 뜻하는데 중국 혼인 관습에 따르면 여자는 시집 즉 남편의 집에 가 살면 남편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며 남편이 죽어도 재혼은 절대 불가능했다....과거 중국에선 여자가 개에게 시집을 가면 개에게도 복종해야 한다는 말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 정착된 한국의 시집살이는 중국의 관습과 비슷했으나 친영만은 조선 후기까지도 일반화되지 않았다.

4. 남성들의 성적 노리개로 만들기 위한 중국 여인들의 전족
전족은 북송 시대인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1000년간 행해진 악습이었다....전족은 3세 정도 여자 아이의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네 발가락을 발바닥 쪽으로 접어 헝겊으로 단단히 감은 다음 아주 작은 신발에 신겨 발이 더는 자라지 못하게 하는 것인데 전족을 할 때 어린 여아들의 고통은 말도 못하게 심하였다....전족을 한 여인들은 발끝으로 서서 뒤뚱뒤뚱 오리처럼 걸어 항문 괄약근과 질의 근육이 강해졌다고 한다. 즉 전족은 여성들의 성적 능력 향상을 위해 필요했다. 또한 전족을 하면 뛸 수가 없고 걸음걸이가 매우 느려 집 밖에 나가는 것조차도 힘들어 여인들이 도망 못 가게 하는 목적도 있었다.

5. 고려 성종 왕비는 딸 있는 과부, 충선왕은 부왕 죽자 부왕 여인과 결혼해
고려시대 여인의 결혼에는 과부든 이혼녀 등 크게 상관없었고 미모가 중요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일부일처의 제약이 없어 부인이 여러 명 있어도 첩의 개념이 아니었다.

따라서 고려 왕실에는 후궁제도가 없었고 왕의 부인들을 모두 비라 했다. 고려 25대 충렬왕은 남편이 일찍 죽어 젊은 과부가 된 김씨와 1297년 재혼해 숙창원비로 봉했다. 그런데 이 숙창원비 김씨는 남편 충렬왕이 1308년에 죽었는데 제사 지내는 아들 충선왕과 눈이 맞아 성관계를 갖고 곧 재혼해 숙비가 되었다.

6. 고려와 조선의 결혼과 가족제도 연구해 한국적 가족시스템 창조해야
고려는 과부와 이혼녀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었던 세계 유일의 문명국가였다. 그런데 한국에 아직도 중국관습인 시집살이의 잔재가 남아 일부 여성들이 명절 스트레스 등 고통을 받고 있다. 시집이 갑이 되어 을이 된 며느리를 압박하거나 괴롭히는 것은 한국 사회 선진화의 걸림돌이다....장단점들이 서로 많이 다른 고려, 조선의 결혼과 가족제도를 함께 연구하여 글로벌 시대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한국적 가족 시스템을 창조해야 한다.

- 2015년 5월8일 금요일...오후 7시30분...수산나 -

 

 

역사기행(3) 허랑방탕 했던 세자 양녕대군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시절 세종대왕 만화에 나오는 양녕대군은 호탕한 성격으로 권력과 세상에 뜻이 없고 풍류를 즐기는 성격이라 세자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주유천하 하면서 살았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었을지 몰라도 여자에게는 관심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아 탈이었다.

 
실록과 기록이 전하는 양녕과 전승해 내려오는 양녕의 모습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태종실록에 실린 양녕대군에 관한 기록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태종실록이 세종 때 편찬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종의 왕위계승 정당성을 위해서 폐세자인 양녕대군의 평가에 인색할 수 밖에 없다. 역사 기록은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세조실록에 기록된 양녕대군 기사도 대부분 부정적이다. 참고로 그는 오래 살았다. 1394년(태조 3년)태어나 1462년(세조 8년)까지 68세를 살았으니 장수한 셈이다. 양녕이 죽고난 후 기록된 세조실록도 그에 대해 인색한 평을 한 것을 보면 그가 양광(佯狂 일부러 미친척)하며 동생에게 세자를 양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듯 하다. 정사나 야사나 공통된 양녕의 평은 사냥과 여색을 좋아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부를 싫어해 세자시강원의 계림군 이래를 원수처럼 미워했다. “이래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해진다. 꿈속에서라도 이래를 보면 그날은 감기라도 걸린다.” 그가 얼마나 공부를 싫어했냐 하면 왕이 되기 위해 반드시 공부 하는 대학을 양녕은 6년만에 마쳤다. 세종은 4개월만에 통과했다.

 
막내동생 성녕이 14세 나이로 홍역을 앓다 죽었을 때도 양녕은 슬퍼하기는 커녕 활 쏘며 놀기 바빴고 태종이 지방 순시 나갈 때도 아프다 핑계대고 배웅도 안하고 활쏘기나 잡기에 빠져 지냈다. 태종이 임진나루(현재 파주 파평면)에 행차하자 따라간 양녕은 하루만 자고 한양으로 돌아가라는 태종의 말에 밥을 안 먹으며 심통을 부렸다. 20세 때 일이다.

 
그러나 양녕을 둘러싼 문제는 여성편력이었다. 폐세자도 여자와 관련된 문제다. 요즘 말로 한다면 그는 섹스중독증 환자였다. 10세에 세자로 책봉된 그는 14세에 김한로 딸과 혼인해 17세 부터 남의 여자를 넘보기 시작했다.
궁녀 초궁장은 양녕으로서는 넘볼 수 없는 여자였다. 초궁장은 그의 백부인 정종의 여자였다. 그러나 나중에 초궁장과의 사이가 문제가 되자 그는 태종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큰아버지 정종과 초궁장이 그런 관계인 줄 몰랐다.”
초궁장 문제로 궁지에 몰리게 된 양녕은 2년전 있었던 외삼촌 민무희, 민무휼의 일을 태종에게 말해 곤란한 지경을 벗어났다. 요즘 말로 하면 물 타기를 한 것인데 다음과 같다.
“2년 전 4월 어머니가 편찮아서 병문안 갔을 때 입니다. 동생들도(효녕, 충녕)있었는데 두 외삼촌(민무희, 민무질)도 병문안을 왔습니다. 동생들이 약을 받들고 방으로 들어가고 저 하고 두 외삼촌만 남자 외삼촌들이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고 형들이(민무구, 민무질)죄를 얻어 죽은 일을 불평했습니다. 제가 민씨 가문이 교만해서 얻은 자업자득이라고 하자 민무희가 ‘세자는 우리 가문에서 자라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 소리 없이 안으로 들어가려하자 민무휼이 따라와 ‘무희가 실언을 했으니 잊어버리라’고 했습니다.”
태종이 선위파동을 일으켰을 때 눈치없이 굴다 협유집권(나이 어린 왕이나 세자를 앞세워 권력을 잡는 것)혐의를 받고 죽은 민무구 민무질이 사형 당한 것을 지금도 민씨 가문에서는 억울해 한다고 뜻으로 태종의 성격으로 볼 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다. 외삼촌을 희생양 삼아 위기는 모면했으나 행실을 고치기 전에는 계속 궁지에 몰릴 수 밖에 없었다.

 

폐세자의 직접 원인이 된 여자는 어리였다. 어리는 지중추부사 곽정의 첩이다. 기생과 달리 첩은 엄연한 유부녀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치 않았다. 어리의 미모에 반한 양녕은 어리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어리는 “남편있는 여자로서 남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양녕은 측근을 데리고 가 어리를 납치해 동궁으로 데려와 강간했다.
태종은 둘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았다. 그러자 양녕은 반항을 했다. 그가 태종에게 올린 상소에는 “아버지는 후궁을 보면서 나는 왜 못하게 하느냐?”고 항변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세자의 이런 저런 비리, 비행 때문에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던 태종에게 세자의 상소는 마지막 결심을 하게 했다. “저런 녀석에게 국가존망이 달려있는 국왕 자리 물려줬다간 나라 거덜 나겠다.”

세자로 책봉되면 변고가 없는 한 왕위 계승은 ‘따 논 당상’인데 변고가 생겨 그는 폐세자 되고 동생 충녕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그는 끝끝내 행실을 고치지 못했다. 심지어 아들 이혜의 첩을 빼앗아 간통을 하기도 했다. 이혜는 아버지에게 첩을 빼앗기고 망나니 짓으로 일관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태종은 용의주도한 왕이었다. 양녕이 말썽을 일으킬까 염려되 “너는 내가 죽은 후에는 사대문 안에 들어 올수 없다.”고 유언을 남겨 형제간의 있을지 모를 권력투쟁의 불씨를 꺼버렸다.
왕조국가에서 왕의 형제로 태어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말 한마디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기 쉬었다. 양녕은 세종 같은 신중하고 사려깊은 동생을 만났기에 역적 누명 쓰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죽을 수 있었다. 동생이 왕이 되었는데도 그는 끊임없이 말썽을 부려 사헌부 사간원에서 수도 없이 탄핵을 했으나 세종은 일체 불문에 붙이고 우애로써 형을 대했다.

그러나 양녕은 동생의 우애를 원수로 갚았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종친과 만조백관을 이끌고 나가 단종을 죽이라고 세번이나 권유해 결국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단종은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장손이다. 그는 조카(수양대군)의 손을 빌려 동생의 가문을 이을 장손을 죽임으로써 왕위를 빼앗긴 복수를 한 셈이다. 그러나 왕위는 동생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허물 때문이었다. (오충근 기자)


 

양녕대군, 17세부터 닥치는 대로 여인들에 '갑질 섹스' 행각으로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 당해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글쓴이 -장대성

 

1. 조선 태종은 재벌 창업가들 보다 몇 백배 힘들게 국가경영권을 획득

태종 이방원은 지금의 재벌 창업가들보다 수백 배의 뼈를 깎는 아픔을 안고 조선의 국가경영권을 확보하였다.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죽이지 말라고 눈물을 흘리며 간청하는 것을 뿌리치고 어린 두 이복동생 방번과 방석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뿐 아니라 방석을 지지하는 개국 공신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동복 형 방간도 귀양 보내면서 왕위 계승권을 어렵게 확보하였다. 왕이 된 후에는 경영권에 위협을 주는 세력들을 다 죽였다.

태종이 왕 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처남 민무구의 네 형제들(원경왕후의 친 동기들)의 세력이 커지자 모두 죽여 조강지처인 원경왕후와 원수가 되었다. 원경왕후는 남편에게 친동기들 네 명이 모두 살해당하자 울화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 태종의 국가경영권 확보와 유지는 지금 재벌들의 노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뇌의 연속이었다. 어렵게 확보한 국가경영권인 만큼 태종은 그것을 장남 양녕대군(이름: 제)에게 꼭 물려주고 싶었다.
양녕대군, 17세부터 닥치는 대로 여인들에 '갑질 섹스' 행각으로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 당해
2. 양녕대군 세자 자리 유지위해 죽어가는 외삼촌들 외면하고 욕해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1394년 출생하여 11세 때인 1404년 세자에 책봉되었다. 양녕대군은 詩와 書에 능했다. 아래 그림 숭례문과 경회루의 현판 글씨는 양녕대군의 것이었으며 그는 13세 때인 1407년 중국에 하진표사로 파견되어 임무를 잘 마치고 돌아와 차기 대권계승자의 자질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 후 그는 부왕의 내정에도 참여하여 주요한 국무를 대신들과 무리 없이 의논도 하여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하여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부친이 왕이 되기 전 당시의 관습대로 외가인 원경왕후 민씨(민제의 딸)의 친정에서 어린 시절을 지냈기 때문에 외삼촌인 민무구 형제들과 친하였다. 민무구 형제들이 태종에 의해 죽게 되자 조카인 세자 양녕대군에게 목숨을 부탁하였으나 세자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냉정하게 거절함은 물론 외삼촌인 민씨 형제들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했다. 이렇게 양녕대군은 왕위 계승권 보전을 위해 외삼촌들이 무참하게 죽는데 일조를 했다.
양녕대군, 17세부터 닥치는 대로 여인들에 '갑질 섹스' 행각으로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 당해
3. 17세 때부터 마음에 드는 여인들 닥치는 대로 갑질 간통해

양녕대군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사냥과 잡기에 소질이 있었다. 아래는 조선 시대 규장각에 있는 소현세자의 하루 일과를 표로 만든 것인데 보통 사람은 감당하기에 매우 엄격하고 고된 일과임을 알 수 있다.
양녕대군, 17세부터 닥치는 대로 여인들에 '갑질 섹스' 행각으로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 당해
세자는 공부에 대한 평가도 받는데 평가 성적은 5등급으로 되어 있고 왕에게 보고된다. 절제된 생활을 싫어하고 잡기에 능한 양녕대군은 세자로서 지켜야 할 일과를 지키지 않고 밖으로 나돌았다. 절도가 부족한 그의 일상생활은 사부인 좌빈객 이래에 의해 부왕 태종에게 상세하게 보고되었고 부왕은 틈만 나면 세자를 나무랐으나 세자로서의 지위는 위험하지 않았다. 세자가 부왕으로부터 본격적인 질책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여색을 밝히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세자는 예쁜 여자가 있다는 소문만 들으면 누구의 여자인지 가리지 않고 탐하고 대궐 담을 넘어 사가에 침입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관계를 맺었다. 문제는 상대 여자들이 대부분 남편이 있는 유부녀여서 섹스에 응하려 하지 않자 국가 서열 제2인자인 세자라는 막강한 지위를 이용하여 강권으로 섹스를 한 것이다. 즉 요즘 말로 전형적인 갑질의 섹스 행각이었다.

4. 부왕 친형인 상왕의 첩과 친매형의 첩과도 성관계 맺어

세자 양녕대군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나 고등학생 나이인 17세 때(1410년)에 명나라 사신을 위한 연회장에서 본 봉지련이라는 기생에 반해 대궐로 끌어들여 주연을 베풀며 간통을 했다. 이에 태종이 동궁전의 환관들을 잡아가자 세자는 단식투쟁을 하며 부왕에게 저항해 풀어 주었다. 세자는 부왕의 부드러운 처사에 더 대담해져 창기들을 대궐로 불러들여 섹스 행각을 벌였다. 그것도 부족해 세자는 장안의 악공 및 한량들과 예쁜 기생들을 물색하고 다니다 1414년 초궁장이라는 기생을 만나 대궐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부왕 친형인 상왕(태조의 차남인 2대 정종)의 기생 첩이었다. 상왕의 여인이라도 현재의 권력이 하늘을 찌르는 세자가 달려드니 몸을 바치는 수밖에 없었다.

세자는 초궁장이 백부의 기생 첩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어쨌든 자기 장남이 백부의 여인과 섹스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태종은 창피하기도 하지만 우선 기가 막히고 분노가 치밀었다. 태종은 초궁장을 대궐에서 내 쫓았다. 그 후 1416년 양녕대군은 친 매형 이백강(태종 장녀 정순공주의 남편)의 첩 칠점생을 노렸으나 동생 충녕대군(후에 세종)의 강력한 만류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대궐 밖에서 매형의 첩 칠점생과 통간하였고 다시 정종의 기생 첩 초궁장과 섹스를 했으나 자신에게 큰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양녕대군을 모시는 주변 사람들과 상대 여인들은 모두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리더 한 사람의 잘못이 그 부하들에게 고통과 수난을 초래하는 것은 옛날이나 요즘 대한항공 땅콩회항 사건의 경우나 흡사하다.

5. 대신 곽선의 첩 어리, 양녕대군 아이 낳아

1417년 세자 양녕대군이 장안의 뛰어난 미색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어리와 정사를 나누면서부터 사건은 심각해져 갔다. 양녕대군의 여자 조달책인 악공 이오방이 前 중추 곽선의 첩 어리를 양녕대군에게 소개하려 하자 어리는 자기는 유부녀이며 몸에 병이 있다 하면서 강력하게 거절하였다. 아래는 어리의 모습이다.
곽선의 첩 어리(TV캡처)
곽선의 첩 어리(TV캡처)
이에 세자는 부하들을 시켜 어리를 대궐 밖에서 납치하여 성폭행한 후 세자궁으로 강제로 데려와 동거했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의 분노는 하늘을 찔러 양녕대군을 세자 자리에서 내쫓으려 했으나 대신들이 만류하고 빈객(세자교육담당 정2품, 장관급) 변계량이 대신하여 작성한 세자 반성문의 맹세가 지극하여 태종은 감동을 하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했다.

그런데 세자는 맹세한 지 겨우 3개월도 안 되어 장인 김한로(광산군, 찬성)의 노비를 통해 방유신의 손녀가 미녀라는 얘기를 듣고 방유신 집으로 가 강제로 그녀와 간통하였다. 그리고 다시 몰래 어리를 대궐로 불러들여 급기야 어리는 임신을 하였고 세자빈의 조모가 어리를 몰래 대궐 밖으로 데리고 나가 아이를 낳게 했다. 세자빈 조모는 손녀사위가 바람피워 생긴 아이를 챙겨야 하니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팠으나 말 한마디 할 수 없고 불안 공포에 떨기만 했다. 어리가 출산한 후 세자는 다시 어리를 대궐로 데려와 동거했다. 1418년 5월 태종이 이 사실을 알고 대로하여 세자를 개경(당시 태종은 개경 궁에 있었다)에서 한양 궁으로 내치고 세자빈은 친정으로 내쫓았고 세자 장인 김한로는 나주로 유배 보냈다. 세자빈은 섹스에 미친 남편을 김한로는 골동품 사위를 잘못 만나 생긴 고통이고 수난이었으나 하소연 한마디 할 수 없었다.

6. 양녕대군 부왕에게 “전하도 여색 즐기는데 나도 여색 즐겨야”

사건이 이렇게 확대되자 양녕대군은 이제 세자자리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감지하고 부왕에게 “전하는 여인들을 궁에 마음대로 들이는데 왜 내 계집은 내쫓습니까? 저는 앞으로도 여색을 즐기겠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읽은 태종은 하도 기가 막혀 더 이상 할 말을 잊었다. 세자는 전혀 후회와 반성하는 마음이 없었다. 태종은 세자가 부왕을 욕하면서 항명을 하는 중대사라 생각하며 세자를 폐위하기로 결심했다.

1418년 6월 태종은 대신들을 소집하여 “여색에 빠져 그릇 행동하는 자에게 백성의 생사여탈권을 줄 수 없다” 하면서 세자를 폐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리고 유정현 등 대신들이 순서를 따지지 말고 가장 어진 왕자로 세자를 다시 정하라 요구했으나 원경왕후가 극렬하게 반대하여 태종은 고민 고민하다가 결국 3남 충녕대군을 세자로 정하였다. 양녕대군은 14년간 세자 자리에 있었다. 아래 표는 세자시절의 양녕대군 갑질 여색 행각을 표로 요약한 것이다.
양녕대군, 17세부터 닥치는 대로 여인들에 '갑질 섹스' 행각으로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 당해


7. 태종 양녕대군 세자에서 폐한 후 통곡해

태종은 장남 양녕대군을 세자에서 폐하고 3남 충녕대군(이름: 도)을 세자로 새로 정하고 나서 슬픔이 복받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울었다. 그만큼 장남을 사랑했던 것이다. 어떻게 하든 장남에게 국가 경영권을 넘기려 하였으나 장남의 자질 부족으로 국가를 위해 결국 포기하였다. 대신 세자의 장남인 장손에게 물려주려 했으나 나이가 5세밖에 안 되어 세손 책봉 후 자신의 건강이 악화 될 경우 정국이 불안할 것 같아 결국 총명하고 품성이 어진 3남 충녕대군(당시 22세)에게 국가경영권을 넘겨주기로 했다.

새 세자는 세종이 되어 한글 창제 등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찬란한 업적을 이루었다. 태종의 뼈아픈 눈물의 결단이 없었다면 주색잡기에 빠진 양녕대군이 왕이 되어 조선은 초기부터 썩어가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고 지금의 한글도 없었을 것이다. 양녕대군이 총명한 충녕대군에게 세자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설도 있으나 사실적 근거가 약하다. 양녕대군은 폐세자된 후 동생 세종의 배려 속에 전국을 돌며 기생들과 놀았다. 그는 수양대군(7대 세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이 되는데 적극 협조를 하여 세조로부터 극진한 대접과 보호를 받으며 살다가 1462년 69세에 죽었고 남긴 자녀는 총 26명에 달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서자 이흔의 15대손이었고 연예인 이승기도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8. 조직의 경영권 승계에 대한 연구 시급해

국가, 기업, 학교 등 모든 조직의 경영 후계자 결정은 조직의 의사결정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조직의 경영자가 조직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실행하기 때문이다. 조선 9대 성종은 태종과 달리 심리 상태가 불안하고 자질이 부족한 연산군에게 어미 없는 불쌍한 아들이라고 인정에 끌려 국가경영권을 물려주었다. 그 결과 연산군 시대 내내 피바람이 몰아쳐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국가는 피폐할 대로 피폐하였다. 부자 자녀는 세상의 어려움을 모르고 성장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약해져 부자가 3대 가기 어렵다는 말이 옛날부터 내려온다.

고귀한 왕자로 성장한 세자가 자질 부족이 될까 우려되어 조선 왕조는 국가경영권을 물려받을 세자에게 매우 엄격하고 강도 높은 교육을 했다. 요즘 재벌기업과 기타 주요 조직 등의 창업 3세들도 귀하게 성장해 경영권 계승 자질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다. 이런 중요한 큰 조직들이 망하면 국가 발전과 존립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이제 한국의 재벌기업 등 대형 조직의 경영권 계승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하여 유능한 인재가 조직 경영권을 승계하게 하는 제도나 문화가 형성되도록 해야 어려운 경제상황도 해결되고 더욱 부강한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과부와 이혼녀 천국 고려, 왕들도 이혼녀 과부와 결혼]

 

TV 드라마 '대왕 세종'을 보면서 양녕대군이 백부 '정종'의 첩인 초궁장을 가까이 했다는 내용을 시청하면서...화들짝 놀랐었다...

짐승도 아닌 인간이 어찌 백부의 여인을 가까이 할 수 있는가?...

일반 백성도 할 수 없는 일이 왕가에서 발생하였으니...어안이 벙벙하였다...ㅠㅠ...

 

그러다가,

나의 상식이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일제시대에 형성된 사회 통념'이 학습되었기 때문에...

이해 불가능한 사안으로 인지된 것이라는 것을 요즘에야 알았다...

 

양녕대군의 성장기에 주위의 어른들로 부터...알게 모르게 자연스럽게 학습되었던 문화는 '고려 시대'의 풍습이었으리라...

고려시대는 [과부와 이혼녀의 천국이고, 왕들도 이혼녀 과부와 결혼]한 그런 시대 였으니...

남(?)의 여자와 사는 것은 크게 흠이 되지 않았던 세대인 듯 하다...ㅠㅠ...

거의 섹스중독증(?) 수준의 여색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호랑이 같았던 부왕 '태종'에게 '양녕대군'이 거칠게(?) 대들수 있었으리라...ㅠㅠ...

 

고려시대는 또한 남자가 장가가는 혼인관습...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 남자가 여자 집으로 가서 혼인해 살다가 자녀가 성장하면 본가로 오는 것) 이었다...

조선 3대 왕 태종도 왕이 되기 전 처가에서 살았기 때문에 장남 양녕대군이 어려서 외가에서 자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은 사대부들에게도 주자가례에 따른 친영과 시집살이를 장려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사대부들도 잘 수용하지 않았고 임진왜란 후인 17세기가 지나 18세기경에야 일반화가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의 시집살이 역사는 약 300여 년 정도로 추정되고 신사임당도 시집살이를 거의 하지 않았다.

 

남자는 “머슴애”, 여자는 “계집애”란 말은 고려시대...장가가는 것에서 유래하여 나온 말이라고 한다...ㅎㅎ...

혼인을 해도 제집에서 산다고 해서 여자를 제집 애라 불렀고 발음이 변화되어 제집이 계집으로 바뀐 것이다. 그리고 남자가 혼인하는 것을 장가간다고 하였다.

이는 장인의 집(장가, 丈家)에 가서 산다는 뜻인데 머슴애는 신랑이 처가에서 마치 머슴처럼 일했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ㅎㅎ...

 

문화의 다양성이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게 존재함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문화가 유행하듯 돌고 돈다는 사실 역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내가 알고있는 통념이 '절대진리와 절대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지하여...

똥고집(?)을 부리는 어리석은 행위는 하지 말아야겠다...

 

- 2015년 5월8일 금요일...오후 9시30분...수산나 -

 

(사족) 내가 초등학교 때 전족의 중국여자를 만난 기억이 있다...북송시대 부터 1,000여년간 이어져온 풍습이라니 놀랍다...ㅠㅠ...

 

과거 중국은 여인들에게 잔혹하였다. 시집살이만 시키는 것이 아니고 여인들의 발을 묶는 전족(纏足)을 행해 여인들을 집안에 가두어 놓고 성 노리개로 삼았다.

 전족은 북송 시대인 10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약 1000년간 행해진 악습이었다.

 

 

 

능소화 1

 

 

능소화 2

 

 

능소화 3

 

 

능소화 4